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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서양 철학 3인

Jobs 9 2024. 11. 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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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3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 철학 계보에 소피스트 학파가 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이었던 자연의 본질에 대한 관찰보다는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인간 자신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철학자들을 소피스트 학파라 부른다. 소피스트란 '지혜로운 자' '현명한 자'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언으로 대변되는 소피스트 학파는 철학의 중심 영역을 신과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 처음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평가 받을만 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소피스트 학파의 상대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였던 철학자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순탄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다양한 철학 사상에 정통하고 웅변술과 대화법에 능통한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당시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다소 기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금욕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의 의미를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자신의 수양만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 모두의 심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느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과 달리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남기지 않았다. 단지 그의 사상은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와 크세노폰의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보편적 진리, 절대미, 절대선의 개념을 인정한다. 그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분석, 비교, 변증, 종합 등의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문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언변은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대화를 통해 상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막연하고 정확하지 않은 지식을 확실한 개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즉,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대화자에게 개념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크세노폰, 디오게네스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는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항소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독배를 마셨다. 

 

이데아론의 플라톤

명문가의 자제였던 플라톤을 철학의 바다로 이끈 이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였다. 한때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아테네 올림픽에 참여했던 젊은 귀족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친구로 혹은 스승으로 모시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고 새로운 철학 세계를 열어 나갔다. 

플라톤은 스무 살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자 아테네를 떠나 몇 년간 여러나라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시실리아 섬을 방문한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오스의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자신의 철학적 이념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388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교육기관을 건립했다. 아카데메이아는 기숙사, 강의실, 박물관 등을 갖춘 일종의 종합대학이었다. 플라톤은 이곳에서 약 20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는데, 아카데메이아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이 곳을 폐지할 때까지 약 9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뿐 아니라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걸쳐 광법위한 학문 탐구가 이뤄졌다. 원뿔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기원전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은 모두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뤄낸 업적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다. 

플라톤의 사상은 이데아론이라는 학설로 대변된다. 이는 "우주의 모든 현상 뒤에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이데아라는 영원한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은 이데아 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절대적인 정의, 미, 진리는 이데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철학, 과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저술활동을 했으며, 그의 정치 사상은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프로타고라스』『국가론』『법률론』『정치가론』 등이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가 배출한 최고의 수재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스티기라 출신으로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백과사전적인 인물,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으며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학자 등은 그를 설명하는 표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생리학, 해부학, 식물학, 박물학, 심리학, 정치학, 논리학, 시학, 수사학, 미학, 신학, 형이상학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어찌 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플라톤의 아케데메이아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았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친구 헤르미아스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헤르미아스가 죽은 후 고향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요청으로 기원전 343년부터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오전에는 고급반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웅변이나 수사학 같은 일반적인 강의를 진행했는데 이때 산책을 하며 수업을 진행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원전 32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반마케도니아파가 대두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불경죄'에 기소되었다. 그 옛날 무고한 죄목으로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를 상기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는 철학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위해 아테네를 떠난다"라는 메세지를 아테네 시민에게 남기고 미련없이 아테네를 떠났다. 그리고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보이아에서 제자인 안티파테르를 후계자로 삼고 아내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제자였지만 사상적으로는 스승과 노선을 달리했다. 그는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실제는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영원한 것으로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서 우주의 본질적인 성격이 부여된다는 일원론적인 사상을 주장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목을 강조했으며 중용이야 말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길이라 강조하였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위대한 철학자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모든 지식 분야에 걸쳐 개척을 이룬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하늘, 아리스토텔레스의 땅

탈레스가 활동했던 밀레토스에서 에게 해를 건너 동쪽으로 건너가면 지금의 그리스가 나온다. 그리스에서는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을 겪으며 정치적인 부침을 많이 겪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바다 건너 사람들이 만물의 아르케가 뭐냐고 따져 묻는 게 배부른 소리로 들릴 법하다. 지정학적인 위치와 정치 환경이 다르면 철학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주주의도 발달한 아테네에서는 만물의 아르케보다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해 권력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소위 ‘말빨’, 즉 언술, 변론, 수사 등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줬던 일종의 과외 선생들이 바로 소피스트였다. 소피스트하면 흔히 궤변론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당시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정치의 시대 소피스트로 살았던 소크라테스였던 만큼 그의 관심사는 바다 건너 동네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물의 아르케가 어떻고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보다 현실에서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주제, 즉 정치학이나 윤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두고 하늘에서 철학을 땅으로 끄집어 내린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본인이 직접 남긴 글은 전해지는 게 없다. 다만 자신 못지않게 유명한 제자를 둔 덕에 후대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위대한 제자의 이름은 바로 플라톤이다. 

나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는 그저 ‘옆집 아저씨’일 뿐이다. 플라톤 하면 그 유명한 이데아론만 떠오를 뿐 그의 철학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20세기의 유명한 철학자인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 2000년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 고 말한 걸 보고 플라톤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플라톤이 과학의 역사를 논할 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은 주로 《티마이오스》라는 저작 덕분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플라톤은 앞선 세대의 엠페도클레스가 주창했던 4원소를 정다면체로 설명한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란 흙, 물, 불, 공기이다. 이 넷이 만물의 근본요소라는 얘기이다. 탈레스의 물에 세 개가 추가되었다. 4원소론은 이후 오랫동안 서구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의 작품 중 《천사와 악마》에서는 4원소와 관련된 연쇄살인이 일어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한편 정다면체란 모든 면이 똑같은 모양의 정다각형인 입체도형으로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다섯 개가 있다. 이 다섯 도형을 플라톤 입체라 부르기도 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정사면체는 불, 정육면체는 흙, 정팔면체는 공기, 정이십면체는 물, 그리고 정십이면체는 우주 전체에 대응시켰다. 지금 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꽤나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실제 《티마이오스》는 이런 내용들로만 가득 차 있어서 아마 일반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티마이오스》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자연의 대상에 수학적 구조물을 대응시켜 자연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런 접근법이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자연과 우주를 신화로 설명하던 시대에 수학적인 도구를 써서 이들을 설명한다는 기획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플라톤 이전에도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아르케가 수학이라고 말했었고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수학을 통해 자연을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은 역시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과 관련한 플라톤주의라고 하면 대개는 플라톤의 이런 수학적인 기획을 뜻한다. 그러니까 정사면체가 왜 불과 연결이 되느냐 하는 디테일보다 정사면체를 불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그 패러다임 자체가 중요하다. 플라톤의 기획은 먼 훗날 케플러와 갈릴레오, 뉴턴에게까지 이어졌다. 21세기의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소립자 세계를 관장하는 표준모형은 SU(3)xSU(2)xU(1) 같은 수학적 군을 기초로 구축돼 있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자연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학적 구조물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세기의 뛰어난 물리학자였던 유진 위그너는 1960년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유효성”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을 기술하는 데에 수학이 왜 이렇게 잘 들어맞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얘기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수리물리학자가 한 말이니까 이 언명은 아주 믿을 만하다. 물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릴레오의 말마따나 이 우주가 애초에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수많은 후손들이 수학이라는 ‘외계어’로 쓰인 과학을 배우느라 골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플라톤은 자신이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철학자의 제자였듯이 플라톤도 자기 못지않게 아주 위대한 제자를 두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에 플라톤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아에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제자인지라 스승의 이분법적 세계관(이데아계와 현실계)을 꽤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는 천상계와 지상계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스승과 다른 점도 많았다. 스승이 천상의 이데아에 관심이 많았다면 제자는 땅위의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은 수학을 좋아했던 반면 제자는 감각경험을 중시했다. 게다가 제자는 그런 방면에 재능도 뛰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을 관찰하고 분류한 결과는 린네가 근대적인 분류체계를 세운 18세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무려 2천 년이 넘는 세월이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철학, 종교 등 서구의 거의 모든 지성사에 2천 년 가까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려면 대략 14세기의 르네상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과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활약했던 17세기는 돼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적인 차이는 르네상스기의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바티칸 시국의 바티칸 박물관 안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 벽에 그려져 있다. 방은 그리 크지 않다. 천정이 돔형이라 벽면은 천정으로 가면서 원형으로 모아진다. 이 그림은 그렇게 휘어진 벽면을 따라 위쪽이 반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50여 명의 철학자가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는 외모만으로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듯한 스승과 제자는 그 몸짓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림을 보는 사람 시각에서 왼편(그림 속 등장인물의 위치에서는 오른쪽)에 서 있는 플라톤은 오른손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추구했던 철학의 핵심을 라파엘로는 각자의 손의 위치로 시각화했다. 스승과 제자는 모두 각자의 왼손에 책도 한권씩 들고 있다.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은 《윤리학》이다. 역시 각자의 관심사를 제대로 반영한 표현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른 철학자들도 이런 식으로 표현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의 기준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큰 자취를 남겼고 그 영향력이 중세 1천 년 또는 그 너머까지 지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점이라면 그가 자기 시대에 비해서 지나치게 똑똑하고 명석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근대과학이 태동한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흙, 물, 불, 공기가 각각 두 가지 성질을 갖고 있어서 이 성질이 바뀌면 4원소가 서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흙은 건조함과 차가움을 갖고 있고 물은 차가움과 습함, 공기는 습함과 따뜻함을, 불은 따뜻함과 건조함을 갖고 있다. 불이 가진 건조함은 흙 또한 갖고 있는 성질이다. 만약에 따뜻함과 건조함을 갖고 있는 불이 차가워지면 차가움과 건조함을 그 성질로 갖고 있는 흙이 된다.  

