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상, 사회적 성격,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람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독일계 미국인 정신분석학자이자 휴머니즘 철학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와인 상인이자 유대인인 아버지 나프탈리 프롬과 핀란드계 어머니 로자 크라우제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친가가 대대로 유대교 랍비 집안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유대인 전통을 지켰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인 프롬에게 집착했다.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주 울었으며, 어린 프롬이 그런 어머니를 자주 달래주었다고 한다. 아버지 또한 "병적으로" 걱정이 많았기 때문에 프롬을 과보호했다. 어린 프롬의 탈출구는 변호사 삼촌 에마누엘이었다. 그는 프롬에게 독일과 유럽의 화려한 상류층 문화를 프롬에게 소개해 주었고 프롬은 여기서 위안을 얻었다.
10대 때 랍비에게 교육을 받고 한때 시오니즘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20대에 들어서 시온주의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카르텔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삼촌의 영향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하며 변호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들어가 알프레트 베버로부터 사회학을 배웠다. 그리고 이무렵 그는 연상의 정신과 의사 프리다 라이히만과 사랑에 빠진다. 프롬은 23살 때 라이히만과 같이 하이델베르크에 심리치료소를 세웠고, 환자들을 같이 치료했으며 1926년에는 결혼을 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1929년부터는 베를린에 사설 정신분석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독일 노동자들의 권위주의적 모습을 연구했다. 『사회심리학적 양상들』이라는 에세이에서는, 가족 내 가부장적 권위가 권위주의적 사회를 만든다는 유명한 주장을 하였다. 가부장적 가족의 생활을 통해 초자아(도덕)가 내면화되고 억압된 자아는 권위의 지시에 맹목적인 복종을 하는데, 이 심리가 바로 마조히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조히즘은 자신보다 낮은 계층 사람에게의 폭력, 즉 사디즘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사도마조히즘은 권위주의의 중심에 있으면서 위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사랑과 존경을, 아래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경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만들어낸다.
나치의 위협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현실로 다가오자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 연구소를 미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1934년, 연구소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이주하는데에 프롬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으로 오자마자 만성적인 결핵이 재발했고 그로 인해 연구소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연구소의 2인자 아도르노와는 학문적 마찰을 겪으면서 연구소와 멀어졌다. 결국 연구소를 뛰쳐나간 프롬은 미국에서 자신만의 정신분석연구소를 열고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배웠으며, 카렌 호르나이, 해리 스택 설리번, 클래라 톰프슨, 루스 베니딕트, 마거릿 미드와 같은 미국의 문화주의 인류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베스트셀러로서의 활동
1941년 마침내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발간되었다. 이 책은 출간 이래 500만 부 이상 팔렸고, 28개의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화이트 연구소를 설립하고 임상수련의들에게 정신분석과 임상실습을 가르쳤다. 1944년에는 별거 중이던 프리다와 이혼을 마무리하고 사진작가 헤니 구를란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치로부터 탈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극심한 류마티즘으로 고생했고 이 통증으로 매번 우울증에 빠졌었다. 그녀를 위해 1950년 멕시코시티로 이주하고 온천치료를 거듭했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그녀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프롬은 절망했지만 헤니의 죽음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양성했던 멕시코의 심리학자들 덕분이었다. 프롬은 그들과 함께 멕시코 사회정신분석학회를 설립했고 그는 멕시코 정신분석학자들의 첫번째 세대의 스승이 되었다.
1953년 수년간 헤니의 죽음을 편지로 위로해주던 뉴욕의 사업가 애니스 프리먼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결혼했다. 프롬은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상실감에서 빠져나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을 저술한다. 자기애에서 벗어나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서 인류애로 나아가자는 이 책은 대중 시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프롬은 아들라이 스티븐슨, 윌리엄 풀브라이트, 필립 하트, 유진 매카시 등의 선거운동에 관여하며 존 F.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정부 고위급 인사들에게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책 《건전한 사회》를 통해 소비주의와 순응주의에 빠져 있는 미국사회를 비판했고, 마르쿠제와 『디센트』지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60년 대 이후에는 베트남 전쟁과 핵 확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여러 차례 내면서 인본주의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갔으며, 이스라엘의 시온주의를 비판했다. 70년 대는 멕시코를 떠나 스위스 로카르노 무랄토에 이주했다. 몇 번의 심장마비를 겪고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제자 풍크의 도움을 받아 1976년 《소유냐 존재냐》를 완성했고, 또 한번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1977년 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고, 1980년 3월 18일 아침,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숨을 거뒀다. 장례식은 스위스 전통으로 이루어져서 화장된 재는 마조레 호수에 뿌려졌다. 프롬이 유대교도이긴 하지만 독실한 신자까지는 아니었고, 그는 자신의 시신의 재를 마조레 호수에 뿌려달라고 요청했었다. 곧장 전세계의 신문에 부고와 조의문이 실렸다.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자신을 독일인이나 미국인, 멕시코인, 혹은 스위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를 모든 곳에 있는 인류와 연관지었다. 그는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계에 널리 퍼뜨렸고, 군국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며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해답은 오직 사랑이었다.
