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존주의(existentialism)
실존주의 철학이란 인간을 자각적(自覺的)인 존재로 보고, 그 어떤 이념이나 관념을 가지고도 규정할 수 없는 인간 존재만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참된 인간 존재를 되찾자고 하는 현대철학의 한 조류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성(根源性)을 규명해 상실한 자기의 모습을 찾고 본래의 자기에로 복귀함으로써 자기 회복을 꾀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인간 소외와 불안의 시대에서 참된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고 본래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아주는 운동이다.
그런데 인간 내면의 불안, 우수, 공포, 절망, 죄책감, 권태, 허무 등의 인생무상을 설파하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을 가리켜 불안의 철학, 반항의 철학, 초월의 철학 등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존철학은 헤겔 철학과 반대편에 서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이라는 것이 정반합을 통해 목적(본질)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전체주의에 도달했다. 즉, 헤겔은 인간을 군대 속의 군인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헤겔의 사상에 반대해 인간들을 본질(本質) 앞에 홀로 서있는 실존의 전사가 되라고 했다.
그리하여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말하기를, “그대의 고독으로 돌아가서 그대 자신의 길을 걸어라”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실존주의자로서 고독을 여읜 자는 하나도 없다. 고독 속에서 쓸쓸히 한평생을 마친 것은 니체뿐 아니라 키에르케고르, 야스피어스, 하이덱거, 마르셀, 사르트르, 까뮈 등 모두 다름이 없었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 속에는 고독한 정신이 맥맥히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실존주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진리다. 내가 그 때문에 살고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진리다.” 이와 같이 객관적 진리와 주체적 진리(主體的眞理)로 엄연히 갈라놓고 주체적 진리가 곧 실존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두 가지로 이야기 한다. 하나는 피투성의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투성의 존재라는 것이다.
•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이 그냥 버려진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부잣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혹은 내가 병이 나고 싶어서 병이 난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사고가 나고 싶어서 사고가 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가 선택하고 생각하고 할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버려진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 이런 것이란 말이다. 누군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고 싶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태어났고, 그래서 학업도 포기해야만 했으며, 꿈도 포기해야만 했다.
• 기투성(企投性)의 존재란, 이것은 던져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나의 선택 없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그 선택한 방향을 향해 내가 내 몸을 던지는 것이다. 비록 내가 피투성이의 존재로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체로 나의 선택 없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거나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났지만 그냥 피투성이의 존재로 가만히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님 여기가 아닌, 이곳이 아닌, 다른 삶을 향해 내 몸을 던질 것인가를 결정해서 내 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런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해서 그 방향으로 내 몸을 던졌을 때, 그때의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도를 닦든, 수행을 하든, 그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 그 첫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게 하는 것, 되새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라 한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이 세계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던져져버린 존재, 즉 피투(던져진)된 존재이지만 죽음의 순간을 예리하게 의식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가 재구성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던지게 된다고, 그것이 바로 기투성이라고 말했다.
2. 실존주의자의 유형
1)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들
신앙에 의한 영적 인격적 교통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S.A.Kiergaard, 1813~1855)
덴마크 종교철학자.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인간은 하나의 실존으로서 다른 물건이나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한 단독자이며 유일무이한 귀중한 존재이다. 인간과 신과의 사이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 거기엔 건널 수 없는 단절이 가로 놓여있다. 이 단절은 그리스도가 화육(化育)해 단절을 넘어섬으로써 가능하게 됐던 것이다. 유한한 실존적 인간의 절대적 과제는 진리에 의해 본래적인 자신의 모습을 찾는 데 있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효력이 가는 데까지 가서 절망하는 데서 오히려 한층 높은 종교의 세계로 비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독자(고독한 실존)로서 신 앞에 서라!”라고 했다.
• 야스퍼스(K.Jaspers, 1833-1969)
독일의 철학자.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실존의 좌절을 경험하고 초월자와 직면하게 되는데, 이 초월자는 상징적인 암호(초월자의 말)로 나타나고 비로소 그 암호를 해독하게 되는 이른바 계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실존철학의 궁극적 의도는 실존의 극단적인 좌절을 통해 포괄적인 신에게로 자기를 초월시켜 나간다는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전개에 있다고 봤다.
