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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로렌, 마지막 수업, 프랑스, 독일, 분쟁 지역, 모젤(Moselle), 바랭(Bas-Rhin), 오랭(Haute-Rhin)

Jobs 9 2025. 3. 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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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로렌

 

 

알자스-로렌 지도

 

위의 지도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 알자스와 로렌 레지옹들의 데파르트망을 보여주는데, 역사적 지명 알자스-로렌은 이 중 노란선 이동, 모젤(Moselle, 57번), 바랭(Bas-Rhin, 67번), 오랭(Haute-Rhin, 68번)을 일컫는다.

 

프랑스어: Alsace-Moselle (알자스-모젤)

독일어: Elsaß-Lothringen, Elsass-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의 행정구역들. 면적은 14,496km². 현재는 그랑테스트 레지옹에 속해 있다. 중심 도시는 스트라스부르.

 

20세기까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범위

 

밖에서는 알자스-로렌으로 통칭하고 있지만, 주의할 점은 우선 알자스와 로렌은 고대 시대부터 대체로 분리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로렌 지방 역시 3개 가톨릭 주교령 지역과 로트링겐 공국 지역의 역사가 다른 등 실제로 알자스-로렌 지역은 자세히 따지고 들면 훨씬 복잡하지만, 일단은 크게 알자스와 로렌 2개 지방으로 나뉜다. 19세기를 기준으로 로렌 지역의 대다수는 사실상 프랑스화되어 있었지만 알자스 지역은 독일계 주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20세기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직접적인 분쟁이 되었던 지역은 1871년 독일 제국이 병합했다가 1918년 프랑스가 다시 차지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Reichsland Elsaß-Lothringen)이며, 위의 지도에서 노란선을 경계로 그 오른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알자스 로렌 지방들의 절반을 좀 넘는 크기로,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93%)과 로렌 지역의 일부(26%)를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어권인 메스와 독일어권인 스트라스부르가 함께 넘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국경선에는 언어적, 지리적, 행정적 연고가 전혀 없었지만, 독일의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적 의식과 12만 대군에 상당한다는 메스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이 맞물리면서 독일어권인 알자스와 전략적 요충지인 메스 등 로렌 일부가 같이 할양된 것이다.

 

 

 

중요성

 

경제적 측면

 

라인강과 보주산맥 사이에 있는 알자스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주를 비롯한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고, 알자스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은 평야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과 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 이종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유럽연합을 탄생시킨 철강자원 쟁탈전에서

 

간단하게 말하면 꿀땅.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의 90%가 알자스에서 채굴된다고 하니 말 다했다. 아래의 역주에서도 나오는데, 1913년 독일 제국의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독일령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인과 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든 독일이든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독일은 35%였지만 프랑스에는 90%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보다 프랑스의 광물자원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더더욱 절실한 땅이다. 덤으로 이곳은 이미 관련 산업시설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즉, 땅만 얻으면 저 풍부한 자원을 바로 개발된 상태로 사용 가능.

 

 

 

군사적 측면

 

알자스와 로렌은 서유럽의 젖줄인 라인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 라인 강과 아르덴 고원이 프랑스 동쪽을 방어하는 천혜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라인 강을 관통하는 독일의 교통로를 단절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면 라인 강을 통해 직접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즉, 독일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건너는 수고로움 없이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하고,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방어선 삼아 프랑스 지역을 방어할 수 있다. 그 유명한 마지노선도 기본적으로는 알자스-로렌을 독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역사

 

알자스-로렌이 비교적 동질한 한 지역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지역이다. 고대 시대부터 약간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가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프랑크 왕국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로렌/로트링겐은 프랑크 왕국에서도 아우스트라시아에 속해 있었고, 알자스는 프랑크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슈바벤(알레만니) 지역 중 라인강 이서 지역이었다. 따라서 언어(사투리)도 조금 다른데, 로트링겐(로렌)의 언어는 프랑코니안 방언 계열로 프랑크 왕국의 지배계층인 프랑크족의 언어와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며 현재 라인란트, 자를란트 지방의 사투리와 같은 계열이다. 반면 알자스의 언어는 알레만니 방언(슈바벤 방언)의 일종으로, 남서 독일과 스위스 독일어와 같은 계열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의 다른 부족에 속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때 로트링겐과 알자스는 일단 중프랑크에 속했다가 855년 중프랑크 왕국이 3분할될 때 함께 '로타링기아 왕국'에 속했다. 그러나 860년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간의 분쟁지역이 되었다가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최종적으로 독일 왕국의 전신인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프랑크 왕국은 이 땅에 대한 미련을 보이며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하거나 아니면 로트링겐 공작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서프랑크 왕국의 이런 시도는 955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 때 마자르족과 로트링겐의 반란을 동시에 진압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한편 알자스-로렌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 후 로트링기아로 통합되었다가, 925년 하인리히 1세가 알자스를 로트링겐(로렌)에서 분리시켜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키면서 다시 카롤루스 대제 이전처럼 분리되었다.

