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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 탈레반, IS, 와하비즘, 무자헤딘, 하마스, 헤즈볼라, 무자헤딘, 무슬림 형제단

Jobs 9 2023. 11. 1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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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비즘, 사우디 건국

1700년대 이후 오스만투르크가 연전연패하면서 이슬람 세력에 위기감이 돌았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흥하고 오스만 제국을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세력은 쪼그라들었다.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등 도처에서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땅을 빼앗기거나 전쟁에서 죽어나갔다.

그러자 이슬람 지도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반성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수세적 처지가 코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오스만 제국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그래서 국력을 상실하고 기독교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북아프리카에서 수피(Sufi) 교단, 인도에서 샤 왈리올라(Shāh Walī Allāh)에 의해 제기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종교학자 무하마드 이븐 압달 와하브(Muhammad ibn Abd al-Wahhab, 1703~1792)에 의해 와하비즘(Wahhabism)으로 발전했다. 와하브 운동은 비이슬람적 풍습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재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와하브는 일체의 해석을 배제하고 오로지 코란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야 하며, 이슬람 초기의 원칙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오스만 제국이 주도하는 이슬람은 알라신이 예언자에게 계시한 신앙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와하비즘의 메시지는 오스만 제국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다. 와하브 추종자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하고 이라크로 확산되었고, 오스만의 종교적 패권을 위협했다. 와하브 세력은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오스만에 의해 혐오스럽고 비이슬람적 사원으로 채워졌다고 설교했다. 압달 와하브는 타락한 메카와 메디나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와하브는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토후(emirate) 무하마드 빈 사우드(Muhammad bin Saud)와 손잡았다. 이 사우드 가문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조상이다. 사우드 일족의 토후는 1744년 리야드 근처 디리야(Diriyah)에서 토후국을 건설했다. 그땐 사우디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하나를 통치하는 부족국가에 불과했다.

디리야 토후국이 급성장한 것은 이슬람 수니파의 와하비즘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디리야 왕국은 이슬람 창시자 무하마드처럼 종교를 앞세워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803년엔 디리야 토후국은 와하브 추종자들과 함께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잘못된 교리의 사원들을 정화했다.

디리야 토후국과 와하비주의자들의 동맹은 메카와 메디나를 통치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삼아 오스만 왕조를 대체하려고 했다. 그들은 점령지에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와하비즘과 디리야 토후국의 영토확장은 이슬람 패권자 오스만 투르크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속주인 이집트를 다스리는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파샤에게 디리야 왕국을 정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무하마드 알리 총독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는 지방군으로 최강이었다. 이집트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대리해 1808년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와 메카에 이어 디리야를 공격해 점령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디리야 왕국의 사우드 왕족을 이집트와 오스만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고, 다리야를 파괴했다. 디리야의 왕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처형되었다. 이를 사우디 제1왕국(1744–1818)이라 한다.

오스만투르크의 탄압에서 살아남은 사우드 왕족들이 1818년 왕국을 재건하고, 1824년 리야드를 점령해 새 수도로 삼았다. 이를 역사적으로 사우디 제2왕국(1824–1891)이라 부르는데, 왕국의 명칭은 네지드 토후국(Emirate of Nejd)이었다. 제2왕국은 오스만 투르크와 그 속령이었던 이집트의 방해로 번성하지 못하고 주변 부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1891년으로 막을 내린다. 남은 왕가는 오스만 투르크령 이라크(쿠웨이트)로 피난을 갔다.
 

1차 왕국의 건국자 무하마드 빈 사우드의 5대손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Abdul-Aziz bin Abdulrahman Ibn Saud)가 세 번째 왕국 건설에 나섰다. 그는 족보상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의 건국자가 된다.

쿠웨이트에 망명해 있던 이븐 사우드는 쿠웨이트의 부족장(에미르)에게 병력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하면서 왕국 재건을 시작한다. 쿠웨이트 에미르는 네지드 왕국을 멸한 리시드 가문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말, 무기 등을 주었다. 그 때 이븐 사우드가 확보한 병력은 40명에 불과했다.

이븐 사우드는 1902년 1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리야드에 도착했다. 병력수는 적었지만, 그들은 하루 밤 사이에 도시를 점령하고 왕국을 수립했다. 이븐 사우드는 리야드 탈환을 계기로 지도력과 용기, 운이 뒤따르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이 입증되었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후 이븐 사우드는 연전연승했다. 1902~1906년 사이에 이븐 사우드는 과거 네지드 왕국의 영역을 다시 확보했고, 1913년에는 알하사(Al-Hasa) 지역에 주둔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을 추방했다. 이븐 사우드는 1917년 스스로 ‘네지드의 술탄(Sultan)’이라고 선언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동등한 지위임을 공포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의 편에 섰다. 오스만은 러시아와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중동 지역에서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은 1차 대전에서 패한데다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 공화국에 의해 1922년 해체되었다.

