미국 국방부는 1980년 12월 10일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생일에 맞춰 국방부의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에이다(Ada)'로 명명했다. 이 프로그래밍 언어에 해당하는 국방부 군사 규격에 붙은 숫자 1815는 에이다가 태어난 해를 뜻한다. 영국 컴퓨터 협회는 1998년부터 매년 컴퓨터 이해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러브레이스 메달’을 주고 있다 |
에이다(Ada), 최초 프로그래머, 알고리즘, 에이다 러브레이스, 시인 바이런의 딸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컴퓨터과학의 탄생을 1840년대에 예견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컴퓨터가 만들어지기 전, 즉 하버드 마크 I(Harvard Mark I)이나 콜로서스(Colossus) 또는 봄베(Bombe)가 발명되기 오래전,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Ada Byron Lovelace)는 자신의 시대보다 거의 100년이나 앞서 세계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하는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Countess Lovelace: 1815~1852) 이라고 알려진 에이다 바이런은 200년 전인 1815년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영국의 저명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경의 딸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무척 젊은 나이에 시적인 상상력을 과학에 적용하여 디지털 시대의 탄생을 점화한, 현대 컴퓨터가 되는 상징적 매체를 예견한 인물이다. 아마도 에이다는 컴퓨터 역사에서 가장 그림 같은 개성 있는 성격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꼽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최근까지 여성과학자들의 업적이 과소평가되는 경향 때문에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컴퓨터과학 분야에 대한 기여는 1950년대 까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영국의 역사가 보덴(B.V. Bowden)경이 1952년에 발표 된지 110년이 지난 그녀의 주해(notes)를 다시 발견하여, 그 다음해에 디지털 컴퓨팅 기계 심포지엄(A Symposium on Digital Computing Machines)에서 소개하였다.
그 후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기념하는 많은 영예가 뒤따라 2009년에는 영국에서 주축이 되어 10월 15일을 “에이다 러브레이스 날 (Ada Lovelace Day)"로 정하여, 매년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분야에서 여성들이 이룬 업적들을 경축하는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에이다 바이런(Ada Byron)의 어린 시절: 숫자의 여자 마법사
에이다 바이런(Augusta Ada Byron)은 영국의 위대한 낭만파 시인 바이론 남작(Baron George Gordon Byron)과 역시 귀족집안의 외동딸 밀뱅크(Anne Isabella Milbanke: 자신을 Annabella 라고 부름) 사이에서 유일한 친생자(!)로 태어났다.
에이다의 어머니 아나벨라(Annabella)는 전직 캠브리지 대학 교수들로부터 고전문학, 철학, 과학과 수학을 배운 매우 총명한 여성으로 특히 수학을 좋아하여 바이런은 그녀를 “평행사변형의 공주(princess of parallelograms)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나벨라는 엄격한 도덕관을 가진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성이어서 때로는 냉정하고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었다.
반면에 급진적인 낭만파 천재 시인으로 유명한 바이런은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로 영국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변덕스럽고 과격하며, 숫하게 많은 여성 및 남성들과 닥치는 대로 염문을 뿌리고 다녔고 이복여동생과도 부적절한 관계라는 추문이 돌았다. 카사노바와 함께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알려진 돈 주앙처럼 -바이런의 대표 작품 “돈 주앙”에선 여성들이 그를 쫒아 다니지만- 자신도 결코 뒤지지 않겠다는 듯이 처신하여 악명이 높았다.
아나벨라의 사촌이며 한때 바이런과 불륜관계였던 레이디 캐롤라인 램(Lady Caroline Lamb)에 따르면 여자들에게는 바이런은 “나쁜 놈, 미친놈, 그리고 위험한 놈”이었다.
