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심부 기행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다. 동시에 조선 왕조 500년 도읍지이기도 하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1394년 개경(현 개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벌써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배달겨레의 중심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서울은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 나지막한 구릉이 발달하였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널따란 분지를 이룬다. 특히 주변으론 북한산, 도봉산 같은 세계적인 명산을 두르고 있어 세계의 웬만한 대도시 중에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는 한강은 양평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서쪽으로 흐르며 서울의 젖줄이 된다. 한남정맥의 영향을 받은 한강의 남쪽 지역은 충적지와 낮은 구릉지가 잘 발달되어 있다.
‘함경도 안변의 철령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오륙백 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와서는 자잘한 산으로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서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동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하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북한산) 백운대로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만경대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갔고, 또 한 가지는 남쪽으로 백악산(북악산)이 되었다.’
위는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경기도편에 나타난 설명인데, 우리 전통 산줄기의 족보인 산경표로 해석하면 한북정맥 마루금 중 서울에 포함된 부분은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 만장봉부터 우이령 너머 552m봉까지의 4km 정도의 구간이고, 온전히 서울 안으로만 들어온 한북정맥 마루금은 없다. 한강 남쪽 울타리인 한남정맥도 마루금이 서울을 지나기 않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서울 일대를 일컫는 지명은 많았다. 통일신라시대엔 한양군, 고려시대엔 양주·남경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한양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엔 이곳이 도읍이 되자, 한양이라 했고, 문호개방 이후엔 한성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엔 경성이 되었다가 8·15광복 이후 비로소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서울을 지칭하는 한양·양주·남경·한성·경성 등 여러 이름들 중에서 고민하다가 수도를 뜻하는 ‘서울’이란 순우리말 지명을 쓰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되찾아 이름을 붙인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당시는 한글 지명도 모두 한자로 바꾸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어원으로 보면 서울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 백제가 수도인 부여를 ‘소부리’라고 불렀고, 신라도 경주를 ‘ 서라벌’ ‘서벌’ ‘서나벌’ ‘서야벌’ 등이라 불렀다. 서울의 ‘서’는 ‘수리·솔·솟’ 등과 통하는 말로써 ‘높다·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울’은 ‘벌·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큰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합치면 서울은 ‘높고 큰 벌판’, 즉 ‘신령스런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울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조선 초 한양·모악·계룡산·개경 등지를 후보로 놓고 도읍을 정하기 위해 피 터지게 벌인 논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빛나는 풍수논쟁으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서울의 지리적인 자연환경을 언급할 때는 풍수를 들먹이지 않고는 얘기가 안 된다.
풍수학자들은 서울이 장풍(명당 주위의 지세)과 득수(명당 주위의 물길)를 고루 갖춘 전형적인 명당임을 강조한다. 우선 서울의 조산은 북한산(삼각산·836.5m)이다. 그리고 북쪽의 북악산(백악산·342m)은 현무인 주산이고, 동쪽의 낙산(111m)은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338m)은 우백호가 되며, 남쪽의 목멱산(남산·262m)은 주작인 안산이다. 북악산·낙산·인왕산·목멱산을 일컬어 내사산(內四山)이라 한다.
그리고 그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은 내수(內水)인 명당수가 된다. 한강은 외수(外水)인 객수(客水)가 되어 남산과 관악산 사이를 빠져 흐르며 명당을 크게 감싸고 있는 형세다. 이렇듯 서울은 사방에서 산들이 에워싸 그 터를 보호해주고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한강에 역방향으로 흐르다가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더 없는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내사산은 조선 천도 당시 한양의 경계가 되었다. 그 산줄기를 연결해 도성을 쌓았고, 그 안쪽에 조선왕조의 궁궐·종묘·사직단·관아·문묘 등 국가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들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펴낸 여지도에 실린 도성도를 보면 조선의 도성이 한눈에 잡힌다.
한편, 명당인 한양을 밖에서 에워싼 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125m), 남쪽의 관악산(631m), 동쪽의 용마산(348m)을 일컬어 외사산(外四山)이라 하는데, 21세기 현재 서울의 경계는 대체적으로 이 산줄기를 이은 안쪽 지역이 된다. 풍수로 푸는 서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즉 ‘북한산이 후 주산이고, 강원도 금강산은 외청룡, 황해도 구월산은 외백호, 제주도 한라산은 외안산’으로 설명하는 데서 서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도 엿볼 수 있다.
