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걸까? 시뮬레이션 논쟁
시뮬레이션 가설(Simulation hypothesis, 모의실험 가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사실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가상에서 구현된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라는 내용의 가설
일종의 관념론적 사유에서 시작되어 최근에는 그럴듯한 과학적 추측이 덧붙여지기 시작한 주장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기에 변경지대의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에서도 이러한 사색은 제1원인론, 즉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라 사실상 검증할 방법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 철학자 닉 보스트롬 등이 이른바 '모의실험 논증'을 시도하면서 주목받았다. 대중적으로는 기업가 일론 머스크가 이 주장에 지지를 표하면서 유명해졌다.
관념론 또는 유아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옛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도된 바 있다. 장자의 호접지몽, 르네 데카르트의 데카르트의 악마 등 철학사에서 이와 비슷한 사고실험이 여럿 등장한다. 그러나 과학 실증론을 주장한 프랜시스 베이컨 이래 근대 자연과학은 철저하게 실재성에 입각한 관찰과 입증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우주의 실재성 자체에 의문을 갖는 사유는 최근까지도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의 세계관이 낳은 산물'로만 여겨졌다. 이 때문에 현대에 '세상이 가상 현실'이라는 주장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자 그 자체로 큰 화제가 되었다.
오늘날 시뮬레이션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근거는 물질이 관측되기 전에는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의 법칙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연산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적화와 비슷하다는 것, 플랑크 길이, 플랑크 시간 등으로 보아 우주가 사실 연속적인 아날로그가 아닌 이산적인 최소 단위가 모여 구성된 디지털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 등이 꼽힌다.
브라이언 그린은 시뮬레이션 가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으며, 만일 우주가 시뮬레이션이 맞다면 인류의 과학이 충분히 발달한 미래에 인류가 이 시뮬레이션의 메모리 한계로 인한 오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오메가 포인트 이론 역시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닉 보스트롬의 모의실험 논증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2003년 논문 <당신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Are You Living In a Computer Simulation?)>#에서 제안한 논증이다. 2011년에 수학적인 문제점에 관한 일부 '패치'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러한 사유는 현실의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될 수 없으므로, 모의실험 논증이 시뮬레이션 가설을 입증할 수는 없다. 하술하다시피 시뮬레이션 가설의 참은 어디까지나 한 가지 가능성으로 남을 뿐이다.
전제
보스트롬이 언급하는 모의실험 논증의 전제는 크게 세 가지다.
의식의 기저 독립성: 심리철학적 전제. 요컨대 우리 인간이 지니는 의식의 기저는 탄소로 이루어진 신경계이지만, 실리콘 기반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의식을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어 방 논증이나 철학적 좀비 논증이 성공적이라면 해당 전제는 의심 가능하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다보면 언젠가는 컴퓨터로 의식을 재현해내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물론 현재에는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컴퓨터로 의식을 구현한다는 의미는 우주 모의실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의식, 영혼, 자아 등을 갖는 인격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밍밍한(bland) 무차별 원칙: 인류 원리의 일종. 보스트롬 본인은 보다 강한 입장을 띠지만, 적어도 현 논증에서는 다음 사례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현 인류 가운데 x%는 S라는 특정한 DNA 패턴을 띠고 있다고 가정하라. 이때 S는 일종의 '덤'인 DNA여서 그 어떤 방식으로도 사람의 외양 등에 발현되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껏 DNA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추론은 "나는 S라는 DNA 패턴을 띠고 있다"라는 가설에 x%의 신뢰도(credence)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 세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적어도 아래 세 가지 명제 중 하나는 참이어야 한다는 것이 모의실험 논증의 결론이다.
인류는 지극히 높은 확률로 의식을 재현해내는 수준의 기술력에 미치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설령 그런 기술력을 지닌다 한들, 의식을 재현해내는 대규모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할 것이다.
모의실험 가설은 지극히 높은 확률로 참이다.