• 마르셀(G.Marcel, 1889~1973)
프랑스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 현대는 소유물이 소유자를 지배하게 되는 소유의 역전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시대. 실존을 되찾는 길은 성실과 사랑과 신앙. 인간은 절대적 너(신)의 존재를 증명할 합리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랑과 숭배의 심정으로 참 존재에 참여하는 데에서 신을 만난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실존주의 철학을 전 세계에 파급시키는데 큰 영향을 발휘했다.
2)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
신의 배제된 상태에서 단독적 주체자로서 실존을 탐구하는 입장.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철학자로서, 대표 저서로 <존재와 시간>이 있다. 인간은 존재자임에는 분명하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를 추구하는 현존재(現存在)의 이해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현존재는 피동적으로 이 세계에 내던져 있을 뿐(피투성이) 아니라 자기가 능동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내어 던지는 가능성(기투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샤르트르(J. P. Sartre, 1905~1980)
프랑스실존주의 철학자. 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했다. 다음은 그의 주장들이다.
① 행동적 실존론 - 대자적(對自的)인 존재인 인간은 공허한 것, 동요하고 있는 것,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즉자존재(卽自存在)'로서 안정되려 무한히 애쓴다. 그러나 헛수고에 그쳐 '인간은 무익한 헛수고'라고 했다. 그래서 "신은 없다. 신은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즉자(卽自)와 대자(對自) - 즉자적인 것과 대자적인 것, 이는 변증법적 과정의 일단이다. 즉자(또는 즉자적인 것)와 대자(또는 대자적인 것)는 헤겔 철학에서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을 해명하는데 사용되는 개념 쌍이다. '즉자'란 사물이 직접 드러난 현상이나 존재, 실체를 가리키며, 즉 현존재를 말한다. 현존하는 그 자체를 말한다. 대자는 그 실체에 대한 객관화를 통해서 인식되는 행위이자 주체화되는 상태로서 변증법적 지양을 거쳐 개념화된 인식된 상태를 가리킨다. 즉, 현존재가 주관적 상태에서 객관화돼 행동하는 자체로서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대자적(對自的)이라고 한다. 즉자적(卽自的)이라는 말과 상대해 말하는 것인데, 자기 자신에 매몰돼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해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동물과의 차이이다.
②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했다.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나서 본질이 후에 있는 존재다.
③ 실존은 주체성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가치선택을 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행동의 전 책임을 져야 하는 동시에 전인류에 대해서도 깊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샤르트르를 중심으로 프랑스 철학자들과 작가들에 의해 실존철학이 세계적으로 급파돼 20세기 최대의 철학사조로 군림하게 됐다.
3. 불교와 실존주의를 접목시킨 선구자들
원래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mism)은 친불교적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방식이 불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큰 의미를 갖는다. 즉, 불교의 무아(無我)에서 그들의 역사적 해답을 찾으려 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여기에는 자연이나 생물이나 환경은 없다. 오직 인간의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쾌락의 구조로 조작됐다고 본다.
포 스트모던이즘의 이 같은 사유방식이 불교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 구조가 불교의 연기론적(緣起論的)인 사유 구조와 같은 관계론적 사유의 한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서구 사상이나 종교는 기존의 전통을 해체하며 불교적 세계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사상이 불교에 접근하는 데 용이하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이 세계를 어떤 근원적 토대 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본다. 상의 상관성(相依相關性)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미래의 세대에 가장 잘 적응할 종교는 불교(佛敎)이다.” 아인슈타인이 왜 미래의 세대에 가장 잘 적응할 종교를 불교라 했다.
이래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학자들에 의한 불교학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실존철학에도 큰 영향을 준, 그리고 서구 불교학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한 쇼펜하우어가 이 계통의 선구자임은 당연한 것이다.