한양은 궁궐을 중심으로 꾸며진 신도시였다. 그래서 지금의 서울을 이해하려면 우선 조선의 5대 궁궐을 둘러봐야 한다. 그런 다음, 사대문과 사소문으로 이어지는 도성을 답사하면서 그 안팎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던 순박한 백성들의 애환도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런 답사는 승용차보다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고 발품 팔아야만 그 절절한 사연이 가슴에 더욱 깊이 다가오지 않을까.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여러 논쟁 끝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으나 한양에서도 궁궐의 후보지는 여럿이었다.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터(궁정동 일대), 서대문 밖의 무악벌, 한양 동북쪽의 노원역 등 의견이 다양했다. 태조는 무학대사와 이들 지역을 직접 답사한 끝에 지금의 자리를 궁궐지로 확정하게 된다. 1394년(태조 3) 8월24일의 일이다.
이성계는 그해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궁궐 조성에 착수했다. 이성계는 궁궐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만인 10월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서울시는 이 날을 ‘서울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이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395년(태조 4) 12월이었다. ‘경복(景福)’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온 이름으로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풍수가 아주 중요했지만, 지금도 서울을 이해하려면 어쨌든 풍수 관련 서적으로 뒤적거려야 한다. 고려와 조선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풍수는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아니던가.
지난 2007년 4월 40년만에 개방된 북악산 서울 성곽을 이번에 걷다보니, 경복궁 정면으로 우뚝 솟아 있는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풍수에서 보는 관악산은 불(火)이다. 따라서 한양은 관악산의 화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논쟁을 벌였다.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경복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제왕은 모두 남향으로 궁을 건설했다며 관악산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궁궐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바라본다)의 터를 잡았다. 이에 무학대사는 “도읍을 정할 때 중의 말을 들으면 나라가 연장될 것이나 정씨의 말을 들으면 5대가 가기 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못가 나라가 흔들릴 난리가 일어난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후세의 백성들은 세조의 왕위찬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대사의 예언을 떠올렸을 것이다.
남향으로 하긴 했어도 관악산의 기세는 그래도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는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 잘 드러난다. 우선 이름의 숭(崇)은 높인다는 뜻이고, 예(禮)는 음양오행 중 불에 해당한다. 불꽃을 확 높인 것이다. 또 현판의 글씨가 여느 문의 현판과는 달리 불꽃처럼 세로인 까닭도 마찬가지다. 불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도였으니,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일종의 부적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악산의 화기가 궁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악산 상봉에 샘을 파고 구리용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궁궐의 연못은 미적인 조경 외에도 화기의 침입을 막아주길 바라는 의도가 있었다. 물론 유사시에 불을 끄는 데 쓰려는 지혜였지만. 그리고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라 볼 수 없지만, 광화문 해태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범위를 살펴보자. 당시 한양의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다. 종묘·사직·궁궐·관청·도로·시장 등이 들어선 성안 지역인 도성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뉘었다. 도성 지역은 현재로 보면 서울 최고의 번화가인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된다. 역시 지금도 서울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에 이르렀는데, 동쪽으로는 양주의 송계원·대현·중랑포·장안평, 서쪽으로는 양화도·고양의 덕수원(응암동)·모래내·난지도, 남으로는 한강 노도, 북으로는 북한산에 이르렀다. 당시 도성은 정치·행정 중심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녔고, 성저 십리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역으로 도성에 생활물자를 대는 역할을 맡았다. 요즘엔 성저 지역도 모두 대도시로 바뀌었으니 이런 상전벽해도 없을 것이다.
인구는 어땠을까. 서울시 기록을 살펴보니 조선이 안정을 찾은 15세기 초인 1428년(세종 10)의 도성 안의 인구는 10만3328명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왕실과 양반 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복무하는 군사들, 각종 관청에 속한 관노비와 개인에 속한 사노비, 공장·상인들이었다. 도성 밖의 인구까지 합하면 11만 명이었다. 그 뒤 200여 년간은 대략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그리고 1624년 병자호란으로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조선 말기인 1835년 한성부의 인구는 20만3901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엔 도시 규모가 계속 확대되어 1910년 23만 명, 1913년 28만 명, 1929년 34만 명 선이었고, 1936년엔 행정구역이 확대되면서 64만 명이던 인구가 1941년엔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97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6월30일 현재의 인구는 무려 1천34만4440명이다.