이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훗날 연금술의 이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납이나 구리 같은 흔한 금속으로 금이나 백금 같은 귀금속을 만들겠다는 속된 욕망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헛된 망상으로 이끌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 ‘원흉’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금술과 결별하고 이제 alchemy가 아닌 chemistry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게 17세기의 일이다. 심지어 뉴턴마저 30년가량 연금술에 매진했다고 한다. 뉴턴을 일러 최초의 근대적인 과학자라기보다 최후의 연금술사였다고 하는 게 빈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현대적인 원자론에 입각해서 100개가 넘는 기본 원소들의 규칙성을 주기율표로 정리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자연에 없는 원소들도 인공적으로 종종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만물의 아르케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금술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다. 물론 금이나 백금을 만드는 일은 지금도 쉽지는 않다. 지난 2017년 과학자들은 우주의 중성자별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금이나 백금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합성되는 정황을 포착했다. 최고의 연금술사는 우주에 있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아버지, Σωκράτης, Socrates, 기원전 470년,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너 자신을 알라.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된다. 탈레스가 자연철학 분야를 개척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 내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경건하고 윤리적이며 보편성과 객관성을 열망하는 면모가 강하면서도, 신비적, 감성적, 권위적이기보다는 이성적, 비판적, 반성적인 자세와 토대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태도를 타자에게 설교하기보다 자기자신이 우선 체화하고자 노력했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오늘날 말하는 메타인지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개인의 성격은 소탈하고 친절했으며, 대화에는 해학이 있었으므로, 그의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 플라톤 등 명문가 젊은이들까지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여간해서는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낮추었고, 대화자의 학생을 자처했으며, 다만 함께 대화하며 진리를 모색하고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이 문답 과정에서 그의 탐구 및 교육 방법으로 유명한 산파술 혹은 변증술이 탄생했다. 그는 화제의 핵심과 선결 요건을 파악하고 상대 논변의 맹점과 반례를 제시하는 데 탁월했지만, 이를 상대를 부정하고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닌 상호 지양적인 목적에서 행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토론과 학문이 지향하는 바의 모범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대화편 가운데 특히 <<변명>>, <<크리톤>>, <<파이돈>> 3부작은 서구 문학사상 예수의 최후에 필적하는 매우 비극적이고 경건하며 장엄한 최후를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핍박받은 성인, 진리를 위해 죽은 현자로서의 소크라테스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

석공인 소프로니스코스(Σωφρονίσκος)와 산파인 파이나레테(Φαιναρέτη)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본업이 석공이었다고 전해진다.

외모는 못생겼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 플라톤의 저작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와 논쟁 중에 그를 '전기가오리 같다'고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모를 불문에 부치고도 그의 풍모는 상당히 비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발을 신지 않고, 누더기가 되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다녀도 익숙해서 편하고 정신력도 단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이런 초연한 풍모를 과시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석공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튼튼한 몸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잔치 자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들이키고도 가장 말짱한 정신으로 가장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가 유유히 떠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알콜 분해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또한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에도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 더움, 잠자리, 적군 등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강철멘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색을 즐겨 하여, 어떤 문제가 떠오르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이고 길게 생각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이 구경하였다고 한다. 여러 모로 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사망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었고 잔소리에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부부관계가 파탄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현대로 치면 명사나 학자들이 TV나 유튜브 교양 방송에 나와서 토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사상
소크라테스는 윤리학을 철학에 도입한 사람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소크라테스 문제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며, 오직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 플라톤 같은 당대 인물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남긴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이런 소크라테스와 알고 지내던 당대 인물들조차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생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이기에, 2천년이 훨씬 넘은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바로 이러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으며,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상기된 바와 같이 우리가 흔히 아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는 대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문헌학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산파술
추가 질문을 계속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러한 질문 중심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패턴은
1. 상대가 어떤 A 주장을 한다.
2. 소크라테스가 A 주장에 나온 단어 a의 뜻을 묻는다.
3. 상대가 a = b 라고 답한다.
4. 소크라테스가 다시 b의 뜻을 묻는다.
5. 상대가 b = c 라고 답한다.
6. 소크라테스가 a하고 c는 서로 모순됨을 지적한다.
7. 상대는 벙어리가 된다.

거듭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도신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Aporia, ἀπορία)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사용한 이유는 그의 주상대가 소피스트라는데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이 가진 대세의 의견은 진리는 그 사람의 주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답이란 정해진게 없고, 질문하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상대방에 맞춰서 그때 그때 대응하는 어떻게 보면 매우 유연하고, 어떻게 보면 매우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는 했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것은 사유에 있어서 정의 (definition)의 중요성이다.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고 생각을 하니까 도대체 진척이란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삶동안 소피스트들을 박살내면서 정의를 내리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실현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산파술에 대해서는 당대로부터 많은 불만이 있어왔다. 
"선생님은 누가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하지 않고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무식한 척을 할 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답에 대한 트라시마코스의 반응. 플라톤의 <국가> 중
"당신 자신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를 원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당신의 견해를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그만 두십시오."
소크라테스를 쏘아붙이는 히피아스. 크세노폰의 <회상> 중

이에 관해서 플라톤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항상 끝맺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가 답을 찾는 여정 자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난 지혜를 낳지 못하네. 그리고 바로 이 점을 두고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다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중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 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도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다.
유(=자로)야, 안다는 것이 어떤지를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논어> 위정편 17


하지만 비슷해보이기만 할 뿐 그 뜻은 매우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 계속하는 것을 말한것이다. 반면에 공자의 말은 전통적으로 2가지로 해석되는데, 

 

1. 수양론적 해석: 부족한 부분을 지나치지 않고 채워야 성인에 이른다는 해석이다. 부족한 지점을 알아야 그것을 채워서 완전한 경지에 이를 텐데, 이를 모르니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과목을 만점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자신이 어느 과목이 약한지 모르는 것과 같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학자로써의 기본자세를 말한 것에 가깝다. 


2. 순자의 해석: 잘난척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해석이다. 자로에게 공자가 조언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 해석이다. 자로는 용맹하지만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하찮은 재주로 자랑해서 남들의 마음을 불편하게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다는 것이다. 순자는 개인의 능력은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할 때 나서야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 

위와 같이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매우 다른 사유와 접근법을 사용 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둘을 연결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참고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속 편한 알키비아데스,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적수는 이들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자(아테네 정치가)들이 아니니 말일세. 돌봄과 기술(앎)이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걸세. 이것들을 결여한다면,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든 이방인들 사이에서든 자네가 명성을 얻는 일 역시 결여하게 될 걸세. 내가 보기에 어느 누가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네가 더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명예 말일세." 
김주일, 정준영 역, 《알키비아데스Ⅰ, Ⅱ》 이제이북스(2007).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토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그의 책, 《법철학》에서 실정법주의(實定法主義)를 주장하며 쓴 글이다. 실정법주의란 서양의 철학에서 실증주의 맥락에서 나온 것인데, 좋은 법 나쁜 법을 따지는 것은 법률가의 영역이 아니고, 오로지 지금 존재하는 법들을 놓고서 법학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일종의 법학의 과학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빠르게 와전되어서 법은 존재하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가면서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이용되었다. 뿐만아니라 독일의 나치, 대한민국의 군부독재에서도 그 통치를 합리화하고, 국민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명언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 때문에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한다며 나선 자들 사이에선 소크라테스가 인기가 없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 11월에, '악법도 법이다'를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냈다. 실정법주의는 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법학계에서는 사장당했고, 법실증주의조차 절름발이 설명력을 가졌다고 보아 뜯어고쳐서 써야한다는 의견이 다수설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다만 "폴리스의 결정을 내가 억울하다 해서 위배하여 이러한 일들이 반복된다면 폴리스가 유지되겠는가? 이러한 행동은 옳은가?" 와 같은 뉘앙스의 말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답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한 해석이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상술(上述)했듯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인 불경죄를 악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죽음을 부당한 법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한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이에 대해서,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이 계약론적 사고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강하게 신봉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압축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 자신의 철학 때문인데, 그는 철학이 유일한 인생의 이유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for a man is not worth living.’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이유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신과의 계약이며, 영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니,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고 도피를 하면 아테네와의 계약은 지키더라도, 신과의 계약을 어기는 행위가 되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변증법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고발되어서 재판에 선 끝에 패소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해서 당대에 자세히 서술한 자료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잘 알려진 플라톤의 대화편의 "변론"이고, 또 하나는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회상"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중에서 철학적으로 성과가 가장 으뜸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철학적 재능은 그보다 훨씬 못하지만, 당대에 유명한 군인이면서 외교, 정치 감각도 탁월했던 인물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면을 잘 조명한다면, 크세노폰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아테네 민중이 어떻게 소크라테스를 바라봤는지에 관한 단서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철학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이라는 두 자료의 차이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원인을 놓고 크게 2가지 해석이 존재해 왔다. 

1. 플라톤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미신과 무지, 감정에 휘둘리는 민중의 뜻에 거슬렸다는 '불경죄'를 이유로 그 중우정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2. 크세노폰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그 주변의 정치적 인물들 때문에 희생되었다. 