•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 독일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는 프로이센 제국의 국가철학자였던 헤겔의 정신 철학에 반대해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했다. 그의 사상은 정신분석학과 실존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비합리주의에 주목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서양철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는 헤겔 사후 서양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니체, 프로이트,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유럽의 불교 수용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가 놀라울 정도로 불교와 일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불교철학의 해설자’로 불렀다.
그는 1819년 출판한 그의 유명한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에서 “만일 나의 철학의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라고 역설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통해 철학적인 세계관을 서구에 제대로 알린 첫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적인 사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에 불교 및 불교철학을 학문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 무렵까지 극소수의 인도학 연구자들이 유럽어로 불경을 번역했고, 이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다른 종교보다 훨씬 출중한 것으로 평가했으며, 불교 교리가 자신의 핵심 명제들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곧 개체화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마야(māyā, 幻)의 베일, 즉 우주적 환상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나’라는 개체성의 환상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그 고통스러운 실존적 조건을 순간적으로 벗어나는 미적 관조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조의 기쁨은 개인의 완전한 무화(無化)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일시적인 진정제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다.
개체적 자아에 대한 인식, 개체화의 원리는 마야의 장막이자 환상이다. 그 장막을 벗어나야만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해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전 세계의 고통과 재난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될 경우에 그는 어떤 고통도 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동고(同苦, Mitleid)’의 감정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생각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일치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의 사후 존재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에 도달하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죽음은 개체의 상실이고 탄생은 새로운 개체의 시작이지만, 의지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식 주체로서의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만이 윤회한다고 봤다. 의지는 새로운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존재를 갖는다. 이것은 윤회보다는 재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새로운 탄생은 불멸의 의지 자체에 도달하려는 갈망의 표현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탄생을 통해 정제되다가 결국에는 완전한 부정의 방식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게 된다고 봤다.
이처럼 나와 세계가 표상이고, 그 배후에 의지가 도사리고 있으며, 삶의 의지의 긍정은 고통을 유발하므로, 고통을 벗어나려면 의지의 완전한 부정을 통해 동고(同苦)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분명 불교의 중심사상과 일치한다. - 김진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 니체는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이다.
니체는 또한 인간들 간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고 봤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라 했다. 약한 자들이 자기를 합리화하는 걸로 봤다. 심지어 노예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것이 니체 사상이 가진 독소이다.
니체 사상 중에 중요한 것은 영원회귀 사상이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삶보다도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길 바란다. 니체는 그런 식의 희망을 단절시켜버렸다. 영원회귀 사상에서는 천국도 없고 유토피아도 없다고 봤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면 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회귀 사상과도 통한다. 강한 사람은 험한 운명이 반복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고, 초인(超人)이란 그러한 사람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하수나 강물을 끌어들이고서 자기 속성을 잃지 않는 바다처럼, 초인은 궂은일을 경험하면서도 오히려 그런 것을 자기의 발전 계기로 받아들인다.
니체와 불교사상 사이에는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구조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삶의 고통스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비슷하다. 근대 계몽주의는 구조를 바꾸면서 인간 고통을 극복하려 했다. 니체와 불교는 인간 정신을 변화시킴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려고 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니체는 정신력을 강화시키면서, 불교는 자기집착주의를 버림으로써 고통을 극복한다. 이처럼 니체와 불교는 고통을 인간 정신의 변화를 통해서 극복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니체와 불교는 내세라든지 유토피아 등을 꿈꾸며 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불교의 경우 자기집착을 버리면 지금 있는 이곳에서 열반한다고 한다. 니체 역시 독립정인 정신을 강조했다.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철학이란 측면에서 니체와 불교는 공통된다.
니체는 불교를 세밀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오해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언뜻 보면 니체와 불교간 유사점이 많이 보이지만 양자 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선명하게 볼 필요가 있다.
고통을 바라봄에 있어 니체는 어떤 고통이든 긍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불교는 고통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여여하게 바라보라고 한다.
