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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 배설, 영국 언론인

Jobs9 2024. 3. 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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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과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구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베델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고종 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 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다음 날부터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 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입구 쪽에 베델의 묘가 있으며,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대한매일신보에 사설로 게재하였고 영문판으로도 번역 게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1907년 1월 고종이 영국의 『런던 트리뷴(London Tribune)』을 통해 자신이 을사늑약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칙서의 형식으로 알렸는데 이를 이어준 인물이 바로 베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같은 내용이 대한매일신보에도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가 불법으로 경천사 10층 석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한 사건을 폭로해 호머 헐버트와 함께 국제여론이 일본을 압박해 이후 한국으로 반환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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