600여 년 전 천도 당시 10만 명쯤 된 인구가 100배에 이르는 1천만 명을 넘어섰으니 제아무리 서울이 명당이라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다 품기는 버거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서울은 대도시가 갖는 온갖 병폐는 다 갖고 있는 종합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통문제, 주택문제, 인구문제, 환경문제, 빈곤문제 등등 풀어야할 숙제가 많은 것이다.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1396년 경상·전라·강원·평안·함경도 등에서 11만8천 명을 동원해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루의 누각들은 공사 후 건축 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하여 빛을 보았다. 당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이었다. 세종 때엔 약 32만2200명의 인부와 기술자를 동원하여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이후 도성은 부분적으로만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애석하게도, 한양의 도성은 정작 필요할 때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도성은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막이지만, 내부가 썩거나 약하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아닌가. 아쉽게도 한양도성이 그랬다. 우리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적은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도 없이 성문을 지나 궁궐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20세기를 전후해서는 일제에 의해 한양도성은 의도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인들은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찻길을 만들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벽 일부를 헐어 버렸고, 이듬해엔 용산과 종로 사이에도 전찻길을 낸다며 남대문 주변의 성곽을 철거하였다. 일제강점기엔 더욱 노골적으로 도성을 없애기 시작했다. 결국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도 헐리면서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엔 총 길이 18.2km 가운데 산지 성곽 10.5km와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만 남게 되었다. 서울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 역사 도시’에 등재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2008년부터 도성을 본격적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라지만, 흥인지문~광희문, 숭례문 주변 등 5.14km는 워낙 건물이 밀집되어 있어 복원이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여하튼, 도성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이 있었다. 사대문은 조선의 통치이념을 성리학적으로 풀이할 때 인간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오상(五常)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즉, 인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의는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예는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지는 북쪽의 숙정문(肅靖門)이고, 신은 보신각이다.
흔히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의 정식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다. 예로부터 낙산의 지형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고종 때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이 중첩된 모양의 갈지(之)자를 넣어 비보(裨補)하였다.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제일 먼저 이 문을 통하여 한양에 입성하였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얼마 안 가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게 된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외침을 막으려면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풍수는 그 다음에 논할 일이다.
서대문으로 알려진 돈의문(敦義門)은 지금은 없다.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들기 위해 예복을 갈아입었던 홍제원(弘濟院), 사신이 들어오던 영은문(迎恩門), 임금이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 등이 모두 서대문 밖에 있었다. 1915년 일제는 도로확장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철거하고 말았는데,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던 이 문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영은문 자리엔 1896년 독립협회에서 세운 독립문이 세워져 있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제1호다. 지정번호가 문화재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국보 제1호가 명예로운 지위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숭례문은 심심찮게 제1호라는 지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곤 한다. 일제 잔재가 묻었다는 것인데, 일제가 숭례문을 철거하지 않은 까닭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한양으로 입성한 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란을 떠나 숭례문은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얼마 전 숭례문으로 행인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개방하긴 했으나, 국보 제1호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항상 훈민정음, 경주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다도 뒤지고 있으니 정말 위태로운 지위가 아닐 수 없다.
북대문은 현재 삼청터널 위쪽에 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이다. 이 문은 방위에 맞춰 세우기는 했지만 대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북문쪽은 지형이 험한 편이라 어차피 사람의 왕래가 적기도 했지만, 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한양의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 하여 평소엔 문을 닫아둔 것이다. 대신 숙정문 서북쪽으로 세검정이 있는 홍제천 위쪽, 그러니까 지금의 상명대학교 남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했다. 이래저래 최근 40년만에 숙정문이 공개되면서 그 문이 열렸으니 호사가들은 풍수를 핑계로 할 말이 많겠다.
이번엔 도성의 작은 문을 살펴보자. 도성의 사소문은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은 주로 가장 큰 문인 숭례문을 통해 입성하였는데, 여진 사신은 혜화문으로, 왜의 사신은 광희문으로만 들어올 수 있었으니 문에도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화문은 일제강점기에 길을 내면서 문루와 석문이 차례로 헐렸는데, 얼마 전 복원할 때 제자리를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혜화로터리 주변의 언덕에 세워야만 했다. 소덕문은 한양의 서남쪽, 지금의 덕수궁 위쪽에 있던 문이다. 이 문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지명으로 짐작해볼 따름이다. 중앙일보 호암아트홀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장사 지낼 때 도성의 시체는 이 소덕문과 광희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 안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 또 성밖엔 죄인을 처형하던 사형장도 있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던 사육신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금의 서소문공원이 바로 죄인을 처형하던 장소였다.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만날 수 있는 광희문은 소덕문과 함께 한양 백성들의 저승문으로 통했다. 개천 물길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문을 지나서 신당동 화장터나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게 되므로 시구문(屍口門)으로 더 많이 불렸다. 아직도 서울 사람들은 이 문의 절절한 사연을 입에 자주 올린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엔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또 1886년엔 도성에 콜레라가 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광희문 밖에는 내다버린 시체와 죽어가는 환자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다. 1898년엔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해월 최시형도 사형당한 후 이곳으로 실려 나갔다.
