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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반도, 셀주크 왕조, 오스만 투르크

Jobs9 2022. 12. 2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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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반도의 혼란과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

 

룸셀주크 왕조의 성립과 멸망

 

본래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반도는 AD 1071년 이슬람 셀주크 왕조의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셀주크 왕조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제3대 술탄인 말리크 샤가 AD 1092년 죽자 셀주크 왕조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시작되었고 그로인해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나라가 급격히 분열되기 시작했는데 아나톨리아 반도 또한 그 과정에서 킬리지 아르슬란에 의해 독립하게 된다.

 

본래 킬리지 아르슬란의 할아버지인 쿠탈미쉬는 셀주크 왕조의 왕족으로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하여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도망쳤었다. 쿠탈미쉬가 죽자 그의 세력은 아들인 슐레이만 1세가 이끌게 되었으나 알프 아르슬란이 아나톨리아 반도 침입해오자 타우러스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후 AD 1078년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테마 사령관이었던 니케포루스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를 지원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AD 1086년 셀주크 왕조의 제3대 술탄 말리크 샤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사령관인 투투쉬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슐레이만 1세는 전사하였으며 그의 아들 킬리지 아르슬란은 포로로 붙잡혀 이스파한으로 송한당했다. AD 1092년 말리크 샤가 죽자 킬리지 아르슬란은 이스파한을 탈출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돌아가 흩어진 아버지 세력을 다시 규합하였고 셀주크 왕조가 내부분열로 외부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니케아를 점령하면서 셀주크 왕조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렇게 성립한 왕조를 역사적으로는 룸셀주크 왕조이라고 부르며 룸술탄국 혹은 아나톨 셀주크 왕조로도 부른다. '룸'이란 본래 로마를 의미하는 말로 동로마 제국을 의미하였는데 아나톨리아 반도가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그렇게 불리웠다.

 

룸셀주크 왕조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십자군 공격 당시에 킬리지 아르슬란은 수도인 니케아를 빼앗기고 코냐로 수도를 옮겨야 했지만 그의 아들 마수드 1세 시절에는 중앙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룸셀주크 왕조의 전성기는 알라에딘 케이 쿠바드 1세(재위 AD 1220년 ~ AD 1237년) 시대로 건축, 공예, 학술, 종교 등 각 방면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통상으로도 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알라에딘 케이 쿠바드 1세 사후에 룸셀주크 왕조는 분열되었고 AD 1243년 몽골군의 침입을 받고 국력이 크게 쇠락해지다가 몽골이 세운 일한국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셀주크 왕조의 마지막 분파로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AD 1308년 룸셀주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인 기야스 우딘 메수트 3세가 급사하면서 멸망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

 

룸셀주크 왕조가 힘을 잃으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족도 서로 분열되었다.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그 중 오스만이 이끄는 카이부족이 새롭게 유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본래 카이부족은 셀주크 투르크와 마찬가지로 오구즈 투르크 계열로 에르투그룰 베이에 의해 룸셀주크 왕조의 용병집단으로 활약하였으나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이를 피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로 이동하였었다. 에르투그룰 베이 당시의 세력은 기병 400기를 보유한 정도로 유랑집단치고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투그룰 베이는 이 힘을 바탕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소구트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AD 1281년 에그투르룰 베이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오스만이 베이(군사령관)의 칭호를 이어받고 부족을 이끌게 되었는데, 이 오스만이 부족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키면서 향후 약 600년간 유지될 제국의 기틀이 마련시키게 된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오스만 베이를 제국의 초대 술탄 오스만 1세로 부른다.

 

 

 

 

 

오스만 제국의 성립

 

초대 술탄 오스만 1세 시대

 

 

24세의 젊은 나이에 부족을 이끌게 된 오스만 1세는 소구트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지방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AD 1025년 제4차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AD 1261년에 니케아의 망명정권인 니케아 제국의 미카엘 8세가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한 상태였다. 그러나 AD 1282년 미카엘 8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쿠스 2세의 무능으로 동로마 제국은 다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안드로니쿠스 2세는 군대를 축소하고 해군을 해산한 채 용병과 제노바 함대에게 군사력을 의지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의 힘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의 전쟁에 개입하여 제노바를 지원한 것 때문에 베네치아 함대의 반격을 받고 무역특권을 내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힘이 많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오스만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로마 제국 영토를 손쉽게 공략하여 빌레지크, 이네괼, 예니셰힐을 차례로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그의 영토로 몽골군을 피해 도망친 이슬람 학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특히 그 중에는 '가지'라고 이슬람 전사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오스만의 세력은 군사적으로도 강성해졌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오스만 1세는 AD 1299년에 룸셀주크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오스만의 공식적인 지위인 '베이(군사령관)' 대신 스스로 '가지들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는 이때를 오스만 제국이 성립된 시기로 본다. 오스만 제국이란 명칭은 스스로를 '오스만 가문의 숭고한 국가(Devlet-i aliye-i Osmaniye)'라고 부른 것에 대한 영어식 표현을 번역한 것이며 '오스만 왕조'라고도 부른다.