또한 니체에게는 현실에 대한 강한 애착 같은 것이 있었다. 명예라든가 야심을 추구하는 것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며, 문화 창조의 강한 동력이라고까지 했다.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이다.
니체는 부정적인 욕망들과 정열을 승화하려고 하지만 불교는 정화를 추구한다. 니체는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원한과 증오를 선의의 경쟁심으로 승화할 것을 촉구하지만 불교는 모든 경쟁심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추구한다.
니체와 불교가 지향하는 인간상에도 차이가 있다. 니체의 초인이 강한 자아에 가깝다면 불교는 자기중심주의에 반대한다.
니체와 불교가 추구하는 덕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긍지, 모험, 지혜 등 남보다 앞설 수 있는 덕들에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불교는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자신이 잘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한다. 열정이나 정열 대신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라고도 하며, 책략 대신 진실, 모험 대신 명상을 강조한다.
니체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처럼 천지창조 등 신화적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의 심리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를 최초의 실증주의적 종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니체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욕, 평정을 최상의 상태로 보지 않았다. 투쟁, 용기 등을 최고로 두었다. 그래서 불교를 노쇠해버린 종교로 보기도 했다. 불교는 정신적인 작업에 몰두해서 삶의 고통에 민감하고 유약해져 버린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란 우울증으로부터 사람을 벗어나게 하는 치유의 성격을 띤다고 했다.
또한 불교는 인격신을 부정하는 정신적 진보를 이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적이고 생명력이 약화된 데카당(Decadent)한 종교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당시에 불교가 유행할까봐 우려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유럽적인 불교’라고 부르는 동시에 자신을 ‘유럽의 붓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를 가지고 니체가 자신의 사상을 불교와 동일시했다고 보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니체 자신과 불교가 유사하다고 본 것일 뿐이다. - 박찬국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선(禪)이야말로 내가 나의 모든 저술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이다.”라고 해서 당시 그의 선에 대한 관심과 서구인들이 가지는 선사상에 대한 단편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철학의 유사점은 비교 철학자들의 많은 연구를 통해서 상세히 알려져 있다.
그의 후기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인 ‘존재’는 불교의 아뢰야식과 같은 잠재의식으로 해석하면 유식학과 유사한 뜻이 된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이러한 잠재의식을 목수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목수가 망치질을 할 때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사고를 하면서 못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와 못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망치질을 한다. 즉, 의식의 배후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과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현존재(Dasein)라는 그의 전기 사상에서 존재(Sein)만을 다루는 그의 후기 사상의 존재론적 사유에서는, 존재는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일체유부의 ‘법(法)’ 또는 개념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면 소승불교와 유사하다.
그리고 일체의 사물을 관념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점에서는 화엄학(華嚴學)과 유사하기도 하다. 화엄학의 있는 그대로의 사상을 하이데거는 또 다음과 같은 자작 시(詩)로 나타내고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이 시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관념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실상(實相)을 표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치 협력자였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 야스퍼스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마르틴 하이데거와 함께 현대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야스퍼스는 그의 후기 사상에서 기획하고 있었던 세계철학 전개의 일환으로 출판된 <위대한 철학자들> 제1권에서 그가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동서의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 불타(佛陀)와 용수(龍樹)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 두 불교 철학자들에 대한 매우 심도 있는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부처님과 용수(龍樹) 보살에 관한 저술을 할 정도로 불교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 자체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그의 불타론에서 야스퍼스가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불교는 그 본래적 의미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에 기초해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의 길을 가르치는 철학적 신앙의 종교이다. 야스퍼스는 이 연구에서 불타의 가르침의 특징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불타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기도, 은총, 희생, 제사 등 어느 것으로도 해탈을 가져오지 못하며, 오직 개인 각자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지혜만이 해탈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야스퍼스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며, 불타의 가르침을 자력적 구원을 가르치는 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여기서 실체론적 자아관을 부정하면서, 개인 각자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본래적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자신의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불타의 무아(無我)의 지혜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면서 해탈(解脫)에 대한 불타의 가르침을 철학이라고 칭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야스퍼스는 불타는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한 고통의 극복을 가르치는 지혜의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개인을 넘어 선 존재”가 됐고, “개인의식을 수반하지 않는 인격의 힘”을 획득한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개인을 넘어선 무아의 존재가 된” 불타의 성불에서 야스퍼스는 실존에 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존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주장하는 실존철학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몸소 체현해 보여준 동양적 실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야스퍼스는 불타의 가르침이 후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특히 대승불교의 전개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불타가 가르쳤던 자력적 해탈의 철학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의 화신들의 원력에 의지하는 타력적 구원의 종교로 대치되고, 지혜의 교사였던 불타는 예배의 대상으로 신격화됐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승불교의 다양한 발전 형태들의 밑바닥에 불타의 가르침에 근원을 둔 정신적인 힘들이 그대로 남아 계승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대승불교의 정신성의 특색을 이루는 중생과 함께하는 ‘연민의 정’ ‘불교적 사랑’, 그리고 ‘비폭력의 태도’ 등이다.