1907년엔 일제가 조선의 구식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불응하다가 목숨을 잃은 120여 명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모아두었다. 당시 성문 주변은 병사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이 몰려들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시신이 나가는 길목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무당 집이 즐비했는데, 광희문 바깥쪽을 무당골, 신당골(神堂谷)이라 부른 것이 지금의 신당동(新堂洞) 지명의 유래다. 광희문 밖의 고개도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서울 가거든 시구문 돌가루 긁어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광희문이었기에 ‘수구문 돌가루’가 주술적인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 형태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이어지는 널찍한 육조거리 좌우로 나랏일을 살피는 중앙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성의 8개 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려주는 큰 종을 매달았던 종루(鐘樓)가 있었고, 종루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뻗은 운종가(雲從街)는 조선 최고의 번화가였다. 지금의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자리했던 운종가 길 양쪽으론 시전 행랑이 죽 늘어서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도 그 중심은 단연 종로 거리다. 서울 종로는 상징성이 가장 크다. 국회의원 선거 때면 흔히 듣게 되는 ‘정치 1번지’라는 수식의 유래도 육조거리, 운종가 등이 지금의 종로구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 백성들은 높은 관리를 만나면 절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운종가 뒤로 난 좁은 골목길로 몰려들었다. 바로 ‘말을 피해 다니던 길(避馬)’이라는 뜻을 지닌 지금의 피맛골이다. 백성들이 이용하다 보니 이 골목엔 선술집·국밥집·색주가 등 술집과 음식점이 번창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낙지볶음·생선구이·해장국 등을 파는 식당과 술집·찻집 등이 즐비하다. 서울서 직장생활 하는 사람 치고 이곳서 밥이나 술 한 번 안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지금은 종로 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3가 사이에 일부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오늘도 여전히 서울의 밤을 즐기려는 술꾼들에게 인기가 있다.
한편, 도성 안의 민가는 운종가를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불렸다. 북촌에서도 경치 좋은 백악산 아래엔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의 주거공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 세종 때의 이름난 학자인 성삼문, 선조 때의 재상 이항복도 북촌에 살았다. 반면, 하급 관리와 세력 없는 선비들이나 무인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살아 남촌을 이루었다. 가난한 선비를 놀릴 때 쓰는 ‘남산골딸깍발이’란 말도 당시 남촌에 살던 선비들은 너무 가난하여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닌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남촌에도 조선 중기의 시인 윤선도,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등 이름난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이제 도성 안의 시장을 둘러보자.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이 모이는데, 도성에서도 유명한 3대 시장이라 많고 많은 물화를 따라 수레가 줄을 이었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의 한양성시전도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도성의 3대 시장은 이현시장(배오개시장), 종루 앞의 시전상가,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을 꼽았다.
1876년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밀려들자 기존의 재래시장들은 일대 위기를 맞았다. 특히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 배오개시장과 종로상가의 상인들이 모여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종로 5가쪽과 청계천쪽 양편에 상가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광장시장이라고 불렀다. 전차 정거장이 광장시장 입구인 지금의 종로 5가 지하철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광장시장은 당대 최고의 시장으로 거듭났다. 8·15 광복 이후에도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명성을 높여갔다.
1959년 광장시장 동쪽에 새로운 시장이 들어섰다. 광장시장과 구별하기 위해 이를 동대문시장이라고 했다. 1960년대는 동대문시장의 전성기였다. 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 등이 주로 거래된 동대문시장의 1만여 점포엔 하루 평균 20여만 명의 고객이 몰렸다. 밤에도 불야성을 이뤄 야시장으로도 이름났다. 파는 물건의 종류도 매우 풍부하여 “동대문시장에선 돈만 주면 고양이 뿔도 판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 등 전문화된 시장이 곳곳에 생겨났고, 또 대형 백화점들이 하나둘 문을 열자 동대문시장은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70년 동대문 서남쪽에 있던 전차차고 부지에 6층 건물로 새로이 시장을 세우고 이를 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 하였다. 현재 동대문시장이라 하면, 넓은 의미로는 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광장시장만을 뜻한다.