그 틈에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 통일에 나섰다. 이븐 사우드는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1926년 헤자즈 왕국(Kingdom of Hejaz) 정복에 성공했다. 헤자즈 왕국 복속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탈환한다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븐 사우드는 헤자즈 국왕도 겸했다.

1932년 9월 23일 이븐 사우드는 본국인 네지드 왕국과 점령국인 헤자즈 왕국을 통합해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건설 전후에 쿠웨이트와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합병에 실패했다. 사우디 아라바아는 1934년 남부 아시르(Asir) 토후국을 합병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정리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것은 1938년이다. 통일 사우디에 알라신의 은총이 내려진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성지 메카를 끌어 않으면서 이슬람과 수니파의 수장국으로서 부상했다.


 

 

 

알카에다, 탈레반, IS

 

알카에다, 탈레반, IS는 종파적 유사성(수니파)을 이유로 사실상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알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아프간으로 모여든 이슬람 성전주의자 세력(무자헤딘)을 돕기 위해 1988년 결성했다.

1989년 아프간에서 소련이 물러난 뒤 여러 군벌이 내전을 벌였는데, 파슈툰족 출신 이슬람 근본주의자 집단이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급성장했다.

탈레반은 1994년 칸다하르에서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결성했다.

이슬람 학교(마드라사) 출신 학생이 주축을 이뤘으며, 탈레반의 의미도 '학생'이다.

IS는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AQI)로 출발해, 2014년 참수 동영상, 민간인 학살 등 잔악한 수법으로 짧은 기간에 알카에다 이상으로 국제적 조명을 받았다.

IS는 알카에다보다 더 극단적 행동으로 '테러 경쟁'을 벌였고,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를 빠른 속도로 장악했었다.

하지만, 미군이 주도하는 국제동맹군의 공격을 받고 2017년부터 패전을 거듭했다.

2019년 3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이 "시리아에서 IS 칼리프제국이 100% 제거됐다"고 선언했다.

IS는 시리아와 이라크를 떠나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그중에서도 아프간에 진출한 세력은 2015년 1월 IS-K라는 조직을 만들어 끊임없이 테러를 저질렀다.

IS-K는 탈레반을 두고 '너무 온건하다'고 비판할 정도로 폭력적 극단주의로 똘똘 뭉쳤다.

IS-K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칼리프(이슬람 신정 일치 지도자)가 이끄는 '칼리프 제국'(칼리프가 다스리는 이슬람 신정 일치 국가) 건설이다.

이들은 서방세계와 타협하지 않고, 비이슬람권을 상대로 계속해서 '성전'을 벌이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IS-K는 탈레반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 정권을 다시 잡자 "미국과 거래로 지하드 무장세력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IS-K는 초반에 파키스탄의 탈레반에서 분파된 극단주의 세력이 합류했고, 최근에도 탈레반의 '미국과 거래'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이 옮겨온 것으로 전해졌다.

IS-K의 현재 조직원 규모는 정확하지 않다. 유엔은 1천500∼2천200명 가량의 조직원이 암약하는 것으로 파악


▲ 알카에다 (Al-Qaeda)

·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조직한 국제 테러단체
· 주요 목적은 이슬람 국가들의 영향력 확대
· 특히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쌍둥이 건물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이 조직의 수뇌인 빈 라덴으로 의심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단체

▲ 탈레반 (Taleban)

·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로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세력
·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여러 정파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지만 탈레반은 파기스탄과 접경지역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함

▲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단체로, 아마드 야신(Ahmad Yasin)이 1987년 말에 창설
· 하마스는 ‘용기’라는 의미로, 이슬람 수니파(派)의 원리주의를 내세우는 조직체 



미·소 경쟁이 이슬람 용병을 키웠다

아프간과 이슬람 테러조직과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된 것은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의 경쟁에서 비롯된다. 냉전 막바지에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이 나라에 연달아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소련은 직접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고,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 용병을 이용하는 간접적 개입을 택했다.

근대 이후 왕정국가였던 아프간은 1933년부터 자히르 샤 국왕(1914~2007)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사촌인 무하마드 다우드 칸(1909~1978)을 총리로 지명하여 전권을 행사토록 하였다. 칸은 친소(親蘇)노선을 유지하였다. 소련도 1960년대 이후 아프간에 경제 및 군사원조를 하였다. 미군이 최근 황급하게 철수한 바그람 공군기지도 이때 소련이 건설한 공항이다.

