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해도 그대로인 이유
물음 : 사회에서 훌륭한 인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학자, 교수, 법조인, 정치인, 목사, 신부, 승려, 성직자 등)들이 왜 성폭행, 성추행 같은 부도덕한 행동을 할까요? 사람(스님, 비구,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10년 20년 수행을 해도 왜 변화가 없고 진보가 없을까요?
답 : 훌륭한 인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학자, 교수, 법조인, 정치인, 목사, 신부, 승려, 성직자 등)들이 성폭행, 성추행 같은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앎(의식적인 앎)과 행동(무의식적인 행동)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스님(비구, 비구니)들이 10년 20년 수행을 하는데도 변화가 없고 진보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이 바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무의식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설법; 法을 설명함)을 빌어서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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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마타(定, 선정, 삼매 계발 수행; 止)-위빠사나(慧, 지혜, 통찰지혜 계발 수행; 통찰, 觀) 수행법은 사마타로 계발된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을 사용하여 마음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층과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 층 사이의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이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비유하자면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은 빙산의 수면 위 부분이고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은 빙산의 수면 아래 부분이다.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예컨대, 의식이 “배고프다 밥 먹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의식은 몸을 이끌고 밥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 이후의 밥 먹는 과정에서 의식은 더 이상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의식이 간여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이 알아서 숟가락을 잡고, 밥을 뜨고,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위와 소장과 대장을 움직이고, 소화액을 분비하고, 음식물을 소화시켜서 온 몸 구석구석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밥 먹는 과정뿐만 아니라 걷고, 뛰고, 서고, 앉고, 눕고, 잠자고, 숨 쉬는 과정 등등 일상생활의 모든 과정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절묘하게 상호작용하며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의식을 인간 정신작용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일상의식)은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도 모른다.
이 모름(무지, 무명)에 숨겨져서, 상카라(업業 형성 작용; 어리석은 마음의 습관적 반응 또는 작용, 아상/에고심의 습관적 작용; 습관적 탐진치 작용; 行)들은 무의식(심층의식)의 차원에서 계속 일어나고 증식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의식(표면의식) 층에 도달하게 될 때는 대부분 너무 강하게 증식되어서 마음을 쉽게 압도해버린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사마타('사마디/삼매/선정/정定; 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반야/지혜/혜慧;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를 통해서
자신의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에서 어떤 탐진치가 어떻게 작용해서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지 깊이 관찰(통찰)하여 의식화하고 이해함으로써 바와나빤냐(修慧, 수행지혜, 통찰지혜; 수행의 통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 통찰지)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해야 한다.
스스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완성하면 무명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에 잠재된 탐진치까지 완전히 소멸된다.
이러한 과정(수행 과정)이 생략되면(거치지 않으면)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에서 일어나고 증식되는 탐진치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10년 20년 수행을 하더라도 변화나 진보가 없고, 또는 어떤 수양(인격 수양)으로 훌륭한 인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학자, 목사, 신부, 승려, 성직자 등)이나 어떤 수행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소위 대오각성했다)는 사람(스님, 승려; 비구, 비구니 등)도 앎(의식적인 앎)과 행동(무의식적인 행동)이 따로 놀게 된다.
그래서 훌륭한 인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학자, 교수, 법조인, 정치인, 목사, 신부, 승려, 성직자 등)들도 성폭행, 성추행 같은 부도덕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잠재의식(무의식, 심층의식) 속에 탐진치가 남아있는 한 인간은 고(苦; 고통, 괴로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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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이래로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생을 거치면서) 무명 상태에서 습관화된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은 쉽게 자신의 상카라(어리석은 마음의 습관적 반응 또는 작용; 습관적 탐진치 작용)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들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聖人)의 가르침, 예컨대 부처님 설법(진리/法을 설명함)이나 예수님 말씀을 들어도 쉽게 자신의 행동(무의식적인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생명체는 물질-정신적 습관 덩어리(쌓임/집적/무더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서양 과학(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체(물질)의 관성력(慣性力, force of inertia)이란 물체(물질)가 지닌 '관성(慣性; 습관慣의 성질性, inertia)의 힘(force)', 즉 '습관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물체,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마음; 의식+무의식)에도 관성력(습관의 힘, 습관의 잠재력)이 존재하는데 이를 부처님께서는 '깜마(kamma, 카르마karma; 業) 발라(bala; force, power; 力)'라고 부르셨다. 업력(業力)은 고대인도어 '깜마(카르마) 발라'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이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짓는 행(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習, 습관; 業)을 형성하고, 동시에 잠재력(습관의 힘, 습성, 습관의 경향성; 업력業力)이 되어 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 인연)이 갖추어지면 표출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에 어리석은 마음의 습관적 반응(습관적 탐진치 작용; 상카라)에 갇혀 지내는 것이다."
-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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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覺) : 마음(의식+무의식)의 각성, 무의식의 의식화
깨달음(覺; 마음의 각성)이란 달리 말하면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의 의식화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註]를 바르게 실천하여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면(무의식이 완전히 의식화되면, 완전히 깨달으면), 마음(의식+무의식) 속에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되면서 텅 빈 하늘 같은, 깊고 넓은 바다 같은 불성(佛性; 깨달은 자/부처佛의 성품性; 무량한 자비희사의 마음)이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무량한 자비(멧따-까루나;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분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사랑)와 반야(빤냐;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의 실상과 진리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가 드러나면서 무한한 자유(해탈)와 평화(우빽카)와 완전한 행복(닙바나, 니르바나; 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한다.
어떤 이는 말하길, 수행의 마지막 점검 단계가 시장 바닥으로 나왔을 때도 마음(깨달은 마음; 자비희사의 마음,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여여한가(흔들리지 않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거친 경계(환경과 관계) 속에서도 깨달은 마음(자비희사의 마음,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흔들리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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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식(識, 윈냐나viññāṇa;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bhavanga)과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에 관련된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오늘날의 지식과 용어를 사용하여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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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지혜(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멧타-까루나;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분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사랑) 속에서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