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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 루트, 향신료 무역, 베네치아, 포르투칼, 후추

Jobs 9 2021. 6. 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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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7마리는 육두구 500g에 해당하며, 후추 30kg은 성인여자 노예 1명에 해당한다.” 오늘날 흔히 식탁 위에서 접할 수 있는 향신료들이 약 1000년 전에는 지금과 다른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금보다 더 귀했고 신에게 받쳤던 제물상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후추,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엔 불 태워 버리는 게 낫다며 섬 전체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육두구, 많은 양의 정향을 생산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되었던 노예들…향신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경제적으로 중요한 비단길(빨간색)과 향신료 무역로(파란색)는 1453년 경에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봉쇄됐으며, 이는 아프리카 해상 무역로 개척을 위한 탐험의 자극제가 됐고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 무자비한 정복활동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향신료 중의 하나인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다. 후추는 지금처럼 요리용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아랍 상인들은 1453년 무렵 유럽으로 후추를 전달하면서 유럽은 특유의 향과 맛에 깊게 빠져들었다.특히 로마 시대에는 운송이 느리고 냉장 기술이 발달되기 전이어서 상한 음식의 맛과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이 나는 후추를 사용했다. 
중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럽보다 이슬람 국가의 세력이 커졌다. 인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은 후추 무역을 독점했고 유럽에 공수되는 물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선 품귀 현상으로 인해 후추의 값은 몇 배 이상으로 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후추를 하루라도 빨리 자국으로 옮기기 위해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 각국의 선박은 해상무역의 요충지인 베네치아로 모여 들었다. 

후추의 향에 길들여진 유럽이들은 후추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해상무역이 요충지였던 베네치아로 모여들었다. 베네치아 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유통 경로를 모두 막았고 유럽 각지의 상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윤을 챙겼다. 15세기로 들어선 후추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독점으로 다른 나라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유럽 국가들은 베네치아가 아닌 다른 경로로 인도에 들어갈 수 있는 바닷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가운데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곶인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어 포르투갈 항해가가 앞서 개척한 항로를 따라 인도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 Kozhikode)에 도착했다. 향신료 교역을 독점하고 있는 베네치아 상인들은 당황했다. 

포르투갈은 인도에 도착하면 후추를 공짜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과는 달리 당시 캘리컷의 지배자는 금을 대가로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포르투갈은 총과 군대로 무장한 20척의 배를 끌고와 무력으로 정복하고 차차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정복활동은 더욱 심해졌다. 인도양에서 무슬림 선박을 공격했으며 수백 명의 순례자를 죽이고 도시 전체를 불태우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 결과,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의 후추 생산과 무역을 독점했고 인도양의 지배권도 얻었다. 

 

향신료 독점


| 주변국들의 시기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당시 그의 항해 목적이 향신료를 얻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포르투갈의 무역 독점에 주변국들은 시기의 눈빛을 보내는 동시에 인도로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의 동쪽 가장 자리에 도달하는 포르투갈보다 짧은 항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서쪽 항로를 따라 어느 육지에 닿았을 때, 콜럼버스는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그 땅을 서인도제도라 부르고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신대륙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항해에서는 서인도 제도에 제대로 도달하게 된다. 그의 일기장을 살펴보면 ‘후추보다 더 좋은 향료’라고 기록돼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고추다. 고추는 동쪽으로 전파되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까지 건너갔다. 고추는 전 세계로 퍼져 아프리카, 동아시아, 남아시아 요리와 다양하게 결합해 사랑을 받았다. 그 고추가 1500년대 유럽으로 건너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2세기를 지나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고추에 대해 국내 최초의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로, 불과 400여년 전의 일이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김치 또한 그 전까지는 빨갛지도 않았고 매운 음식도 아니었다. 

 

향신료 유통


| 식민지 건설
후추와 고추만큼이나 귀중한 향신료로는 육두구Nutmeg와 정향을 꼽는다. 기록에 의하면 1512년에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몰루카 제도는 향료 섬the Spice Islands이라고 불렸다. 가장 먼저 육두구와 정향에 관심을 보인 포르투갈은 몰루카 제도를 강제로 점령했다. 16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정향 무역을 지배했지만 독점하지는 못했다. 포르투갈은 몰루카 제도 사람들과 무역과 요새 건설에 대한 협정을 맺었고 이곳에 노예를 들여와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바다와 섬, 그 안에서 나는 후추, 정향, 육두구와 같은 향신료를 얻기 위해 많은 나라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은 1600년, 네덜란드는 1602년, 덴마크는 1616년, 프랑스는 1664년에 저마다 일종의 무역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말만 무역회사지, 당시 국제법과 인권도 제대로 없던 시대에서는 유사시에는 군사력을 행사하는 곳이기도 했다. 각 국의 동인도회사는 서로의 해상무역을 통제·감시하면서도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1605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몰루카 제도를 강탈하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육두구와 정향의 재배권을 확보하며 독점하게 된다. 

강력하게 무장한 네덜란드 군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도네시아의 원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육두구 숲을 모조리 파괴했다. 향신료가 생산되는 몰루카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은 15세기부터 19세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장기간에 걸친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전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파산하자 영국이 향신료 무역의 새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향신료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동인도회사의 향신료 독점 체제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영국 정부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책임을 물어 회사 운영을 정지시켰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왕에게 헌납했다. 동인도 회사는 187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향신료는 동과 서, 남과 북의 여러 문화를 이어주었다. 현재에도 향신료를 이용한 여러 조합의 새로운 요리가 탄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재료이지만, 우리 식탁으로 오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맛과 향을 간직하고 있는 향신료는 앞으로도 우리의  입안에서 깊게 맴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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