아나벨라는 사촌의 말을 경고로 받아들이는 대신 바이런의 부도덕한 난봉꾼 기질을 고쳐주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였는지 1815년 1월 바이런과 결혼을 하였고, 에이다는 같은 해 12월에 태어났다. 한편 남편이 이복 여동생과 근친상간 관계를 갖고 있다고 의심한 아나벨라는 에이다가 태어난 지 5주 만에 남편과 별거를 하였다. 아나벨라의 수학적 재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때는 “평행사변형의 공주”라고 불렀던 바이런은 이제 그녀를 계산적인 적대자 “수학의 메데아(Mathematical Medea)”로 생각하였다.
그는 유명한 서사시 “돈 주앙”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과학은 수학이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계산기 같다” 라고 조롱한다. 그들의 짧은 결혼은 그렇게 해서 결딴나고 말았다. 에이다가 태어난 지 4개월 후 바이런은 영국을 영원히 떠났고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에서 1824년 말라리아에 걸려 36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에이다의 나이는 그때 여덟살이었다
영국 여왕 빅토리아 통치시대로 상징되는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소송도 할 수 없으며, 결혼한 여성이 번 돈도 전부 남편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이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혁명의 결과로 점차 많은 여성들이 유급 노동력 시장에 참여하고 있던 때다.
레이디 바이런은 1800년대 중반 귀족집안의 딸의 교육으로는 상당히 특이하게도 수학과 과학을 에이다에게 가르쳤다. 그녀는 바이런으로부터 물려받은 딸의 상상력이 위험하며 잠재적으로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억누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엄격한 학문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제력을 길러 기분변화가 심하고 예측할 수 없는 남편의 기질이 딸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에이다의 인생은 감정과 이성,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시학(詩學)과 수학, 좋지 못한 건강과 폭발할 듯 한 활기사이에서 끊임없는 투쟁의 절정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에이다의 복합적인 감정적 유산은 이미 1828년 그녀가 비행기에 관한 디자인을 그려낼 때 분명해졌다. 그녀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수학이었으며 이렇게 흔치않은 주제에 몰두해 있는 에이다를 고무시킨 것은 어머니였다. 자신도 최상급 교육을 받았던 아나벨라는 과학과 수학의 단단한 기초를 닦아주기 위해 에이다에게 최고의 선생님들을 가정교사로 모셨다. 가장 중요한 가정교사들 중 한 사람인 모르간(Augustus De Morgan)은 그당시 새로운 분야였던 기호논리학의 선두 주자로 위대한 영국의 수학자이다.
그녀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이 드러나자 모르간은 에이다가 저명한 독창적인 수학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아나벨라에게 말하였다. 또 다른 중요한 가정교사는 1830년 에이다가 열다섯살 때 만난 스코틀랜드 출신 소머빌(Mary Fairfax Somerville)로 유명한 여성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다. 두 사람은 그 후 20년간 수학의 주제들에 관하여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밖의 다른 저명한 지인들로는 크로스(Andrew Crosse), 브루스터(David Brewster),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딕킨스(Charles Dickens)와 패러데이( Michael Faraday)가 있다. 에이다는 또한 그림, 음악 그리고 언어에 매우 뛰어나 그녀의 유창한 불어실력은 나중에 컴퓨터 역사에 기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33년 초, 에이다는 가정교사중 한 사람과 바람을 피웠고 들키게 되자 그와 함께 도망을 가려고 하였다. 가정교사의 친척들이 에이다를 알아보고 어머니한테 연락을 하여, 아나벨라와 친구들이 이 사건이 세상이 떠들썩한 추문이 되지 않도록 숨겼다.
