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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신학, 세대주의 종말론, 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 19세기 초 개신교 신학 이론, 극단적 종말론, 기독교 근본주의,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Jobs9 2024. 1. 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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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신학, 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

19세기 초 태동한 개신교 신학 이론. 역사를 몇 개의 파트(보통 7개)로 나누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간 한국은 세대주의를 19세기 초 태동한 개신교 신학 이론으로 역사를 몇 개의 파트(보통 7개)로 나누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가르친다고 보아왔다. 하지만 최근 외국 연구에서 존 넬슨 다비 이전에 이미 개신교에 세대주의가 있었음을 밝혔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미국 부흥사 조나단 에드워즈가 미국을 천년왕국으로 본 것이라든지 아니면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스라엘 독립을 찬양하는 등등 자국을 이스라엘로 보기도 하고 중동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기도 한다. 크게 둘로 나뉜다고 하겠다.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서술하는 성경의 서술과 교회에 대한 성경의 서술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해, 교회를 회복된 이스라엘로 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세대주의 신학 유래
세대주의적인 경향 자체는 교부 시대부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개혁기에 정립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에 알려진 세대주의는 과거와는 단절된 19세기 초부터 것들이다. 영국의 목사 존 넬슨 다비(1800~1882)는 더블린에서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며 세대주의를 확산시켰다. 이후 다비는 플리머스 형제단이란 독립 교파를 결성했고, 신선함을 갈망하던 교인들의 갈망과 맞아떨어져 크게 성장할수 있었다. 

이후 플리머스 형제단은 분열하고 쇠퇴하게 되지만 세대주의는 사그러들지 않고 미국에서 다시 불길을 열었다. 다비의 미국 집회에서 큰 감명을 얻은 변호사 사이러스 스코필드는 세대주의 이론에 기반해 주석성경을 만드는데 이게 그 유명한 스코필드 성경이다. 스코필드 성경은 미국 개신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미국 개신교는 세대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한국도... 그 스코필드 성경은 지금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 중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플리머스 형제단은 시기상 루터교회보다도 훨씬 뒤늦은 1974년에야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

 

세대주의 신학 비판
세대주의 자체가 무조건 이단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설로 대접하긴 해도 그 자체로 "너 이단"을 때리진 않는다. 신앙의 대선배로 존경받는 조지 뮬러, 윌리엄 켈리, C.H.매킨토시 같은 인물들부터 세대주의의 대가람인 플리머스 형제단의 구성원이었다. 주류 교단인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의 종말론에도 어느 정도 세대주의가 들어가 있다. 

문제는 극단적 종말론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의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4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종말을 염두에 둔 영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교묘하게 더 나가서 '즉각적인 예수의 재림이나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그 주장에 근거로 근래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성경의 특정 예언 내용들과 결부시켜서 해석하거나, 더 나아가서 특정 날짜나 시간을 그 때로 선언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패턴이 많이 보인다. 6~70년대의 냉전과 핵위기는 세대주의의 온상이던 미국 사회를 공포감으로 적셔놓았고, 그 가운데 핵전쟁, 인구 감축, 적그리스도의 등장, 대환란과 휴거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가운데 할 린지가 쓴 '대유성 지구의 종말'이 대히트하게 되었고, 극단적 종말론자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세계관은 이 책을 통해 정립되었다. 이 극단적 종말론이야말로 세대주의가 가진 문제의 대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미치는 해악은 개신교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관과 변하지 않는 구원의 방식에서 신자들의 관심을 빼앗아, 오직 자신들이 해석하는 성경의 특정 상황과, 그 상황을 자신들이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재앙을 통과만 하면 된다는 식의 왜곡된 신앙을 펴 나가고, 그에 대한 근거로 정치적, 사회적, 국제적, 역사적 상황들을 음모론에 근거하여 갖다 붙이면서, 마치 그것이 기독교의 기본 입장인 양 호도한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은근히 그 주장하는 자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 확대에 이것을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마치 특정 정파나 특정 정치/사회 단체나 특정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성경적 행동인 양 말이다. 그것이 신자들 중에서 맹목적인 부류와 만나면 파괴력은 커진다. 그런 신앙 기조 속에서 때로는 그 신앙적인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나 성경보다는 그 세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예언자, 신학자, 목사, 교주에게 더 부여하는 입장을 취하게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개신교 내부의 문제는 물론이요, 사회적인 물의를 빚는데까지 나가기도 한다. 물론 요한묵시록이나 다니엘서를 보면 문자적으로 종말의 때에 대한 상당한 강한 경고적인 메세지가 많이 저술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을 못박아 둔다.