야스퍼스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변치 않고 남아 있는 이와 같은 불교의 관용정신과 비폭력의 태도를 불교 본래의 특성으로 보며, “불교는 폭력도, 이교도의 박해도, 마녀 재판도 십자군 전쟁도 동반하지 않은 유일의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용수론(龍樹論)>에서, 야스퍼스는 용수(龍樹, Nagarjuna) 보살의 대승불교적 공(空) 철학, 특히 그의 공(空)의 논리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매우 심도 있는 연구를 전개했다. 용수의 중관철학(中觀哲學)의 근본적 사유방식인 소위 공의 논리학을 자기 자신의 포괄자론의 철학적 논리학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신옥희
4. 선(禪)과 실존철학
우주만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함께 살고 서로 해치지 않는 것이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그것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이다. 이 생명의 원리를 거역해서는 어떤 문명도 궁극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병폐가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과학문명이 이대로 발전해 나가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역사를 창조해나간다면 인류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과학문명을 창조하는 원리를 어떻게 개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과제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2500~3000년 전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천할 무렵에도 오늘날과 같은 큰 혼란기가 있었다. 부족을 이루고 사냥을 하며 살다가 농업이 발달해 도회지를 형성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자, 옛날 질서로는 도저히 사회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혼란이 오고 전쟁이 자주 일어날 때, 붓다(佛陀, buddha)가 나타나서 참다운 인간상, 올바른 인간상을 깨우치게 해 대자대비 한 마음과 자유자재한 삶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리고 공자(孔子)는 인의(仁義)를 주장해 어진 마음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했고, 노자는 지나친 인위(人爲)를 경계해 무위(無爲)를 주장했다. 또 유대의 선지자 이사야(Isaiah)는 사랑을 주장하며 질서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더구나 농경시대가 아니라 공업시대이다. 과학문명은 발달했지만 과거의 전통과 유산이 모두 무너져 혼란에 빠져있다. 또 과학문명을 창조하는 원리가 욕망에서 비롯돼, “대자연을 정복하자”, “욕망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자”, “나(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시대가 됐다. 이렇게 모든 갈등을 대립과 투쟁, 그리고 이기주의로 해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의 멸망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욕망이 바탕이 된 과학문명의 원리를 어떻게 시정해야 하느냐가 인류에 주어진 큰 과제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결국 죽고 만다.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늘 올바른 행위를 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이 세상살이다. 착한 일을 하려고 하면 악이 따라온다. 이렇게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며, 현실은 아주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라 봤다.