숭례문 동쪽에 있는 남대문시장은 동대문시장과 쌍벽을 이루는 시장이다.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전통 재래시장으로 명성 높은 남대문시장은 예전엔 ‘남문안장’ 또는 ‘신창(新倉)안장’이라고도 불렀다. 흔히 1911년 친일파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조선 초기인 1414년(태종 14) 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이 이곳에 있었으니 무려 6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남대문시장은 근래에 들어와 6·25전쟁과 몇 번의 화재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동대문시장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지방 출신인 이 길손은 동대문시장보다 남대문시장을 먼저 알았다. 등산장비도 동대문시장이 아니라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하곤 했다. 다른 분들도 사정은 비슷할 것인데, 이는 아마도 남대문시장이 서울의 대표적 출입구인 서울역 가까이에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동대문시장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남대문시장을 찾던 손님들을 그쪽으로 많이 빼앗겼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은 대부분 동대문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젊은이들 취향인 쇼핑 중 편히 쉴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요즘 남대문시장의 주요 고객은 중장년층의 여성들이다. 또 외국인들도 남대문시장 쇼핑을 필수코스로 꼽고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남대문시장을 가보지 않으면 한국 쇼핑의 최대 명소를 보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남대문시장은 동대문시장·인사동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한 남대문시장의 매력은 대한민국 고유의 재래시장에서 풍기는 정겹고도 활기찬 분위기와 다양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길손도 이에 동의한다.
길손은 예전에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도 한 번에 빠져나올 자신은 없는데, 이는 상점과 건물들이 넓은 지역에 걸쳐 마치 미로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는 계획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 재래시장의 특징이다. 바로 남대문시장만의 색깔인 것이다.
길손은 예전엔 남대문시장도 동대문시장처럼 계속 변화를 꾀하며 외연을 확장하면서 현대적으로 변해야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남대문시장은 무질서한 듯이 보이면서도 철철 넘치는 정과 생동감, 그게 바로 가장 큰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길손은 외국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남대문시장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또 길을 잃고 말았다. 허허, 언제쯤 남대문시장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서울, 어떤 곳인가
한반도의 서쪽 중앙부에 위치한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다. 동쪽은 경기도 남양주·구리·하남시, 서쪽은 고양·김포·부천시, 남쪽은 성남·과천·안양·광명시, 북쪽은 의정부·양주시에 접해 있다. 위도로는 동경 126˚34’, 북위 37˚34’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과 같은 위도에 있는 도시로는 리스본(포루투갈), 아테네(그리스), 샌프란시스코·워싱턴(미국) 등이다.
한강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구분한다. 강북은 한반도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 구릉이 발달하고 주변이 산으로 에워싸인 넓고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강남은 한남정맥의 영향으로 충적지와 낮은 구릉지가 잘 발달되어 있다.
삼한 시대에 마한(馬韓)에 속하였고, BC 18년경부터는 백제 세력이 이 지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백제의 발상지는 하북 위례성(지금의 도봉구 미아동)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광개토왕, 장수왕을 거치면서 세력이 커지자 남쪽으로 진출하였는데,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서울 지방은 77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면서 신라땅이 되었고, 신라는 서울을 삼국 통일의 중심지로 삼았다.
통일신라 때 한양군이 되었고, 고려시대인 940년에 양주로 바뀌었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으로 불렸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했고, 이듬해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해 점차 도읍 시설을 마련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크게 파괴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을 겪으면서 한성부에는 새로운 근대적 시설인 철도·전차·전신전화 등이 설치되고, 서양식 학교·병원 등이 운용되어 외형적으로는 근대화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과 1906년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한성부는 조선 왕조의 수도 기능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이 되었다. 일본은 한성부를 경기도에 속한 경성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구제를 실시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가 설치되었다.
현재 총 면적 605.39㎢에 종로·중·용산·성동·동대문·중랑·성북·도봉·노원·은평·서대문·마포·양천·강서·구로·영등포·동작·관악·서초·강남·송파·강동·광진·금천·강북 이렇게 25개구 522개 동에서 인구 10,344,440명(2006.6.30)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도시다.
