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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 실존주의, 實存主義, existentialism, 무신론, Existence precedes essence

Jobs 9 2025. 3. 1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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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실존주의를 표현하는 기본 구호와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1945년 강연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 에서 최초로 이 개념을 말했다. 이 개념은 '사물의 본질, 즉 본성이 존재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었다. 실존, 즉 존재가 먼저이고 존재가 등장하기 전에는 본질은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 존재는 처음에는 무엇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즉, 존재, 본질의 가치 및 의미는 당초에는 없고, 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이 생각에서는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이 생각은 크리스트교 등의, 사회에서의 인간에게는 본질 (영혼)이 있어 태어난 의미를 가진다는 고대부터의 종교적인 신념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무신론의 개념의 하나가 되어 있다.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istence precedes essence.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

實存主義

existentialism

 

20세기의 철학 및 문학 사조(思潮)로, 1940년대와 195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통 학자들은 마르틴 하이데거를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본다. 이후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프랑스에서 실존주의의 꽃을 피웠다.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알베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그들이다. 독일에서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카를 야스퍼스가 있다.

 

실존주의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선택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선택에 대한 불안감에 압도되면서도 그 선택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로 대변되는 그전까지의 과학적 근대 철학이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를 단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데 그쳤다면, 실존주의는 '우리는 세계 밖의 전지적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를 실제로 겪고 그걸로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느낌과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철학의 진정한 첫 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의 답은 '자신의 선택', 곧 자유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실존주의는 미래의 대안들을 현재에 미리 구성해 보고 그중에서 자신에게 끌리는 바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그런 선택이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 특성상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보다는 '개별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단지 언어에만' 사로잡혀 있는 다른 철학들의 무미건조함과는 다르게, 실존주의 철학은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례들을 통해서 실제의 삶에 대한 고뇌를 되도록 상세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그게 강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특수성을 모두 인정하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굳이 '논증을 할 필요가 없는 철학'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메리 워낙은 지적한다.

 

결국 한때 프랑스 철학을 대표했던 실존주의는 '문화와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구조주의 철학에 의해서 점차 대체된다. 더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경우에는 '일원화된 체계와 고정된 구조를 부정하며 다원적인 가치를 긍정'하면서 구조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존주의와 연결되는 맥락이 있긴 하다. 다만 실존주의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자유와 미래 가능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 문화적 구조의 해체나 재조정을 통해 자유의 증진과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역사

 

실존주의의 확실한 근원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데,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등을 일찍이 분석한 마르틴 하이데거에 의해 실존주의적 주제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고, 1,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던 전후 프랑스 문학가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이를 논의함으로써, 사회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신적 조류는 1920년대 말, 장 발(Jean Wahl)과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에 의해 처음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0대 초중반부터 하이데거는 강의를 통해 실존주의의 주요 개념들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았다. 1927년 비로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자 유럽 철학계 모두는 이 철학자를 주목했다. 그의 작품은 수십 번 읽혀지고 연구되면서 한순간에 이 개념들은 철학계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9년 프랑스에서 키르케고르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장 발은 실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실존, 그것이 뜻하는 것은 이렇다. 선택하기, 열정적이기, 생성되기, 개별적이고 주체적이 되기, 자기 자신을 무한히 염려하기,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기, 신 앞에 서기." 비록 신을 믿었던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추려낸 개념이었지만, 이러한 '실존' 개념은 당시 1930년대 프랑스의 지성인 사이에 두 가지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첫째, 인간의 삶은 합리적인 근거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며 파편화된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가능성들 사이에 내던져져 있으므로, 실수도 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둘째, 개개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부모와 환경, 키와 외모 등을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미 언제나 주어져 있으며, 인간은 무언가를 스스로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이미 그런 것들과 함께 시작된다.

 

즉 인간은 피투(주어진 것)로 태어났지만 기투(선택하는 것)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얘기다. 이러한 실존의 개념은 '자유의 이념'을 함축한다. 실존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때, 자유란 신과 절대자에 반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뜻한다. 실존을 비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때, 자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라는 책의 근간이 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으로 하룻밤 사이에 유럽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살 데 상트로(Salle des Centraux, 중앙홀)'에서 개최된 이 강연에는 실존주의의 회칙이 선포될 것이란 기대감을 품은 수많은 인파가 쇄도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드잡이도 심심찮게 일어났으며, 매표소는 장사진을 이뤘고, 의자들이 남아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청중을 헤치고 연단에 오르기까지 15분이나 걸렸다. 열기와 흥분과 청중으로 가득 찬 강당에서 사르트르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입을 열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 갔으며, 청중은 그의 표현이 타당하고 궁극적이란 인상을 금할 수 없었다. 서로 포개어져 옴짝달싹 못 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청중은 지금 듣는 문장들이 장차 부단히 인용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를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고 지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는 비단 프랑스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실존주의에 관한 최초의 입문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는 유럽 각지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답변은 이렇다. "참여적이 되어라, 인류를 함께 끌어들여라, 너 자신의 힘만으로 늘 새로이 스스로를 창조하라." 사르트르의 인상적인 표현은 파괴된 유럽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말은, 폐허 속에서 서로를 재발견한 사람들의 절실한 감정에 충분히 와닿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 문명에 확고히 장착되어 있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휴머니즘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가치는 우리가 그때그때 결단의 상황에서 매번 새롭게 고안하고 실현시킬 때만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이런 자유와 그에 결부된 책임 앞에 우리를 세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현실 도피나 비관주의, 정적주의, 에고이즘, 혹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참여의 철학이다. 사르트르는 곧 유럽 전체를 사로잡을 간명한 표현들을 동원한다. "실존주의가 인간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행동에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에게 삶을 허용하는 유일한 것은 행위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행동으로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이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마디 변명도 듣지 못한 채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 버려졌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을 선고받았다'고 내가 말할 때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혹은 "주관성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한다(Si vous voulez, qu'il faut partir de la subjectivité)"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장폴 사르트르의 해석을 따르자면, 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의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다. 즉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의자의 형태가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의자의 형태를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앉을 수 있고, 그렇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의자인 것이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즉 원래의 목적(본질)이 충족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실존)의 형태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자와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결정되지 않은 데다 고정된 것도 아니다. 어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이 아니라, 일단 "신이 없음을 가정"하고 전개되는 것이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다만 위의 정의는 오직 사르트르의 실존과 존재에 대한 것이지, 다른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지목되는 프리드리히 니체나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키르케고르의 경우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괴롭지만 신의 의지로 회귀하여 그것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발현하여 초인이 되어서 삶의 고통과 무의미한 세계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뻥카를 치는 (종교 등의) 기존 도덕을 초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와 니체만 비교해 봐도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지만, 어쨌든 간단한 교양서나 개론서 등에서는 둘 다 실존주의의 시조로 쳐준다(...).

 

전후 실존주의 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부조리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카뮈는 부조리한 이 현실과 인간 조건에 반항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학적 사조는 국내의 근대 문학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6.25 전쟁과 그 이후 사회의 부조리함, 비참함을 다룬 전후 소설에서.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라고 보았으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상극인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연금술마냥 합치려고 하는 이런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그러한 지역, 정치, 철학적 입장 때문에 사르트르는 신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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