야스퍼스 철학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양철학에서도 인간존재의 허망함과 위기에 대해서 깊이 다루게 된 것이다. 중세기에 서양철학에서는 “앎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근세에 이르러 이성적인 사고가 발달하자 “어떤 것이 참[眞]이냐, 어떤 것이 지(知)를 사랑하는 철학이냐”를 묻게 됐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무엇이 참다운 나의 존재이며 인생이냐?”를 묻게 됐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의 현실은 무상하고 모든 이론체계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참구하려고 해도 깊이 들어가면 거짓이 따르고 좌절,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비약하려고 노력할 때 절대 의식이 나온다. 거기에 깊이 몰입할 때 자기의 참다운 존재를 각지(覺知)하게 된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므로 우리는 철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자유자재한 존재를 체험하게 되고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인간의 감성ㆍ분별ㆍ이성도 모두 의식이라고 보는데, 화두를 탐구해 나가면 그러한 의식이 모두 통일돼 순수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무의식이 되고, 거기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무의식마저 초월하면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된다. 견성(見性)한 부처 자리에도 걸리지 않고 초월해 나가면 명확한 자리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독단론에도 걸림 없이 인간의 본래면목을 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철학은 분별하는 이성의 작용을 완전히 끊어 무의식까지 간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의 근본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선에서 보면 중간에 머물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선은 인간의 분별하는 이성을 완전히 끊고 전환해버려서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면서 이성과 감성이 자유자재하게 되살아난 원융무애(圓融無礙)한 전체적 인간, 우주적 인간, 자유자재한 초인간의 입장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훌륭한 전통으로 인류의 평화에 값지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禪)이라는 훌륭한 보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유 사이에 유사성 또는 일치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다. 하이데거 사유 자체가 선불교와 노장 사상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후년의 하이데거가 중국인 제자와 함께 <노자>를 독일어로 옮기는 작업을 시도했다는 사실도 하이데거와 ‘동양철학’의 친연성을 방증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명시적으로 자신의 철학과 불교·도교가 직접 연결돼 있다고 밝힌 적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하이데거는 중국철학을 폄하하기도 했다. 1966년 <슈피겔>과 한 장문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현대 기술 세계가 발생했던 동일한 장소로부터만 어떤 전환이 준비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전환은 선불교나 그 밖의 다른 동양의 세계 경험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하이데거와 불교 또는 동양사상을 겹쳐 읽어보려는 움직임은 줄지 않는다. 그만큼 두 사상 사이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권순홍 군산대 교수가 쓴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도 이런 학문적 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그에게 하이데거와 불교의 접점을 숙고하도록 자극한 것이 김형효 교수의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2000)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은이는 김형효 교수의 책에 대해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을 유식불교의 눈으로 풀이한 최초의 연구서라는 점에서 그 학문적인 가치와 의미가 남다르다”라고 공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이 유식불교와 하이데거 사이의 동일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해석의 과잉’이라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 견강부회를 걷어내고 하이데거와 유식불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냉정하게 분별함으로써 둘 사이에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작업이 이 책의 내용을 이룬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와 유식불교가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하이데거와 불교
지은이가 먼저 강조하는 것이 두 사상이 공히 반본질주의·반실재론, 요컨대 반 실체론을 사유의 전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서양 형이상학의 근본 가정을 부정하고 해체한 니체 철학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하이데거가 거부하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로 대표되는 영혼·실체라는 관념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이 생성·변전의 흐름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유식 불교도 자아니 실체니 하는 영원한 동일성을 부정한다. 유식불교는 중관 불교와 함께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유식불교는 소승불교의 ‘설일체 유부’를 정면으로 비판·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세웠다. 설일체 유부는 세상 만물이 모두 실재하고 있으며, 자성(자아·자기 동일성)이 만물에 내재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유식불교는 바로 이 실재론·실체론을 급진적으로 거부한다.
지은이는 이런 전제를 공유하는 하이데거와 유식불교가 ‘마음’이라는 공통 지반에서 서로 만난다고 말한다. 유식불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의 기능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작용해 만물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일 뿐, 그 마음을 떠나면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유식불교는 말한다. 유식불교의 이 마음(아뢰야식)에 해당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근원적 시간’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하이데거는 전기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모든 존재 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논술의 잠정적인 목표다.” 하이데거의 설명을 따르면, 인간 현존재는 시간 안에서 생기하는 존재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향해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문제 삼는다. 그때 드러나는 것이 존재의 지평인 ‘근원적 시간’이다. 이 시간 안에서 인간 현존재는 그때그때마다 세계와 내적·외적으로 관계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전한다. 끝없는 달라짐의 연속이 현존재다. 현존재는 실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개방성이며 차이성이다. 하이데거 철학은 이 끊임없는 생성·변화를 긍정한다.