세대주의적 해석을 개신교인들이 잘 사용하는 경우에는 종말에 대한 경각심을 신앙에 잘 활용하여 본인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무조건 이단이거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해석이 그렇게만 활용되지는 않았고, 근대 이후 역사에서 개신교가 빚어온 많은 물의와 이단 및 사이비 사건들의 중심부에서 자리잡은 신앙적인 태도이기도 했기에, 결론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매우 경계하는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 관점 중 하나로 쭉 지목되어 오고 있다.

세대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성경에 대한 관점이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 그 자체를 사실로 보는 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1886년 미국의 선교운동 이론가인 A.T.피어선과 복음전도자 D.L. 무디는 대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도전을 위해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란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에서 배양된 선교사들은 이후 한국에서도 많은 사역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피어선과 무디의 세대주의적 성향이 배어들어갔다.

초창기에는 세대주의로 인한 문제가 크게 일어나진 않았다. 물론 이때부터 세대주의적 세계관이 한국 개신교계에 침투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냉전, 국내적으로는 독재와 정치적 불안을 겪는 한편 미국판 세대주의 세계관 역시 한국 개신교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점점 악화되는 정세, 바코드(현재는 베리칩)를 통한 적그리스도 체재의 인간 통제와 휴거를 통한 도피라는 설정(?)은 한국 개신교의 세대주의 정서 안에 녹아들었고 결국 다미선교회, 구원파라는 복수의 폭탄을 만들었다.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인 선교 방식 , 기독교 근본주의와 성경 문자주의 해석의 배경 안에는 결국 세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WCC 부산대회 반대운동이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배경에도 역시 세대주의 종말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교리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지 않은 개신교 교회의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도 세대주의적인 사고나 신학관이 나타날 정도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세대주의 신학
 
세대주의 신학(dispensationalism)은 영국의 배타적인 플리머스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제도권교회 성공회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배타적인 교회운동이다.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에 의해 영어권에 널리 보급되었다. 따라서 세대주의자들 가운데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많다.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는 세대주의 신학을 대변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대주의에도 점진적 세대주의와 극단적 세대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극단적 세대주의의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정통신학인 ‘개혁주의 언약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두 신학체계는 구원과 율법, 종말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다비는 자신의 교리를 “재발견 진리”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한국의 폐쇄적 형제교회와 유병언, 박옥수, 이요한의 구원파, 말씀보존학회, 베뢰아, 그리고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 등이다. 
 
세대주의의 보편적인 교리적 특징은 개혁주의 신학과 네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둘째,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 왕국의 회복을 주장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에 따르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는데, 이는 다윗 왕국의 회복이요, 유대인들이 천년왕국의 시민이 되고 이방인은 그의 입양된 시민이 된다. 셋째,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분류하여 각 세대별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배타적인 개념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넷째로는 7년 대환란 전 휴거설과 예수님의 이중 재림을 주장한다. 
 
 
이단적 종말론
 
구원과 율법과 은혜: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시민법과 의식법, 도덕법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등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기대적 성격으로, 신약에서는 오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성격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세대주의자들은 율법의 도덕적, 규범적 용도를 무시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은혜시대’에 살고 있는데 율법인 십계명을 존중은 하지만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으로 지킬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2000년 안에 예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 설교했던 대형교회 J목사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유병언과 이요한의 구원파도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쳤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천 년은 계시록 20장에서만 사용된 단어인데, 10을 세 번 곱한 숫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세대주의 전철년설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 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도 그리스도의 지상통치도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천년설이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지배적인 천년 왕국”의 견해라면, 세대주의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춘 지상 천년왕국의 해석”이 19세기 중엽부터 일어나서 보수적인 기독교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왔다. 전천년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구분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는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간에 분명한 차이점을 둔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 교회의 휴거와 함께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써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 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는 세대주의 종말론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써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피난처에 모여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든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신앙이 아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 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 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신천지, 안상홍 증인회, 인터콥, 구원파, 은혜로교회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그리스도의 2중 재림,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의 위험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 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 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 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써,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처처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지진과 화산폭발, 쓰나미가 일어나고 있다;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 각종 사이비종교가 난무하고 있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베드로도 훈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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