경복궁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景福宮·사적 제117호)은 조선시대의 정궐(正闕)로 1395년(태조 4) 완공했다. 궁내에 세워진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재 경회루·근정전 등과 국립민속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있다. 일반(18~64세) 3,000원, 청소년(7~18세) 1,500원. 한 장의 관람권으로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02-732-1932
창덕궁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사적 제122호)은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 5)에 별궁으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어 조선 말기에 복구될 때까지 약 300년간 본궁의 구실을 하였다. 현재 창덕궁 안에는 국보인 돈화문·인정전, 보물인 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구선원전 등의 문화재가 있다. 금원(비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으로 꼽힌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대인(19~64세) 3,000원, 소인(7~18세) 1,500원.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전화 02-762-8261
창경궁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인 창경궁(사적 제123호)은 1484년(성종 15) 옛 수강궁터에 지었다.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33년 중건했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 일제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쳤으나 1986년 창경궁으로 복귀하였다. 요금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02-762-4868
경희궁
종로구 신문로2가에 있는 경희궁(사적 제271호)은 1617년(광해군 9) 창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 궁에 입거하지 못했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경희궁은 280여 년 동안 웅장함을 지켜오다가 1910년 국권 피탈 직전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었다. 정문인 홍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 등이 있다.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광화문역 7번 출구 02-724-0221 02-3707-9433
덕수궁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德壽宮·사적 제124호)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왕궁이 불타면서 1593년부터 행궁으로 사용했다. 광해군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270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되었고, 1897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왕궁으로 사용하면서 경운궁이라 불렀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때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21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떴다. 대인(18세 이상)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02-771-9951~2
운현궁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사적 제257호)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다. 고종이 이곳에서 출생해 12살까지 성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863∼1873년에 지은 것으로 원래 집의 구조는 담에 네 개의 문을 두고, 그 안에 아재당을 비롯하여 고종이 태어난 안채인 노락당, 흥선대원군이 사랑채로 쓴 노안당, 별채인 이로당, 그리고 은신군·남연군을 모신 사당 등이 있어 궁궐에 비할 만큼 웅장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되었다. 일반(25~64세) 700원, 청소년(13~24세) 300원. 02-766-9090
종묘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사적 제125호)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으로 1395년(태조 4) 9월 완공되었다. 현재 정전 19칸에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영녕전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등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종로3가역(1호선 11번 출구, 3호선 8번 출구, 5호선 8번 출구) 전화 02-765-0195
문묘
종로구 명륜동3가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문묘(보물 제141호)는 조선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사 지내고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 그리고 명륜당을 비롯한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웠으나 몇 차례 불에 탔고, 지금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 남동쪽 기슭에 펼쳐져 있는 서울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은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서 사직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동쪽에 있는 것이 사(社)인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고, 서쪽은 직(稷)으로 곡물신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양단 신좌는 국가의 대본으로 중대한 제사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으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 전통 민속자료를 소장한 박물관이다. 8·15광복 후 개관된 남산민족박물관이 1950년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된 후 1966년 경복궁 수정전에 1,600여 점의 민속자료를 수집하여 민속박물관을 개관했다. 현재 16,000여 점의 유물이 역사실·생활1실·생활2실에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02-3704-3114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의 품격과 예법, 장엄하고 화려한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제왕기록·국가의례·궁궐건축·과학문화·왕실생활실 등 5개 주제 이외에도 왕실의 탄생과 교육·문예·궁중회화·음악·어가의장·대한제국·황실어차·자격루 등 다양한 주제로 조선왕조의 제도와 역사, 그리고 조선왕실의 예술과 문화 등을 아우르고 있다. 전시 유물은 국보 제228호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과 보물 등을 포함해 모두 900여 점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02-3701-7500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 내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과 관련된 사료를 모아놓은 전문박물관이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기증유물전시실, 뮤지엄 샵 등이 있으며, 3층에는 옛 서울과 서울사람들의 생활, 문화, 서울의 발달 등 서울을 4개 주제로 나눠 구분 전시한다. 요금 어른 700원, 청소년 300원.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광화문역 7번 출구. 02-724-0114
1985년까지 종로 보신각에 달려 있던 서울 보신각 종(보물 제2호)은 조선시대의 종이다. 총높이 3.18m, 구경 2.28m. 1468년(세조 13)에 만들어 신덕왕후 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1895년(고종 32)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 종이라고 불렀다. 1985년까지 제야(除夜)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4번 출구.
조계사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직할의 사찰로서 중앙총무원·중앙종회 등이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지다. 1395년(태조 4) 창건된 사찰로 1910년 각황사(覺皇寺)라 했으며, 1937년 북한산성 안에 있는 태고사(太古寺)를 옮겨 오면서 태고사로 변경하였다. 1955년 한국불교 정화운동 이후 조계사로 되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 중심사찰로 명맥을 이어 왔다. 경내에는 국보 제367호인 용문산 상원사 동종과 사리탑비, 부처의 진신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는 7층석탑 등이 있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02-732-2183
흥인지문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보물 제1호)은 한양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른다.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문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이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하철 1, 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
광희문
중구 광희동에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다.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문으로 시구문(屍軀門)·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지하철 동대문운동장역 2, 4, 5호선 3번 출구.
북한산 국립공원
서울 종로구·은평구·성북구·강북구와 경기 고양시 사이에 솟은 북한산(836.5m)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한 산이다. 최고봉인 백운대, 동쪽의 인수봉(810m), 남쪽의 만경대(800m)의 세 봉우리가 뿔처럼 불쑥 솟아있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삼각산(三角山)이라고 했다. 또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렸다.