 

AD 1326년 오스만 1세는 죽음 앞두고 동로마 제국이 보유한 아나톨리아 지방의 마지막 거점인 부르사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비록 오스만 1세는 죽기 전까지 부르사 함락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오르한 1세에 의해 마무리되지만 살아생전에 부르사 점령을 거의 마무리지었기에 이를 오스만 1세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부르사는 오르한 1세에 의해 오스만 왕조의 새로운 수도로 정해진다.

 

 

제2대 술탄 오르한 1세 시대

 

 

오르한 1세는 AD 1326년에 아버지 오스만 1세의 뒤를 이어 오스만 왕조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오르한 1세는 오스만 1세의 사망시까지 진행된 부르사 정복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오르한 1세 시절에도 오스만 1세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가지들의 유입이 계속되었고, 풍족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새롭게 용병들도 적극적으로 고용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도시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니케아(AD 1337년)와 니코메디아(AD 1337년)를 차례로 점령하였고 동쪽으로도 세력을 확대하여 투르크족 일파인 카라시 공국을 AD 1345년에 병합하였다.

 

아나톨리아 반도 점령을 마무리한 오르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틈타 발칸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AD 1341년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9살의 나이어린 요한네스 5세가 즉위하자 섭정자리를 두고 선대황제 총리였던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와 요한네스 5세의 어미니인 사부아의 안나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상태였다. 사부아의 안나는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운 사이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였고,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르한 1세와 동맹을 맺고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는 동맹의 증거로 자신의 딸을 오르한 1세와 결혼시켰고 이에 오르한 1세는 발칸반도로 군대를 진격시켜 AD 13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를 요한네스 5세의 공동황제인 요한네스 6세로 즉위시켰다. 그 과정에서 오르한 1세는 갈리폴리 항구를 점령하여 향후 유럽지역을 공략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삼게 된다.

 

 

한편 오르한 1세는 영토확장과 더불어 내정도 정비하여 이슬람 법관 제도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였다. 특히 수도인 부르사에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와 신학교인 마드라사, 대상들의 숙소를 세워 훗날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로서 오르한 1세의 오스만 왕조는 오스만 1세 시절의 단순한 군사집단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하게 되었다.

 

 

 

제국의 세력확장, 발칸반도 진출

 

제3대 술탄 무라드 1세 시대

 

내정정비와 발칸반도 침공

 

오르한 1세가 AD 1360년 사망하자 아들인 무라드 1세가 오스만 왕조의 3번째 군주가 되었다. 무라드 1세는 본래 오르한 1세의 차남이었으나 형인 슐레이만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무라드 1세는 팽창된 오스만 왕조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재상(와지르)의 숫자를 늘리고 그들의 수장으로 대(大) 와지르 지위를 신설했다. 군사체제도 개편하여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대 축이 되는 술탄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과 봉건기병 시파히 부대를 창설하였고 총사령관인 베일러베이 직위를 만들었다. 

 

 

무라드 1세는 AD 1361년 발칸반도의 남동부인 트라키아로 처들어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빼앗고 이름을 에디르네로 바꾸어 AD 1365년부터 오스만 왕조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AD 1366년부터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의 불화를 틈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 나갔으며 불가리아 제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마리차강 전투

 

AD 1366년 계속된 오스만 왕조의 발칸반도 잠식과 불가리아 속국화에 위기를 느낀 세르비아의 왕 부카신이 AD 1371년 불가리아 일부와 합류한 군대 7만명을 이끌고 마리차 강 유역으로 진군하였다. 세르비아는 한때 스테판 두샨(재위 AD 1331년 ~ AD 1355년)에 의해 발칸반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스테판 두샨 사후 다시 세력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왕조의 무라드 1세도 아나톨리아 반도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발칸반도에는 무라드 1세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힌 파사와 소수의 부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기회를 틈타 세르비아 왕 부카신은 에디르네로 처들어 갔다. 하지만 오스만 왕조의 사힌 파사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마리차강 근처까지 진군한 세르비아군에 대해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어 세르비아 대부분의 병력을 괴멸시키고 세르비아왕 부카신도 전사시켰다. 세르비아가 이 때의 피해를 '세르비아인의 파멸'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대한 피해였다.