소련은 아프간 북부에서 유전을 발견하고 1985년까지 매년 2억㎥씩 채굴하여 대부분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히르 샤 국왕은 1964년 선거를 통해 아프간인민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종, 지역 및 종교 간의 심각한 갈등이 이어졌다. 1972년에는 극심한 한발로 10만명이 사망하는 대재난이 발생했다. 해외에서 온 구호물자를 국왕의 친척들이 착복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다음해 국왕이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중 쿠데타가 발생하여 자히르 샤 국왕은 권좌에서 축출되고 150년 지속된 왕정도 종식되었다. 쿠데타의 배후인 무하마드 다우드는 독재자 대통령이 된 후 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무하마드 다우드 정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78년 4월 아프간인민민주당 세력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다우드 일족을 몰살하고 무하마드 타라키(1917~1979) 대통령 정권의 아프간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정권의 실세가 된 하피줄라 아민(1929~1979)은 수천 명의 반정부 인사들을 처형하는 한편 친소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 유학 경력이 있는 아민이 친미 인사라는 의심을 떨치지 않았다. 소련이 보낸 외교관은 아민을 만난 뒤 소련이 가장 위험시하는 특징인 “평범한 프티부르주아이며 극단적인 파슈툰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1979년 3월부터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과 파키스탄에 고무된 이슬람주의 세력의 폭동이 잦아지면서 소련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소련은 미국이 혼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권을 침범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당시 소련 외무장관은 훗날 소련 몰락 후 “브레즈네프는 아민이 미국과 타협할 역량이 있다며 이것만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소련 국방차관이었던 발렌틴 바레니코프 장군은 1979년 소련 당국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악몽의 시나리오를 10년 뒤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아프간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수중에 들어가면 미국이 단거리미사일을 배치하여 소련이 카자흐스탄에 배치한 전략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여 호메이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소련 핵심부에서는 아프간의 실권자 아민이 미국의 첩자라고 확신했다.… 아프간은 우리의 세력권, 우리의 국경 안에 있다. 미국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프간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카터-브레진스키 프로젝트

결국 소련군은 그해 12월 23일 아프간을 침공했으며 아민 등 정치인들도 처형했다. 그러자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중앙정보국(CIA)에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이슬람전사인 무자헤딘에 ‘살상용(lethal)’ 무기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카터는 1979년 7월 카불의 친소정권이 장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슬람전사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행정명령에 처음으로 서명했다.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2017) 안보보좌관의 주도로 진행된 일련의 이슬람전사 지원정책은 나중에 ‘카터-브레진스키 프로젝트’로 불렸다. 브레진스키는 1989년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비밀작전은 뛰어난 아이디어였다. 그 효과는 소련을 아프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소련군이 아프간에 침공한 12월 23일 그는 카터에게 “우리는 소련에 베트남전쟁을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 전쟁으로 소련의 사기는 저하되고 궁극적으로 소련제국은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CIA는 대소 전선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피했다. 미국 내에서 베트남전 실패나 민간인 사찰 등으로 CIA에 대한 여론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었다. 대신 CIA는 작전국을 중심으로 자체 인력 동원은 최대한 줄이면서 이슬람전사들을 가능한 많이 훈련시켜 투입하였다. 존 쿨리는 저서 ‘성스럽지 못한 전쟁(Unholy Wars)’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용병작전이었다. 용병의 대부분은 이슬람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신(神)이 자신들에게 신의 적(敵)이자 무신론자들인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뜨겁게 믿게 되었으며, 명예와 적은 급료로 보상받았다. 싸우다 죽으면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보상을 받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무렵 이슬람 청년들을 아프간의 대소 전선으로 동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이집트의 급진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MB)이었다. MB는 안와르 사다트(1918~1981) 대통령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 이론가들의 선동을 통해 반정부 성향의 청년들을 아프간 대소전선에 대거 동원했다. 이집트의 MB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0년대에 태동했다. 1928년 이집트의 신학자인 하산 알 바나(1906~1949) 등은 코란에 따른 철저한 이슬람신정국가를 지향하는 MB를 결성했다. 이후 MB는 이슬람 국가들로 확산되어 일찍부터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에 테러를 저지르는 등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집트와 아프간의 이슬람주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 이슬람주의의 모태로 불리는 이집트 알아즈하르대학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은 1950년대에 이집트 나세르(1918~1970)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등 세속주의에 반대하여 많이 투옥되었다.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집권한 사다트는 이들을 대부분 석방했다.