조망도 좋아 최고봉인 백운대에서는 북악산·남산·관악산, 그리고 도봉산·수락산·불암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와 그 바깥쪽의 경기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서해의 섬들도 선명하게 보인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외에도 노적봉·영봉·비봉·문수봉·보현봉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 40여 개나 된다. 특히 클라이머들에게 암벽등반 대상지로 사랑받고 있는 인수봉은 한국 산악운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1천만 명이 넘는 서울 인구가 즐겨 찾는 산답게 북한산의 등산로는 북한산성을 기준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등산인이 많이 몰리는 산행 코스는 우이동·정릉·세검정·구파발·북한산성 기점이 대표적이다.
독립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독립문(獨立門·사적 제32호)은 1897년 독립협회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국민의 헌금으로 그 자리에 세운 석문이다.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옛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개의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복원하고, 예전 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
국립서울과학관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국립서울과학관은 수도권 주민들의 과학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립중앙과학관 산하기관이다. 과학기술사, 자연사, 기초산업기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하여 상설 전시한다. 전시장은 생활과학을 중심으로 한 본관전시관, 산업기술 위주의 산업기술관, 특별전시관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철 4호선 4번 출구. 02-3668-2200
한국은행 본관
중구 남대문로3가에 있는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은 대한제국시대인 1907년 착공되어 1912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건물이다. 절충식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전시공간은 한국은행의 설립목적과 기능, 화폐제조, 물가, 통화신용정책 등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의 화폐 실물을 전시하는 4개 구역으로 되어있다.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4호선 회현역 02-759-4881
남산공원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는 남산(南山·262m)은 북악산·낙산·인왕산과 함께 한양을 에워싼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다. 1897년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때 왜병의 주둔지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왜성대공원을 조성하고 벚나무를 심었다. 현재 남산공원은 장충지구와 예장지구·회현지구·한남지구로 나뉜다. 이밖에 이황·김유신·김구·안중근·유관순 등의 동상이 있고, 자연보호헌장비·소월시비·최현배비 등이 있다.
namsan 02-753-2563, 5576
청계천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흐르는 청계천(淸溪川)은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물이 모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다.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흘러든다. 홍수 방지를 위해 태종 이후 계속 공사가 이루어졌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청계천 복원사업을 벌여 현재 종로구 태평로 1가의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에 이르는 5.8㎞의 구간을 시민들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동대문종합시장
종로구 예지동에 있는 상설시장. 18세기 전반 이곳에 큰 규모의 시장이 있었다. 1905년 ‘배우개장’으로도 불리다가 그해 11월 동대문시장 관리를 위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광장시장’으로 불렸다. 이후 그 일대에 여러 상가가 생겼고, 1970년 종로6가 동대문 맞은편에 규모가 훨씬 큰 동대문종합시장이 개설되었다. 현재 동대문종합시장은 종로5∼6가 일대의 전체 상가를 가리키며, 과거의 동대문시장은 광장시장에 한정되고 있다. 지하철 1, 4호선 동대문역 9번 출구.
남대문시장
중구 남대문 동쪽에 위치한 전문 종합시장으로 ‘남문안장’ 또는 ‘신창(新倉)안장’이라고도 불렀다. 1414년(태종 14) 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으로 개시되었는데, 1608년(선조 41) 대동미·포·전의 출납을 맡아보기 위해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됨에 따라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친일파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6·25전쟁 후 주로 이북 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미군의 군용 원조물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재 총 58개동에 9,200여 개의 점포가 있고, 하루 평균 45~50만 명이 이용한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황학동 벼룩시장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던 황학동 벼룩시장은 1950년대 월남한 사람들이 몰려 살던 재래시장으로 출발해 고서·가발·골동품에서 카메라 전자제품의 판매 수리로 영업 형태가 바뀌면서도 서울을 대표하는 만물시장으로 50여 년간 명맥을 이어왔다. 몇 년 전 청계천 재개발 때 동대문 운동장으로 옮겨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재 황학동 벼룩시장은 청계천 반대쪽, 즉 영도교에서 동묘 지하철 역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명동성당
중구 명동에 있는 명동성당(明洞聖堂·사적 제258호)은 프랑스인 고스트(高宜善) 신부가 설계하여 1898년에 완성한 한국 근대 건축사상 규모가 가장 큰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本堂)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 69m, 너비 28m, 지붕의 높이는 23m, 종탑 높이는 45m이며, 지붕재료는 동판(銅板)으로 되어 있다.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의 장중한 고딕형으로 되었다. 2호선 을지로 입구역 5번 출구, 4호선 명동역 8·5번 출구. 02-774-1784 www.mdsd.or.kr
남산골 한옥마을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 중구 필동의 마을. 이곳에 있던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하자 서울 지역의 시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동을 이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민 뒤 1998년 개관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시민속자료 제24호),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시민속자료 제18호), 오위장 김춘영 가옥(시민속자료 제8호),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시민속자료 제20호),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등이다. 전통정원 남쪽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29일 묻었다. 지하철 3, 4호선 충무로역 3번 출구 02-2266-6923