 

마리차 강 전투의 승리로 불가리아에 대한 오스만 왕조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고 세르비아 남부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오스만 왕조와 동맹을 맺었던 공동황제 요한네스 6세가 AD 1354년 축출되고 새로운 황제 요한네스 5세가 즉위한 상태였으나 오스만 왕조가 발칸반도 북부의 마케도니아 지방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공물을 받쳐야만 했다.

 

 

제1차 코소보 전투

 

무라드 1세는 AD 1380년대에 발칸반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AD 1385년)와 세르비아의 니슈(AD 1386년)를 잇달아 정벌하였다. 그러나 플로크니크 전투에서는 세르비아 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를 설욕하기 위해 AD 1389년 무라드 1세가 직접 군대를 불가리아의 필리포폴리스에 집결시키고 코스보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세르비아는 AD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에서 왕 부카신이 사망하면서 왕조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라자르 흐레벨리아노비치를 중심으로 보스니아의 일부 지원을 받아 코소보에서 오스만 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코소보 전투 당시 오스만 왕조의 병력수는 대략 4만명으로 추산되며 2천 5백명의 근위기병과 5천명의 예니체리 군단, 6천의 시파히 기병, 2만명의 아잡스(비정규 경보병) 및 아킨시스(비정규 경기병) 및 그 밖의 병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라드 1세는 우익과 좌익을 각각 아들인 바예지드와 야쿠브에게 지휘를 맡겼는데 주로 궁병과 아잡스, 아킨스로 구성되었다. 무라드 1세 자신은 최정예 군단인 예니체리와 함께 중군을 맡았다.

 

한편 세르비아는 도합 2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라자르 자신이 1만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고 5천명은 코소보의 불크 브란코빅의 부대였으며 보스니아에서도 일부 종군하여 블라트코 부코빅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세르비아 군의 중심은 수천명의 중무장 기병이었으며 그 중 수백정도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최정예 기사들이었다. 라자르도 역시 세르비아 군을 3군으로 편성하여 자신이 중앙에 위치했고 블라트코 부코빅과 불크 브란코빅에게 각각 좌익과 우익을 맡겼다. 세르비아 군의 맨 앞에 최정예 중무장 기병을 위치시켰다.

 

전투가 개시되자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의 돌격에 나섰다.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의 막강한 위력에 야쿠브가 이끄는 오스만 군의 좌익이 큰 피해를 입었고 중앙의 전투도 오스만 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바예지트가 이끄는 오스만 군의 우익이 세르비아 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무장을 한 세르비아 군은 지치기 시작했으나 경무장의 오스만 군은 상대적으로 피로도가 적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점을 살려 세르비아 군을 몰아붙이게 되었다.

 

전황이 오스만 군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되고 있을 때 세르비아 측에서 탈영병으로 위장한 밀로스 오블리크가 오스만 진영으로 몰래 잡입하였다. 밀로스 오블리크는 무라드 1세의 호위병에게 살해당했지만 그 전에 독 묻은 칼로 무라드 1세를 찌르는데 성공했고 이 때문에 무라드 1세는 사망하였다. 갑작스런 술탄의 암살로 인해 오스만 군 내부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지만 바예지드가 동생인 야코브를 살해하여 지휘권을 장악하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결국 혼란에서 벗어난 오스만 군이 다시 공세를 펼쳐 세르비아에게 대승을 거뒀다. 세르비아 군은 마리차강 전투에 이어 다시한번 다수의 병력을 잃었고 라자르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들이 포로로 붙잡혀 살해당했다. 코소보 전투는 오스만 왕조에게 있어서는 발칸반도의 강국이었던 세르비아에게 완승을 거뒀다는 점에서 발칸반도를 장악하게 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비록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의 대패로 끝났지만 막강한 오스만 군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점 때문에 AD 19세기 민족독립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날 때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다. 그리고 무라드 1세를 죽인 밀로스 오블리크는 세르비아 민족의 영웅이 되고 라자르는 동방정교회의 수호성인으로 격상된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체제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 시대
오스만 1세 시절 오스만군은 일반적인 투르크 궁기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스만군은 직접 공격보다 화살을 이용한 원거리공격을 주로 이용하였고 공성전이 약했기 때문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보다는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스스로 항복하도록 유도하였다. 오스만 군은 주축인 카이부족 이외에 다른 투르크 부족들도 합류하여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는 대신에 약탈품과 전리품을 나누어받았다.