 

오늘날 로렌(독일명 로트링겐)은 구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로렌영역의 75%)과 3개의 주교령(로렌 영역의 25%)으로 구성된다.

 

 

동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프랑크 왕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나, 그의 사후 베르됭 조약(843년)과 메르센 조약(870년)을 거치면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메르센 조약 이후 알자스-로렌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아들인 루트비히 경건왕을 거쳐 루트비히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에게 이탈리아 왕국을, 샤를 2세에게는 서부 영지들과 아키텐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는 동부 영지를 물려주었다. 843년 프랑크 왕국 분열 당시 로타리우스 1세의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그의 사후 세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는데, 각각 루도비코 2세의 '이탈리아 왕국',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 그리고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Lotharingia)'이다. 이 '로타링기아', 또는 '로트링기아'는 로타르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 지명은 중세 이후 로트링겐(로렌)의 어원이 된다. 현재의 로렌 지역은 당시 '로타링기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 '로타링기아'는 대략적으로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과 알자스-로렌, 스위스 서부, 남프랑스 그리고 북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자스-로렌은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고 이후 알자스-로렌의 역사는 동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프스 이북의 로타링기아는 동서로 분리되어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서로타링기아는 오늘날의 벨기에, 그리고 스위스의 서부 지역,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고, 동로타링기아는 네덜란드,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스위스를 포함한다. 룩셈부르크 및 로렌 지방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로망스어권과 게르만어권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876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동(東)로타링기아를 병합할 야욕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안더나흐(Andernach)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3세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여 패퇴하고 말았고, 서로타링기아와 동로타링기아가 재통합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게 되었으며(877년), 880년 리베몽 조약에서 이것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중세 시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로트링겐(로렌)은 독일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서기 899년 나이어린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동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때마침 마자르족의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동프랑크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지역 방어를 위해 독일 5대 부족 공국의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서기 900년 로트링겐 공작이 신설되면서 로타링기아는 사실상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되면서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독일계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독일 5대 공작들이 모여 콘라트 1세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제도의 직접적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타링기아(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 카롤루스 왕조가 다스리던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에게 충성하기 결의했다.

 

918년 유약했던 콘라트 1세가 사망하고 독일 제후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왕을 선출하기 위한 공작들의 회의에서 하인리히 1세는 작센 공작(하인리히 1세 본인)과 프랑켄 공작의 지지를 받았지만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을 무력과 유인책을 함께 사용하여 굴복시킨 후 919년 마침내 독일의 왕을 칭했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끝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국왕 편에 붙은 로타링기아를 다시 되찾기 위해 나섰다. 결국 922년 로타링기아는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독일 왕국에 재병합되었다.

 

로타링기아를 재병합한 하인리히 1세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로타링기아 왕국을 925년 공식 소멸시켰다. 이전까지 중프랑크 왕국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의 지위를 칭할 수 있었던 로트링겐의 군주는 이로써 왕이라는 타이틀을 잃고 로트링겐 공작으로 격하되었다. 또 하인리히 1세는 로타링기아 왕국 폐지와 함께 로타링기아 지역의 가장 동쪽 지역(알자스)을 떼내어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켰다. 이로써 로렌(로트링겐)과 알자스가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다시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의 역사는 따로 흘러가게 된다.