플라톤의 견해는 계몽시대 이전에, 크세노폰의 견해는 계몽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통설을 이루었다. 크세노폰의 정치적 원인설이 인기있었던 이유는 계몽시대 서양인들이 고대 그리스를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로워서 서양의 합리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다는 견해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그 시발은 철학사가 브루커(J.J.Brucker)의 크세노폰에 대한 견해가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 반영되면서 였다는 의견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당대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내용
1.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았으며
2.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 시켰다.
-고발인 시인 멜제토스, 민중파 영수 아뉘토스, 정치가 뤼콘-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비공식 고발내용(당대 악소문)
1. 하늘에 높이 있는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이며 지하의 온갖 것들을 탐사하는 자(=자연철학자)
2. 한결 약한 주장을 더 강한 주장으로 만드는자(=소피스트)
<플라톤, 변론>

 

소크라테스는
1.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nomizein) 않고,
2. 새로운 신격(다이몬daimon)을 수입한 죄를 짓고 있다. 또,
3.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짓고 있다.
<크세노폰, 회상>

내용은 보다시피 거의 같지만,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게서는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라고 비난받은 점에 대해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들과 학문적 입장이 달랐다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데 반해, 정치가였던 크세노폰은 정치적 상황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정치를 중시하는 크세노폰의 성향 때문에 그의 글에는 플라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정치관련 고발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신탁을 내리는 듯한 행위를 해서 아테네에서 널리 화자되고 있었다고 크세노폰은 증언한다.
"신령스런 존재(daimonion)가 자신에게 신탁을 내린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특히 바로 이걸 근거로 그들은 새로운 신령스런 존재들을 끌어들인다고 고발했던 것 같다.
위 발언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신앙심이 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크세노폰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신의 권위를 존중하며 행위했기 때문에 기성 아테네의 종교활동과 다를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테네가 공직자를 검은콩 중에서 흰콩을 뽑는 추첨방식으로 결정해온 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비판을하여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의 국법을 멸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압제자들이 나왔다고 고발자들이 주장한 사실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함께하는 자들이 현행법을 깔보게 만들었으니, 키잡이든, 목수든, 피리 연주자든 잘못하게 되더라도 나랏일을 잘못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에는 추첨된 사람을 쓰기를 원하는 자가 없거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추첨으로 임명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라고 말을 하였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당대에는 이러한 공직 추첨제의 당위성을 신의 계시에서 찾았기 때문에 신앙심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되었다. 크세노폰은 이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책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떤식으로 당대 신앙을 존중했는지에 관해서 많은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에 끼친 끔찍한 해악에 대해서도 고발자들이 문제 삼은 사실을 말한다.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 두사람은 나라에 너무도 많은 나쁜짓을 했습니다. 크리티아스는 과두정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살육을 일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면,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무절제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라고 고발자(=폴뤼크라테스)가 말했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 집안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써 과두파의 핵심이었으며, 저 폭군 크리티아스가 다름 아닌 자신의 5촌 친척이었던 플라톤으로서는 자신의 가문이 자신이 사랑한 스승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과두파와 가깝지 않았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상적으로도 과두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과두파 집권기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가 정권으로부터 일체의 발언을 금지당하는 처분까지 당했다며 스승을 변론하는데에 장문을 할애했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부친을 바보로 알도록 만들었으며, 사람이 병들거나 소송에 휘말리면 근친들이 나서는 전통 또한 무가치하다고 말한 과거도 문제 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들을 짓밟으라고 가르쳤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들보다 지혜롭게 만든다고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상의 판결을 받아내면 자기 아버지라도 구속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공언함으로써 였으니, 이는 '더 무지한 자는 더 지혜로운 자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적법하다.'는 법조항을 근거로 했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친척들에게까지 망신을 주게 만들었으니, 이는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친척들이 아니라 의사와 변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고 말함으로써였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한편 친구들과 관련해서도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친구들이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로움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또한 그분은 필요한 것들을 알고 있고 설명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존경의 가치가 있다고 공언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시인의 시구를 골라서 비틀어서 오독하는 기술로 제자들에게 부도덕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고발자는 그분이 명성이 드높은 시인들에게서 아주 몹쓸 구절들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폭정(tyrannikos)을 일삼으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헤시오도스의 "일은 전혀 비난거리가 아니고, 게으름이 비난거리이다."를 인용해서는 부정의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멀리하지 말고 그것들도 이익을 고려해서 행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발자는 호로메스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자주 했다고 말했다. "백성들 가운데 소리치는 자가 보이고 눈에 띄면, 그는 지휘봉으로 때리고 말로 꾸짖었다."의 뜻을 그 시인이 일반백성들과 가난한 자들을 때리는 것을 칭찬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크세노폰을 정리하면 고발내용은 다시 4가지로 풀어낼 수 있다.
아테네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했다.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전통을 무시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관직 제도를 무시했다.
아테네에 폭군들을 키워냈다.

1번과 2번의 경우, 일반 아테네 대중의 반감을 산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아테네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아테네인들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만큼 막연하게 그들이 이성적이고, 비종교적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사소한 가정문제에서 부터 중요한 군사결정까지 점을 쳐서 결정할 때가 많았고, 그러한 점치는 행위에는 신이 관여한다는 종교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 제비뽑기 선발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 모욕이었다. 그들은 제비뽑기 기계 클레로테리온의 구멍으로 흰색과 검은색 패를 인도하는 것은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 그리스에서는 신의 승낙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클레로테리온은 단순한 제비뽑기 기계가 아니라 효험 있는 주사위 점이었다. 절대로 비웃어서는 안 될 신성하고 신비로운 절차였다.
-Bettany Hughes, 《아테네의 변명》The Hemlock Cup, 강경이 번역, 옥당, 2012, p.499

더군다나 아테네에서 데모크라티아는 근대국가의 세속헌법적 의미가 아닌, 그 자체로 신격을 지닌 신으로 대우 받았다. 그리고 선거를 민주정치의 한 형테로 인정하는 근대인의 생각과 정반대로, 아테네인에게 선거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행위였다. 이런 환경에서 직접민주정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는 데모크라티아라는 신(神)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아테네에서 '추첨'은 신의 질서가 개입하는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곧 '추첨'은 본질적으로 제비를 뽑아 점을 치는 행위였고, 바로 그 '점 치기'를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것이다.

한편 아테네의 가정은 각각 하나의 나라이고, 가부장이 그 나라의 임금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는 크게 존중 받았다. 그러한 가부장들이 곧 아테네의 시민으로 여겨졌던 만큼 가부장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공격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동시대의 뛰어난 비판적 지성 중의 하나이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던 것도 1번, 2번 항목 때문이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3번과 4번은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와 깊게 연관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희대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 한편 크리티아스는 적의 앞잡이가 되어서 폭정을 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이었다.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만 왜 정치적인 고발내용이 이렇게 풍부하게 들어가있는지 의문이 학계에서는 제기되어 왔다. 도리옹을 비롯한 콜라이아코와 같은 학자들은 크세노폰만이 언급하는 고발내용은 플라톤이 언급하는 세명의 고발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 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기원전 403년에 내려졌던 '사면령'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황금기가 막을 내린 시점이었다. 아테네에는 잘 교육받은 귀족 엘리트를 중심으로하는 과두파와 도시의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민중파가 존재했는데,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파르타는 과두파가 정권을 잡을 것을 아테네에 요구했다.그 결과 크리티아스를 중심으로 30인이 권력을 독점했는데, 이들은 매우 끔찍한 폭정을 아테네에서 휘두른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 숫자를 3,000명으로 제한을 하는 한편 민중파와 온건-과두파를 대대적으로 학살했고, 그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했다. 당연히 이들의 폭정은 시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년만에 민중파가 들고 일어나서 내전이 발생한다. 민중파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민주정은 이전의 과두파에게 "다시는 과거사를 들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통합을 시도한다. 
누구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과거 일을 캐서는 안된다.
...
그리고 과거사를 들추었을 때 그를 재판 없이 처형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였다.
아리스텔레스, <아테네 정치제도사> 39-40장 
학자 콜라이아코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장의 내용이 크세노폰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와 같은 사면령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위함이라고 본다. 다시말해 사면령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불경죄의 죄목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와 한통속으로 묶어서 처벌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에게도 꺼려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성욕과 과시욕에 휘둘려서 살았던 알키비아데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누가보아도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최소한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자족적으로 사는 것을 보았고, 그분이 모든 쾌락을 아주 잘 지배하며 자신의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크세노폰, <회상>
한편 크리티아스와 소크라테스를 엮기는 더더욱 힘들었는데, 소크라테스가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30인 정권의 심기를 거슬렸기 때문이다.
30인 정권이 많은 시민들을 죽이고, 불의를 행하도록 조장했을 때, 어디선가 소크라테스는 소 떼의 목자가 되어서 소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자신이 나쁜 소치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이며,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민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신이 나쁜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크세노폰, <회상>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강의하고 젊은이들에게 말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처분을 당한다.
30인의 입법가가 되었을 때도 소크라테스에 앙심을 품고 말에 대한 기술을 가르치면 안된다고 법으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선고된 것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도 되는지 크리티아스에게 묻는다. 좋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몇가지 그 다운 질문을 한다. 
몇 살까지 젊은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정해주시오. 

30세보다 젊은 장사꾼에게 가격을 묻는 것을 되오?

누가 어디에 사는지 묻는 것은 되오?

크세노폰, <회상>

또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행하기도 했다.
시민들 주 어떤 사람(살라미스의 레온)을 끌고 와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법에 어긋나게 명령을 한다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고 만다.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실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사망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인 《소크라테스의 죽음》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감사의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름의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국명:나도독미나리)(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것으로, 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이다.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은 그 후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제에 대해 분노에 휩싸인다. 스승을 죽인 민주제의 한계를 중우정치라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철인정치를 주창하기도 했다. 

