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종단 정책
영국 아프리카 식민지
아프리카 종단 정책, 영어로는 케이프 투 카이로 정책(Cape to Cairo Policy)은 19세기 영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의 하나이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부터 시작하여 이집트의 카이로로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것이 계획
3C 정책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추구한 정책. 카이로(Cairo) - 케이프타운(Cape Town) - 콜카타(Calcutta)를 잇는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C 정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국력이 최절정에 달했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에 벤자민 디즈레일리, 세실 로즈, 조지프 체임벌린 등이 주창한 제국주의 팽창 노선이다. 영국은 프랑스 등과 함께 선발 제국주의 국가로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이 식민지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취하고 또 카이로에서 인도의 콜카타를 연결하기 위해 중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했다. 이렇게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콜카타 3개 지역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국의 팽창주의 노선은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였다. 먼저 아프리카에선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이른바 횡단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은 남쪽으로 프랑스는 동쪽으로 진출하다보니 결국엔 오늘날 남수단 일대에서 충돌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다.
또 카이로와 콜카타를 연결하는 정책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였다. 크림 전쟁,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거문도 사건 등 영국과 러시아의 잇달은 충돌은 모두 3C 정책과 남하정책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의 손으로 러시아를 죽이는 차도살인을 단행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좌절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후엔 또 다른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 제국과 충돌하게 된다. 식민지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문했다. 그 결과 나온 정책 중 하나가 베를린 - 비잔티움 -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이른바 3B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이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보물단지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건드리게 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이같은 두 나라 간 충돌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아프리카 횡단 정책
프랑스 식민제국이 추진한 세계 정책의 일환이다. 아프리카 대륙 횡단을 통해 홍해로 진출하기 위한 프랑스의 정책이다.
프랑스는 1830년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알제리를 점령하고 1881년에는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중심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아프리카 분할을 가속화한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으로 진출하여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점 식민지로 만들고 1894년 수단과 지부티를 점령하게 되자, 서아프리카 식민지와 인도차이나와 남태평양 일대에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연결하고 영국과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홍해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식민제국이 추진한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여기에서 말미암았다.
그런데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영국이 추진하고 있었던 종단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영국의 종단 정책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 지역(오늘날 남수단 지역)이었다. 1898년, 프랑스가 파쇼다 지역에 국기를 게양하자 영국이 여기에 항의하며 프랑스와 충돌하였고 이렇게 발생한 사건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었다. 당시 군사적으로 영국에게 불리했던 프랑스는 결국 한발 물러서서 철수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물거품이 되었고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이후 독일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두 국가는 1904년 영프협상을 통해 화해했으며 국제문제에 있어 서로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했다.
파쇼다 사건
1898년 7월 10일 프랑스 육군 원정대가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Fashoda. 오늘날 남수단의 코도크)에 자국 깃발을 게양하여 영국 육군과 충돌한 사건.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대표적 충돌 사례 중 하나로 사건 이름만 언급되는데, 결과적으론 충돌보단 양국간 동맹 관계가 강화된 사건이다.
흔히 '영국의 종단 정책(케이프타운-카이로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충돌'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의 육상 종단이 가능해진 것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지금의 탄자니아를 획득한 1919년 이후이며 남아프리카 이북은 그닥 쓸모도 없었던 만큼 파쇼다 사건을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압력이 떨어지던 와중에 "수단 남하 정책"의 필요성이 높아지던 영국이 서로 공조하지 못했던 해프닝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영국
당시 영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이집트와 식민지 인도 제국을 잇는 항로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화되기 이전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고 무엇보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와 약소 국가들에게 수출하던 면화 산업의 경쟁 국가였다. 따라서 두 국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 장악해야 하는 것이 홍해 지역의 항로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홍해 주변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수단에도 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수단은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점진적으로 지배하며 대충 허수아비 체제로 놔 두려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881년 마흐디 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빈번해지자 영국의 이런 처지는 곤경에 놓였다. 이슬람의 마흐디(구세주)를 자처한 누비아인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압드알라(محمد أحمد ابن عبد الله, Muhammad Ahmad bin Abd Allah, 1844–1885)가 이끄는 마흐디군이 급속도로 팽창해서 이슬람 신정국가를 세운 것이다. 거기에 1883년에는 창과 칼로 무장한 마흐디군 4만명이 윌리엄 힉스 영국 육군대령(William Hicks, 1830–1883)의 지휘를 받는 현대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집트 혼성군 1만명을 샤이칸 전투(Battle of Shaykan, 1883년 11월 3일 ~ 11월 5일)에서 박살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패한 힉스 대령도 전사하고 시체는 효수되면서 영국 여론은 굴욕감에 떨어야 했다.
찰스 조지 고든
이런 가운데 1884년 민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이집트를 지키고자 파견된 영국인 총독 찰스 조지 고든은 이집트 방위군과 수단의 수도 하르툼(카르툼) 방위전에 나섰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무하마드 아흐마드군의 반격으로 1885년 1월 26일 하르툼이 함락당하면서 고든 총독이 참수당했다.