오르한 1세 시대가 되면 점령지가 확대되어 재정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 다수의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야야'라고 불렀는데 전리품 대신에 정해진 봉급을 지급하였다. 야야로 고용되는 용병은 충성만 한다면 꼭 이슬람교도일 필요는 없었다.



무라드 1세 시대

무라드 1세는 오스만 왕조의 국가체제를 갖춘 술탄으로 군사체제도 체계적으로 바꿔 부대를 술탄 직속의 카피쿨루(수바릴레이, 예니체리), 투르크 귀족로 구성된 시파히 기병, 그리고 비정규적으로 모병하는 아잡과 아킨시스로 구분하였다.


카피쿨루, 수바릴레이와 예니체리 군단
무라드 1세는 발칸반도에서 포로로 붙잡은 그리스도교도 아이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군사훈련을 시킨 후 술탄의 근위대로 편성하였는데 이를 카피쿨루라고 부른다. 카피쿨루는 크게 술탄 근위기병대인 수바릴레이와 근위보병대인 예니체리로 다시 나뉘어진다.


수바릴레이는 재능이 뛰어나 궁전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아 시종으로 키워진 그리스도교도 아이들 중에서 특히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중무장 기병으로 훈련을 받았고 주로 술탄의 개인 호위를 받았다. 수바릴레이는 엄격한 교육을 통해 충직하고 절제된 행동을 하며 전투능력이 뛰어난 최정예군으로서 오스만 제국군 중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다.


한편 궁전으로 보내지지 않은 아이들은 지방 귀족들에게로 보내져 양육되었다. 이를 데브시르메 제도라고 부르는 데 지방 귀족들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귀족가문에서 하인으로 생활하며 투르크 문화를 배우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에 일정 나이가 되면 다시 군사학교로 보내졌다. 그 곳에서 철저하고 엄격한 훈련을 받고 정예병으로 길러졌는데 이렇게 구성된 부대를 예니체리라고 불렀다. 예니체리는 수바릴레이와 달리 결혼도 금지된 채 엄격한 금욕생활과 병영에서만 숙식하도록 통제되었고 보병대로서 대부분 갑옷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칼과 창, 활 등 대부분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었고 높은 봉급과 명예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예니체리는 시파히 기병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의 양대 기둥이 되었고 AD 15세기경 활을 버리고 총병으로 양성되면서 시파히 기병을 누르고 오스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예니체리는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상비군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정복전쟁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웠으나 훗날 군기가 문란해지면서 술탄마저 폐위시키는 전횡을 일삼다가 AD 1826년 폐지된다.


시파히 기병
시파히 기병은 봉토(티마르)를 지급받은 오스만 왕조의 지방 귀족들이 봉토를 받은 대가로 부담하는 군역으로 구성된 기병들이다. 이는 중세 유럽의 봉건제나 셀주크 왕조의 이크타 제도와 유사한 것이었으나 오스만 왕조의 시파히들은 봉토의 수입만 가져가는 제한된 권리만이 있었다.


시파히 기병은 보통 중무장 기병으로 갑옷을 입고 활과 창, 방패, 칼 등으로 무장하였으나 술탄 근위기병인 수바릴레이보다는 무장이 가벼운 편이었다. 시파히 귀족들은 기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때 지원하는 기병의 숫자는 봉토의 수입에 따라 달랐다. 시파히 기병들은 몽골군과 마찬가지로 10의 배수단위로 군제가 편성되었고, 전쟁시에 시파히 기병 10명 중 1명은 후방에 남아 영지방어와 세금징수를 담당하였다.


시파히 기병은 오스만 제국 초기 예니체리와 함께 정복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나 점차 총과 대포 같은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점차 그 중요성이 줄어들게 된다.


비정규군 아잡과 아킨시스
오스만 제국은 상비군인 카피쿨루(수바릴레이, 예니체리)와 시파히 기병 이외에 비정규군으로서 아자브와 아킨시스를 모집하여 전쟁에 동원하였다.