보스트롬 자신은 마지막 가능성인 "모의실험 가설은 참이다"가 옳을 확률은 20% 정도일 거라 언급하면서도,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현실에서는 증명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보스트롬은 "이게 데카르트의 악마나 통 속의 뇌랑 뭐가 다르냐?", "이거 반증 불가능한 거 아니냐?", "이거 유신론이 맞다는 얘기냐?" 등등 여러 질문에 대한 FAQ를 직접 본인의 사이트에 게재했다.
보스트롬은 또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모의실험 논증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평을 꼽아 인용하기도 했다.
모의실험 논증은 창조자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으로는 2000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흥미로운 사례라 할만할 것이다.[6]
데이빗 피어스 (보스트롬 曰: "과장된 칭찬임(exaggerated compliment)")
감사합니다, 보스트롬 박사님! 제가 방문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완전 틀렸다는 걸 증명해 주셨군요![7]
익명의 제보자 (보스트롬 曰: "엇나간(잘못된) 칭찬임(misfiring compliment)")
유사 논의
우주는 지나치게 광대하며 또한 커지고 있으므로, 컴퓨터 또한 이 우주 안에 있는 한 우주를 통째로 모의실험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의실험 논증을 지탱하는 데 '우주를 통째로 모의실험'하는 것은 하등 필요하지 않다. 그 모의적 의식의 '주변'만 구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닉 보스트롬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Simulating the entire universe down to the quantum level is obviously infeasible, unless radically new physics is discovered. But in order to get a realistic simulation of human experience, much less is needed – only whatever is required to ensure that the simulated humans, interacting in normal human ways with their simulated environment, don’t notice any irregularities. The microscopic structure of the inside of the Earth can be safely omitted. Distant astronomical objects can have highly compressed representations: verisimilitude need extend to the narrow band of properties that we can observe from our planet or solar system spacecraft. On the surface of Earth, macroscopic objects in inhabited areas may need to be continuously simulated, but microscopic phenomena could likely be filled in ad hoc.
새로운 물리학이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양자 레벨로 우주의 모의실험을 하는 건 확실히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을 흉내 내는 거라면 모의실험 당하는 사람이 모의실험되는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않게만 하면 된다. 지구 내부의 미시적 구조는 문제없이 생략할 수 있다. 먼 천체라면 압축적인 표현방식을 쓸 수 있다. 비슷해야 하는 건 우리 행성이나 태양계 내 우주선에서 관측 가능한 성질들뿐이다. 지표면에 있는 일상속의 거시적 물체들은 계속해서 모의실험되어야 하겠지만 미시적 현상들은 필요에 따라 구현되어도 될 것이다.
닉 보스트롬 (2003) "Are You Living In a Computer Simulation?"
문제는 엄격한 수학적 논리 위에 세워진 물리현상을 이런 미봉책으로 건성건성 때우다시피 할 경우 진작에 과학자들에게 모조리 들통났을 것인데다 애초에 인간을 미봉책으로 구현하면 사회생활이나 경제는 동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날씨를 예측하는 문제를 예로 들어서 컴퓨터 성능의 한계로 그러한 모의실험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가 '보는' 부분만 파동함수가 붕괴하며 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계산하는 게임 속 시뮬레이션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다중우주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보는' 것 때문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파동함수가 붕괴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파동함수 붕괴방식은 일반적인 게임 속 시뮬레이션 방식과 차이가 있다. 물론 우리가 본다는 행위가 파동함수의 붕괴를 유발시키는 건 맞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본다'라는 행위가 기본적으로 빛 입자와의 상호작용이라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키는 건 인간의 의식 혹은 인식이라기보다는 입자 간의 상호작용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2021년 5월에 arxiv에 인간의 의식이 파동함수의 붕괴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논문이 올라왔다. Chalmers, David J., and Kelvin J. McQueen. "Consciousness and the Collapse of the Wave Function." arXiv:2105.02314. 이건 오히려 이걸 뒷받침하는 내용이 될 듯
시뮬레이션 가설의 문제점
시뮬레이션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근거는 물질이 관측되기 전에는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의 법칙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연산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적화와 비슷하며 여기에 플랑크 길이, 플랑크 시간 등으로 보아 우주가 사실 연속적인 아날로그가 아닌 최소 단위가 모여 구성된 디지털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모의실험 가설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의식만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대니얼 데닛이 그러한 시각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외부자극, 즉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외부자극 없이 인간의 의식을 구현하는 것은 '이론상' 가능할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즉 유한시간 내의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실행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시뮬레이션 우주치고는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문제도 있다. 인간의 의식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목적이라면 지구와 태양만 구현하거나 온라인 게임처럼 상호작용 부분만 구현하면 되는데 불필요하게 우주의 규모가 너무 크다. 고차원에서는 에너지가 훨씬 남아돌아 아무것도 아니라쳐도 같은 비용대비 결과차이가 너무 나는데 비합리적이다.