그런데 고든 총독은 수단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았는데 그는 청교도 성향이 강하고 성공회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했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종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성격도 침착했으며 청나라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는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고 수단에서도 똑같았다. 게다가 현지에 남아 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들의 교육이나 자립에까지 관심을 보였으며 현지인이 믿는 이슬람에 꽤 관대하게 대했고 현지인 부하들도 잘 대해 줬기 때문에 대부분이 무슬림인 7천여명 이집트 및 수단인 부하들은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 하다가 모두 죽었다. 마흐디도 그에 대한 평을 듣고 '유럽 기독교놈치곤 그나마 나은 놈'이라며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부하들이 죽여서 목을 베어 가지고 오자 불같이 화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마흐디는 사전에 협상을 시도하면서 고든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었는데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 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자유요." 같은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 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 할래?' 한 마디 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 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게다가 고든은 이미 1884년 말에 조국 영국에게 그대 잘못은 없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내가 할 일을 마지막까지 하겠다고 끝까지 남았던 터라 영국에서 책임감도 있던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수단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수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고향으로 옮겨져 지금은 영국에 있다. 고든의 머리는 말 그대로 효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당시 죽은 고든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하고 영국에 가묘로 안장되었다.
당시 국내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빠졌던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영국 총리는 고든이 참수당한 후 목이 내걸렸다는 정보를 듣곤 "하필이면 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라고 화내면서 큰소리를 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전보를 보내 사임을 권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글래드스턴은 결국 곤경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 년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은 것은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 소수당 내각이었다.
수단의 마흐디 신국은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대영제국의 떨어진 위신을 상징하는 생선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군은 결국 굴욕으로부터 13년 만에 고든의 복수를 위하여 대규모로 수단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였고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을 앞세워 고작 47명의 전사자만을 내고 마흐디군 5만 2천 중 1만 명 이상을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지워 버렸다. 이후 하르툼을 다시 함락시키고 마흐디 신국을 멸망시키면서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반도와 남태평양 일대에 존재하던 그들의 식민지로 진출하는 빠른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홍해 인근을 노리던 영국과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다카르 & 브라자빌 - 서아프리카 & 중앙아프리카 - 수단 - 에티오피아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를 잇는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1893~1895년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고히 한 프랑스는 동진을 계속했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토(Gabriel Hanotau)는 1896년 프랑스 육군 대령 장 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끌던 1개 중대급 원정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였다. 마르샹 원정대가 파쇼다에 도착하면 지부티에서 원정대를 파견하고 파쇼다에서 조우함으로써 횡단 정책을 완성하겠다는 의도였다. 마르샹 원정대는 브라자빌을 출발하여 콩고 강과 우방기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중앙아프리카의 정글과 수단의 사막을 헤쳐나가는 14개월의 원정 끝에 1898년 7월 10일 남수단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지부티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현지 주민의 적대적 태도에 당초 원정을 위한 통로 이용을 허가한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원정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 1897년 실패로 돌아갔고 파쇼다에 도착한 것은 먀르샹의 원정대뿐이었다. 마르샹의 원정대 홀로 파쇼다에서 버티는 상황 속에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이 9월 18일 파쇼다에 들이닥치면서 파쇼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되었다.
열 배가 넘는 1,500명의 병력에 영국 해군의 포함까지 거느린 영국 원정군의 우세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양측 지휘관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하고 충돌 없이 동시 주둔에 들어갔다. 파쇼다에는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 그리고 명목상 수단의 지배국인 이집트 국기가 일단 함께 내걸렸다. 이런 갈등 소식이 본국에 날아들자 가뜩이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었던 양국 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고 양국은 함대까지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
해결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해 11월 3일 마르샹의 원정대에게 철수를 지시하면서 파쇼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으며 다음해인 1899년 3월에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수원 중간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했다.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상실된 데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었다. 단기적인 원인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이 있다. 파나마 운하 비리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 재임했던 아노토 장관은 7월 말에 사임해야 했다.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Henri Brisson) 내각의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장관#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 왕국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애당초 당시 파쇼다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만나 대립하게 되자 개전 여부를 상대편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영국군이 카이로로 전령을 보내 카이로에서 런던으로 가설되어 있던 해저전신을 통해 런던에 소식을 전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소식을 전한 뒤(...) 파리로부터 다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쳐서 현지의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명령 전달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영국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프랑스 본국으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기적인 원인으로는 친영국 입장의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 동안 장기 재임했으며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 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했던 상황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 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해 버렸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으며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는 해군 함대가 프랑츠 측이 영국에 열세한 사실도 한 몫했다.
결국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영불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확실하게 양보했고 대신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고립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이로서 수단은 '영국-이집트령 수단'으로서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단 민중이 대거 학살되었고 수단 측의 극렬한 저항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철저하게 뿌리내리면서 뒤에 종교적 갈등 요소를 남겼고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과의 갈등에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또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3B 정책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20세기 초 독일 제국이 추구한 정책. 베를린(Berlin) - 비잔티움(당시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Byzantium) - 바그다드(Baghdad)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B 정책이라고 부른다.
세계 정책을 내세워 독일의 패권을 전세계로 확장하고자 했던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추진 중이었던 바그다드 철도는 독일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업이었다. 만약 이 철도를 독일이 부설할 권리를 손에 넣게 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독일의 경제권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해 관계 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도이체방크는 1893년 바그다드 철도(BagdadBahn) 부설권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독일이 철도를 부설하는 대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114년간 운영권을 임차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열강들은 독일이 서아시아 일대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우선 영국의 경우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핵심 이익지대인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침범할 것을 심히 우려했다. 이 시기 영국은 앞서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케이프타운 - 카이로 - 캘커타를 잇는 소위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남하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고, 페르시아 일대에서 영국과 경쟁하고 있던 러시아 역시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에 독일의 3B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히려 했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 부설을 방해했다.
오랜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독일은 마침내 1911년에 러시아, 1914년에 영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숙원사업이었던 3B 정책에도 순풍이 불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두 국가도 독일의 적성국으로 돌아서면서 사업은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