실체가 따로 없는 차이의 연속이라는 하이데거의 이 지점이 바로 불교의 제행무상·제법무아와 통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유식불교의 공통점은 여기서 그친다. 결정적인 것은 유식불교가 종교인 데 반해 하이데거는 철학이라는 사실이다. “중생이 걷는 열반의 길에는 말 그대로 열반이라는 최종 목적지가 있지만, 현존재가 걷는 본래적인 실존의 길에는 어떠한 목적지도 없다.” 지은이는 하이데거 철학이 불교에 비해 사태를 더 깊숙이 해명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 또 결정적으로 삶의 목적에 대해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하이데거 철학의 미흡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변전하고 생멸한다는 것에서 불교는 괴로움을 본다. 아름다움이 스러져 추함으로 흩어질 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반면에 하이데거 철학은 차이를 만드는 생성에서 ‘실존의 활력’을 발견한다. “그러나 한 번쯤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정녕 하이데거에게도 ‘차이화’의 사건은 괴로움이 아닌가?
실존주의, 실존 대 본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실존주의를 표현하는 기본 구호와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1945년 강연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 에서 최초로 이 개념을 말했다. 이 개념은 '사물의 본질, 즉 본성이 존재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었다. 실존, 즉 존재가 먼저이고 존재가 등장하기 전에는 본질은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 존재는 처음에는 무엇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즉, 존재, 본질의 가치 및 의미는 당초에는 없고, 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이 생각에서는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이 생각은 크리스트교 등의, 사회에서의 인간에게는 본질 (영혼)이 있어 태어난 의미를 가진다는 고대부터의 종교적인 신념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무신론의 개념의 하나가 되어 있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는 20세기의 철학 및 문학 사조(思潮)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통 학자들은 마르틴 하이데거를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본다.이후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프랑스에서 실존주의의 꽃을 피웠다.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알베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그들이다. 독일에서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카를 야스퍼스가 있다.
실존주의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선택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선택에 대한 불안감에 압도되면서도 그 선택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로 대변되는 그 전까지의 과학적 근대철학이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를 단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데 그쳤다면, 실존주의는 '우리는 세계 밖의 전지적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를 실제로 겪고 그걸로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느낌과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철학의 진정한 첫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의 답은 '자신의 선택', 곧 자유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실존주의는 미래의 대안들을 현재에 미리 구성해보고 그중에서 자신에게 끌리는 바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그런 선택이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 특성상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보다는 '개별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단지 언어에만' 사로잡혀있는 다른 철학들의 무미건조함과는 다르게, 실존주의 철학은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례들을 통해서 실제의 삶에 대한 고뇌를 되도록 상세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그게 강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특수성을 모두 인정하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굳이 '논증을 할 필요가 없는 철학'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메리 워낙은 지적한다.