인간 실존의 모든 고난에 단 하나의 만족할 만한 해답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사상
사회적 성격
정신분석가였던 프롬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가지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사회비판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연구를 할수록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프롬은 프로이트의 성충동이론이 남근의 유무를 중시하는 남성 권위에 따른 이론이라고 보았으며, 또한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이론은 인간의 파괴 본능을 생물학적 본능으로 규정함으로서 인간을 반사회적 존재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사회의 파괴를 합리화하는 이론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프롬은 인간의 심리학적 구조가 자신의 육체적 구조(리비도)에 의해 만들어진 반사작용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나 활동의 산물이며 이러한 삶의 관습이 사회 속에 위치한 인간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개념이 바로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생리학적 충동)을 대체하는, 프롬의 '사회적 성격' 이론이다. 즉 '동물적 본능'이 인간 심리의 내면(무의식)에 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라면, 프롬의 주장은 동물적 본능보다 더 강한 '사회적 본능'이 인간 심리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성격은 에리히 프롬의 모든 책에서 공유되고 있는 공통되고 중요한 주제이면서도 그 내용은 점차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에 이를 명확히 규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설명해보자면, '사회적 성격'이란 주어진 사회적 상황에 대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리적이고 역사적인 '적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사람의 성격은 생리적 충동 에너지 뿐만이 아니라 종교, 정치, 심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찾아가는 개인과 그 개인의 환경을 이루는 경제적 사회 구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는 권위를 존중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권위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 책에서 프롬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파시즘이 태어나고 지지를 얻는지를 분석한다. 인류가 오랜 시간 갈망해 온 그 자유가 주어졌는데, 거기에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프롬은 주목했다. 중세의 사회 질서가 깨지고 근대 사회가 열리면서 하층 중산 계급으로까지 자유가 확산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궁핍했던 중산 계급은 자유에 대한 무력감과 공포감 속에서 도리어 자유를 지배계층에게 반납한다. 이를 통해 독일인들은 애써 얻은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복종을 선택하여 나치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프롬은 종교개혁 이후의 마틴 루터와 장 칼뱅 등이 주장했던 당시 개신교 신앙이 나치즘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중세의 시대는 사실 사회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성직자, 기사, 농민의 3가지 위계로 구별되어 명확한 신분관계 속에서 각자의 할 일과 사는 지역이 구분된 사회였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이 마주하는 '자유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기에 이르게 되면 중세의 안정된 체계가 해체되는 와중에 개인들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고립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개인이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을 느끼는 상황에서 루터와 칼뱅의 개신교는 열심히 일할 것과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는데, 개인은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여기에 빠져들었다. 이후 개신교의 근면 성실의 정신은 자본주의 체제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관한 사회 심리적 매커니즘은 권위적인 지도자에 빠져버린 독일 국민들과 이러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나치 체제의 사회심리 매커니즘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 프롬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유를 반납하게 되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는 '자본'이 있어야 자유롭다. 즉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의 자유이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남는 것도 나의 책임이 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경쟁에서 살아 남는 자유'인 것이다. 누가 자신의 생계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그럼에도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람들은 치열하게 경쟁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경쟁은 끊임없는 불안과 고독감을 야기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과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권위에 자유를 반납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랑은 자연스럽게 알게되는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반드시 배우고 가르쳐야만 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원제목은 《Art of Loving》 인데, 명사 Love가 아니라 동사(동명사) Loving 인 이유는 사랑은 명사처럼 그렇게 고정적인 대상이나 그런 상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지속적이고도 역동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기술'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느냐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사랑을 어떻게 지켜가느냐는 기술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의 선택이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이런 자유는 인간을 불확실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고독감을 느끼게 되었고, 고독감은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방법을 찾게 된다. 술이나 마약을 통해 잊어보려고 하고, 때론 성적인 욕구에 매달림으로써 불안을 잊어보려고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함으로써 불안을 떨쳐내려고 하기도 하고, 창조적 작업과 노동에 매달림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국 '인간이 혼자'라는 감정을 바꾸진 못한다. 사실 고독감의 불안을 극복하는 진정한 방법은 "인간과의 융합, 즉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융합'하길 원하는 개인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대방에게 의존적인 사랑은 사랑을 왜곡시킨다. '의존적인 사랑'은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벗어나기위해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단지 쓸쓸해서 외로워서 심심해서 혼자 있지 못해서 사랑을 하기 때문에 '같아지려고 한다.' 같아지기 위해서 한명은 희생을 강요하고 다른 한명은 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여기서 사랑의 역학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기울어진다. 프롬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위해 차라리 복종받기 원하는 사랑을 마조히즘이라 부르고, 반대로 우월적인 관계를 이용해 상대방을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사람을 사디즘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는 가짜 사랑일 따름이다.