한 편 중요한 건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영향과 평가

 

Sed ab antiqua philosophia usque ad Socratem, qui Archelaum, Anaxagorae discipulum, audierat, numeri motusque tractabantur, et unde omnia orerentur quove reciderent, studioseque ab is siderum magnitudines intervalla cursus anquirebantur et cuncta caelestia. Socrates autem primus philosophiam devocavit e caelo et in urbibus conlocavit et in domus etiam introduxit et coegit de vita et moribus rebusque bonis et malis quaerere. 
옛 철학으로부터 ,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에게 배운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수와 운동들이 연구되었고, 만물이 어디에서 생겨나고 어디로 돌아가는지가 다루어졌고, 이들의 의해 별들의 크기와 간격과 궤도 등 천문이 전체적으로 열심히 탐구되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도시로 가져다 놓았으며 집안으로까지 들어놓았으며 삶과 도덕과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탐구하게 했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5.4.10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점은, 다양하다 못해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듯한 사상들이 제자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언급하듯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나올 수 있었던것은 그만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가진 사상과 삶의 폭이 넓고 깊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시작이자 끝. 아카데미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명료한 사고 방법론과 초월을 추구하는 태도에 영향받았다.
소(小)소크라테학파: 플라톤 보다 영향력은 작았던 3개 학파를 지칭하는 용어다.
안티스테네스: 개인의 본성을 사회와 대비해서 중시하고, 금욕과 자기극복을 추구했다. 키니코스 학파를 창시한다.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의 삶이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움, 소박하고 절제된 삶에 영향받았다.
아리스티포스: 현재의 지적 쾌락을 미래의 것과 대비해서 중시했다. 키레네 학파를 창시했다. 호기심과 지적탐구의 즐거움에 몰입해서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우클레이데스: 논리정신을 추구했다. 메가라 학파를 창시했다. 유명인들과 무수하게 벌였던 소크라테스의 논쟁들에 영향 받았다.
파이돈: 엘리스 학파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육체적 삶보다 이성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초월적 태도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크세노폰: 의무와 절제를 중시하면서도 실용적인 정치철학을 추구했다. 남성적이면서 시민으로써 의무와 자유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학파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여러 저작을 남겨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학파의 난립에 관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는 《서양철학사》에서 그 이유를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자기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사상은 그만큼 비밀스러웠던 말인가? 또는 그렇게도 풍부했다는 말인가? 또는 그만큼 미완성품이었단 말인가? 이런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의 방향들 중에서 어느 것이 스승의 원래적인 본질과 의도에 꼭 들어맞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관한 결정은 우리들이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즉 플라톤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려질 수 있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그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그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노장(老莊)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귀납적 방법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당장 플라톤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아카데미를 연다든가 하면서 각자의 철학 학파를 창설했을 정도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기는 죽은 이후에 오히려 올라갔으며,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당히 유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를 달린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되듯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나 친구들은 재산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끊임없이 탈옥을 권한다. 고대는 물론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반역죄나 살인죄 같은 엄청나게 사악한 죄상이 아니고서는 죄수를 처박아놔서 콩밥 먹이거나 사형을 시행시켜봤자 딱히 좋거나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걍 범죄종자가 꺼져버리고 다신 자기네들 공동체에 얼씬도 않으면 그러려니 했었다. 실제로 진상이 다르게 밝혀지거나 범죄자가 다시 필요해져서 불러들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서 묘사되는 간수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그를 사형시키기 싫어하면서 은근히 탈옥에 대해서도 그리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 내가 아테네의 법률을 따랐고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혜택을 입었으며, 또 평생 아테네를 위해 옳은 말을 해왔는데, 탈옥한다면 내 가르침들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니 사형 선고에 묵묵히 복종하고 후회하지 않겠다며 의연하게 독배를 마셔 죽음을 택했다. 아마 이로 인해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나 하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소크라테스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특히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모습이 크게 조명되었다. 어느 공동체가 안 그러겠냐만 당시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절제 등을 주요한 가치로 여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어서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 또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잘 선동된 군중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정적을 매도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된다는 것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논객(論客)으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평범한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사리 분별이 지극히 뚜렷하고 양식이 있으며 사나이다운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 했다고 하니, 아마 그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표리부동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적수준 등에 맞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먹고 도움이 되는 식으로 대화를 전개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위인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허나 정작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받은 영향이라고는 일리아스와 귀납적 추론 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를 죽인 것은 물론이고 다시 태어나면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물욕 뿐만 아니라 식욕과 성욕까지 자제하는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실천은 오히려 디오게네스의 철학과 닿아 있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관계는 정치적 파트너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당장 알렉산드로스가 주장했던 세계시민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며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이 싸웠다. 

 

 

소크라테스 제자들


플라톤
크세노폰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티포스
에우클레이데스

 

 

소크라테스에 대한 어록


이것이 우리 벗의 최후였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우리는 말할 겁니다. 그는 당시 우리가 겪었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의로웠노라고.
― 플라톤 『파이돈』 118a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덕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덕을 돌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그분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무엇보다 그리워한다. 나에게 그분은 내가 상세히 설명한 그런 분이었다. 신들의 판단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만큼 경건하셨고, 누구에게도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로움을 줄 만큼 의로우셨으며, 더 좋은 것 대신에 더 즐거운 것을 선택하는 법이 전혀 없을 만큼 자제력이 있으셨고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을 분간하는데 실수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결정하는데 다른 사람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들을 결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현명하시고, 그런 것들을 설명도 하고 규정도 하기에 충분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고 잘못하는 것을 논박하고 덕과 아름답고 훌륨함으로 권면하기에 충분한 분으로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행복한 그런 분으로 내게는 보였다. 이것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들과 다른 사람들의 품성을 비교해서 판단하게 하라. 
―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 4.8.11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전력을 기울였지만 전체 자연에 관해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것들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을 탐색하면서 최초로 정의들에 관해 생각을 기울였다. [...] 저 사람이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탐색한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는 추론하기를 추구했던 것인데, 추론들의 시작은 바로 어떤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당시에는 철학적 대화술의 역량이 본질 규정 없이 반대되는 것들을 탐구할 만큼,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동일한 학문이 다루는지를 살펴볼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에게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귀납적인 논증과 보편적인 정의인데, 이것들은 모두 학문의 출발점과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7b1, 1078b17 


어디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찾을수 있습니까?
― 키티온의 제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 2권을 읽고 기뻐하며 서점 주인에게 한 말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안티스테네스와 그 제자들이 진전해 나아갔다는 사실이 덕이 실제로 있다는 증거가 된다.
― 포세이도니오스 단편 29 


이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맞세웠다. 그는 논변의 어떤 정교함을 가지고서 그들의 교설을 물리치는 데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의 매우 풍부한 연설들로부터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철학이, 더 오래전에 있었던, 자연에 관한 저 철학이 아니라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그리고 인간들의 삶과 성격에 관해 논의하는 이 철학이 발견되었다고 이야기된다. 

―키케로, 『브루투스』 8.31 


그러나 만약 그대가 예시를 원한다면, 모든 고난 속에서 헤매었지만 가정을 괴롭게 한 가난과 군복무를 견디는 수고에도 굴복하지 않은 인내의 노인 소크라테스를 보게나. 그의 집에는 거친 행실과 극성스러운 혀를 가진 아내, 또는 다루기 힘든 성격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아이들의 무리가 있었고, 그는 전쟁 중에 살았거나 폭군 치하에서 살았거나, 전쟁과 폭군보다 더 잔인한 민주주의 시대에 살았다네. 전쟁은 27년동안 계속되었지. 그 후 해로운 30인 참주들의 군대에 의해 도시는 결국 항복했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네. 마침내 가장 심각한 비난으로 정죄가 완성되었네. 그들은 그가 종교를 어지럽히고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신들과 의회를 무시하고 국가에 저항하도록 타락시켰다고 비난했지. 그 다음은 감옥과 독배였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영향을 거의 주지 못했으며 그의 외색 하나 바뀌게 하지 못했네. 이 얼마나 훌륭하고 비범한 기적인가! 마지막까지 소크라테스가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 모든 커다란 운명의 차별 속에서도 그는 한결같았다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104.27 


소크라테스가 일반적인 법적 변호 방법을 사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판사들의 마음을 달래고 반박에 전념했다면, 소크라테스의 무죄를 확보하는 데 더 유익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의 품성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이 받게 될 형벌을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하며 형을 받기를 원했다. 이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삶을 죽이느니 남아있는 삶을 죽이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판결을 후손들에게 맡기고, 최후의 노년기를 잠깐 잃으면서 곧 모든 세기의 영원함에 이르렀다. 
― 퀸틸리아누스, 『웅변 교육』 9.9 


가장 훌륭한 인생의 스승.
―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기념할만한 행동과 말들』 3.4 ext.1 


소크라테스는 인생이 언제나 모든 부분에서, 모든 경험과 모든 활동에서 보편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 플루타르코스, 『노인이 공무에 종사해야 하는지』 26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완벽해졌고 모든 면에서 자신을 향상시켰으며 이성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도,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51 


지혜와 웅변에 있어서 으뜸.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마르쿠스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 3.16 


철학의 논의는 먼저 자연에 관한 것이 유일한 형태였고, 두 번째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윤리에 관한 것을 덧보탰고, 세 번째로는 플라톤이 변증술에 관한 것을 덧보태서 철학을 완성에 이르게 했다 .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항』 3.56 


소크라테스는 당신들 신들을 파괴함으로써 진리를 더욱 면밀히 탐구했다 비난을 받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이 세상에 있지는 않았지만, 진리는 항상 비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들은 소크라테스가 퓌티아가 당신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증언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아폴론을 압도하여서, 그는 저 스스로를 거슬러 선언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고백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부인하는 그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에 의하면 그는 신들을 부인했기에 덜 현명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들을 부인했기에 더 현명하다. 
―테르툴리아누스, 『이교도들에게』 1.4 


켈소스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이나, 영, 혹은 현자가 그러한 일이 그에게 닥칠 거라는 걸 예견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그는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리 일어날 거라고 예측한 그 일에 성급하게 몸을 던진단 말인가?'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신 후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크리톤의 설득을 받아들여 감옥에서 탈출하고 이런 재난을 피하는 것은 그 자신의 힘에 달려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것에 따라 비철학적으로 사는 것보다 철학자로써 죽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했다. 
―오리게네스, 『켈소스 논박』 2.17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동료 시민들의 판결로 아테네에서 사형당했다. 그가 부당하게 삶으로부터 추방당했기에 그가 관습, 도덕, 의무에 대해 논의한 것들이 헛된 것이 되었는가?
―아르노비우스, 『이교도 논박』 1.40 


철학의 1인자.
―락탄티우스, 『신성한 가르침 요약』 37.1 


모든 그리스인들 중 가장 현명한 소크라테스.
―에우세비우스, 『복음 준비』 15.61.12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보잘것없고 미숙한 어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인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와 다른 현자의 '너 자신을 알라'를 말하길 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편지 57: 팜마키우스에게』 12 


철학의 최고 스승.
―암브로시우스 『시편 제 118편 해설』 16.11 


그 당시 저명했던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도덕 혹은 행실이라 불리는 부분에서 탁월한 권위를 차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18.37

 

 


서양 철학의 강의를 듣게 되면 '소크라테스의 저서를 쓰시오'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있는데 상술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의 스승으로 인용되었기에 널리 알려졌을 뿐, 그 자신 소크라테스의 책이 남아있어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서양철학계에 플라톤의 영향력이 어마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덩달아 높혀진 것. 물론 그도 서양철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알려진 계기가 플라톤의 책에서 일뿐.
플라톤의 책 향연에서는 미소년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또다른 미소년 아가톤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알키비아데스가 질투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알키비아데스가 이전에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기까지 하는 등 눈물나는 구애 쇼(...)를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완강한 거절 때문에 실패한 이야기를 고백한다. 