아자브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모집한 경무장 보병들로 봉급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언제든지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아자브는 경무장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궁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였고 전술적으로는 카피쿨루나 시파히 기병이 진형을 갖추고 공격할 기회를 잡을 때까지 화살로 적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아자브도 역시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그 효용성을 잃게 되지만 여전히 후방 보급로 방어, 수송마차 호위, 보급로 보수 등의 임무에 활용되었고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상비군으로 주둔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아킨시스는 전통적인 투르크 출신 경무장 궁기병으로서 아자브와 마찬가지로 봉급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아킨시스의 역할은 전초부대로서 주로 적진영의 정찰과 적군의 유인, 보급로 습격 등이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궁기병으로서 측후방에서 적군을 교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외에도 아킨시스는 국경방어나 적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역할과 적 영토 약탈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속국 지원병과 포병대
오스만 제국은 점령지에 대해서 직접 지배하는 대신 속국으로 삼아 공물과 병력을 상납받기도 하였다. 속국의 지원병 중 대표적으로 활약한 것이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과 크림한국 타타르 궁기병이다. 세르비아와 타타르 기병은 주로 배후에 숨어있다가 적군을 기습공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외에 동방의 코사크족과 쿠르드족도 속국으로 편입되어 병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AD 14세기 말부터 대포를 도입하기 시작하는 데 이를 위해 술탄 직속의 포병대를 편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포병대는 훗날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셀림 1세의 맘루크 왕조 정복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제4대 술탄 바예지드 1세 시대

 

세르비아 속국화

 

바예지드 1세는 AD 1389년 코소보 전투 도중 아버지 무라드 1세의 갑작스런 암살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지휘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부기반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무리하게 세르비아 전역을 정복하기보다는 세르비아에게 종주권을 인정받는 정도로 정벌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바예지드 1세는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빅의 지위를 보장하는 대신에 공물과 병사를 제공받는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맹의 결속을 위해 스테판 라자레빅의 딸과 결혼한 후에 아나톨리아 반도로 돌아갔다.

 

  

니코폴리스 전투 승리와 발칸반도 장악

 

오스만 왕조의 발칸반도 원정은 AD 1394년 다시 시작되었다. 바예지드 1세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왈라키아 등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를 차례로 굴복시켰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빠진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십자군 결성을 선포하였다. 비록 십자군에 대한 열정은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발칸반도와 인접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느끼고 있던 헝가리왕 지기스문트가 교황의 호소에 호응하면서 십자군이 결성될 수 있었다. 십자군의 목표는 먼저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고 그 기세를 이어서 아나톨리아 반도와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진군하는 것이 되었다.

 

십자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한 것은 프랑스였는데 프랑스는 대부분 부르고뉴 공국의 중무장 기병으로 이루어진 1만명의 부대를 장 드 느베르(훗날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지휘하에 파견하였다. 약 1천명의 잉글랜드 부대까지 흡수한 장 드 느베르는 AD 1396년 7월에 부다로 진군하여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약 6천명의 헝가리군과 합류하였다. 이때 발칸반도에서 동방정교회 국가임에도 미르체아 1세가 이끄는 1만명의 왈라키아군이 합류하였다. 왈라키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만큼 오스만 제국군과의 많은 전투경험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보헤미아,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불가리아, 스코틀랜드, 스위스에서 온 병사들이 약 2만명 가량을 구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장악에 위협을 느끼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 로도스섬의 성 요한 기사단에서도 함대를 동원하여 해안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육군만 약 4만 7천명 가량이었고 해군까지 포함한다면 12만명이 넘는 대병력이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경험이 많았던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가 자신의 경기병대를 이끌고 정찰과 선봉대 역할을 맡을 것을 자청였지만 프랑스군을 이끄는 장 드 느베르가 이를 거절하였다. 장 드 느베르는 가장 많은 병력을 지닌 자신이 전투의 핵심이 되도록 요구하였고 결국 십자군의 지휘권은 장 드 느베르의 차지가 되었다. 이어 십자군은 니코폴리스 방향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니코폴리스를 공격하기 위한 공성병기를 보유하고 있진 않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오스만 제국군이 멀리 있다는 생각에 별다른 걱정없이 약탈을 거듭하며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그렇지만 십자군의 생각과 달리 바예지드 1세는 신속하게 군대를 집결시켜 니코폴리스로 향했고 이제는 오스만 제국의 우방이 된 세르비아의 스테판 라자레빅이 이끄는 약 2만명의 군사가 지원왔다. 세르비아 군 중 약 5천명은 중무장 기병이었다.

