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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수정주의, 한국전쟁의 기원, 아시아학, 한국학, 시카고 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

Jobs9 2024. 4. 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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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수정주의, 아시아학, 한국학, 시카고 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

 


브루스 커밍스

 

미국의 한국학자이며 시카고 대학교의 전 석좌교수이다. 아시아학의 거두

1943년 9월 5일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나고 아이오와와 오하이오에서 자랐다. 데니슨 대학교에서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1961년에 평화봉사단으로 대한민국에 온 것이 인연이 돼 한국 연구에 파고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뒤에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스와스모어 칼리지, 워싱턴 대학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좌교수가 되었다. 

 

계보
미국의 1세대 한국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 1924~2001),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의 계보를 잇는 2세대 미국인 한국학자다.

커밍스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팔레의 동료 겸 후임 교수가 됐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커밍스의 논문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가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하지만 팔레는 자신의 의견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편 커밍스를 워싱턴 대학교에 꽂아주었다. 

와그너와 팔레의 학풍은 존 페어뱅크(John Fairbank, 1907~1991)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 외에는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Walt Rostow, 1916~2003)의 근대화 이론을 동아시아학에 적용한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1910~1990) 등이 학문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커밍스의 연구 경향은 이들과 많이 갈라섰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시카고 대학교의 해리 하루투니언(Harry Harootunian, 1929~)과 나지타 데쓰오(奈地田哲夫, 1936~2021)의 학풍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가르칠 당시에는 특별히 제자를 많이 두지 않았으나, 시카고 대학교로 학적을 옮긴 이후부터 한국사를 전공한 제자들을 여럿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UCLA의 이남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마이클 신, 컬럼비아 대학교의 찰스 킹 암스트롱 등이 있다. 방송인으로 유명한 타일러 라쉬의 졸업논문도 지도했다.


활동영역
6.25 전쟁 기원에 대한 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지한 학문의 영역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작품인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1년에 출간됐는데, 이미 그 전부터 우드로 윌슨 센터를 중심으로 6.25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면 6.25 전쟁은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냉전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6.25 전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1987년 말 김학준이 대한민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6.25 전쟁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에서 논의된 6.25 전쟁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한 것이다. 

커밍스의 업적은 당시 주류 이론이었던 전통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냉전에 대한 인식과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은 전통주의적 시각이 주류였다. 전통주의적 시각이란 냉전과 6.25 전쟁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전지구화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야욕에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이 바로 냉전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6.25 전쟁은 당시 냉전의 격화 속에서 미국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전초전, 대리전적 성격을 띠었다고 보았다.

이에 반대하는 수정주의는 1960년대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윌리엄 A. 윌리엄스가 있고, 그는 저서인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에서 국제사회의 문제를 잘못된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보았다.

커밍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6.25 전쟁의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나 김일성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내부적 사회 모순에 의해 촉발됐다고 보았다. 그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편은 식민지 시대 한국사회의 계급, 사회적 모순을 실증적으로 분석했으며, 당시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를 통해 분석의 신뢰도를 높였다. 2편에서는 과도한 해석, 해주 진공설이나 미국이나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차용해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1편은 상당히 높은 분석을 기반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전통주의적 시각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체계적이었기에 이후 박명림 등 대한민국의 6.25 전쟁 학자들은 이러한 커밍스의 연구를 많이 부정하면서도 그 담론에는 상당히 따르고 있다. 물론 외국의 경우 대표적으로 웨더스비를 비롯, 스툭 등 커밍스의 분석을 평가절하하고 국제사회에서의 힘의 역학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커밍스의 연구는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선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소위 자유 진영에서 북한을 '악의 무리'나 '공산주의 괴뢰 집단'이 아닌 진지한 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커밍스가 처음이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제자인 찰스 암스트롱이 이어갔으나, 이후 연구 표절로 인해 학계에서 매장당했다. 이때 커밍스도 수제자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아니라고 실드를 치다가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맞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망신 좀 당했었다.

