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차 세계대전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은 나치 독일에서 탄생할 뻔했다.
당시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핵물리학이 발달한 나라였고, 우라늄에 의한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독일 먼저 밝혀냈다.
하지만 독일이 핵무기 개발에 실패한 이유는 유대인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치 독일에 있는 유능한 물리학자 중에는 유독 유대인 출신이 많았는데 독일이 극단적인 반유대인 정책을 펼치자 그들이 대거 다른 나라로 망명한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다. 유대인이었던 그 또한 독일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자칫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에너지 연구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핵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이 권고를 받아들인 미국은 영국, 캐나다와 함께 원자폭탄을 생산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비밀리 추진해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이 결과 원자폭탄 탄생의 시초가 되는 트리니티 원폭실험을 하기에 이른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 앨러모스 인근의 사막 한가운데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 준비가 시작된다. 트리니티는 핵실험이 있었던 이곳의 명칭이자 암호명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군사기밀이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야 실험이 공개되었다.
원리나 구조가 간단한 우라늄과 달리 플루토늄 핵폭탄은 전혀 새로운 구조인 데다가 기술적 난도가 높았기 때문에 실전에 투입되기 전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1945년 7월 16일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트리티니 핵실험의 위력은 TNT 20kt이 한꺼번에 터졌을 때와 같은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폭발의 위력은 전 뉴멕시코주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고 정부에서는 지역 공군기지의 탄약 창고가 폭발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는 짧은 입장 표명뿐이었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훗날 이 원자폭탄 기술이 실제 사용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핵실험을 하기 두 달 전인 1945년 5월, 이미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외치던 일본이 남태평양의 모든 식민지를 다 빼앗겼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본토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동맹관계에 있었고, 자기들이 국제관계의 중심축이라는 뜻으로 주축국이라 불렀다.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까지 항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지만 일본은 본토에서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철근과 콘크리트 등의 구조물을 해안가에 배치하며 결사항전의 태세를 보인 것이다.
기나긴 전쟁으로 고통받은 미국 국민들의 종전 요구가 거세지는 데다가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에 의한 미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결국 일본에 핵무기 사용을 결정한다.
미국과 영국 등은 마지막으로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뜻하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근본이라 여겼던 일왕을 천황이라 불렀으며 항복을 받아들일 경우 군의 통수권자이자 국가 원수인 일왕이 전쟁 책임을 지고 전범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조건 항복이라는 연합국 최후통첩에 일본이 애매한 태도로 대응하자 서방언론에서는 항복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때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소련의 중재로 미국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만약 항복을 하게 되면 이곳 군대도 모두 철수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끈질기게 버티며, 뒤로는 계속 소련에 중재를 요청했다. 협상을 통해 식민지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원폭 투하 작전에 돌입했고 목표 도시로 히로시마가 결정되었다. 당시 히로시마는 산업지대가 많아 지속적으로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중요 군사거점이자 병사들의 승선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보이’
1945년 8월 6일 리틀보이를 실은 B-29 폭격기가 다른 2기의 기체와 함께 히로시마로 향했다. 원폭 투하가 있기 한 시간 전, 일본의 조기 경보 레이더는 본토 남쪽에서 접근하는 미국 비행편대를 발견하게 된다.
곧 히로시마를 비롯한 주변 도시에서는 즉각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급경보를 알렸으며 사람들은 황급히 방공호로 대피했다. 오전 8시 무렵 비행기 개체 수가 3대밖에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되자 단순 정찰 임무용 정찰기로 판단해 공급경보를 해제하였고, 시민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9분 후 목표 타격지점에 도달한 B-29 폭격기에 원폭 투하 명령이 하달되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실전에서 핵무기가 사용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리틀보이를 투하했던 B-29 폭격기의 명칭은 ‘에놀라 게이’였으며, 기장인 티베트 대령의 어머니 이름을 딴 것으로 인류 역사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남겼다.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600m 상공에서 폭발했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가 무려 4,000도에 달했다.(태양의 표면 온도 6,000도) 이 엄청난 열기로 인해 폭심지 근처에 있던 모든 생명체들이 증발했다.
리틀보이의 위력은 TNT 15kt으로 알려졌으며 트리니티 핵실험보다는 약했지만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11 km2 범위에 화재를 일으켰다. 히로시마의 69% 건물이 파괴되고 나머지 건물들도 크나큰 손상을 입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인명피해였다. 당시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가 출근 시간이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폭발 직후 24만 명의 히로시마 인구 가운데 9만 명이 그 자리서 사망했고, 화상이나 후유증으로 인한 희생자까지 총 16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
원폭 투하 후 일본 반응
당시 일본군 지휘부에서도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난 비행기는 3대에 불과했고 설령 공급이 있다 하더라도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히로시마에 있던 군 지휘부와 연락이 되지 않자 혼란스러워했고, 즉시 비행기를 보내 피해를 조사할 것을 명한다.