 

갑작스런 오스만 제국군의 출현에 십자군은 부랴부랴 전투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전위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부대가 담당하였고 헝가리와 신성로마제국군이 중앙을 담당했으며 왈라키아 군이 좌익을, 나머지 부대들이 우익을 담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스만 제국군은 기병을 전위로 내세웠으나 십자군의 중무장 기병의 돌격에 대비하여 목책과 말뚝을 설치해 놓았다. 예니체리 군단과 궁수로 이루어진 오스만 제국군 본대와 세르비아군은 거리를 두고 언덕 뒤에 숨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다시한번 왈라키아의 미르체아 1세가 자신의 경기병들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을 유인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하였으나 공명심에 들뜬 다른 십자군들에게 거절당했다. 십자군은 전통적인 방법대로 중무장 기병을 돌격시키기로 하였고 이 역할을 프랑스군이 맡기로 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어 프랑스의 중무장 기병들이 돌진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의 궁병들이 미리 준비한 목책과 말뚝에 불화살을 쏘아 불을 질렀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기병들도 역시 말에서 내려야만 했기 때문에 기병끼리의 전투는 땅에서 난전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십자군의 중무장에 고전하여 큰 피해를 입은 오스만 제국군은 언덕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이 기세좋게 이를 뒤쫓아갔다. 그러나 무거운 중장갑을 입은 프랑스 군은 언덕 위를 오르기도 전에 지쳐버렸고 언덕 뒤에서 대기하던 오스만 제국군이 역습을 시작하자 프랑스 군은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장 드 느베르는 포로로 붙잡혔다.

 

프랑스 군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지기스문트는 헝가리군을 급히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헝가리군과 오스만 제국의 본대의 전투는 혼전으로 진행되었지만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이 등장하면서 전황이 오스만 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이 헝가리군의 우익으로 돌격하자 헝가리군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헝기리왕 지기스문트는 달아났다. 헝가리군마저 무너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왈라키아 군도 퇴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전투는 오스만 제국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한편 달아났던 지기스문트는 간신히 베네치아 함대가 있는 곳까지 간신히 도망쳐 해상을 통해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했고 훗날 보헤미아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된다.

 

전투가 종료되자 바예지드 1세는 전투 개시전에 프랑스군이 오스만 제국군 포로들을 살해한 것과 전투 초반 많은 병사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약 1만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였으나 어린 포로들은 죽이지 않고 오스만 제국군에 편입시켰다. 니코폴리스 전투를 통하여 오스만 제국군이 중세 유럽군대보다 우수하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바예지드 1세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앙카라 전투 패배  

 

니코폴리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한 바예지드 1세는 이제 관심을 아나톨리아 반도로 돌렸다. AD 1397년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투르크 공국들을 병합하였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투르크 공국들에 대해서도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투르크 공국들이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바예지드 1세의 요구는 티무르와의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란과 이라크 지방,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 지방까지 정복한 티무르였지만 처음에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 바예지드 1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십자군 연합을 격파하여 자신감이 충만했던 바예지드 1세는 오히려 티무르를 정벌하겠다며 도발하였다. 이에 분노한 티무르가 군대를 이끌고 왔고 양군은 AD 1402년에 앙카라 근처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티무르군은 14만명의 대군으로 대부분이 투르크와 몽골계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일부 코끼리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예지드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은 6만 5천명이었으며 이번에도 스테판 라자레빅이 이끄는 세르비아군 2만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오스만 제국군이 돌격하였고 티무르군은 궁기병대가 수많은 화살을 쏘아댔다. 수천명이 죽었으나 전투는 결판이 나지 않은 채 혼전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티무르가 근처의 수원이었던 쿠북강의 흐름을 바꾸자 오스만 제국군은 식수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목마름에 지친 많은 투르크족과 시파히 투르크 귀족 기병들이 티무르군에 항복하였다. 오히려 이교도인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들만이 끝까지 바예지드 1세의 곁에 남았다. 전황이 기울자 바예지드 1세는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도망치려 하였으나 낙마하여 티무르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제국의 분열

 

티무르는 바예지드 1세를 정중하게 대해주었지만 실의에 빠진 바예지드 1세는 이듬해인 AD 1403년에 감옥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앙카라 전투 승리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에게 병합되었던 여러 투르크 공국들을 부활시켰고 오스만 제국을 바예지드 1세의 세 아들이 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하였다. 장남인 슐레이만이 유럽영토인 루멜리아를 지배하였고 메흐메트와 이사가 각각 아마시아와 부르사를 통치하였다. 바예지드 1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던 막내아들 무사까지 풀려나면서 오스만 제국은 4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진 채 서로 다투면서 AD 1413년까지 술탄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대공위 시대가 약 10년간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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