1833년 6월, 17살의 에이다는 런던 사교계의 명사들로 가득한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였다. 그 파티에는 자신이 발명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에 관해서 신나게 이야기 하고 있는 42살의 캠브리지 대학 수학과 루커스 석좌교수인 배비지(Charles Babbage)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만남은 에이다의 인생을 바꾸는 기회를 가져온다. 차분기관에 매혹당한 에이다는 이주일 후 어머니와 함께 장비와 시연을 보기 위해 배비지의 집으로 찾아 갔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들의 우정은 18년간 지속된다. 에이다는 수학의 뮤즈(Muse)였다. 그녀의 뛰어난 지적 능력에 감탄한 배비지는 그녀를 숫자의 여자 마법사(Enchantress of Numbers)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수학자들이 로그함수나 삼각함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연산에 손으로 계산한 큰 수치표(mathematical table)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차가 나기 쉬었다. 차분기관(差分機關)은 다항함수를 계산하기 위한 기계식 디지털 계산기이다. 로그나 삼각함수를 포함한 모든 수학함수는 다항함수로 근사할 수 있어 범용계산기로 사용할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 이 연구를 위해 £17,000 (현 시세로는 대략 170만 파운드)를 지원했지만 배비지가 이 기계를 완성하지는 않고, 좀 더 복잡한 기계인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연구에 착수하자 더 이상의 지원을 철회하였다.
차분기관은 숫자가 새겨진 톱니바퀴들을 탑처럼 쌓아올려서 만들었는데 기계의 핸들을 돌려서 계산을 했다. 에이다는 이 미완성의 시제품에 매혹되어, 그때부터 차분기계의 잠재력, 수학문제들, 논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주제들에 대하여 배비지와 방대한 양의 서신왕래를 시작하였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된 에이다 바이론
1835년 7월, 19살의 에이다 바이론은 자신보다 나이가 10살 위인 킹(William King)과 결혼을 한다. 그 후 1839년까지 부부는 3명의 자녀를 두었다. 킹은 1838년 백작 작위(Earl of Lovelace)를 물려받게 되어, 이제 에이다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되었다. 킹은 부인의 연구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지지해 주었으며, 무척 기가 센 에이다의 의견에 반대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어떤 면에선 그녀 부모의 결혼생활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역할이 바뀌어서 에이다는 지독하게 독립적이며 총명하고 인습에 억매이지 않은 반면, 남편은 유모감각이 별로 없고 엄격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에이다는 사교적이어서 쉽게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몇 명의 친분 있는 남성들과 여러 건의 스캔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과 인생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갖고 있던 여성관과는 달리 킹(King)은 항상 그녀의 연구나 야망을 지지해 주었다.
배비지와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
차분기관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배비지는 훨씬 더 범용적인 해석기관 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차분기관의 후속으로 기계적 범용 컴퓨터인 해석기관 설계에 착수한다. 1837년에 처음으로 해석기관의 설계가 발표되었는데, 1871년 그가 죽을 때 까지 설계를 끝내지 못하여서 차분기관과 마찬가지로 이 장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해석기관은 프로그램과 데이터와 같은 입력이 천공 카드를 통하여 장치에 제공되는데, 이 방법은 천공카드를 사용해 복잡한 패턴을 짜는 자카드 문직기(紋織機) (Jacquard loom)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다. 세 종류의 천공 카드가 사용되었으며, 각각 수학 연산을 위한 카드, 숫자 상수를 위한 카드, 그리고 숫자를 수학 연산 단위로 전달하거나 이를 다시 전달받는데 사용되는 카드로 이루어졌다. 이 세종류의 카드를 읽기 위해 세종류의 카드 리더기가 존재한다. 출력에는 프린터와 곡선 플로터 그리고 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카드에 구멍을 뚫을 수 있도록 해 숫자를 나중에 다시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숫자는 고정 소수점을 갖는 10진수를 사용하였으며 사용자가 채택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현대의 어셈블리어와 유사하다.