중립
닐 디그래스 타이슨: 우리가 시뮬레이션일 확률과 아닐 확률을 50:50이라 주장한다.
긍정
일론 머스크: 대표적인 모의실험 가설 옹호자, 우리의 존재가 시뮬레이션이 아닐 확률이 0.0000001%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론 머스크는 과학자가 아닌 사업가이므로 공신력 있는 발언은 아니다.
일론 머스크는 모의실험 가설이 참이 아닐 확률이 10억분의 1일 것이라는 코멘트를 남긴 적이 있다
부정
맥스 테그마크: 본인의 고유 주장인 수학적 우주 가설과 충돌하는 측면도 존재하며 논리적으로 오류임이 분명하며 USB의 존재가 다중우주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 주장한다. 우리가 시뮬레이션 세상에 살 확률을 대략 17%라고 말했다.
대니얼 데닛: 모의실험 '가설'에 대해 터무니 없는 헛소리라는 평을 남겼다(Preposterous nonsense).[8]
리사 랜들: 우리가 시뮬레이션일 확률은 0%라고 말했다.
로저 펜로즈
맥스 호닥: 모의실험 가설에 반대한다. 같이 뉴럴링크를 창업한 일론 머스크가 모의실험 가설을 강하게 지지하는것과 대조된다.
우주가 자가 학습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논문도 나왔다.
록밴드 MUSE의 8집 앨범 Simulation Theory, 록밴드 NELL의 EP 앨범 Dystopian's Eutopia는이 모의실험 가설을 컨셉으로 잡고 제작된 음반이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밈으로서 쓰이는 지구 온라인이라는 드립이 시뮬레이션 가설과 흡사하다.
시뮬레이션, 우주에 대한 이해를 열고 넓히다
우주론학자의 ‘우주론 시뮬레이션’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별의 일생…
양자우주론, 시뮬레이션 우주론까지
“현실 재현 불가능, 협력의 종합예술”
상자 속 우주
우주론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앤드루 폰첸
과학은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가설을 제시하고 실험과 관측으로 이를 검증해 이론으로 만든다. 그 대상이 너무나 거대해서, 또는 아득할 정도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서 실험과 관측이 곤란한 경우라면 어떨까? 먼 우주는커녕 태양계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인간은 ‘우주는 극도로 밀도가 높은 한 점에서 대폭발로 탄생했다’, ‘기체 구름이 자체 중력으로 뭉쳐서 별이 되었다’, ‘우주는 지금도 가속 팽창하고 있다’ 등 오늘날 우주를 설명해주고 있는 이론들을 도대체 어떻게 건져 올린 것일까?
