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신문 기자.
카뮈는 에세이 《TheReverse》에서 그의 전 생애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허무주의 철학에 반대하는 데 헌신했다고 썼다. 1957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를 거부했다.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카뮈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여 대표적인 저항 언론지인 콩바에서 편집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층은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층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의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 이에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광범위한 숙청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는 부역 혐의자가 제대로 된 절차나 재판도 없이 임의로 처형되기도 하고 각종 징계나 불이익등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때문에 샤를 드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식인은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알제리 전쟁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민족해방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범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 측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특히 장폴 사르트르)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1961년에 그를 추모하여 카뮈가 살던 알제리 티파사에서 만들어진 카뮈 문학기념비는 지금까지도 60년 넘게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다. 기념비 맨 밑에 끌로 깎여져 지워진 게 알베르 카뮈 이름.
이젠 프랑스인이나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알더라도 혐오감을 가지고 이름조차 잘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에서 카뮈 기념비를 보관한다고 하면 응할지 모르겠지만, 이젠 프랑스도 잊어버렸는지 그런 제의도 없었다. 심지어 알제리 문학인사들이 문학적 재능과 그 공로를 인정해 프랑스에게 카뮈 기념비를 가져가 보관하라고 먼저 제의했음에도 수십여 년 동안 답변조차 없었다고 하니 프랑스에서도 잊어버린 듯하다.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사상
카뮈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시지프 신화이다. 그가 동시대에 활동하며 자주 충돌했던 장폴 사르트르와 도대체 어떻게 다른지는 그의 문학 작품만 비교해서는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카뮈의 이방인이나 비슷해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모호함을 단번에 깨버리는 것이 시지프 신화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도 이방인과 거의 시간간격이 없게 출판 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어느정도 해설서 역할을 수행한다. 때문에 두권을 번갈아가면 읽을 수만 있다면 그의 사상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돨 것이다. 다만 '시지프 신화'가 서양 철학 개념을 안다고 전제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해설서 없이 이해하는 것은 끔찍하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의 사상을 정리하자면, 니체 사상에서 인생론 부분을 구체화 시킨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너진 것에서 오는 상태로 정의한다. 가령 세상에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아이의 고통도 일종의 부조리다. 물론 카뮈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일반적인 것은 산타클로스 정도가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믿음이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진 것에서 오는 부조리였다. 간단히 말해 과학과 이성을 백날해봐야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커녕, 모두 전쟁의 잿더미만 남겼다는 분노와 상실감속에 유럽은 있었다. 카뮈가 보기엔 이 또한 부조리의 일종이었다.
다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 카뮈는 니체와 다소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니체의 경우에는 초인으로 불리는 것인데, 내가 느끼는 것들은 동물적인 것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가령 내가 느끼는 사랑과 그 감정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란 동물이 진화해오는 과정에서, 그것이 집단생활을 통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도태되지 않고 유전되어온 형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나 의도 없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로 발생한 동물적 생존본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선배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는다. 니체는 인간의 가장 멋진 점을 허영심 섞인 상상력이라고 여긴다. 비록 시작점은 생존본능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 즉 '초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몸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들, 인류 등을 지키는 고귀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니체는 이렇듯 허영심과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카뮈는 그러한 초인이나 상상력 추구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카뮈와 니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니체의 경우에는 지적이면서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령 혁명적인 지식인이나 예술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상을 전개했다. 반면에 카뮈는 그가 고려하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지식이나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노동자로서는 니체와 같이 스스로 상상력과 지적인 발랄함을 발휘하라는 조언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카뮈는 이러한 일반 노동자 계급의 시점에서 어떻게 부조리를 타파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도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나의 삶의 욕망이 의미를 만들려고 하고, 또 원하지만 무의미한 세상에 의해서 좌절되는 것을 부조리라고 본다. 다시말해 잘 살고 싶은데 잘 안될 때 느끼는 빡침의 일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서 자살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황당한 일이다. 카뮈는 '철학적 자살' 즉 세상에 대한 나의 신념이 깨졌다고 죽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일로 여긴다. 왜냐면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다 보니까 생긴 것인데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에 관해서 카뮈는 동시대의 실존주의자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당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를 포함하여 대부분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뮈는 이들 후설 계열은 세상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또다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 다시 말해서 종교화 시키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가 특히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태도이다.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이성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서 카뮈는 니체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성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어찌되었든 한개의 관점으로서 각각의 이성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다시말해 '상대적 이성'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므로 폐기하라는 것은 카뮈가 보기에는 허무주의로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가 보기에 실존주의자들이 이렇게 무진리를 교리화 시키는 태도가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초월'을 추구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이 또한 니체적인 의견인데, 그러한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결국 내 삶의 경험을 한계 짓는 다는 것이다. 가령 엄격한 교리에 따라서 수행하는 수도사는 이성과의 경험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초월과 영원성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의 반대편에는 감각적인 생생한 경험이 있다. 카뮈는 유명한 호색한 돈 후안과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예시로 든다. 돈 후안은 눈 앞의 여성만을 열렬히 반복해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것은 없다. 그저 매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 또한 마찬가지인데, 작가와는 달리 연극배우는 자신의 활동을 후세에 남길 수가 없다. 연극을 녹화 기록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의 연기는 오로지 매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바로 피자마자 덧없이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배우는 돈 후안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에 자신의 최대를 담아 '소진'시키며 연기한다.
매 순간을 '소진'시키는 것은 카뮈에게 중요하다. 모든 진리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감각적 경험 뿐이다. 카뮈가 보기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경험도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가령 화가의 가난한 생활은 은행가가 보기에는 무가치한 경험이지만, 비평가가 보기에는 가장 풍부한 영감의 경험일 수도 있다. 은행가도 비평가도 상대적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경험을 딱히 딱 얼마짜리 경험이다 하고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는 재밌는 생각을 하는데, 경험의 질의 차이가 무의미하니까 경험의 '양'이 많은게 좋은 것이란 거다. 그래서 거의 똑같은 수작을 여성에게 피우는 돈 후안이나 거의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배우의 삶이야 말로 지극히 모범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문학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초기 부조리 문학은 대체로 부조리를 매우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으로만 표현한다. 때문에 주인공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태도는 기껏해야 체념뒤의 냉소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뮈는 다르다. 그는 오히려 부조리를 그 사람이 살아있고,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를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부조리와 함께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카뮈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항'이다.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듯하고, 갑자기 모든 친숙했던 것이 외계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이 부조리라면,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받치듯 저항하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초기 부조리 문학의 등장 인물들이 멘붕과 넋나간듯한 대사를 늘어놓다 끝나는 반면에, 카뮈의 "이방인" 주인공은 격렬히 반항하는 끝에 죽음을 맞는다. 카뮈의 표현에 따르면 부조리 문학의 인물들은 "철학적 자살"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 주인공은 세상앞의 "사형수"가 되기를 스스로 택하고 앞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세상이란 폭력 앞에 스스로 처형받기를 택하는 인물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표현한다.
어록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자살이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