1842년, 배비지는 튜린대학(University of Turin)에서 해석 엔진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 가운데 이태리 수학자인 메나브레아(Luigi Menabrea)가 있었다. 그는 불어로 "배비지가 발명한 해석기관에 대한 스케치 (Sketch of the Analytical engine invented by Charles Babbage Esq)“라는 논문을 써서 이를 ”Bibliothèque Universelle de Genève” 라는 학술지에 출판하였다. 배비지의 친구인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이 에이다 러브레이스에게 이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맡겼고, 배비지는 에이다가 장비에 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메나브레아 노트(notes)를 확장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미 8년 전부터 해석기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이다는 1842년 부터 1843년에 걸친, 9개월 동안 번역과 함께 열정적으로 베르누이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포함한 광범위한 7개의 주석들(A에서 G 까지)을 써 첨부하였다. 사실상 번역된 원래의 논문보다 3배나 되는 길이의 자세한 주석이 훨씬 더 중요하며, 이 주석이 바로 에이다 러브레이스에게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녀의 해석기관에 대한 이해는 동시대의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배비지 자신을 능가할 정도였다. 에이다는 자카드의 베틀(Jaquard loom)처럼, 인간의 상상력의 파트너가 되어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는 해석기관의 미래를 예언하였다. 그녀는 컴퓨터가 발명되기 100년도 더 전에 현대 컴퓨터의 탄생에 기여한 중요한 4가지 개념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첫째, 그녀는 미리 프로그램된 작업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무제한적 범위의 작업을 실행할 수 있는 범용기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현대 컴퓨터를 예측하였다.
둘째, 기계는 단순한 수학적 계산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는― 즉 음악, 글, 그림, 숫자, 심벌, 예술적 표기 등― 상징적인 메데아 (Symbolic Medea), 즉 디지털 시대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셋째, 그녀는 한 단계, 한 단계씩 작동하는 방식의 개요, 즉 우리가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넷째, 지금까지 남아있는 에이다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기계가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해석기관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시작할 수는 없으며 다만 우리가 명령하는 것을 수행하고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분석적인 관계나 진리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튜링과는 달리 컴퓨터가 정말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갖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말년― 수학으로 통제되지 않은 바이런의 DNA
바이런의 정서불안과 정신병을 딸이 물려받을까 걱정되어 에이다의 마음을 논리적인 수학과 과학으로 억제하려던 아나벨라도 바이런의 DNA까지는 통제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에이다 자신도 수학공부가 자신의 정서불안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녀 인생의 후반기는 스캔들과 실패,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메나브레아(Menabrea)논문에 대한 에이다의 주석이 출판되었을 때, 29살의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 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자주 소화와 호흡장애를 겪었고 의사는 브랜디, 와인, 맥주, 아편, 모르핀의 위험한 다양한 조합들을 처방하여서 에이다는 심각한 성격장애를 겪는다.
그녀는 경마도박에 열광적으로 빠져들었는데, 에이다는 엉뚱하게도 배비지와 함께 수학적 확률이론을 써서 경마에 돈을 거는 무오류 베팅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오류는커녕 결점이 많은 베팅 시스템이었는지, 에이다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잃었으며 나중에는 가족의 보석들까지 저당 잡혔다. 남편인 러브레이스 경(Lord Lovelace)은 그녀가 많은 빚을 진 것을 알고도 스캔들로부터 에이다를 지키려고 애썼다. 설상가상으로 에이다는 자궁암이 발병하여 1852년, 아버지 바이런경과 같은 36살의 한창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녀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버지―그러나 아버지의 시적 감수성이 자신의 시적인 수학의 천재성을 갖게 해준― 바이런 경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기를 원하였고 그녀의 요청대로 노팅엄(Nottingham), 성 매리 막달렌 교회 (Church of St. Mary Magdalene)에 있는 아버지 무덤곁에 묻혔다.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고,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치 않는 곳,
깊은 바다 곁, 그 함성속에 음악이 있다.
난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하네
-----George Gordon Byron----------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은 사후(死後) 100년 동안 사실상 잊혀졌다가 컴퓨터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녀의 연구결과가 다시 부상하게 되어 마침내 업적을 인정받게 되었다.
미국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DoD)는 DoD에서 사용하던 수백 개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공모하였는데, 이히비아(Jean Ichbiah)가 이끄는 팀에서 설계한 언어가 채택되었다. 1980년 미국 국방부에서는 이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에이다(Ada)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바이론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