 

959년 로트링겐 공국이 남쪽의 상(上)로트링겐 공국(현 로렌 지역)과 북쪽의 하(下)로트링겐 공국(베네룩스 저지대)으로 분리되었다. 오토 1세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통치하고 있다가 브루노 사후 분리되었다. 초대 상로트링겐 공작 프리드리히(프레데리크)는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누나인 베아트리체의 남편이며, 베아트리체의 모친인 헤드비게는 하인리히 1세의 딸로서 오토 1세와 브루노의 누나이므로, 오토 1세 및 브루노의 조카 사위였다. 이로써 로렌과 베네룩스 3국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베네룩스 지역인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1183년 브라반트 공국이 하로트링겐 공국에서 갈려져 나왔고, 1190년 브라반트 공작이 나머지 하로트링겐 영토도 모두 다스리게 되면서 하로트링겐은 브라반트 공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하로트링겐이 소멸하면서 자연스레 상로트링겐 공국이 그냥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로렌으로 이어진다.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로트링기아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다시 왕국으로 승격할 뻔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방계로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국을 정복하면서 로타링기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조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부르고뉴)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로타링기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 황제가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고 점령하려던 로트링겐에서 르네 2세를 필두로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샤를이 남자 후계자 없이 전사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세력을 키우던 부르고뉴와 샤를을 아니꼽게 보던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살리카법에 따라 남자 계승자가 없으니 발루아 왕실 본가의 당주이자 주군으로서 산하 제후국의 영지를 회수한다'는 명분으로 부르고뉴를 침공, 부르고뉴를 합병하면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로트링겐을 합병하려던 부르고뉴가 사라지면서, 이후 로트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독립된 공국으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점진적인 병합

 

로트링겐(로렌) 3 주교령 획득 (1552년)

그동안 쭉 독일계 국가들의 땅이었던 알자스와 로렌 땅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디디게 된 것은 1552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종교 전쟁에 휩싸여 있던 와중인 1552년,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이끄는 독일 신교파 제후들과 동맹(샹보르 조약)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전쟁을 지원하는 대가로 로트링겐(로렌)에 존재하는 메츠, 비르텐, 툴 3개의 주교령을 획득했다. 이 3 주교령(전체 로렌 지역의 약 25%)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 병합되었던데다가, 이 당시는 발루아 왕조 말기라서, 뒤이은 부르봉 왕조 시대, 곧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고 국가 정체성이 강해진 절대왕정 및 앙시앵 레짐 기간을 오롯이 프랑스와 함께했기 때문에, 이미 프랑스 혁명이 그리 머지 않은 200여년 후에 병합된 나머지 로렌 지역(즉 로렌 공국)에 비해 빠르게 프랑스화되었다. 이 3개 주교령 지역과 그 주변 로렌 지방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알자스-로렌을 재합병할 때 이미 완전히 프랑스 문화권으로 흡수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의 알자스-로렌의 병합을 반대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 3개 주교령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어권 서부 로렌 지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에 합병되지 않고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30년 전쟁과 알자스 중남부 획득 (1648년)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면 유럽 전역은 장기간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 무려 30년간 전쟁이 지속되며 유럽 각국의 경계는 수차례 주인이 바뀌며 불명확해져 갔는데 이과정에서 프랑스가 1552년부터 점유해오던 로렌의 3주교령에 대한 프랑스의 점유권도 불안정해졌다. 그러나 1648년 결국 프랑스는 30년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알자스의 중부 이하(준트가우(Sundgau) 지방. 현 프랑스 오랭(Haut-Rhin) 주)를 병합했다.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북부 알자스는 계속 신성 로마 제국에 남았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로렌 3주교령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이로 인한 주변국들과의 분쟁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루이 14세는 로렌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회복하기 주변국들과 갈등 및 분쟁에 휩싸였고, 결국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 등을 잇달아 일으켰다.

 

로렌 지역 분쟁과 알자스 완전 병합 (1697년)

30년 전쟁으로 인해 로렌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쟁이 지속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불명확한 서술과 번역은 분쟁을 증폭시켰다. 이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 등을 잇달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1683년,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상헝가리에서 헝가리인 귀족 퇴쾨이 임레가 일으킨 반 합스부르크 봉기에 호응하여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였고 제2차 빈 공방전이 일어났다. 빈 방어에 성공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변 기독교 국가들을 포섭하여 신성 동맹을 맺고 패퇴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뒤쫒으면서 대 튀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1683년~1698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신성 동맹의 뒷통수를 때리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 즉 알자스 지역을 침공하여 9년 전쟁(1688~1697)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손쉽게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했다(1697년). 로렌 동쪽의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프랑스의 영토는 로렌 공국을 완전히 둘러싸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 병합된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와 그 인근의 알자스 북부 지역은 알자스-로렌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트라스부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근세 독일 출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알자스 지역은 라인강을 따라 상류의 스위스와 하류의 라인란트를 연결하면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어 있어 독일 경제권에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슈바벤 및 라인란트 지역과 연계성이 강했다. 때문에 알자스 지역은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독일계 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을 가져간 데 이어 알자스 북쪽으로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는 라인란트까지 차지하려 했지만 다른 협상국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로렌 공국 병합 (1766년)

