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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허무주의, Ernest Hemingway,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Jobs9 2023. 4. 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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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Hemingway

“Never delay kissing a pretty girl or opening a bottle of whiskey.”

 

어니스트 헤밍웨이

 

종군기자, 소설가.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저자다. 그의 작품 전반에 허무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서 영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허무주의 하면 빠질 수 없는 작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등장 이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로, 문학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후배 작가들이 가장 많이 롤모델로 삼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와 포크너가 꼽힌다.

쿠바에서 몇 년간 생활을 했고, 말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 때문에 간첩으로 오해받아 몇 년간 미국 수사당국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둘 다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당시 아기들에게 성별 무관하게 여자 옷을 입히는 일이 잦긴 했으나, 헤밍웨이의 마초기질을 생각하면 몹시 불쾌한 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장당한 일 때문인지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 헤밍웨이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권총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헤밍웨이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하고 조용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와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헤밍웨이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죽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라는 식으로 가볍게 무시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려 미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권투 선수 시절에 얻은 눈 부상과 어머니에게서 얻은 선천적인 시력 낮음으로 인해 미 육군, 해병, 해군 모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사 소속의 구급차 운전사 모집공고가 뜨자 바로 신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했었다. 1918년 5월부터 운전사로 일하는 중 7월 8일에 두 다리가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일시적 불구가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받던 도중, 전쟁이 끝났고 다리 부상도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겪은 걸 기반으로, 자전적 소설인 논픽션과 허구를 약간 섞은 무기여 잘 있거라 책을 집필했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 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참고로 남동생 리오 스타인은 시인 겸 평론가다.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수박 겉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다. 이 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헤밍웨이는 1926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본명은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 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 대전의 참전 용사였던 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오류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워낙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스트 성향 지식인, 문화인들이 주목했던 사건이니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같은 실재로 참전하여 전장에서 싸웠던 다른 네임드 문필가들에 일방적으로 비교당한 면도 있다.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부지"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 (1899년생이니 노르망디면 40대 중반이다. 당시는 징병제시대였으므로 병사들은 대부분 20대 초.) 참고로 파리 해방 이후 파리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J. D. 샐린저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4번째 아내이자 당시 특파원으로 런던에 있던 메리 웰시와 만나서 1946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하여 온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맘에 들지 않아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절규를 터뜨렸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은 피할 수 없는 자살의 한 사례로 소개되어 지고 있다. 그를 포함해서 그의 가족 중 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형, 누나, 손녀, 본인) 또한 아들 중 한 명은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생하였고 여러 차례 전기경련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하였고 우울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입원은 1961년 Mayo clinic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망상과 인지 저하,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신체적 노화, 폭음으로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었다. 7주 동안 입원하며 항우울제 치료, 전기경련치료, 정신치료를 받았고 1961년 6월 26일 퇴원하였다. 퇴원 당시 그는 치료진에게 "선생님과 저는 제가 어느 날 저한테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퇴원 후 6일 뒤 1961년 7월 2일 그는 자살한다. 

헤밍웨이는 자살의 요소인 여러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전성, 정신 질환, 약물 오남용, 자살 사고, 소아기 외상 등이 위험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헤밍웨이 단편선 1의 전기적 정보에서는 장례를 가톨릭 의식에 따라 치루었다고 나온다.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진취적인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그는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언급한 지인도 있다. 1943년에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샘 우드(1883–1949)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시사회에서 영화화 수준에 불만을 품고 감독을 주먹으로 패서 코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가 있다. 자신을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과도 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자를 밝혔으며 사생활도 문란해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결혼 중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며 지냈다. 일단 그의 아내들을 정리해 보면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 - 1921–27년까지 결혼.
폴린 파이퍼(1895–1951) - 1927–40년.
마사 겔혼(1908–1998) - 1940–45년.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 1946–61년까지 가장 오래 같이 살았으며 그의 장례식도 그녀가 치렀다.

위의 셋은 헤밍웨이의 주체할 수 없는 막장 행보에 질렸거나 그와 마찬가지로 막장으로 놀다 떠나갔고, 마지막 아내인 메리가 헤밍웨이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다룰 때 자주 나오는 사례들 중 하나다. 한 친구의 증언을 인용해보자. 그의 사망 뒤에 친구가 저건 그의 성격이 아니며, 실제로는 겁쟁이에 울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호텔에 머물면서 어느 영국인이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기에 퉁명스레 답했더니, 그 사람이 "아,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합니다."라고 해서 헤밍웨이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위 스페인 내전에 반 프랑코 파에 섰던 경력, 그리고 쿠바의 아바나에 살았던 것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다 할 확증은 없는 상황이며, 거꾸로 미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까지 제기되어 실은 이중 스파이가 아니었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모스크바와 바티칸 시국에서도 그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상술했듯 말년에 정신질환이 심해져 자신이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당시 정말 FBI 측에서 1940년대에 쿠바에 거주한 등의 과거력을 이유로 그의 주소 변동을 예의주시하였고 1950년대에는 존 에드거 후버가 인정했듯 실제로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헤밍웨이 말고도 무수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짓이었으며 헤밍웨이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은 존 스타인벡도 감시당해왔으며 그 역시 헤밍웨이처럼 생전에 똑같이 말하고 아예 법무장관에게 전화를 걸며 "후버의 졸개놈들이 날 감시하는 걸 지겹게 보고 있는데 좀 후버 놈에게 그만두라고 말해보시오!"라고 따져들 정도였다.    

다만 헤밍웨이가 정말 이 사실을 알아서 피해를 주장한 것인지, 아니면 정신질환 때문에 생긴 편집증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각에서는 이때 병원에서 전기 충격 요법을 받고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기록을 들어 "헤밍웨이는 누군가에 의해 폐인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라는 음모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의료행위가 전두엽 절제술, 뇌량 절단술 등 상당히 미개한 방식의 수술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우울장애에 대한 전기충격요법은 상당히 일반적인 처방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비슷한 질환과 최후를 겪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전적으로 정신적인 질환에 상당히 취약한 체질이라, 정신질환에 비정상적인 환경까지 합쳐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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