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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식탐, 동파육, 북경오리, 만한전석

Jobs 9 2025. 6. 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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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식탐, 동파육, 북경오리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굉장히 강해서 한 끼에 무려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으며, 이는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식비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천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자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천만 원 정도다.

 

그리고 서태후는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 먹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거나 아예 과일을 요즘의 디퓨저처럼 소비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요리들 중에서 오리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 육식을 무척 좋아했으며 서태후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렸지만, 오리고기/돼지고기/닭고기로 만든 요리만큼은 매끼마다 빠진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나 좋아해서 향령(響鈴)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번 즐겼다. 고기 외에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후식으로는 과일/사탕/떡을 즐겨 먹었다. 이러다 보니 서태후가 전용 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고,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제 서태후의 식생활과 관련된 야사가 있다. 피난 생활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으면서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하루는 자금성으로 돌아온 서태후가 그 때 그 맛을 떠올리고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황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입맛이 고급이 된 서태후에게 그 옥수수빵을 그대로 올려봐야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요리사들은 궁리 끝에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옥수수빵을 만들어 바쳐 서태후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옥수수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와 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북경오리, 서태후가 사랑한 미식

 

청나라 말 서태후는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간 최고 권력자였다. 사치를 일삼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미식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런 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돈을 물 쓰듯 썼다. 이런 서태후가 즐겨 먹었던 요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태후의 미식을 알아보기에 앞서 그녀가 최고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단 비교하자면 서태후는 서양 역사에서 최고의 음식 사치와 식탐 때문에 패가망신한 로마 황제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서기 69년 4월에 즉위해 12월까지 단 8개월 동안 권좌에 앉았던 비텔리우스의 음식 사치가 얼마나 심했는지 로마 시대 역사가 타키투스는 저서인 『역사(Histories)』에서 재위 기간에 끝없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 로마 화폐로 약 9억 세스테르스를 낭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미화 약 4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런 비텔리우스 황제에 뒤지지 않았던 인물이 서태후였다. 19세기 말 동양 최대 해군 함대였던 북양함대 유지에 필요한 군비를 빼돌려 청 황실의 여름별장인 이화원 건설에 쏟아부으면서 흥청망청 놀고먹는 데 낭비했던 사실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막대한 군비를 빼돌려 이화원을 재건한 서태후는 자금성을 떠나 이화원에 머물며 온갖 사치를 누렸는데 그중에서도 먹는 음식에 막대한 비용을 썼다. 보통 한 끼 식사에 백은 100냥을 썼다는데 이 정도 금액은 당시 평민들의 일 년 치 수입을 넘는 돈이었다고 한다. 하기야 북양함대 건설의 투자비용이 연간 300만 냥이었으니 한 끼 식사에 함대 건설비의 1만분의 1을 쓴 셈이었다.

 

서태후는 이런 엄청난 돈을 쓰면서 도대체 무엇을 먹었을까? 서태후의 한 끼 식사를 위해서는 보통 100가지의 요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아무리 미식가이면서 대식가라고 하지만 한 번에 100가지 요리를 다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거의 모든 요리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고 대부분의 경우는 3~4가지의 요리만 먹었다고 한다. 서태후가 젓가락도 대지 않은 음식들은 모두 내관과 궁녀들의 몫이었으니 엉뚱한 사람들이 음식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특별히 좋아한 음식은 오리고기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 오리고기 요리는 서기 400년 무렵 남북조시대 무렵부터 궁중요리로 발달했다. 원과 명, 청나라를 거치면서 다양한 오리 요리가 선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북경 오리구이는 청나라 황실에서 특별히 발전시킨 요리다.

 

미식가인 만큼 먹는 방법도 독특해서 많은 경우 북경 오리구이는 살코기는 먹지 않고 바삭하게 구운 껍질만 밀전병에 싸서 먹는다.

북경 오리 고기 중에서도 서태후가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오리 혀였다. 오리 혀(鴨舌)라고 하니까 우리한테는 엽기적으로 보이지만 중국 궁중요리에서는 상어지느러미, 말린 해삼과 함께 고급 미식 재료로 꼽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태후를 모셨던 여관(女官)인 유덕령(裕德齡)이 남긴 『어향표묘록(御香缥缈錄)』에는 오리 혀는 고기와 함께 구워서 만드는 데 서태후가 좋아했기에 커다란 접시에 담아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았다고 나온다.

 

참고로 오리 혀 맛이 궁금하면 혹시 베이징 여행할 때 왕푸징의 유명한 북경 오리구이 전문점 전취덕(全聚德)에서 북경 오리구이를 풀코스로 주문하면 맛볼 수 있다.

 

어쨌든 얼핏 들으면 겨우 오리고기, 그것도 오리 혀 같은 엽기적이지만 특별할 것 없는 것으로 입맛을 만족하게 하려고 그 많은 돈을 썼을까 싶지만 내막을 알면 조금 다르다. 서태후 식탁에 차려지는 요리는 그렇게 만만한 음식들이 아니었다.