프랑스는 30년 전쟁과 루이 14세 시절을 거치며 로렌(로트링겐)을 수차례 침공하였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적극적인 방어로 로렌은 위기를 극복했다. 17세기 이후 로렌 공작들은 프랑스의 위협 앞에 바람 앞에 등불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로렌 공국을 둘러싼 위기가 지속되자 공작들은 로렌을 비우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지 빈에 오랜 기간 거처하기도 했다. 로렌 공작 샤를 5세는 아예 오스트리아군의 직업 장군이 되어 대튀르크 전쟁, 9년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활약하며 무공을 세웠으며, 페르디난트 3세의 둘째 딸 엘레오노레와 결혼하기도 했다.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구 프랑크 왕국 계열의 국가들은 살리카법의 전통에 의해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발표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하여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순조롭게 물려받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누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전유럽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한 신랑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되는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다.

 

로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랑스는, 로렌 공작이 차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인 로렌 공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요구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것이었지만, 카를 6세는 어떻게 해서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를 원했다. 결국 카를 6세와 루이 15세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로렌 공국은 1736년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주어진 후 그의 사망 후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사가 끊긴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 대공국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는 것을 프랑스가 용인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빼앗기게 된 프랑수아 에티엔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결국 자신의 영지를 포기해야 했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하면서 로렌 공국은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병합된 지역은 프랑스화가 이루어졌다. 강제적인 프랑스화 정책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이 되어 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까지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의 동부 지역은 여전히 독일어 방언을 모어로 사용했으며, 독일어권 라인강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이 그랬듯 알자스-로렌을 합병했다.

 

알자스 로렌 주민들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사람과 그 자손에 대해서는 잔류 및 프랑스 국적 취득이 허용되었고, 1870년 이후에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 111,915명은 독일인으로 간주되어 1921년 7월까지 추방되었다.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반(反)하여 주민선거 없이 일방적으로 알자스-로렌을 강제 병합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대다수의 주민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던 알자스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다. 알자스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성급한 동화정책, 특히 지역의 전통적인 교회학교를 국립학교로 대체시키려는 계획과 독일어 신문을 폐간하려는 시도는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알자스-로렌은 1920년대에 자치 운동을 전개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일에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이 책정되었고, 그 결과 독일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유사 이래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파탄 수준으로 붕괴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적극적인 독일 재합병론을 펼치는 대신 일단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주장하는 선에서 그쳤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라인란트를 노리고 있었고, 알자스-로렌의 자치 요구가 결국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재병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요구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획득 운동은 실패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주하자, 나치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북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알자스-로렌의 젊은이들의 충성심이 약하다는 이유로 징집은 실시하지 않고 자원 입대만 받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자 나중에는 징집을 실시했다. 알자스-로렌에서는 징집이 아니라 자진해서 독일군에 입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로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이전 정부의 억압적인 강제동화 정책이 알자스-로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을 거울삼아 강제동화 정책의 철폐를 선언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4공화국은 세속국가였지만 알자스-로렌은 그 원칙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에선 독일군 부대에 자원 입대한 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자스-로렌 출신이 적지 않았다. 기 사예르의 경험에 따르면 부모 중 한 쪽이라도 독일계인 사람은 처형을 당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알자스의 주도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축구 감독인 아르센 벵거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 여느 스트라스부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알자스 독일어를 말하며 자랐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독일에 대한 증오를 가르쳤지만 자라서 독일에 가보니 자신의 동네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외부에서는 알자스-로렌이라는 같은 지역으로 묶어서 보고 있지만 두 지역은 차이가 있다. 로렌의 경우 일찍이 프랑스어권이었으며, 때문에 17세기 이후 로렌은 대체로 독일보다 프랑스에 대한 동질감이 더 강한 편이었다. 반면 알자스의 경우 더 동쪽에 있고 라인강에 접해 있다보니 독일어권에 대한 귀속 및 소속감의 정도가 로렌보다도 더욱 높았다. 그 결과 알자스 주민들의 대다수는 20세기 중후반까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지금도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는 독일어에 매우 능통하다. 로렌 지방 안에서도 메스, 베르됭 등 프랑스 본토에 가깝고 16세기에 프랑스에 병합된 지역은 매우 프랑스화의 정도가 높지만 룩셈부르크나 자를란트와 인접한 변경의 로렌 지역에서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많은 경우도 있었다. 또 알자스에서도 남부 지역은 북부에 비해 비교적 프랑스화가 더 진전되었다.