 

 

 

 

 

 

 

 

 

 

 

 

플라톤, Platon, 소크라테스 제자, 이원론, 이데아, 철인, 아카데메이아

 

플라톤
Platon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대화편”을 다수 씀.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며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實在)라고 보았고, 철인 정치를 주장함.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n, B. C. 428?~B. C. 347?)은 스승의 주지주의적 윤리 사상을 더욱 심화하여 발전시켰다. 플라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세계를 눈으로 통해 볼 수 있고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의 세계와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현상의 세계는 참다운 세계가 아니며, 오직 이데아의 세계만이 참다운 세계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현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참다운 실재가 될 수 없는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불변하고 완전무결한 실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모든 사물에는 그것의 원형인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삼각형을 그린다고 할 때, 플라톤에 따르면 이 삼각형은 완벽한 삼각형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삼각형의 모습을 가진 한 형태를 그릴 수 있을 뿐이며, 우리가 그릴 수 없는 완벽한 삼각형이 플라톤이 말하는 삼각형의 이데아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산 등 모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아름다움의 이데아라고 하였다. 이처럼 플라톤은 각각의 사물이나 가치에는 그것만의 이데아가 있으며, 우리는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참다운 앎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은 모든 이데아 중 최고의 이데아를 ‘선(善)의 이데아’라고 하였다. 그는 선의 이데아와 다른 이데아의 관계를 태양과 만물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태양이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인 동시에 만물을 보이게 하는 빛의 근원이듯, 선의 이데아는 모든 지식과 진리의 원인이며 모든 이데아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하였다.

지하 동굴 입구에 불이 있고, 동굴 깊숙한 곳에 어릴 때부터 손발과 목이 묶인 채로 지내 온 죄수들이 있다고 하세. 그런데 이들은 묶여 있기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가 없어서 안쪽의 동굴 벽만을 쳐다볼 수 있는데, 그들 뒤쪽의 동굴 입구에서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네. 그리고 이 불빛과 죄수들 사이에는 하나의 담이 세워져 있어. 마치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을 치고,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주듯 말이야. (중략) 좀 더 상상해 보세. 담과 불빛 사이의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온갖 물품과 돌이나 나무 등의 온갖 재료로 만든 인물상과 동물상들을 담 위로 높이 들고 지나가는 모습을 말이야. (중략) 죄수들은 반사된 불빛을 통해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들을 쳐다보게 되지. (중략)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횃불을 강제로 쳐다볼 경우에, 그는 횃불을 쳐다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네. 또한 전에는 그림자로만 보던 실물을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거야.  

- 플라톤, “국가” 

여기서 동굴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이고,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현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동굴 밖의 세계는 참된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이며, 동굴 밖의 태양은 선의 이데아를 말한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은 본 사람, 즉 선의 이데아를 아는 사람은 철인(철학자)이며, 철인은 동굴 안으로 돌아와 우리를 참된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국가와 도덕적인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그는 모든 것에는 그것만의 고유한 기능이 주어져 있는데, 각각의 것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을 잘 수행해 내는 상태를 ‘덕(德)’이라고 하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가지 기능에 탁월한 성향을 지니며, 그에 대응하는 덕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타고난 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의 각 구성원이 타고난 자질에 부합하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국가에는 생산 계급과 수호 계급, 통치 계급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산 계급은 자신들의 욕망을 제어할 절제의 덕, 수호 계급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용기의 덕, 통치 계급인 철학자는 지혜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절제의 덕은 생산자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에게도 공통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상적인 통치자 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국가를 수립할 때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어느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름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이들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시민 전체를 행복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중략)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각각 한 가지 일에 대해 그것에 해당하는 개인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 전체는 여럿이 아닌 ‘하나의 나라’가 된다. (중략) 철학자들이 나라를 통치하지 않는 한, 또는 현재의 최고 권력자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철학과 정치권력이 하나로 결합하지 않는 한 나쁜 것들은 끝나지 않는다. 

- 플라톤, “국가”


이처럼 플라톤은 지혜의 덕을 지닌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각 집단이 그들의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하여 조화를 이룰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세 부분의 구조, 즉 욕망, 기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각 부분이 자기의 맡은 바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할 때, 절제와 용기, 지혜의 덕을 지니며, 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정의의 덕이 실현되고, 비로소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국가를 지혜롭게 만드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또한 국가를 그렇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부분들이 개인을 현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가?

글 라 우 콘: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국가를 용기 있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부분과 방식이 개인을 용기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글 라 우 콘: 필연적으로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더욱이 나는 우리가 국가가 정의롭게 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도 정의롭게 된다고 말하리라고 생각하네.

글 라 우 콘: 저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우리는 국가가 정의로운 까닭은 그것을 구성하는 세 계층이 저마다 자신의 맡은 바를 행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잊지 않고 있네.

글 라 우 콘: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바는 우리들 각각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이 각각 자신의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정의롭고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점일세.

글 라 우 콘: 물론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이성적인 부분이 나머지 영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 부분은 진정으로 지혜로우며 나머지 영혼 전체를 위한 선견지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격정적인 부분은 이에 복종하고, 이성적인 부분에 협력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글 라 우 콘: 당연히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이 두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양육되어 진정으로 자신의 역할을 배우고 계속 그런 교육을 받게 되면 이들은 욕구와 관련되는 부분을 지배하게 될 걸세. 욕구와 관련되는 부분은 각자에 있어서 영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본성상 재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부분일세. 이 부분이 이른바 육체적인 쾌락으로 가득 차고 지나치게 강대해져서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오히려 나머지 두 부분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지배하려 들고 따라서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어엎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 부분은 감시를 하게 될 걸세.

- 플라톤, “국가”



나아가 플라톤은 이상 국가와 이상적인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교육, 특히 수호자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수호자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국민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으로서, 장차 나라의 지배자가 될 사람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공공 정신이 투철한 수호자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특히, 시가 교육(음악 교육, 문학 교육)과 체육 교육이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렇게 양성된 수호자는 공적 생활을 위해 재산을 공유하고, 공동 식사, 공동생활 등 생활 방식도 공유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철저한 공유제에 의해서만 사적 소유로 말미암은 분쟁, 불화, 갈등 등이 없어지기 때문에 수호자는 배우자와 자식까지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

기원전 428(또는 427)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들의 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2.12.3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카데메이아의 창설자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전기 헬라스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플라톤의 연구 분야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인식론 등 서양 철학의 온갖 영역에 걸쳐있으며, 실상 플라톤 이후의 유럽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들"(화이트헤드)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학자이다. 또한 플라톤이 주장하고 직접 솔선수범한 금욕적이고 경건한 관상(觀想, θεωρία)적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이후 유럽인들의 인생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수많은 《대화편》(라틴어로 dialoghi)들과 약간의 편지들이 남아있다. 중고등학생 교육과정에서는 이데아론, 철인정치 등 몇몇 키워드를 통해 잠깐 소개되어 그의 위상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대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어느 학문의 입문 과정에서든 비조 격으로 거론되곤 하며, 그의 형이상학, 정치철학, 미학 등과 그 영향력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배울 수 있게 된다. 

젊은 시절
플라톤의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Ἀριστοκλῆς이며 아테네 출신이다. 어머니의 가계에 그 유명한 솔론이 있다. 플라톤은 외가로 해서 솔론의 6대손이 된다. 한편 솔론의 가계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플라톤은 종종 '포세이돈의 후손'이라 불렸다. 또한 당시 아테네의 소문에 따르면, 플라톤의 어머니는 아폴론에게서 잉태하여 플라톤을 낳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클레스는 디오니시오스에서 글을 배웠고, 아르고스 출신 레슬링 선수 아리스톤에게 체육 교육을 받았다. 아리스토클레스는 체격이 좋은 탓에 아리스톤에게서 '넓다'는 의미를 지닌 "플라톤"이라는 이름도 새로 얻었다. 그는 레슬링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고, 그림에 관심을 두기도 했으며, 서정시와 비극시를 썼다.

20세 때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비극 작품을 갖고 경연에 나서려던 차에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을 듣고는 써 두었던 시를 불태웠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소크라테스도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그는 백조 새끼를 무릎 위에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백조 새끼에게 갑자기 날개깃털이 돋더니 기쁜 듯 고운 소리를 높이 울고 나서 날아가 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플라톤을 소개받자, 그는 '이 친구가 바로 그 백조로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플라톤도 젊은 시절에는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친척들 덕분에 정치권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 정권 싸움 과정에 자신의 외가 친척인 카르미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살해당하자 이런 생각은 굳어진다. 아테네에 민주정이 들어서자 다시 한 번 정치에 욕심을 내지만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어이없는 이유로 고발당했고, 재판에서 배심원들 투표에 의해 사형당하자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방랑 생활과 시칠리아 섬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후, 플라톤은 크라튈로스와 헤르모게네스의 철학에 전념했다. 그는 28세가 되자 다른 소크라테스 학파 사람들과 함께 메가라에 있는 에우클레이데스에게 가서 은거했다. 그 다음에 그는 퀴레네에 있는 수학자 테오도로스에게 가기도 했고, 다시 이탈리아에 있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인 필롤라오스에게 가기도 했다. 또 그곳을 떠나 이집트 사제들에게 갔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을 만나 보기로 결정했으나 그곳에 전쟁이 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메이아에서 지내면서 철학 공부에 열중했다. 
 