사다트 역시 이슬람 청년들을 아프간 대소 전선에 동원하는 데 나름 기여했다. 사다트가 MB를 설득하여 참전시킨 청년들을 ‘아랍아프간’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사다트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1979년 3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자 국내에서 MB 세력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때 사다트는 MB 지지자들을 아프간으로 보내면 국내 정치에서의 압박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사다트는 아프간 지하드를 지원하며 1956년 이후 나세르가 소련으로부터 얻은 엄청난 양의 소련제 무기들을 이슬람전사들에게 공급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이집트에 50억달러를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16 전폭기 등 신예 무기들을 판매하였다. 

1970년대에 이집트에서는 눈먼 성직자인 오마르 압델라흐만(1938~2017)의 호전적인 설교가 명성을 떨쳤다. ‘알 지하드’라는 투쟁단체의 지도자로도 알려졌던 그는 전투적인 지하드를 촉구했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정부가 그의 설교를 금지하자 녹음 테이프가 은밀하게 전파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아프간 국제테러조직원이 된 전사들을 가장 독려한 인물로 평가된다. 

아프간 대소 전선의 무자헤딘을 키우는 데는 파키스탄도 기여했다. 파키스탄은 러시아와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이 아프간을 장악하게 되면 다음 목표는 파키스탄이 될 것이라는 위기를 느꼈다. 미국의 브레진스키는 1980년 1월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지아 울 하크(1924~1988) 대통령과 무자헤딘 지원과 훈련에 합의했다. 

사우디아리비아 역시 무자헤딘의 육성에 일조했다. 사우디는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을 밖으로 확산시키고 자국 내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을 해외로 내보낼 기회로 삼고자 아프간 무자헤딘에 오일머니를 대폭 지원했다. 이때 사우디 명문가인 빈 라덴 가문도 아프간 전사 지원에 적극 참여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80년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처음 방문한 뒤부터 무자헤딘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2년 그는 페샤와르에 정착했는데, 건설기술자들을 불러들여 CIA가 추진한 ‘호스트’의 터널공사를 완공시키기도 했다. 호스트 터널은 무기고와 아랍아프간들을 위한 훈련소 등을 갖춘 복합 군사시설이었다. 미국과 훗날 원수가 됐지만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CIA의 파트너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아프간 국경지대에 정착하여 사우디왕국과 아랍, 그리고 전 세계의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오는 지원자들을 받았다. 내가 세운 캠프에서 미국인 장교들이 이들을 훈련시켰다. 무기는 사우디가 낸 돈으로 미국이 제공했다.”

1989년 빈 라덴은 아랍아프간들과 가족들의 지원센터 격인 ‘알 카에다(군사기지라는 의미)’를 설립하고 연계를 확대했다. 빈 라덴의 도움으로 수천 명의 아랍아프간들이 아프간 각지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아프간에서 소련군도 철수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몰락을 공산주의체제의 실패로 파악했지만 이슬람 세계와 무자헤딘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소련의 실패를 이슬람의 승리로 파악했다고 ‘탈레반’의 저자 아흐메드 라시드는 설명한다. 아프간에서의 성전(지하드)으로 초강대국 소련을 패배시켰다면, 또 다른 초강대국인 미국도 패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지하디스트들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에 대한 무자헤딘의 증오는 곧 미국을 향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아프간에서 벌어진 소련과의 싸움을 통해 급진적인 이슬람 전사들이 엄청난 숫자로 육성됐다는 점이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43개국에서 약 3만5000명의 전사들이 아프간 무자헤딘의 세례를 받고 귀국했다. 10만의 급진적인 이슬람전사들이 아프간 및 파키스탄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슬람권에서도 이들의 위험성을 일찍부터 감지한 나라들이 있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이집트와 알제리는 미국을 향해 아프간에 개입하여 안정을 찾아주라고 계속 주문했다. 아프간을 안정화시켜 전쟁에 숙달된 아랍아프간 전사들이 생업을 찾도록 도우라고 충고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였다. 미국이 아프간을 방치하는 동안 탈레반이라는 세력이 성장하면서 아프간은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성역이 되었다. 

탈레반은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간에서 벌어진 지독한 내전의 결과물이었다.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간의 저항세력은 크게 7개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풍족하게 받았다. 반면에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 파슈툰족, 특히 듀라니 일파는 미국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과수원 지대인 칸다하르의 반소 저항은 지역 성직자들이 이끌었는데 이 지역은 수목이 울창하여 소련군에 대한 매복공격이 수월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이 지역에 역사상 가장 많은 지뢰를 설치하였다. 소련군이 철수한 뒤 폐허가 된 과수원 지대에서 농민들은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 무자헤딘 출신의 군벌들이 통행세를 뜯는 등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뮬라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이었다. 오마르는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에서 국민들을 구해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우리는 전능한 신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탈레반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파키스탄이었다. 당시 파키스탄도 아프간 내 여러 세력의 갈등에 신물이 난 상태에서 아프간을 이끌 새로운 세력을 찾고 있었다. 1993년 총리가 된 베나지르 부토(1953~2007)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아프간 카불을 거쳐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잇는 루트를 연결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성향이 짙은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탈레반을 지원하여 이 통로를 확보하였다. 1994년 12월까지 파키스탄에 거주하던 1만2000명의 파슈툰족 청년들이 아프간 탈레반에 합세하게 된다.  

