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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 정치기 - 비변사, 삼정문란, 홍경래 임술농민 봉기

Jobs 9 2022. 9. 2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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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기 비변사

 

세도 정치

1. 배경

정조 사후 정치 세력 간의 균형 붕괴 → 소수의 유력 가문에 권력 집중

2. 전개

순조(안동 김씨) → 헌종(풍양 조씨) → 철종(안동 김씨)

3. 권력 구조의 변화

비변사로 권력 집중, 세도 가문이 주요 관직과 군영 장악 → 의정부와 6조의 유명무실화, 왕권 약화 초래

 

세도 정치의 폐단과 사회 모순의 심화

1. 정치 기강 문란

매관매직, 과거 시험의 부정 성행 → 수령의 농민 수탈로 이어짐

 

▶세도 정치가 가져온 정치적 폐단

과장(科場)의 폐단은 예전에도 가끔 있었으나, 그때는 고시(考試)를 명백히 밝히기 어렵고 정식(程式)을 정밀히 하지 못하는 데에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과장의 폐단은 고시, 정식 외에 또 있다. 물색(物色)으로 뽑고 서찰로 꾀하여 법을 업신여기고 사(私)를 꾀하는 버릇을 예사로 행하며, 심하면 막중한 국가시험을 마음대로 하여 자신의 재물로 삼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번번이 소과, 대과를 치르면 온 나라의 희망을 잃어 어지럽고 해괴한 소문이 사방에 파다하니, 이를 막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답겠는가?- "헌종실록"

 

→19세기 세도 정치는 국왕의 외척이 된 소수의 유력 가문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세도 정치가 행해지던 시기에는 정치 집단 간의 경쟁은 물론 세도 가문을 견제할 세력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도 가문은 온갖 폐단을 일으켰는데, 과거 시험의 부정과 수령직의 매관매직이 대표적이었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그 대가를 백성들을 수탈하여 거두어들이고자 하였음

 

2. 양반층의 분화 가속화

권력에서 소외된 양반층의 몰락 → 향반이 되거나 잔반으로 전락

 

3. 삼정의 문란

전정의 문란

각종 부가세로 법에 정해진 것보다 많은 액수 부과, 지주가 부담할 세금을 소작농에게 전가

군정의 문란

군사 기구의 확대로 군포 부담 증가 → 농민의 군역 회피(노비가 되거나 양반으로 신분 상승, 도망 등) → 남아 있는 농민의 군포 부담 증가

환곡의 문란

환곡의 강제 배당, 환곡을 전혀 대여하지도 않고 이자 납부 강요 등

 

하하전(下下田)이 2만 결이고 하중전(下中田)이 1만 결인데 통틀어 6두씩 거두니 그 쌀은 18만 두가 된다. 아전은 이처럼 징수하지만, 호조에 보고할 때에는"하하전(下下田)에서는 각기 4두를 거두고 하중전(下中田)에서는 6두를 거두어서 그 쌀이 모두 14만 두 뿐이다."라고 한다. 옥 같은 쌀 4만 두가 중간에서 빠져나가니 이것이 무슨 법인가.- "목민심서"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을 입었고

갓난아인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 "다산시선"

봄철에 좀먹은 쌀 한 말 받고서

가을엔 온전한 쌀 두 말을 바치고

게다가 좀먹은 쌀값 돈으로 내라 하니

온전한 쌀 판 돈을 바칠 수밖에

이익으로 남는 것은 간활한 자 살을 찌워

한번 벼슬길에 천경 논이 생긴다네

- "다산시선"

 

→삼정의 문란은 전세를 징수하는 전정의 문란,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의 문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 후에 갚게 하는 환곡의 문란을 말한다. 세도 정치기에는 수령직을 돈으로 산 탐관오리들이 관직을 사는 데 든 돈을 보충하기 위해 농민 수탈을 강화하면서 그 문란함이 더욱 심해짐

 

 

농민 저항

 

홍경래의 난(1811)

1. 원인  

세도 정치의 폐단, 서북 지역(평안도)에 대한 차별

2. 봉기  

몰락 양반인 홍경래 주도, 영세 농민·중소 상공업자·광산 노동자 등이 참여

3. 전개  

평안도 가산에서 봉기 → 청천강 이북 지역 장악 → 5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됨

홍경래는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 과 함께 봉기하여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

 

임술 농민 봉기(1862)

1. 원인

삼정의 문란 등 지배층의 탐학

2. 전개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

3. 진주 농민 봉기

원인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

봉기

몰락 양반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 → 자진 해산

영향

다른 지방의 농민 봉기 자극 →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남 → 전국으로 확대

19세기의 농민 봉기

세도 정치기인 19세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1862년에는 함흥에서 제주까지 전국 72개 군현에서 개별적∙산발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남

4. 정부의 대응

안핵사·암행어사 파견, 삼정이정청 설치 → 성과 미흡

 

 


 

기출 문제

 

 Q  19세기 농민들의 동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왕조 부정 논리를 담고 있는 <정감록>과 미륵신앙이 농민들 사이에 퍼졌다.

②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난’에서는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가 대거 가담하였다.

③ 농민들의 불만이 조직적으로 확산되어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괘서(掛書)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④ 지주.토호의 압박과 삼정의 수탈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 조직의 일환으로 농민층에서는 향약이 성행하였다.     

 

【해설】 정답 ④  

* 19세기 농민들의 동향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농민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항쟁이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외에 중소 상인 등의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 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백성 사이에는 왕조 부정 논리를 담고 있는 <정감록>과 미륵신앙 등의 비기, 도참설이 널리 퍼져갔다. 

④ 16세기 들어 지방 사족들이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은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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