 

서태후 생일상에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1861년 음력 10월 10일은 서태후의 서른한 살 생일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날 아침상에는 어중이떠중이 음식은 빼고 모두 24가지 요리가 차려졌다. 이 중에서 과일 사탕 떡 등의 후식 네 가지를 뺀 스무 가지 요리 중 무려 여덟 가지가 오리구이와 오리탕, 오리 콩팥 등 각종 오리고기였다. 주요리로는 만 년 동안 복과 수명을 누리라는 뜻에서 복·수·만·년(福壽萬年)이라는 글자가 한 자씩 새겨진 4개의 대형 접시에 오리고기와 닭고기, 돼지고기가 각각 차려졌다.

 

오리고기를 유별나게 좋아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화려하다거나 소문만큼 사치스럽다고 할 만한 요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서태후를 보고 음식에 흥청망청 돈을 쏟아부었던 미식가라고 비난할까 싶지만 내용을 알면 이유를 알 수 있다.

 

평소 100종류의 음식을 준비하고 그중에서 서너 가지만 골라서 먹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생일상의 24가지 요리는 상대적으로 간소하기 그지없고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요리를 만드는 재료가 유별났다. 후식과 국수를 제외한 대부분 요리를 귀하디귀하다는 바다제비 집을 소스로 조리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생일상, 서태후의 미식이 특별하다고 하는 이유다. 






 

 

서태후의 식탐이 음식문화 꽃피웠다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2대 요리로 꼽히는 중국 요리. 오늘날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까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국 음식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혁명의 맛>은 한족, 몽골족, 여진족, 후이족 등 여러 민족의 대립과 융합의 역사가 중국의 깊고 넓은 음식 문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중국인들이 지금처럼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된 것은 명나라 때였다. 청대에 이르러 베이징 요리는 봄에 만발한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건륭제는 ‘만한전석’이라는 최고의 궁중 요리를 완성시켰다. 만주족과 한족의 진미 150가지를 한 상에 올린 만한전석은 제국 통치의 이념을 담은 정치적 요리였다.  

 

검소했던 황실의 타락과 부패는 역설적으로 요리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이전까지 황실이 금했던 상어 지느러미에 탐닉했던 서태후는 지칠 줄 모르는 탐식가였다. 서태후의 ‘맛의 사치’ 덕에 중국 요리는 전례 없이 화려한 백화제방 시대를 맞았다.  

 

20세기의 사회주의 혁명과 문화혁명 역시 음식 문화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저자는 베이징의 오랜 서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뒷골목 ‘후퉁’, 공산당 간부들의 화려한 연회, <마오쩌둥 어록> 암송이 필수 코스였던 1970년대 거민식당 등 당시 외국인이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탐사해 마오쩌둥 시대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이 책은 ‘음식’을 소재로 삼아 중국 역사를 들여다보는 독특한 문화사이자 흥미로운 풍속사다. ‘황제들의 중국’과 루쉰의 시대, ‘공산당의 중국’과 문화혁명의 시대, 그리고 현재의 중국까지 시공을 초월하여 종횡무진하는 ‘혀’의 탐사기다.

 

<혁명의 맛>을 읽고 나면 중국요리는 ‘달고 맵고 기름지다’라는 생각이 일종의 선입견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중국 4대 요리(베이징 요리, 상하이 요리, 광둥 요리, 쓰촨 요리)의 특징과 기원은 물론이고,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 양고기 꼬치구이처럼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요리가 탄생한 과정을 ‘중국 음식을 사랑하는 미식가’의 입장에서 애정 어린 목소리로 들려준다. 

 

특히 저자는 오로지 한국어판을 위해 9장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을 썼으며, 이 글에서 한국, 중국, 일본에 고추가 전파된 경로, 조선족과 여진족의 음식 문화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둥베이 요리 등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악녀가 사랑한 맛, 무소불위 서태후의 끝없는 식탐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만한전석은 전설의 연회양식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한결같은 해설은 인류역사에 등장하는 잔칫상 중에 아마도 가장 호사스러운 밥상이라는 것이다. 1977년에 홍콩의 유명레스토랑 국빈대주루가 일본 TBS TV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한전석의 108가지 산해진미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2006년에 방영된 중국 공영방송 CCTV의 인기 프로그램 ‘만한전석 요리대회’에도 비슷한 규모의 요리상이 소개되었다. 당시 가격으로 10인상 기준 약 한화 3400만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3개월 간 준비한 음식을 사흘에 걸쳐 먹는다는 연회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300가지 요리가 차려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세상에 어떤 식탁이 이렇게 사치스러울 수 있을까. 만한전석의 내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청나라 초기에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합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명칭으로는 변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중국의 정사에 만한전석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 식단도 전해지지 않는다. 문화대혁명 때 관련 자료들이 대부분 소실되었고, 청나라 왕조가 무너지면서 궁중요리사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만한전석의 뿌리라고 할 만한 잔치는 청나라에 관한 역사서 ‘청사고’에 등장한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와 6대 건륭제가 주최한 천수연이라는 큰 연회이다. 강희제의 잔치에는 65세 이상 만주족 문무대신 680명, 한족 관리 340명 등 약 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통합을 위한 잔치였다는 명분을 유추할 수 있다. 당연히 융합이라는 목적은 물론, 피지배민족에 대한 위세과시의 용도도 짐작할 수 있다. 건륭황제 재위 50주년 기념 천수연에는 만주족과 한족 노인은 물론 조선을 비롯해 주변국 노인까지 모두 3000여명을 초대했다. 조선의 정조 실록에도 건륭제의 천수연에 참석하는 정사와 부사를 모두 회갑이 넘은 사람으로 차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때 예조판서 정창순이 “천수연은 태평을 과시하려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라고 아뢰자 정조임금이 “이는 경사를 널리 함께하려는 뜻인 것이다.”라고 답한다. 잔치의 목적이 복합적임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만한전석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이두의 ‘양주화방록’이다. ‘양주화방록’은 18세기 후반 양주의 문화 및 사회모습을 다각도로 기록한 백과 사전류의 서적이다. 이때의 만한전석은 양주의 지방 관리들이 건륭제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연회였다. 만한전석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나 실상 그것을 가장 즐긴 사람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청나라 말기를 지배했던 서태후였다. 서태후는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고, 공식명칭은 너무 길기 때문에 대개 줄여서 부르는데 효흠현황후 또는 자희태후라고 한다.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25세에 남편이 죽자, 바로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 후 72세에 죽을 때 까지 어린 황제들을 수렴청정하면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거세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사치와 식탐에 절어 산 인물이다. 