한편 오사마 빈 라덴은 무자헤딘 간의 내전에 염증을 느끼고 1990년 사우디로 귀환하여 아랍아프간들의 정착지원사업을 벌였다. 그는 4000여명을 메카와 메디나에 정착하게 하는 한편 전사자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빈 라덴을 다시 충동하는 긴박한 사태가 벌어졌다. 1991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다. 당초 빈 라덴은 사우디 정부에 아랍아프간들을 동원하여 이라크군에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우디 당국은 빈 라덴의 제안을 일축하면서 대신 미군을 끌어들였다. 사우디 당국이 미군 54만명의 주둔을 허용하자 이에 실망한 빈 라덴은 수단 등에 머물며 사우디 왕정과 미국을 맹비난했다. 1996년 빈 라덴은 3명의 처와 13명의 자식들, 그리고 소수의 아랍아프간 전사들과 함께 아프간으로 돌아갔다.  

1996년 8월 그는 처음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지하드를 벌일 것을 촉구하는 ‘파트와(fatwa)’를 발표했다. 파트와는 이슬람 성직자가 발표하는 일종의 이슬람법령이다. 빈 라덴이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무자헤딘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

1997년 칸다하르로 거처를 옮긴 그는 뮬라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98년 2월 23일 자신이 건설을 담당했던 호스트 캠프에서 열린 알 카에다 모임에서 그는 ‘유대인과 십자군과 싸우는 지하드를 위한 국제이슬람전선’ 명의로 “미국과 동맹국의 시민과 군인들을 죽이는 것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는 파트와를 다시 발표했다.

이어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테러로 22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빈 라덴은 최악의 이슬람 테러 주모자로 떠오른다. 1998년 11월 미국은 빈 라덴의 목에 현상금 500만달러를 걸었다. 미국은 탈레반에 빈 라덴 추방을 요구했지만, 파슈툰 탈레반들은 ‘손님을 내쫓는 것은 파슈툰의 관습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당시 탈레반은 빈 라덴을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보았다. 미 국무부는 위성전화를 통해 뮬라 오마르와 직접 장시간 통화하며 협상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미국은 1999년 2월까지 빈 라덴을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탈레반은 그를 숨겨놓고 있었다.

아프간 사태 뒤에는 미 CIA 그림자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아프간 사태는 다시 급변한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의 배후에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돕거나 숨겨주는 행위도 테러로 간주했다. 알 카에다뿐만 아니라 탈레반도 미국의 적이 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시작된 미국과 동맹군의 공격으로 탈레반 정권은 두 달 만에 붕괴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도 몰아냈다. 후세인 정권 붕괴는 또 다른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이라크의 몰락한 수니파 테러리스트들이 시아파들을 상대로 무수한 테러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아랍국,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체첸공화국과 서유럽 국가 등에서 몰려든 테러리스트들로 구성된 이슬람국가(IS)라는 테러조직이 기승을 부렸다. 1999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하며 결성된 IS는 2010년대에는 이라크 북부의 모술과 시리아의 라카 등을 점령하여 1000만 이상의 주민들을 중세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지배한다며 약탈하고 살해하였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후세인은 2006년 12월 이라크에서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 역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2년 5월 사살되었다. 탈레반 지도자인 뮬라 오마르는 2013년 3월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IS의 마지막 리더인 알 바그다디도 2019년 10월 미군의 공격을 받자 자폭하여 사망했다. 이들이 사라지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미군의 목표는 달성된 것일까? 

