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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의미, 반야심경,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Jobs9 2024. 10. 1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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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한문으로 읽혀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는 음역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대로 번역 할 수 없다. 그 뜻을 알고자 하면 인도의 고대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의 원음을 알아야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

이 문구는 일반적 문장이 아니라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진언이나 주문은 주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보기 드물게 이 문장은 번역을 하기도 다.

진언이란 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투명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물의 본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반야심경> 속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진리를 이해하고 세상을 꿰뚫어 본 뒤,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진언이다. 

‘아제(gate)’는 가버린 것을 의미다. 괴로움에서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혼란스러움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반복어 ‘아제아제(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이다. ‘바라아제(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다.  ‘바라승아제(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곳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다. 

그러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버리네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가버렸네!’라고 번역 할 수 있다. 이어서 ‘모지 사바하(bodhi svh)’는 ‘모지(bodhi)’가 깨달음을 뜻하고, ‘사바하(svh)’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처럼 기쁨과 행복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 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이루어지이다!’ 혹은 ‘만세!’, 젊은 세대들 표현이라면 ‘아싸!’ 정도로 번역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이여, 아~(만세)!’가 되겠다.

정리하자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이 경의 핵심인 ‘공(空)’을 이해하고 깨달은 희열을 외마디 탄성으로 표현한 진언이다. 굳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줄거리
비구니들의 절인 청정암의 여승 진성은 신비스러움의 세계와 이상을 좇는 인물이다. 같은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순녀는 은선 스님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임에도 아직 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순녀는 남다른 과거를 앓고 있다……. 어머니, 오빠와 살아온 그녀는 스님인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지만 그 스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는 가운데 '너희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나 버린다. 아버지의 입적(入寂)과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오빠의 자원 입대 이후, 순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을 보고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고독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현종 선생은 전교생의 관심 대상이 되며 순녀도 늘 그의 행적에 주목한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나선 차에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 선생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나선다. 그 길에서 현종 선생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순녀는 평생 그에 곁에 붙어 있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는 현종과 순녀 사이를 가리키는 헛소문이 떠돌아 결국 현종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순녀의 가슴에는 깊고 큰 구덩이가 패게 된다.  
……진성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오라는 은선 스님의 뜻에 따라 절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진성은 은선 스님이 있는 청정암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방학 때 청정암에 돌아온 진성은, 이제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가 박현우라는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 이를 계기로 절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를 비웃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순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성이 만행에서 돌아왔을 때 은선 스님은 중생들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다. 진성은 은선 스님이 기다린 것이 자신이 아니라 속세를 헤매고 다니는 순녀임을 깨닫고 크게 실망한다.  
한편 박현우가 순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돌아온 뒤 그녀를 떠나가자, 순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과중한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젊음과 원기가 하릴없이 외롭게 사그라져 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얼마 후에 환자 수송차를 운전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된 그녀는 성심껏 환자와 주민들을 돌보면서, 현종 선생이 출간한 시집으로 마음을 달랜다……. 섬마을에 콜레라가 돌자 온 마을이 공황에 빠지고 병원에선 환자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진정되고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던 날, 모든 이들의 칭찬을 받아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송 기사가 갑자기 밤중에 죽고 만다. 
……은선 스님의 열반이 가까워 올 무렵,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밤에 순녀가 청정암에 돌아온다. 진성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하는 순녀와 누워 있는 은선 스님 사이에 말없는 교감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챈다. 은선 스님은 열반하기 전 효정과 정선 스님에게, 몸소 체험하여 법도를 깨달은 청화(순녀)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과 함께 순녀를 부탁한다. 순녀와 둘이 남겨지자 은선 스님은 한 아기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열반에 들어간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고, 순녀는 은선 스님이 얘기한 버려진 아기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은 순녀에게 그 아이의 죽음 소식을 전한다. 불길이 사그라진 다비대에서 사리를 찾는 진성은, 은선 스님의 유골을 찾아 품에 감추는 순녀를 빈정거린다. 이튿날 순녀는 낙도를 향해 떠나며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주문을 중얼거린다.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의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문이당 청소년 현대문학선'의 일곱 번째 기획물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영화화되어 대중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제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출간됨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참다운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보다 가깝게 접하고 이해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초월적인 이상 세계를 좇는 진성과 파계하고 맨몸으로 세속을 떠도는 청화, 두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참다운 자유인의 길을 일깨워 주는 구도 소설의 대표작이다. 제목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 작품은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어둠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불교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는 종교적 영역을 뛰어넘어, 정신적 방황과 미망을 극복하는 과정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울러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정현주의 일러스트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이끌고 가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잘 드러내 줌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심도 있게 해독하는 데 훌륭한 코드가 되고 있다.  



목차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승과 도화살
꿀벌은 꽃잎을 해치지 않고
파계
심심삼천에 붙는 불
깨들음의 진주
고기가 놀아서 물은 흐려지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둠의 시간에서 빛의 시간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중생을 보듬는 보살행

한승원 소설 원작…거장 임권택 감독의 ‘대승불교관’ 드러낸 영화
수행 매진하는 진성 스님과 세간 속 순녀의 대승적 수행 비교 구도
은사 스님의 열반 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하는 순녀로 대승 지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한승원이 각색한 영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색과 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도 동시대의 풍경과 공기를 프레임에 담는다. 시대적 풍경과 분위기를 담는다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가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두를 담아낸다. 하나는 작품 속에서 제시한 ‘달마 대사는 왜 얼굴에 수염이 없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시대적 화두인 ‘역사의 변화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식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화가 1989년에 제작됐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여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 임권택의 존재가 두 개의 화두를 직시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승불교의 길의 제시를 통해 두 화두를 통합한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순녀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회상 장면으로 아버지와의 만남과 열차 여행 그리고 이별 장면을 제시한다. 더 거슬러가서 고등학교 시절 현종 선생님과의 만남과 함께 백제 문화권의 여행과 입산의 과정이 펼쳐진다. 순녀는 자살에 실패한 박현우(한지일 분)를 만나서 탄광촌으로 떠난다. 이 지점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순녀의 삶과 대비되는 진성 스님의 수행과 만행이 평행 편집되어 두 개의 서사로 나누어 진다. 

순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 같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부친은 참회를 위해 입산 수도하였으며 순녀에게 하늘의 구름을 보여주면서 “저 구름이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떠난다. 순녀가 아버지라는 뜬 구름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돌려 당부한 셈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그는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멸망한 백제와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집필하려고 답사한다. 두 사람의 여행은 학교 당국의 오해로 현종과 순녀의 이별을 야기한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은선 스님은 수행은 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순녀를 저잣거리로 내보낸다. 이와 같은 순녀의 행보는 대승불교를 경유하여 불교세계를 녹여내려는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부합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첫 장면의 천불전 장면에 대해 “천불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대승적 수행이란 바로 중생과 더불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겉은 정주민이지만 속은 떠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뿌리 깊은 사유도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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