한때 6.25 전쟁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한 내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는 이미 1945년 해방 당시부터 사실상 내전 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존 학계에서는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8일으로 한정해 과연 6월 25일 누가 먼저 침공했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커밍스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좌익vs우익, 농민vs지주, 노동자vs자본가, 식민체제 협력자vs독립운동가, 소련vs미국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모순들이 겹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각종 반공/반소 의거(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대표적)와 남부에 벌어진 대구 10.1 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4.3 사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물론이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과 지주의 충돌 등으로 해방 이후 조선은 전국적 혼란 상태였다. 거기에 1948년 남북 양쪽 정권 수립 이후에는 1950년 6월 25일 직전까지 38선 전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커밍스는 이 모든 것을 감안해 봤을 때 한반도 전역이 사실상 이미 내전 상태였고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선제 공격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초판 이후 개정판에선 견해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1949년까지의 한반도 내부의 혼란상을 강조하고 있다. 6월 25일의 상황은 북의 조선인민군이 보다 큰 규모의 국지전을 시도하다가 전면전, 총력전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에 나온 여러 정황 자료상 남침설이 근거가 적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내전 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침설, 음모론적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모양이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보면 어쩌다 만나게 된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가 "이제는 더 이상 북침설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물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든 일도 있다고 한다. 커밍스가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대학가의 필독서로 만들었던 전대협, 한총련 인사들이 이 책을 근거로 들어 남침유도설을 주장했고, 더 나아가 6.25 이전의 사건을 들어 북침을 주장해 북한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읽었든 읽지 않았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다. 1980~1990년대 운동권 출신자와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에서는 "6월 25일이란 전면남침 날짜가 의미 없다" 내지 "적어도 북한은 우발적으로 방어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배운 책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리고 커밍스 본인도 교묘하게 책에서 말장난을 많이 쳤으며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진 않으면서 동조하는 서술을 많이 남겼다. 또한, 김일성이 정말 남침을 하고 싶었다면 겨울에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뇌피셜로 남침설을 부정하기도 했고, 조선인민군에 복무하면서 전쟁 계획 작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전쟁이 준비되었음을 증언하자 사기꾼이라고 불필요하게 공격적으로 비난하는 등 자신이 역으로 비판당할 건덕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무례하게 비난해서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커밍스로부터 터무니없는 연구를 했다고 매도를 당했던 한국의 원로 정치학자 신복룡은 커밍스가 대한민국 사회에 분열만 가져온 간사한 인간이라고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문제는 이러한 남침 유도설은 미국이나 서방에서 이미 진즉에 깨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남침 유도설 중 하나인 해주 진공설은 1960년대 굽타에 의해서 제시됐고, 콜코 부부는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타당하지 않았다. 흔히들 소련의 기밀자료가 풀려서 남침 유도설이 거짓이라고 밝혀졌다고 하지만 소련의 기밀자료가 나오기 전부터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것은 명백했다. 커밍스의 저서도 그러한 점에서 초판 당시에도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이미 1980년대에도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 소련이 전쟁을 지원한 사실은 넘치고도 넘쳤다. 참고로 소련 기밀문서의 경우 러시아 정부가 선별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뢰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커밍스도 캐서린 웨더스비가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커밍스의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을 시작하자 방어 차원에서 소련 기밀문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웨더스비가 이 논쟁에서 압승했다. 기본적으로 증거가 너무 차고 넘쳤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북한의 침공이 확실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에선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소련의 지원이나 남침이 훨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고 소견을 밝히면서 기존의 의견을 수정했다. 하지만 2010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25 전쟁의 성격을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이라고 정의하며 내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남한의 경우는 좀 다른데, 남한의 경우 6.25 전쟁을 금기시 해왔다. 1980년대 남한 현대사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그 논의를 그 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다고 박명림 교수가 말했지만, 사실 남한은 1987년까지 6.25 전쟁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속에서 6.25 전쟁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던 것이고, 그 연구의 기반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었던 것이다. "6.25는 스탈린이 독단으로 일으켰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냉전에서 있어서 특히 6.25 전쟁에 있어서 수정주의적 사조를 만들었고, 그 틀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6.25 전쟁에 대한 시각은 총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통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이 소련과 중국의 팽창정책에서 찾는다. 두 번째는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사회내부의 모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다고 본다. 물론 혹자는 3가지라고 해서 북한이 주장한 북침설도 넣기는 하는데, 이미 학문적으로 증명이 끝난 부분이다.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초판, 1988년에 박세길이 쓴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권에도 남침유도설 같은 수정주의 관점의 견해들이 대거 수록되었으나, 동시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명림의 "6.25 전쟁사 쟁점"도 같이 수록되었다. 특히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1995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출판하면서 6.25 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을 풍부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여, 커밍스의 남침유도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수정주의적 사조는 박명림도 따르고 있다. 