존 쿨리는 이슬람 테러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슬람단체는 포도송이를 의미하는 ‘안쿠드(anquds)’라는 세포들로 나뉜다. 포도송이처럼 여러 안쿠드가 통합하여 별도의 조직을 구성한다 하여도 각각의 안쿠드는 해체되지 않는다. 각각의 안쿠드 우두머리가 ‘아미르(amir)’이다. 아미르들이 모여서 일종의 협의체인 마줄리스 알 슈라(majlis al shura)를 이룬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간에 참전한 전사들의 조직은 이와 같다. 이들은 귀국 후에 같은 형태를 유지하며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지난 8월 26일 카불공항 인근에서 테러를 저지른 IS-K는 IS의 호라산 지역 분파로 알려지고 있다. 호라산은 오사마 빈 라덴이 ‘알 카에다’를 결성한 곳이다. 아프간에는 소련에 저항하도록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 CIA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있다. 이슬람 테러를 준비하는 이슬람의 ‘안쿠드’가 과연 IS-K 하나뿐일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영토 변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견원지간으로 서로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단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존재를 자국 내 자치정부 비슷한 존재로 인정하고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자치 영역으로 인정해주었지만 그것은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역시 오슬로 협정을 받아들였지만 스스로를 독립국이라 주장하며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들 입장에서 이스라엘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 초기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재산을 뺏고 학살을 자행했으니 관계가 매우 나쁘다. 툭하면 폭정을 저지르는 터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악의 집단이다. 따라서 사이가 매우 나쁘며, 양 국민들이 서로를 해하는 악순환이 70년넘게 지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책이라면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에 대한 글이 빠짐없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스라엘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국제적인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것조차 이스라엘의 승인이 필요할 정도이며, 기업조차 이스라엘 정부가 허락해 주지 않고, 설령 허락한 기업들조차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각종 규제를 걸어놨고, 세금도 유대인보다 더 많이 물린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물가는 대한민국보다 높으며,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뮌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킨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테러 과정에서 네오 나치의 지원을 받았으며, 네오 나치의 지지를 꽤나 받고 있다. 이것은 네오 나치에게는 이이제이, 팔레스타인에게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진영논리의 한 예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거두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아민 알 후세이니는 나치즘에 동조하며, 나치 독일에 부역을 하며 세르비아계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에 티토가 그를 잡아 죽이려 이를 갈았지만 그는 잽싸게 팔레스타인에 달아났다. 자세한 내용 및 기타 관련 내용은 아민 알 후세이니 문서와 관련 링크, 네오나치 문서의 팔레스타인 부분, 반유대주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참조하면 좋다.

이런 점에서 인도의 찬드라 보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다른 조직이 저지른 짓이지만,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가 여기에 협조했다는 점과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이 협조했다는 점,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테러리스트들을 대외적으로 영웅이라고 선전한다는 점과,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기에 동조 혹은 방조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이점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을 비롯한 아랍인들마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취급됐으며, 이는 현재 서구에서 무슬림, 혹은 아랍계에 대한 가장 질 나쁜 인종차별적 모독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주류는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받으며, 여성 인권이나 다른 종교, 민족과도 훨씬 더 유화적이었던 PLO나 PFLP 산하의 지원병(fedayeen, فدائيون)들이었으며, 하마스의 부상은 이들이 오슬로 협정 이후 부정부패로 심각하게 지도력에 금이 간 아라파트 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긴 일이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도 2018년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땅이며 예루살렘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수도라고 말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압제를 아라파트와 자치정부가 대항할수 없었던 것도 있다. 당장 대중 문화에서 체 게바라 같은 팔레스타인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유명한 여성 페다인 레일라 칼레드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고, 하마스의 부상 이전 명실부공한 두번째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였던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전선(PFLP)의 경우 아예 기독교 신자인 조지 하바쉬가 창설하고 지휘했던 집단이다.

아랍 민족주의의 선봉에 서있던 것이 서구와의 접점이 많았던 아랍계 기독교 지식인들이었고, 오스만 말기에 간행되어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을 널리 확산시키며 지역민들을 이어주고 시오니즘을 비판하던 대표적 근대신문 '필라스티니'도 기독교 신자가 만든 언론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원래 동로마의 영역이었던데다 십자군 전쟁의 주된 전장이었다 보니 기독교인 공동체도 많았고, 이들을 집중 박해하여 추방한 건 팔레스타인 무슬림 측이 아니라 이스라엘 당국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 같은 이슬람 vs 서구세계라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대 담론에서 조금만 벗어나 현지의 직접적인 역사와 각 세력들의 역학 관계를 살펴 보면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권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부상과 접점은 있어도 근본이나 주된 성격은 전혀 다른 분쟁이란걸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세속 국가이고 종교 강요는 없지만 유대교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하며 다른 종교를 싫어하고 배척한다.

건국 당시 이스라엘 사정상 회유책을 벌일 능력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을 회유하려면 장기간 막대한 양의 물품들을 배급하며 각종 복지를 펼쳐야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물자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전쟁에서 부상당한 유대인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무기들은 대부분이 적으로부터 노획한 것들이거나, 예전에 쓰건 구닥다리를 개량한 것들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할 수 있던 것은 외면하거나 강압책을 벌이는 것뿐이었는데,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기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에 지나치게 반이스라엘 조직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불경기로 인한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로 경제 문제가 심각해 장기간의 회유책이 힘든 상황이다.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기만 해 양측이 피해보고 있는 상황이다.