한편 플라톤은 시칠리아 섬을 뱃길로 세 차례 방문했다. 처음엔 그 섬과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를 구경하기 위해 갔는데, 당시 그곳의 참주였던 대 디오니시오스를 만났고 그는 자신과 친교를 맺자고 플라톤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참주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더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도 뛰어나지 않는 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그 자체로 이익이기만 하지는 않다"고 주장하여 그 참주를 화나게 했다.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는 화가 나서 "당신은 노망난 이야기를 하고 있소"라고 말했고, 이에 플라톤은 "당신은 참주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라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참주는 플라톤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처남 디온의 만류로 그렇게 하지 못했고, 대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플라톤을 스파르타의 노예상에게 노예로 팔아버렸다. 

노예상은 플라톤을 아이기나 섬에 팔았고 그곳은 그 섬에 상륙한 모든 아테네 사람들을 재판없이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플라톤도 사형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런데 누군가 플라톤을 보고 철학자라고 말하자, 철학자를 죽이면 신령한 존재가 노하기 때문에 그들은 표결을 통해 플라톤을 사형시키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를 다시 팔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니케리스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20므나의 몸값을 주고 그를 아테네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려보냈다. 플라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대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에게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지 말라고 편지로 협박했고, 이에 플라톤은 "나는 디오니시오스를 기억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고 답장을 보냈다. 

두 번째로 시칠리아 섬을 방문한 것은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자신의 철인정치에 따라 살 사람과 땅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 디오니시오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다. 철인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명목상이고 사실 플라톤은 그 섬을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디온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위기에 처해있었고 이때 친구 아르퀴타스가 디오니시오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양해를 구하고 플라톤을 아테네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것은 디온과 디오니시오스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디온은 그 섬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디온은 반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소 디오니시오스를 축출하였으나 부하 장수의 배반으로 암살당한다.

 

 

아카데미아학파 설립과 말년
플라톤은 자신이 머물던 아카데메이아에 학당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아카데미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서기 529년에 폐쇄될 때까지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카데미아는 오늘날의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교와 비슷하다.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제자는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세운 학당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아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이 죽고 나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의 학당, '리케이온'을 세운다.

플라톤은 결혼식 피로연 중에 81세로 생을 마쳤고,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철학을 했던 아카데미아에 묻혔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기록한『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고 한다.

 

 

"(전략) 한편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 우선,

사멸하는 자들 중 절제와 정의로운 품성에서 뛰어난 자,
바로 여기에 신적인 아리스토클레스가 눕다.
누군가가 모든 이로부터 지혜에 대한 위대한 명성을 얻는다면,
이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것이고 질투는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가이아가 플라톤의 이 육신을 가슴에 숨기고,
불멸하는 혼은 지복한 자들 사이에서 위치를 정한다.
아리스톤의 아들, 아무리 멀리 살지라도 훌륭한 사람이라면>그를 누구나 존경한다. 그가 신적인 삶을 보았으니.

그리고 더 최근의 것으로는

A: 독수리여, 너는 왜 무덤 위에 올라 있는가? 말하라! 진정
너는 신들 중 누구의 반짝이는 거처를 멀찍이 보고 있는가?
B: 나는 올륌포스로 날아가 버린 플라톤 혼의
닮은꼴이라오. 흙으로 된 육신은 아티카의 땅이 지녔지만.

그리고 내가 쓴 것은 이렇다.

그리고 어떻게, 만약 포이보스가 플라톤을 그리스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의 혼을 글로써 고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가 이 육신의
의사이듯이, 플라톤은 혼의 의사로다.

그리고 다른 것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니.

포이보스는 사멸하는 자들 사이에 아스클레피오스와 플라톤이 태어나게 했으니,
한 사람은 혼을, 다른 사람은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결혼 잔치를 치르고 그는 언젠가 자신을 위해 세웠던 나라.
제우스의 평원에 건립한 나라로 갔다.

이것들이 그의 비문시들이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김인곤, 김재홍, 이정호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서울, 나남출판, 2021, p.286-288. 


 

 


플라톤 사상


Out of Plato come all things that are still written and debated about among men of thought.
여지껏 사상가들에 의해 쓰이고 논의되는 모든 것들이 플라톤에게서 나왔다.
- 랠프 월도 에머슨


우선, 플라톤의 사상은 복잡하고 거의 모든 저작이 대화편 형식이라 해석 또한 이견이 갈리기도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플라톤의 사상은 흔히 파르메니데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

소크라테스로부터는 윤리적 가치의 정의(definition)을 찾고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리에 도달하려는 대화법을, 파르메니데스로부터는 불변하는 참된 존재에 대한 존재론을,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는 만물의 근원인 수의 존재론과 수학적 진리의 확실성, 그리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신봉하던 오르페우스교의 영혼불멸과 윤회론 등을 받아들여, 이것들이 플라톤의 사상을 이루는 당대 주요한 사상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정리해보면 플라톤의 사상은 크게 존재론으로서는 중기 대화편 중에는 <파이돈>과 <국가>,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정치가>의 형상 이론, 인식론으로서는 <메논>과 <파이드로스>의 상기론 내지 <테아이테토스>의 지식론, 윤리학/정치사상으로서는 <국가>의 영혼삼분설, <파이돈>과 <국가>의 영혼불멸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플라톤이 쓴 저서의 대부분은 주로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 형식의 문집이었다. 당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문학 장르가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안티스테네스, 파이돈, 에우클레이데스, 아리스티포스, 아이스키네스)에 의해 많이 쓰였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일화에 대해서 알려진 것들 중 현존하고 그리고 다수인 이 플라톤의 저작으로 알려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실제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이나 그의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묘사되어있는 이상적이고 비극적인 소크라테스와는 매우 다르다. 플라톤의 후기 저작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 등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반면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가 그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 따른 문학적 설정이라는 설도 해석학적 관점으로서 유력하다.  

 

 

 

이데아론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데아는 한국어로는 흔히 형상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는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소피스트들과 논쟁했다. 소피스트들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하는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볼 때 그리스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법정에 서서도 말빨만 세우면 똑같은 행위가 불법도 되고 합법도 되기 때문.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개념정의가 확실히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는 개념정의가 확실하게 되었다면 행동으로 옮기라는 지점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런 개념정의를 좀 더 고급화하고 체계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건드리고 싶었던 개념 정의는 용기나 절제, 정의와 같은 것들이며 이런 것들을 위해 구두를 만드는 사람, 의자를 만드는 사람 등의 기술에 대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플라톤이 본격적으로 철학의 길로 뛰어들어서 이런 개념들을 논의하려고 하고, 똑똑한 애들 모아서 가르치고 토론하려고 하니 막상 어려움도 많고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의 이데아론은 이런 부분을 다듬은 것으로,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대강 생각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와 관련된 부분에서 얘기하자면, 의견, 감각, 언어 등과 관련해서 얘기해 볼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being은 오직 하나뿐이며, 유일한 진리이고 불변하고 운동하지 않는다. 이런 being은 머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감각적인 것이 아니다. 감각은 항상 우리를 속인다. 소피스트들도 이 교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다. 소피스트들은 이런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대해서, 아예 감각은 그냥 그 사람 개개인의 고유한 것이므로 사람이 느끼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참에 속하며, 거짓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플라톤은, 감각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형상이란 것을 도입했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에서 예시로 드는 것 중에 하나는 크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크다는 형용사를 명사로 바꿔서 큼이라고 하고, 순수한 큼 그 자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순수한 큼 그 자체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이 순수한 큼 그 자체는 정확히 어떤 것인가 등등, 이 순수한 무언가 그 자체가 세상에 있다고 하면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자기 나름대로 풀어낸다. 

이 형상에 대해 플라톤이 새로이 지적하는 것, 플라톤을 서구 철학의 거인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인식 혹은 앎과 개념의 근저를 이루는 그 무엇이다. 바로 위에는 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데아를 예시로 들었는데 이데아에 대한 다른 측면을 조망하기에는 약간 적합하지 않아서 새로운 예시가 필요하다. 플라톤뿐만 아니라 하이데거 같은 현대철학자마저도 이데아에 대해 흔히 예시로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나무이다. 우리 인간은 나무를 보면 나무라고 인식한다. 그게 소나무이건 전나무이건 참나무이건, 소나무나 전나무나 참나무의 개체가 멋있게 자랐있던, 병이 들어 시들었건, 죽어서 썩어 있는 상태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여러 나무들을 나무로 만들어 주고, 우리가 그것으로 나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의 이데아인 것이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인간이 기계어를 통해서 만든 간단한 논리는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 하지만 인간은 이와 같은 종류의 개념을 손쉽게 인식하는데, 이것이 형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와 같은 것이 있어서 진실된 앎을 가리키고 있으면 소피스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기가 어려워지니 말이다.

이런 형상의 체득에 관해 플라톤은 일종의 생득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말이 생득적이지, 혼(魂)득적이라고 나무위키에서 대강 불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나무라던가 바위라던가 하는 이런 수많은 이데아는 우리 인간들이 이미 혼의 수준에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혼의 개념은 윤회설과 이어진다. 우리 인간의 혼은 불멸하며 육체와 육체를 떠도는데 새로운 육체에 깃들 때 기억을 잃게 된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는 형상과 마주할 경우, 혹은 형상과 마주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미 알고 있던 형상을 상기해서 알게 된다. 마치 우리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상기할 때 관련된 것과 마주했을 때 쉽게 상기하게 되는 것처럼 또 때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대목에서 상관없는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한국어로 흔히 상기설이라 부른다. 