가짜 사랑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첫번째는 숭배적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해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에게 복종하는 그런 사랑의 형태를 띤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상대는 자신의 기대를 결코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자신은 끊임없는 불만에 빠지게 된다. 두번째는 감상적 사랑이다. '사랑'에 너무 많은 낭만을 부여해서 현실에서의 사랑이 도리어 너무 시시하게 생각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람들의 사랑은 오로지 드라마나 소설 속 환상에서만 경험될 뿐이기 때문에, 현실의 사랑에서 어떠한 만족도 얻지 못하게 된다. 숭배적 사랑이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생기는 잘못된 사랑이라면, 감상적 사랑은 '사랑'에 대한 기대(환상)가 너무 컸기 때문에 생기는 잘못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는 투사적 사랑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방이 채워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매번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정작 자신은 그 갈등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상대방에게서 찾기 때문에 이로써 끊임없는 갈등이 이어진다. 따라서 투사적 사랑은 결국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사랑이 단지 어떤 황홀한 느낌을 '받는' 감정에 불과하다면 굳이 배우지 않아도 우리가 풍부한 감성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내 자신을 잘 꾸미기만 하면 된다'는 수동적 사랑이지만 나의 외모나 능력, 조건은 언젠가 변하기 마련이고 이 변화에 따라 손익계산적인 헤어짐이 생긴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사랑은 조건에 맞춰 거래하고 그 거래 조건에 만족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이 알아서 다 해주길 바라는 '받는 사랑'은 항상 허무감만 남긴채 끝난다. 사실 사랑의 본질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에 있다. 여기서 '주는 사랑'은 맹목적으로 주는 사랑이거나 미래의 이익을 기대하는 투자로서의 주는 사랑이 아니다. 타인과 결합하는 사랑의 과정에서 각자의 다른 개성이 서로 존중받고 유지되는 관계가 될 때 서로에게 생기는 충실함으로 조건없이 '주는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주는 사랑'이, 나의 자유를 타인에 맡기게 하거나 타인의 자유를 내가 구속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지배'와 '속박'의 의존적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주체'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결정과 판단을 인내심있게 응원하는 관계가 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사랑의 기술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떤 실용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는 달리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이다. 이 훈련은 외부로부터 부여된 규칙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 표현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운 과정이다. 또한 '집중'이 필요하다.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자립할 수 없어서 상대에게 집착한다면, 상대는 나를 구해줄 수 있겠지만 그 관계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홀로 있을 줄 알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한번의 완성이 아닌 반복된 실패를 통해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이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기울여야 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프롬은 마지막으로 두 가지 조언을 건넨다. 결국 사랑의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일테다. 자아도취의 반대는 '객관성'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자아도취에 빠지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신의 결점을 직시하고 이성을 통해 겸손을 취하며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상대도 나를 사랑해 주리라는 희망을 거는 것이다. 내가 바뀌었으니 너도 바뀌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력 속에서 상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냐 존재냐》는 제목 그대로 소유의 삶을 추구하는게 좋은지, 존재의 삶을 추구하는 게 좋은지 논하고 있으며, 에리히 프롬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하다.
어록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지지하는 것'이지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