 

로렌의 경우 역사적으로 친프랑스적인 경우가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발루아 왕조의 분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프랑스의 울타리에서 독립해 나가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유명한 잔 다르크 또한 로렌 출신으로,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다만 중세 유럽은 귀족들과 백성들의 민족 의식이 동질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근본적으로 알자스-로렌이란 행정구역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별개로 이어져 오던 두개의 지역을 후대에 재결합하여 탄생된 것이다. 알자스와 모젤은 둘 다 동프랑크 제국와 독일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왔지만, 서로 별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의 경우 거의 독일어 방언을 유지하고 있었고 훨신 나중인 17세기에 프랑스의 일부가 된 반면, 로렌 지방은 물론 독일이 합병한 로렌의 모젤 지역의 상당수도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알자스-로렌이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모젤 지역의 프랑스인들은 독일 국경 내에 묶이게 되었고 탄압으로 독일통치에 대한 반감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수백년간 프랑스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 프랑스의 고유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영토의 일부였다. 이를 간파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알자스-로렌의 병합으로 프랑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영구적인 적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고, 또 프랑스 정부도 알자스-로렌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할양을 제안하며 어떻게든 병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몰트케와 군부의 반발로 끝내 독일로 병합되었다.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는 애초에 명분은 방어 전쟁이었는데 영토합병을 하면 침략전쟁으로 변질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려했고 빌헬름 1세는 당시 영국대사에게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그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서 거리를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을 정도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까지 프랑스가 알자스-로렌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출신 인물

 

기 사예르 - <잊혀진 병사>의 저자. 다만 출생지는 파리이고, 이후 알자스에서 성장했다.

니콜라 빌렘 신부 -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밀했던 프랑스인 신부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때 고해성사를 집전해 준 신부이다.

마리 손탁

아르센 벵거 - 축구선수, 감독, 행정가. 아스날 FC의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자 최고의 감독. EPL 유일 무패우승을 기록한 명장이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시 듀틀렌하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동네 사람과 마찬가지로 알자스 독일어 방언을 쓰며 자랐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교에서 처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Wenger 역시 독일계 성씨이기 때문에 프랑스어 표기법인 벵게르가 아닌 벵거로 읽는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에 위치한 알자스-로렌 지방

19세기 후반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유명한 단편소설의 무대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이 지역을 독일에 빼앗겼을 때,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프랑스어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업을 진행한다. 열정을 다해 가르치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격한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한다. 칠판에 “프랑스 만세! 알자스 만세!”라고 크게 쓰고 나서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가라고 손짓하는 걸로 글이 끝난다.

알자스-로렌은 서유럽의 라인강과 뫼스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산지 쪽으로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평야지대는 비옥한 농토다. 북쪽 룩셈부르크와 독일 방면으로는 산지가, 서쪽은 뫼스 강, 남쪽은 알프스 산지가 막고 있으며 동쪽에는 라인강이 흐르는 지형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천혜의 요새로서 독립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독일로 봐서는 프랑스로 진입, 유럽 서남부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이며, 프랑스로 봐서는 독일을 견제해서 국토를 지키는 성문과 같은 곳이다.




알자스-로렌 위치 및 지형(왼쪽)과, 1920년대 이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는 정당인 알자스-로렌 지역당의 선거 포스터 (오른쪽)
근현대기 기록을 보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프랑스령, 1871년 보불전쟁 후 독일령,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잠시 알자스-로렌 독립 공화국,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령, 1940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독일령, 1945년 종전 후 다시 프랑스령이 되는 식이다. 위 오른쪽 포스터에서 엿볼 수 있듯이 토착세력 자주권 운동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지리의 이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한은 알자스-로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패권을 쥐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눈독을 들일 만하다. 역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근현대기를 보면, 그 정치적 격랑 속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이곳의 주도권을 노렸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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