플라톤이 솥뚜껑을 보고 자라를 떠올렸다고 해 보자. 그러면 플라톤은 솥뚜껑과 자라를 순간적으로 감각을 통해 이모저모 비교하게 된다. 솥뚜껑과 자라는 뭔가가 조금 닮았을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둘이 같지 않음을 안다. 즉, 솥뚜껑을 보고, 자라를 상기하며, 둘 사이를 비교하며 둘이 같은지 그냥 좀 닮았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그러면 같음이나 닮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빵을 만져보고 그게 떡이 아니라 빵이란 걸 알았다면 해당 촉감 경험이 자기가 알고 있는 빵에 대한 지식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기타 소리를 듣고 그게 드럼 소리가 아니라 기타 소리란 걸 알았으면 마찬가지로 해당 청각 경험이 자기가 알고 있는 기타 소리에 대한 지식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감각 경험을 통해서, 감각으로 무언가를 경험하자마자 우리는 감각 경험과 우리 안의 개념을 비교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감각 경험이 있고, 우리 안의 개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사이에 놓인 같음이란 개념은 무엇일까?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가정을 하나 해보자. 우리가 빵의 촉감에 대한 지식이나 기타 소리에 대한 지식이나 솥뚜껑 모양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았다고 하는 가정이다. 딱 봐도 알 수 있듯이 설득력이 높지 않다. 그런 지식들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적으로 축적되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같음이란 개념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경험 이전에 알게 된 것일까? 아무래도 경험 이전에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태어나자마자 시작하지 않은가? 같음이란 개념은 아무래도 감각경험을 하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으니까 영혼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윤회를 반복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니까 같음이란 개념, 말하자면 같음 그 자체를 우리가 아는 것 같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레벨에서부터 알고 있는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우리는 ~임 그 자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에 대한 예시가 위에 써져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 가지 개별 나무들을 보고 아 그게 나무라는 개념과 같네요, 나무라는 개념에 속하는 개별적인 물체네요 이런 것을 안다. 어떻게 개별 나무를 보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나무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재언하는 바지만 요것이 나무의 이데아, 나무임 그 자체 뭐 그런 것이다. 

플라톤은 이 상기설을 바탕으로 착한 이성과 철학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면 못된 욕심과 감정과 욕구의 삶을 살게 된다면 죽어서 사람이 되기 힘들고 동물이나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이 새 육체로 들어갈 때 깨끗한 이성과 철학의 삶이 아니라 찌들은 삶을 살면 혼이 오염되어 버리는데,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감정과 욕구에 휘둘리는 동물의 육체에 들어가기 적합하게 되어 버린 바람에 동물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철학을 하지 않지만 절제하는 삶을 살 경우는, 꿀벌과 개미나 인간에 들어가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성과 철학 없는 절제는 곧 무절제한 감정과 욕구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욕구에 치우친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설명이다. 반면 이성과 철학으로서 절제를 하더라도 선선하고 즐거운 삶을 살며 영혼을 정화한 사람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신이 사는 세계에 신은 아니지만 합류하게 된다.

이데아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도 있고 대상의 본질, 인간의 인식 구조를 이루는 원자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해석에 따라 물자체, 실용적 정의 등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윤리학에선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좀 고급화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달리 질문해봐도 그럴 듯하다.

플라톤은 이런 개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데아에 대한 정의로부터 선의 이데아 등등이 나오고 세상을 만드는 데미우르고스 등이 나오고 우주나 세계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이 형상이론이야말로 서구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이며, 영미철학이건 대륙철학이건 오늘날까지 중후한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정치철학

 

배경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정치철학이 주요 테마인 대화편은 국가, 정치가, 법률 셋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티마이오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한 서한들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철학적 이슈가 언급되곤 한다. 개중에서 국가가 가장 유명하다. 플라톤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정치철학뿐만이 아니라 예술비평, 영혼론 등 수많은 테마가 얽힌 방대한 저작이다. 또한 시기적으로는 국가, 정치가, 법률 가운데 국가가 가장 먼저 쓰여졌으며 대화편들 가운데에서 분량이 두 번째로 많은 대화편인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젊은 시기에 썼다고 할 수 있다. 

비단 국가뿐만이 아니라,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그가 놓여 있는 시대상황과 동시에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인터넷에 나도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란 대개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저열한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경구와 더불어, '근데 이 사람 민주주의자 아니었음 ㅋ' 따위의 발언이 부록처럼 붙어나오기 일쑤다. 즉 플라톤으로 하여금 국가를 쓰게 만든 당시 아테네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며 단순히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식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들 생각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아테네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무찔렀을 뿐 아니라, 영걸 페리클레스의 통솔하에 아테네는 일개 도시국가가 아니라 거의 제국을 방불케 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아테네 주변의 영토들을 작게나마 계속 흡수하고 있었으며, 해운국가답게 바다를 장악해 무역에서 위세를 떨치며 수많은 도시국가들을 아테네 산하에 편입시키며 세금을 받아먹었고, 각 도시국가들 사이의 견제로 인해 쉽게 축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긴 성벽도 기습적으로 축조해 수비적으로 엄청난 우세를 차지하게 되어 위세가 등등해졌다.

아테네는 패권국가를 꿈꿨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욕망, 더불어 현재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합쳐지면서 인해 패악질이 심해졌다. 스파르타와 테베 등의 강한 도시국가는 이를 좌시하다간 아테네가 장래에 정말로 제국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전쟁이 벌어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연설은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다. 페리클레스는 이 연설에서 아테네인들의 용기와 자율성, 임기응변과 자발적인 애국심과 협동심을 찬양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병사하고 난 이후 아테네는 더 많이 뜯어내려다 좋은 협상시기를 놓치거나, 반대파를 누르려고 선동하던 사람들이 제 논리에 제가 빠져서 불리한 원정을 강요받거나, 어쨌든 인물은 인물인 알키비아데스도 정치 싸움으로 그 능력을 소진시키고 적국에 좋은 일만 시키는 등 썩 좋은 모습은 못됐다. 거기에 멜로스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인의 패권주의와 야욕은 결론적으로 멜로스 인들의 경고처럼 반 그리스 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거니와 플라톤 입장에서 볼 때 올바르지 못한 데다가 경멸스럽기까지 할 내용이었다. 

아테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의 민주정 폴리스들은 많은 수가 엉망이었다. 아테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우정치, 선동, 야합, 분열과 반목으로 인해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외세 결탁, 전쟁 사주, 이적 행위, 부정부패, 쓴소리 하는 엘리트가 미워서 잘난 체한다고 도편추방하기, 누명 씌우면서 공격하기, 그러다가 망하면 책임전가, 능력이 아니라 연설과 선동으로 표를 얻어내서 요직 차지하기 등의 일이 폴리스들에게 일어났다. 

이와 같은 민주정치의 혼란은 소피스트들의 정치철학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멜로스의 대화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피시스와 노모스의 대립관계를 둘러싼 설전이다. 공격을 당하는 약소국 멜로스인들은 퓌시스, 신이 만든 불변의 정의 및 약자를 함부로 괴롭히면 받게될 응보나 재액 등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의 경우는 노모스, 그러니까 '흥 신이 만든, 불변하고 만인에게 공유되는 정의라니 웃기고 있네. 온세상 풍속이나 법률이 다 천차만별인 거 보면 모르냐? 그런 건 다 약한 놈들이 무서워서 만든 헛소리고 어차피 세상 일은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어 정의가 어쩌고 착한 거 어쩌고 하려다가 먹을 거 못 먹으면 못 먹은 놈 손해지 지금 우리가 세니까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는 식의 얘기를 했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진 소피스트들의 유명한 논쟁이다. 이를 통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퓌시스를 공격하고 노모스를 숭앙하는 풍조 및 무리들이 아테네 민주정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소피스트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결국 아테네의 폭망으로 끝나자, 아테네인들은 지독한 멘붕에 빠졌다. 많은 아테네인들이 이 당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그냥 빛 좋은 개살구고 사실 스파르타 식의 엄격한 규율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역시 킹왕짱인 거 아니냐?' 하는 식의 생각에 깊이 경도되거나 영향을 받았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런 배경 아래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과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민주정 폴리스들을 비판하려는 목적 또한 품고 있었다.

 

사상
유의사항: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 가지의 탐구법이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었던 당시의 아테네 또는 그리스의 시대상을 파악한 뒤 플라톤의 생각 변화를 기점으로-즉 역사주의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이 첫째요,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한 비역사주의적 탐구 방법이 둘째다. 이는 현재의 학자들도 논쟁이 있는 부분으로,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는 중도를 택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국가는 주제 면에서 대단히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그렇지만 대화편 형식인 까닭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플라톤의 본심인지 아니면 역설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문학적 형식인지도 불분명한, 후세인들이 풀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를 몇 개로 나누고 다시 그 정치체제들의 등급을 나누고 하는 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차라리 그건 현실정치에 더 초점을 맞춘 훗날의 대화편인 법률이나 정치가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되는 바다. 국가가 이렇게 당대 인간생활의 수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justice)라고 할 수 있다. 대화편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노신사 케팔로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야기의 소재가 정의로 튄 것으로 불이 붙는다. 케팔로스가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난 이후, 불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를 통해 더욱 격화된다.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비교적 소박한 정의관, 정직하고 공평하고 잘 대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자주 그러하듯이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면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한다고 해도 불의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생각을 가다듬고는 정의는 친구에게는 유익함을 가져다 주고 적에게는 불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을 바꿨다. 왜냐면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받고 나서 보니 정직함, 공평함과 잘 대해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인물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트라시마코스가 개소리 집어치우라며 토론에 난입한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남한테 해를 끼치는 건 정의가 아닙니다하는 견해와 더불어 자기가 먼저 말하면서 주장을 만들기보다 남이 말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태도에 화가 났던 것 같다. 트라시마코스는 벌컥 화를 내고 기세를 돋우면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왜냐면 보통 법률이나 규칙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시국가의 법률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어떤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법률을 만드는 사람(입법자)에게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란 힘이 있는 강한 사람들이며, 그 강한 사람들이 법률을 만들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움이란 개념은 허위이며, 정의의 실체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인데 법률의 실체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편다. 도시국가는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생겨나면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처벌하지만 실은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든 법률을 어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법률을 따르는데 그게 지배자의 이익이 아니고 시민의 이익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배자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정의가 항상 강자의 이익인가?' 하면서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견습공은 실수를 하지만 장인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진정한 지배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지배자는 미숙한 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그럼 진정한 지배자는 지배의 기술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인데, 다른 모든 기술들이 그렇듯이 기술이란 것은 의술(醫術)처럼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강자만의 이익이란 것은 말이 이상하지 않냐' 하고 논의를 펼치자 트라시마코스가 '양과 양치기와 주인을 생각해 봐라. 양치기가 아무리 양을 잘 돌봐줘도 결국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하고 받아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어느 정도 기가 죽은 데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양치기의 비유 역시 오류가 많아서 트라시마코스는 물러나게 된다.