 

서태후는 어마어마한 인간이었다. 섭정으로서 황제보다 훨씬 큰 권력을 잔인하게 휘둘렀으며, 사치와 향락을 위해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몰락시킨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설에는 서태후가 아편전쟁 때 불타버린 이화원을 복원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환갑잔치를 벌이는데, 은전 3천6백만 냥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액수는 당시 청나라 1년 예산의 3분의 1이 넘는 규모였다는 것이다. 더한 것은 그 낭비가 북양함대의 군함구입비를 유용한 것이라 그로 인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치욕의 패배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옷과 보석, 음식에 대한 과소비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옷이 3천 여벌, 7백여 상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고, 전신에 보석을 휘감고 살았다.  

 

서태후는 지금까지도 여태후,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로 꼽힌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 청사공정의 일환으로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엄청난 사치와 낭비벽의 소유자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태후의 많은 욕심 중에서도 식탐과 미식추구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녀의 음식욕심은 참으로 대단한 수준이고 분량이었다. 우선 그녀는 평소 한 끼에 120여 가지에 달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한 끼 식사에 드는 비용이 지금 돈으로 무려 1억 원에 육박했다. 먹지 않을 것이라도 관상용으로 호화스러운 음식을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놓게 했다. 같은 음식을 세 숟가락 이상 뜨지 않았고, 한 번 먹은 요리는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렸다. 육식을 무척 좋아해서 돼지고기나 닭고기, 오리고기로 만든 요리는 끼니마다 빠지지 않았다.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먹었으며, 제비집과 샥스핀 같은 고급재료로 만든 음식을 선호했고, 후식으로는 과일과 사탕, 떡을 즐겨 먹었다. 사과 향을 좋아해서 그 냄새를 맡기 위해 소비한 사과만 1년에 15만개였다고 한다. 

 

만한전석을 처음 만든 사람은 강희제라고 해도 그것을 가장 누리고, 더욱 호화롭게 만든 인물은 서태후라 할 수 있다. 만한전석의 시작은 국가통합을 위한 정치의식으로 고안되었지만 나중에는 서태후만을 위한 잔치로 전락한 것이다. 서태후만이 만한전석을 먹을 수 있었고, 그녀가 식사를 할 때면 황제와 황후는 옆에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는 음식으로 절대 권력을 과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서태후가 봉천에 갈 때 만한전석을 위해 준비한 물품목록을 살펴보면 그 행태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전용열차 16칸 중 4칸이 화로 50개를 실은 주방이었고, 100여명의 요리사가 동승했다고 한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수백종류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식자재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디저트 및 간식의 재료를 싣고 다녔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스케일이다.  

 

서태후가 즐긴 만한전석의 재료에는 산과 들, 바다 등에서 진미를 8개씩 모아 ‘사팔진’이라 명명한 것이 있다. 그것들 중에는 상어지느러미와 제비집은 물론 낙타의 혹, 곰발바닥, 원숭이골, 표범태반, 코뿔소꼬리 같은 괴이한 재료도 포함되어 있다. 평소 기름진 음식, 특히 고기요리를 입에 달고 산 서태후의 건강이 좋았을 리 없다. 그녀는 과식으로 인한 복부팽창과 위 기능 저하, 이질에 항상 시달렸다. 결국 그녀는 72세 생일축하연에서 만한전석을 즐기다 지병인 이질이 도져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황제 푸이로 잘 알려진 선통제는 광서제가 죽자 서태후가 세 살도 채 안된 아기를 황제로 지명한 것이다. 수렴청정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었지만 자신도 광서제가 세상을 뜬 다음날 죽음을 맞이하였다. 서태후는 역설적으로 “다시는 나 같은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가 죽은 직후 청나라 왕조도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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