도쿄에서 3시간여를 비행해 히로시마 인근에 도착한 정찰 비행기 조종사는 히로시마로부터 160km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을 목격한다.
곧 히로시마 상공에 다다르자 모든 것이 불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시가 보였다. 이 사실은 도쿄에 보고되었다.
당시 도쿄 라디오에서도 히로시마 폭격 피해를 보도했는데 실제 라디오 내용은 이러했다고 한다. “사람, 동물,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죽음 속에 그슬렸다”
당시 미국인들은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인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를 듣고 하늘을 쳐다볼 때 리틀보이를 터트려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유도하자는 의견도 나왔고, 원폭 후 이미 도시 기능이 마비된 히로시마에 한 번 더 소이탄으로 폭격을 감행해 모조리 태워 죽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에 원자폭탄임을 떠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원폭 투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두꺼운 옷으로 열기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정신 나간 보고를 하는 등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기어코 일본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자 미국은 핵무기를 한발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내에서 항복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천황제 유지 조건만 붙이고 항복하자는 화평파와 전범재판을 일본이 직접 해야 한다는 등 온갖 조건을 요구한 강경파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면서 항복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떨어진 원자폭탄 팻맨
두 번째 목표 도시로 결정된 곳은 나가사키였다. 본래 나가사키는 히로시마 작전 중 변수가 생길 시 대체할 후보도시 중 하나였다. 당시 대규모 산업지대로 전쟁 물자를 생산했으며, 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도시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
미군의 작전은 리틀보이 투하 때와 비슷했으며, 두 번째 원자폭탄의 이름은 ‘팻맨(’Fat Man-뚱뚱한 남자)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리틀 보이보다 훨씬 크고 뚱뚱한 모양을 한 폭탄이었다.
1945년 8월 9일 아침, 원자폭탄 ‘팻맨’을 실은 B-29 폭격기가 다른 두 기체와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한 대는 기상관측 및 사진 촬영을 담당하고, 다른 한 대는 원폭 투하 결과를 측정하는 임무였다.
당시 B-29 폭격기 기장 스위스 소령은 ‘복’이라는 친구의 비행기를 빌려 작전을 수행하게 됐고 ‘복스 카(BOCKCAR)'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나가사키 상공은 쾌청할 것이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구름이 잔뜩 끼어 육안으로 시야 확보가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원자폭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보조연료 장치를 떼어내 연료가 부족했고 팻맨을 싣고 다시 기지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시야 확보를 할 수 없더라도 레이더를 이용해 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오전 11시 1분, 나가사키의 산업지대가 밀집된 곳에 팻맨이 떨어졌다. 본래 타격지점으로부터 3km 덜어진 곳이었다.
폭탄이 투하된 지점은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들이 밀집된 지역이었고, 상공 440m에서 폭발했다. 당시 팻맨의 위력은 리틀 보이보다 강력한 TNT 21kt의 파괴력이었다고 한다.
폭발지점은 순식간에 섭씨 3,900도에 육박했으며 산악지형이 많고 히로시마보다 인구가 적은 나가사키였지만 6만 명이 그 자리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항복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까지 원폭이 투하되자 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담화를 통해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고 일왕이 발표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도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미군 전함이 미주리함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열렸고,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이 공식적인 종전일이 된다.
훗날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을 하였더라도 미국의 원폭 투하는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인 7월 25일, 미국에서 이미 원폭을 투하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명령서는 당시 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미국의 전쟁부 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이 서명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것이다.
명령서의 요지는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이른 시일 이내 원자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의 선전포고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까지 원폭이 투하되었지만 정작 일본에 가장 큰 충격은 소련의 선전포고였다.
두 나라는 1941년 체결한 불가침 조약을 근거로 미국의 참전 요청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 판단한 소련의 스탈린은 8월 9일 오전 0시에 일방적으로 일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으로 총공세를 명한다.
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련군은 만주와 사할린, 쿠릴열도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소련의 남하를 경계해왔고,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전력을 꾸준히 증강시켜 왔다. 그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가 자신의 곡창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병력 수는 90만 명에 달해 그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소련의 기갑부대를 막을 항공 전력이 없었고,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15일까지 불과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 트루먼에 회신을 보내 쿠릴열도를 점령할 시 소련의 영토로 인정해 달라는 동의를 구하기도 했고, 실제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자국의 영토로 흡수해 버렸다.
일부 기록에서는 일본이 항복한 이유를 두고 소련군에게 일본 본토까지 장악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내린 결정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문제는 쿠릴열도 점령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쿠릴열도에서 전투가 시작된 건 8월 18일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이후라는 점이다. 오늘날 일본은 쿠릴열도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까지는 여전히 전시 중이었다는 주장을 고수해 아직까지 양국이 분쟁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