 

하마스, 헤즈볼라 관계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 팔레스타인, 레바논에 위치한 헤즈볼라는 국제법상 인정된 정치 정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PLO와 이스라엘이 합의를 보았던 자치정부안에 반대하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고 특히 가자지구를 석권하다시피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 헤즈볼라만 멸망시키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가자 주민들이 점점 하마스의 광신적인 통치에 싫증이 나고있는 바람에 하마스의 지지율은 썩 좋지 않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하마스의 무자비한 전략(민간인을 향한 무분별한 미사일 발사 및 인간 방패)과 인권 침해를 점점 알아가면서 아랍권을 제외하곤[1] 하마스에 대한 지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하마스가 자발적으로 정권을 포기할 리도 없고[2] 지지자들도 상당하기에 줄어든다 해도 이스라엘의 비타협성과 탄압으로 늘 다시 지지를 확보하니 큰 문제가 없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측에게 절대적인 전재 조건으로 내거는게 협상 하고 싶으면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과 유럽 상대로 계속 팔레스타인측은 무장해제 하지 않는다고 저들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테러리스트라 언플을 하고 있지만 세계 여론은 파타와 이스라엘 진보파도 정부보고 그런식으로 하니 협상이 되겠냐며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완벽하게 하마스를 때려잡으려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3] 이스라엘은 하마스로 인해 당분간은 괴롭힘을 당할 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유대인들도 끝이 안보이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의 전쟁, 팔레스타인인, 아랍인들의 테러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평화를 찾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극우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이스라엘 정계도 큰 문제라서 그저 폭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어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4]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나쁜 집단이라며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사진과 미디어로 홍보해도 전혀 먹히지 않고 오히려 국제여론은 팔레스타인의 피해만 보지 이스라엘 피해는 자업자득이라며 비웃음만 당한다. 이스라엘에서도 이젠 자조적으로 국제적으로 욕먹는 나치와 더불어 제 2의 나치라며 우리 이스라엘이 붙는다든지 이스라엘 내 시사만화로 국제적으로 미국 외 우리 동맹은 없다, 그 미국에서도, 유태인 후손들에게도 점차 동맹국이라는 점을 질색하는 문제라고 풍자되고 있다.

하마스뿐만 아니라 헤즈볼라는 더욱 이스라엘이 고전 중이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한 정당이다. 게다가 하마스와 달리 세속적인 모습을 통하여 매스 미디어 전에서도 이스라엘에게도 덤벼든다.

이스라엘에게 비극은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국제적으로 욕먹어도 지지자들 및 새로 들어갈 인구층이 탄탄하는 점이다. 게다가 헤즈볼라를 소탕하고자 레바논으로 쳐들어간 2006년에 이스라엘은 15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전군 전사자가 몇 백명 수준이던 걸 생각하면 일개 테러단체라고 부르는 헤즈볼라에게 이 정도 전사자를 냈으니 이스라엘에서도 우리가 졌다라고 분노했다. 그렇다고 레바논으로 쳐들어가 총력전을 벌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무자헤딘  Mujahideen / مجاهد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들을 지칭하는 말. 무자헤딘은 아랍어로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뜻한다. 알파벳 표기로 MU(~하는 사람)+JIHAD(지하드)+IN(복수형)을 합한 것으로 모자헤딘, 무자히딘, 가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하디스트'. 좁게는 아프간의 반군을 뜻하나 넓게는 단어 뜻대로 지하드에 참전한 자로써 아프간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가 선포한 성전을 수행하여 반정부단체나 무장 게릴라 조직이나 타국의 전쟁에 자기 스스로 나아가 개입한 외국인 이슬람 무장단체 등을 통칭한다.

즉 한국으로 치면 의병과 딱히 다를 게 없는 표현이며, 원칙적으로는 탈레반이나 헤즈볼라, 하마스 등의 이슬람주의 군사조직 모두 그들이 하는 일로 치면 무자헤딘이라고 할수 있으나 포괄적인 의미와는 달리 무자헤딘이 최초로 등장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이들이 진화한 탈레반의 악명이 높다보니 단어의 첫인상이 보통의 의미들보다도 훨씬 좋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흔하며, 보통 아프간의 이슬람 극단주의 군사조직을 무자헤딘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프간의 무자헤딘도 사실은 다민족에 부족연합체들, 종파별로 따로따로 뭉쳐있다. 차이가 있다면 탈레반, 헤즈볼라, 하마스 등은 출발이 지역에 뿌리를 둔 군벌 집단이지만 알 카에다, IS, 보코 하람 등은 지역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원래 테러를 위해 떠돌아다니던 국제 범죄집단이 거대화, 체계화된 케이스이다. 


