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의 명칭은 북간도 용정 일대의 넓은 평야를 의미하는 ‘서전대야(瑞甸大野)’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塾 글방 숙 |
1910년대 국외 항일 운동
북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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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남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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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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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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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화하고, 1910년에 한⋅일 합병 조약을 맺어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북간도, 남만주, 연해주, 그리고 미주 지역 등지에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할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애국지사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이 서서히 이주하였고, 그곳에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민족정신 발양과 교육을 위해 민족학교가 세워졌고, 여러 한인 자치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상설은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 건물로 개수하고, 서전평야에서 이름을 딴 서전 서숙이라는 민족 학교를 개교한 것이다.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 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이었다. 그러나 서전 서숙이 실제로 중점을 둔 교육 내용은 철저한 항일 민족 교육이었고, 따라서 서숙은 독립군 양성소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숙은 고등반과 초등반을 구분하여 갑반에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으로 분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상설은 교사들의 월급과 학생들의 교재비 및 학용품 등을 일체 개인 사재로 부담하여 완전 무상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온성⋅종성⋅회령 등의 주변 지역들을 방문하며 신교육과 민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자제들을 서전서숙에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는 등 민족 교육에 큰 열성을 쏟았다.
그러나 이상설이 1907년 4월에 고종의 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자 학교는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그즈음 통감부의 간도 출장소가 설치되고,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결국 서전 서숙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폐교되었다.
서전서숙은 비록 1년여의 짧은 역사였지만,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녔었고, 그 뒤 북간도와 만주 일대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의 민족 교육이 항일 운동으로 발전해 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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