결국 한때 프랑스철학을 대표했던 실존주의는 '문화와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구조주의 철학에 의해서 점차 대체된다. 더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경우에는 '일원화된 체계와 고정된 구조를 부정하며 다원적인 가치를 긍정'하면서 구조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존주의와 연결되는 맥락이 있긴 하다. 다만 실존주의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자유와 미래가능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문화적 구조의 해체나 재조정을 통해 자유의 증진과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역사
실존주의의 확실한 근원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데, 키르케고르, 니체 등을 일찍히 분석한 하이데거에 의해 실존주의적 주제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고, 1,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던 전후 프랑스 문학가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이를 논의함으로써, 사회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신적 조류는 1920년대 말, 장 발(Jean Wahl)과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에 의해 처음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0대 초중반부터 하이데거는 강의를 통해 실존주의의 주요 개념들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았다. 1927년 비로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자 유럽 철학계 모두는 이 철학자를 주목했다. 그의 작품은 수십번 읽혀지고 연구되면서 한순간에 이 개념들은 철학계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9년 프랑스에서 키르케고르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장 발은 실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실존, 그것이 뜻하는 것은 이렇다. 선택하기, 열정적이기, 생성되기, 개별적이고 주체적이 되기, 자기 자신을 무한히 염려하기,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기, 신 앞에 서기." 비록 신을 믿었던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추려낸 개념이었지만, 이러한 '실존' 개념은 당시 1930년대 프랑스의 지성인 사이에 두 가지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첫째, 인간의 삶은 합리적인 근거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며 파편화된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가능성들 사이에 내던져져 있으므로, 실수도 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둘째, 개개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부모와 환경, 키와 외모 등을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미 언제나 주어져 있으며, 인간은 무언가를 스스로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이미 그런 것들과 함께 시작된다. 이러한 실존의 개념은 '자유의 이념'을 함축한다. 실존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때, 자유란 신과 절대자에 반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뜻한다. 실존을 비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때, 자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라는 책의 근간이 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으로 하룻밤 사이에 유럽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살 데 상트로(Salle des Centraux, 중앙홀)'에서 개최된 이 강연에는 실존주의의 회칙이 선포될 것이란 기대감을 품은 수많은 인파가 쇄도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드잡이도 심심찮게 일어났으며, 매표소는 장사진을 이뤘고, 의자들이 남아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청중을 헤치고 연단에 오르기까지 15분이나 걸렸다. 열기와 흥분과 청중으로 가득찬 강당에서 사르트르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입을 열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 갔으며, 청중은 그의 표현이 타당하고 궁극적이란 인상을 금할 수 없었다. 서로 포개어져 옴짝달싹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청중은 지금 듣는 문장들이 장차 부단히 인용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를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고 지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는 비단 프랑스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실존주의에 관한 최초의 입문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는 유럽 각지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사르트르가 여기서 말하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답변은 이렇다. "참여적이 되라, 인류를 함께 끌어들여라, 너 자신의 힘만으로 늘 새로이 스스로를 창조하라." 사르트르의 인상적인 표현은 파괴된 유럽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말은, 폐허 속에서 서로를 재발견한 사람들의 절실한 감정에 충분히 와 닿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 문명에 확고히 장착되어 있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휴머니즘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가치는 우리가 그때그때 결단의 상황에서 매번 새롭게 고안하고 실현시킬 때만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이런 자유와 그에 결부된 책임 앞에 우리를 세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현실도피나 비관주의, 정적주의, 에고이즘, 혹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참여의 철학이다. 사르트르는 곧 유럽 전체를 사로잡을 간명한 표현들을 동원한다. "실존주의가 인간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행동에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에게 삶을 허용하는 유일한 것은 행위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이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한마디 변명도 듣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을 선고받았다고 내가 말할 때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주요 인물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프리드리히 니체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 말로
모리스 메를로퐁티
카를 야스퍼스
쇠렌 키르케고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를 융
가브리엘 마르셀
프란츠 카프카
하이데거
김병준
주요 작품
구토 (사르트르)
인간이 사물의 본질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실존의식을 묘사했다.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이다.
존재와 무 (사르트르)
벽 (사르트르)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어떻게 유지해나가야 하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이방인 (카뮈)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허무한 본질을 버리고 자기 자신(실존)의 상태로 남아 새로운 본질을 설립해 실존주의를 나타낸 소설이다. 카뮈는 세상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소설과 세계를 연결했다.
페스트 (카뮈)
변신 (카프카)
현대인의 부조리한 자의식을 그린 소설이다.
주요 인용문
“ 신은 죽었다 ”
— 니체
“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리라.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
— 사르트르
“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었던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의 자유이며, 이 허무의 바다에서 인간을 구출하는 것은 그의 결단이고 사회참여다. ”
—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 사르트르
“ 인간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칠 듯한 명징에의 요구와 이 불합리한 세계의 충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
—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