‘상자 속 우주’는 영국의 우주론학자 앤드루 폰첸(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이 ‘우주론 시뮬레이션’을 설명하는 책이다. 시뮬레이션은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는 현상을 컴퓨터로 모방하는 작업”의 총칭으로, 이를 우주에 적용한 것이 우주론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을 그저 현실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실험을 컴퓨터 속에서 대신 수행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지은이는 우주에 대한 연구의 역사를 훑으며 시뮬레이션이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 계산과 과학, 인간의 창의력이 혼합된 과학계의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뮬레이션의 기원은 일기예보다. 19세기 미국 기상학자 클리블랜드 애비와 20세기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과 도러시 부부는 유체(fluid)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세 개를 활용해 물리법칙으로 날씨를 예측해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시뮬레이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초기조건’과 ‘규칙’(물리법칙)이다. 초기조건을 숫자로 변환한 뒤 주어진 규칙을 적용하면 대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선구자들은 당시 발달된 통신 기술(전신)에 힘입어 초기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했으나, “엄청난 속도로 계산을 수행하는 획기적 기술”, 곧 컴퓨터의 개발과 발전에 활용하기까진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시뮬레이션 안에 초기조건과 규칙 외 숨겨진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기 중 모든 원자와 분자를 추적하고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대상을 격자(그리드)로 구획하는 등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동원한다. 이때 격자 내부에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예컨대 강우를 유발하는 작은 구름의 생성-을 놓치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서브 그리드’를 설정해 규칙으로 유도되지 않는, 대략적인 계산과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 별도의 규칙을 반영시켜 시뮬레이션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우주 시뮬레이션 역시 지구의 대기 시뮬레이션과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핵심 운동이 중력이란 걸 알았다. 2차대전 중 스웨덴 천문학자 에리크 홀름베리는 전구를 활용해 “중력의 세기를 빛의 광도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100만년에 걸친 별들의 움직임을 재현했는데, 초기조건으로부터 일정 단계까지 움직임을 진행시킨(‘드리프트’) 뒤 중력을 고려하여 그 경로를 수정(‘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컴퓨터도 없이 수행한 이 시뮬레이션에서 “두 은하가 가까이 접근하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나로 합쳐진다”, “두 은하가 충돌하면 나선형 팔이 생긴다” 등의 사실이 발견됐다.
우주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는데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대부분은 미지의 물질이란 어려움이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중요한 이유다. 1970~80년대 ‘천문학의 대모’ 베라 루빈은 은하가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회전한다는 사실로부터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도 않으면서 중력을 행사하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제시했고, 마크 데이비스와 그 동료들(‘4인조 갱단’)은 “상자 속 우주 시뮬레이션에 표준 드리프트-킥 정식을 적용하여 엄청난 중력을 발휘하는 암흑물질이 수십억년에 걸쳐 물질 네트워크(‘코스믹 웹’)를 구성해온 과정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그 뒤 마거릿 겔러는 이 코스믹 웹이 수억 광년에 걸쳐 뻗어 있는 개별적인 ‘끈’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발견해, ‘반중력’ 특성을 지녀 우주를 팽창시키는 물질인 ‘암흑에너지’의 존재를 제시했다.
별과 은하의 생성과 소멸 등 ‘눈에 보이는’ 5%가 되레 난제를 던졌다. 예컨대 우주에는 기체가 널려 있으니 모든 것을 중력에 맡겨두면 우주 공간은 이들이 모두 별로 뭉쳐 밝은 빛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지만, 우주망원경 허블이 촬영한 ‘딥 필드’ 사진에서 은하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작았다. 이는 앞서 천문학자 비어트리스 틴슬리가 제기했던 “별은 은하 속에서 얼마나 빠르게 형성되는가” 물음과 연관된다. 이에 대해 틴슬리의 동료였던 리처드 라슨은 “별의 생성 속도를 조절하는 무언가가 우주 전역에 걸쳐 작용하고 있다”는 ‘피드백’ 아이디어를 냈고, 그 뒤 시뮬레이션에서 별이 소멸하고 다시 생성하는 과정에서 암흑물질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초창기 우주와 광활한 코스믹 웹,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은하와 별, 행성을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다는 핵심적인 사실이, 시뮬레이션에 힘입어 밝혀진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우주론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주가 이런 모양인지, 그러니까 한 점에서 시작된 우주의 밀도가 왜 지금처럼 균일하지 않은지 해명하려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중우주론’ 등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들까지 도출해냈으며, 급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자체가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만약 현실을 100% 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그 속에 있을 확률도 50%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시뮬레이션은 현실 세계를 담은 팩시밀리가 아니며,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고 단정한다. 그가 볼 때 시뮬레이션의 진정한 목적은 가상에서 현실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지식과 통찰,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의 협력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 그 자체의 본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