무슬림 형제단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범 아랍권에 퍼져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 조직, 정당이다. 무려 500만~1000만 명에 이르는 수[7]의 회원을 가진 세계 최대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파와 함께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모태라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기준 러시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이집트에서는 이 단체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합법-불법 조직을 오가다가 2012년 집권까지 했으나, 무리하게 샤리아 법을 강행하려다가 세속주의 세력의 큰 반발을 불렀고, 2013년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군부가 나서 쿠데타를 벌여 집권당에서 내려왔다. 이후 불법조직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겨난 탈레반과 알카에다
1979년, 이슬람주의 급진화의 시발점

1장. 아랍 민족주의의 부침과 이슬람주의의 태동
와하비즘과 사우드 가문
제국주의, 아랍 분쟁의 씨앗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탄생과 이크완
이슬람판 YMCA, 무슬림형제단과 하산 알 반나
무슬림형제단의 급진화
이집트 혁명과 나세르, 그리고 사이드 쿠틉
아랍 민족주의의 발흥과 쇠퇴
이집트와 사우디에서의 이슬람주의 부활
이슬람주의의 부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이란 혁명

2장. 이슬람주의의 확장, 이란 혁명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페르시아인의 나라 이란
이란의 세속주의 근대화의 실패
수니파와 시아파
이란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지미 카터와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혁명의 발생과 신정국가의 수립
1979년, 급진적 이슬람주의의 전면화가 시작되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현대 제국주의의 각축장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제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 친소정부의 수립과 미국의 반격
무자헤딘의 저항, 소련의 늪이 된 아프가니스탄
아랍국가의 전면적 지원
오사마 빈 라덴의 등장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소련의 철군과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략

3장.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등장
내전으로 치닫는 아프가니스탄,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
무자헤딘의 분열와 알카에다의 탄생
친소정부의 붕괴와 또 다른 내전의 시작
탈레반의 등장
내전의 승자로 부상하는 탈레반

4장. 걸프전과 탈레반, 본격화되는 알카에다의 테러
걸프전,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의 새로운 기회
걸프전쟁의 원인이 된 이란-이라크 전쟁, 그리고 사담 후세인
걸프전의 발발, 미국의 중동전략 실패의 시작
수단으로 간 빈 라덴, 그리고 알카에다
지하드 네트워크의 구성과 전 세계로 퍼져가는 테러
탈레반 정부의 수립과 오사마 빈 라덴
미국에 대한 성전을 선포한 빈 라덴
빗나가는 미국의 빈 라덴 체포 작전, 아랍세계의 영웅

5장.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KSM과 빈 라덴의 만남과 9.11 테러의 기획
아마드 샤 마수드의 죽음
그날,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와의 전쟁 선포
탈레반 정권 붕괴, 빈 라덴 체포 실패
미국, 다음은 이라크
이라크 침공을 위한 명분 쌓기
명분 없는 전쟁, 미국의 이라크 침공

6장.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비극, 그리고 빈 라덴의 최후
미국의 전후 처리와 이라크 내전의 발생
이라크 내전의 격화, 고전하는 미국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탄생
이라크 신정부의 출범과 미국의 반격
또 하나의 전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귀환
오바마 정부의 등장과 미국의 이라크 철군 결정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7장.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이슬람 국가
미군의 이라크 철군
중동의 민주화 투쟁,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 튀니지의 시민혁명
확산되는 아랍의 봄
시리아라는 나라
시리아의 민주화 투쟁과 내전의 발발
시리아 내전의 첫 번째 변수, 종파 분쟁
두 번째 변수 : 급진화된 이슬람주의의 확산과 이슬람 국가(IS)
이슬람 국가(IS)의 등장과 성장
세 번째 변수 : 쿠르드족의 독립투쟁
네 번째 변수 : 주변 강대국의 개입
터키와 이란, 이스라엘의 개입
시리아 내전의 현재 상황

8장. IS의 패퇴와 탈레반의 재등장
이라크 내전의 진행과 현재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재수립
탈레반의 학정
탈레반과 파키스탄, 탈레반과 알카에다, IS
탈레반과 미국의 협상, 탈레반의 카불 장악
탈레반 정부의 현재와 미래

9장. 이슬람주의의 급진화가 미친 영향과 이후 전망
난민 문제
혐오와 차별의 확산
이슬람주의의 미래와 그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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