원래부터 커밍스의 방법론은 철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증주의이다. 미국인으로서 수천건의 한국어 사료를 섭렵하여 연구한 것은 대단하다. 당시 한국학자 중에서도 그만큼 자료를 수집해서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엄청난 사료를 섭렵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한국어 사료에 집중한 것도 나름 그의 연구에 한계를 가져왔는데, 그가 주목한 한국어 사료들은 주로 6.25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 문서들, 특히 강원도당의 지방 문서고들인데, 이런 문서에는 스탈린이 지시했다는 내용 따위 들어있을 리 없고 이러한 문서만 봐서는 북한이 매우 자주적인 건설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90년대까진 커밍스를 비롯해 노획된 북한 문서를 많이 본 학자들은 북한이 소련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오해석을 내놓곤 했지만 소련 문서고가 해금되면서 북한 정권 건설 독자성의 결정판으로 여겨졌던 토지개혁조차도 스탈린이 조만식의 지지기반인 중농과 부농을 조지기 위해 실행한 것임이 드러나면서 북한 자주론의 위상은 많이 박살났다. 

논란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김구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것으로, 임정의 요인들이 해방 이후 귀국하자 김구가 일단의 첩의 무리들과 유급 총잡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다.고 했으며 송진우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김구라는 근거로 송진우 암살 배후를 김구라고 주장했다. 훗날 김자동은 김구가 송진우 암살 배후인건 우파의 음해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에 자신이 송진우 사위랑 같이 살았는데, 송진우 유족들도 김구가 배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자동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다. 

2021년에는 "미국이 6.25 전쟁을 끝내지 못한 것이 북한의 핵 보유를 촉발했다"고 발언했다. 

 

 

 

수정주의(修正主義 / revisionism)

 

기존 사상을 해당 사상의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개량, 변질, 수정하는 행위나 이념을 나타낸다. 비슷한 말로 재평가가 있다.
중소결렬 이후 중국이 소련을 비난할 때 붙인 레테르가 바로 '수정주의자'다.

 

역사수정주의
그 중 역사수정주의(historical revisionism / 歷史修正主義)란 한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기존의 시각을 재해석하는 역사학의 한 분야다.

수정주의는 종종 반동을 정당화하는 형태로 이용된다. 가령 홀로코스트를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반유대주의자 및 네오 나치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형태로 이용되는게 그 예.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려는 사상은 '부인주의(否認主義, negationism)'라고도 불린다. negationism은 의미가 확장되어 역사 왜곡의 번역어로도 사용된다. 

나치 독일의 행보나 파시즘, 나치즘 등을 재평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독일이나, 르완다 내전 당시의 투치족 학살을 부정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르완다 등, 명명백백하게 폐해를 불러온 사상이나 사건을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법인 국가들이 존재한다. 또한 파시즘의 팽창주의로 인해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 사실관계 규명같은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 추축국이 옳았느니 뭐니 하는 수정주의는 금기시되고 있다. 그렇기에 역사를 담론할 때, 특히나 2차대전과 같은 민감한 현대사를 다룰 때 '수정주의적', '수정주의자'라는 표현은 비하적, 공격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에서 수정주의란 어쩔 수 없이 요구된다. 어떤 학설도 완전한 것은 없으며, 결국 이는 후학들의 새로운 연구로 극복되기 마련이다. 결국, 현재의 정설도 처음에는 수정주의였다는 것이다. 어떤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역사학에서 정설은 맹종의 대상이 아니다. 일례로 서구학계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수정주의의 주장에도 허점이 있었지만, 기존 정설의 체계를 상당부분 허물었으며, 결과적으로 혁명사에 대한 보다 풍부한 연구성과를 촉진했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딜레마 앞에서 더욱 입체적인 관점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수정주의는 소설 장르에 적용되기도 한다. 역사소설 혹은 가상역사물에서 숨겨지거나 의도적으로 억압된 비밀의 역사가 있으며, 이를 재발견하거나 기존 역사를 재해석하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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