농업박물관
중구 충정로 1가에 있는 농업박물관은 한국 농업의 발전사를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농업의 발달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농사 관련 유물·자료·농기구·운반도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5,000여 점의 소장유물 중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농업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농업역사관, 농사 모습·전통농가·전통장터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는 농업생활관, 그리고 농협홍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 출구. 02-2080-5727~8 http://museum. nonghyup. com
한국금융사박물관
중구 태평로1가 신한은행 광화문 지점에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금융 역사 전문 박물관이다. 1982년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강남 별관에 마련한 조흥은행 사료관으로 시작하여, 1997년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광화문지점 3·4층에 조흥금융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2006년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이 통합되면서 명칭이 한국금융사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금융의 역사와 관련된 문서·서적·기물, 유가증권·화폐 등 4,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 2호선 시청역 3번 출구 코리아나호텔 옆. 02-738-6806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구 현저동 옛 서울구치소 자리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사적 제324호)은 일제강점기 때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투옥되어 가장 많은 곤욕을 치른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자 1988년 독립공원을 조성하였고,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은 크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그 외의 시설로 나뉜다. 독립문, 서재필 선생 동상, 독립관, 3·1독립선언 기념탑, 순국선열추념탑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02-364-4686
봉원사
서대문구 봉원동 안산에 있는 봉원사(奉元寺)는 대한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반야사(般若寺)로 창건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중창하였고, 1748년(영조 24)에 찬즙·증암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했다. 영조의 친필로 쓰인 봉원사라는 현판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명부전 현판은 정도전의 친필이다. 1788년(정조 12)에는 전국 승려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승풍규정소가 있었다.
효창공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사적 제330호)은 독립 유적지다. 원래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園)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1924년 일제는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김구 선생의 묘소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이동녕 선생, 군사부장 조성환 선생, 비서부장 차이석 선생의 묘소와,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선생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소가 있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 3번 출구(도보 15분), 4호선 숙대 입구 10번 출구(도보 20분), 국철 남영역 3번 출구.
전쟁기념관
용산구 용산동1가 옛 육군본부 자리에 들어선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대형장비실·방산장비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국군인 형과 인민군인 아우의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상’이 세워져 있다.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4번 출구, 6호선 12번 출구. 입장료 어른 3,000원, 중고교생 2,000원, 초등학생 2,000원, 유치원생 1,000원. 매주 월요일 휴관. 02-709-3032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용산구 한남동 단국대학교 안에 있는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은 한국 복식사의 산 증인인 석주선 박사가 기증한 3,365점의 유물을 포함해 7,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에서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의 당의(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심동신의 금관조복 일습(중요민속문화재 제2호) 등이 눈에 띈다. 매주 화·목요일 10:00~16:00 개장. 공휴일, 국경일, 여름·겨울방학에는 휴관. 무료. 지하철 1호선 한남역 1번 출구. 02-709-2267 museum.dankook.ac.kr
절두산 성지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있는 절두산은 1866년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약 8,000명의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잠두봉이라고도 부른다. 순교 100주년째인 1966년 세운 순교기념관은 순교자 기념성당, 순교박물관, 순교성인 28위의 유해를 안치한 지하묘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교박물관에는 교회사 관계자료, 순교자의 유물 유품, 형구 등 3,033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입장료 성인 500원, 학생 200원. 월요일 휴관. 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 02-3142-4434
서울외인묘지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외국인 묘지공원에는 조선 말 고종 때부터 우리나라를 위해 공헌한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외국인 인사들 500여 명이 묻혀있다. 한국의 암흑기였던 1900년 전후에 언론창달의 기수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의 토마스 베델, 이화여대 설립에 공이 큰 아펜젤러, 세브란스의대를 세운 더글러스 B. 에비슨, 한국의 은인으로 추앙 받는 헐버트 박사의 묘소도 있다. 무료. 지하철 2호선 합정역 4번 출구. 02-334-0384
하늘공원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하늘공원(Sky Park)은 옛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조성한 생태환경공원이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기념해 도시의 생활폐기물로 오염된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자연생태계로 복원하기 위해 개원하였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1번 출구. 전화 02-300-5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