트라시마코스 이후의 논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폴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에 의해 진행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주제가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나머지 그 주제에서 끝장을 보길 원하며, 자신들이 소크라테스에 반론하거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반박의 논리를 펼침으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길 원하고, 더욱 선명해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극중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상대하기 버거워해 퇴장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많은 의문과 토론을 불러일으킨 논설이었다.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제기한 의문들은 대강 이렇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정의는 어렵고 불의는 쉬운가? 왜 정의를 행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불의를 행한 사람이 이득을 보는가?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정의라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하고, 어기면 처벌 등의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제약이 없고 자유롭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 불의가 판칠 것인가? 본심이 아니라 억지로 정의를 따르는 것은 좋은가 나쁜가? 사람들은 그저 수치스러운 평판을 피하기 위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선생님, 부디 저희에게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정의란 것은 단지 그것이 정의란 이유만으로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을 함께 토의하기 위해, 그 어려운 문제들을 보다 더 쉽게 살펴보기 위해 개인이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라는 큰 그림에서 정의가 어떤 것일지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올바른 행동과 법률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논의는 개인 차원의 정의, 법률, 이익, 욕망 등이 얽힌 문제에서 국가, 사회구조와 같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은 1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케팔로스의 아들이 정의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은 2권에 속한다. 이 나머지 9권의 분량 동안 정의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는 교육, 사회, 국가, 예술, 정치, 영혼, 윤리 등 많은 분야를 건드리게 된다. 국가는 그 과정에서 3가지의 주요한 입장을 등장시키는데, 첫째 입장은 노신사 케팔로스가 제시하는 헬라스 세계 종래의 소박한 도덕관이다. 그리고 피시스와 노모스를 구분하는 소피스트를 대표하여 트라시마코스가 있고, 마지막으로 플라톤 본인의 주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플라톤은 앞선 두 주장을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개인의 행복과 정의는 도시의 행복과 정의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냐면 법과 정의, 행복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법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개인은 법을 지켜도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 법을 어기면 불이익을 받아 행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도시의 법이 정의로워야만 도시에 속한 개인 역시 정의로운 법을 문제 없이 준수하면서 괜찮은 생활을 꾸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를 그리기 위해 플라톤의 상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얘기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혼자서 살기는 어렵고 사회에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인간은 각기 타고난 적성이나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재능이나 적성에 따라 직업이 알맞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런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좋은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화를 창조해내서,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특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를 채워준다. 즉 인간이 공동으로 모여사는 이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부족하지만 필요한 부분을 협력해서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각자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단계로 1단계로 건강한 도시, 즉, 말하자면 돼지들의 도시, 2단계로 정화된 도시 즉 말하자면 군인들의 도시, 마지막 3단계로 아름다운 도시 즉 말하자면 철학자가 통치하는 도시의 3단계가 제시된다. 건강한 도시는 각자가 각자에게 필요한 적성에 맞춰 생활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알맞은 인원이 알맞게 모여서 알맞은 일을 하며 정부가 없이도 잘 돌아간다. 그러나 이 도시는 말이 되지 않는데,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순진무구하게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덕(ἀρετή), 즉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제해서 얻는 기술적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고, 돈과 부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몇 개씩이나 겸직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빈부격차가 나타나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자연히 정부의 필요성이 나타나며, 영토확장의 욕구 또한 나타나게 된다. 영토확장의 욕구와 함께 전투의 기술에만 집중하는 전사계급이 나타난다. 돈 버는 기술이 최고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렇게 전투의 기술 아래 귀속되는 것처럼, 전투의 기술도 최상위의 기술 아래 포섭되게 되는데 바로 철학이다. 어쨌거나 전사가 아무리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 해도 올바른 적을 상대로 올바른 타이밍에 용맹하게 싸우는 게 중요하지, 잘못된 적을 상대로 쓰면 소용이 없으니까. 

이런 전투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군인들의 강한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 수 있도록 음악과 시의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 때 제공되는 예술은 적절한 것만이 필요할 뿐, 도시가 추구하는 정의에 걸맞지 않고 사람들의 심성을 어지럽히는 나쁜 시와 음악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인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신들이 전혀 정의롭지 않고 이상한 놈팽이들로 묘사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도시는 건전한 시와 음악만을 필요로 한다.

체육과 음악 교육을 받은 군인 계급만으로는 이상적인 도시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우월한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철학 교육까지 제공되어야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절제의 미덕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부류가 주장하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는 무력과 욕망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력과 욕망을 함부로 남용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어쩌면 현실정치에서는 그처럼 이익을 위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결코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테네인들이 멜로스를 멋대로 침공했던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도시는 무력을 남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은 폭력 위에 우리의 현실이 기반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득에 눈이 멀은 도시가 폭력을 남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현실적 사항을 도외시하고 오직 이상과 정의만을 생각해 볼 때 폭력의 남용은 정의가 아님이 자명하다. 이상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도시 전체가 절제의 미덕 아래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만 집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도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사유재산과 가족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주장이지만,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적인 공유제야말로 정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절제로 가득찬 도시, 사유재산의 폐지와 절대적인 공유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자뿐이다. 전사계급에게 시행되는 통제된 예술교육만으로는 사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절대적인 공유제를 실현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흐름 아래에서, 도시의 세 계급이 서로 다른 일을 해도 정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잘 맞는,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절제라는 기치 아래에서 잘 짜여진 공동체 도시에서는 세 계급이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제까지 도시와 개인을 쭉 유비관계로 다뤄 왔는데, 그에 따라서 도시가 세 가지 계급이 있는 것처럼 유비관계를 통해 개인의 영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욕망, 혈기, 이성이 그것이다. 가장 뛰어난 이성에 의해 개인의 영혼이 금전욕에 빠지지도 않고 무절제한 분노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그는 정의로울 것이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플라톤이 다른 대화편에서도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 정의로워 보이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통제된 상태가 아니라면 완전히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정말로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행하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미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주장하는 극렬 공산주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5권에서는 현대 시점에서 플라톤의 평가를 한층 더 격상시키고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부숴버린 다음, 그러면 아기와 여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도시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품고 있는 재능이나 소질은 퓌시스적으로 볼 때 차이가 없다.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으며, 남자와 여자에 구분이나 재능에 차등을 두는 것은 노모스, 인습적인 것이며 자연 즉 퓌시스에 반하는 것으로, 이상국가에서 그러한 노모스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이와 같은 가상실험에 파묻히던 소크라테스 일행은, 그건 그런 거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정의입니까?하는 글라우콘의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 지긋지긋한 이데아론이다. 정치철학 바로 위의 항목이 이데아론이긴 한데 여기서 연결되는 내용은 쓰여져 있지 않은데 이 문서에서 대강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참나무건 전나무건 소나무건 죽은 나무건 병 걸린 나무건 딱 보면 나무를 나무라고 알 수 있게 하는 나무다운 그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 애매한 개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이데아는 수학으로 표현가기가 대단히 편리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원이나 삼각형은 없지만 우리는 삼각형이나 원의 정의를 알 수가 있고 그를 통해 삼각형이나 원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 직각사각형의 정의 = 이데아라고 친다면 사각형 중에서 직각사각형의 이데아, 즉 정의(定義)에 들어맞는 건 직각사각형일 터이다.

국가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데아를 이렇게 대충 설명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이데아의 문제가 뭐냐면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약간 국가를 벗어나서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시장바닥 돌아다니면서 썰을 풀 때 개념정의에 대해 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얘기했던 모양이지만, 플라톤의 경우는 본인이 생각을 깊게 하다 보니 아님 학교를 차리고 강의를 하다 보니 애들이 곤란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데아가 있다고 한다면, 큰 문제가 생겨버리는데 이데아의 이데아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귀납적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용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모아서 필요하고 충분한 요소들만 쏙쏙 모아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용기, 용기의 이데아인 것이다! 이데아야말로 진짜다! 다른 것들은 다 허깨비, 가상, 2차적인 찌끄레기이고 오직 이데아만이 진정한 참이자 세상의 진리이자 불변하는 실체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할 때,

아니 플라톤 선생님, 그럼 이데아라는 애매한 개념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또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할 거고요, 또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 즉 무한퇴행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 그렇다면 그 이데아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까? 이데아와 우리 마음이나 지성 이런 것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는 아주 골아픈 형이상학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위의 이데아론 항목에서도 얘기했듯이 현대까지도 해결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전문 철학자들, 철학 역사에 남았으며 현대에도 천재로 이름 높은 난다긴다 하는 영미, 대륙의 철학자들끼리도 절찬리에 치고박고 있는 노답문제라 꺼무위키는 꺼무위키다운 주제를 파악하고 대강 넘어가 버리고 국가를 얘기하고 있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은 결국 정의를 얘기함에 있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앞서서 나온 퓌시스와 노모스 문제, 결국 정의롭게 잘 살기 위해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법의 관계에 대한 통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와 법 속에서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및 철학에 준거된 국가의 이상적 형태 및 나라에서 꾸준히 나라를 다스릴 철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형태 등등을 만드는 것에는 정의(正義, justice)의 이데아와 그것을 알고 있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또, 이 정의의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좋음(the good)의 이데아와 연결되어 있다, 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이다. 

모든 이데아는 이 좋음의 이데아에서 비롯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에 결론을 낸다. 이데아 무한퇴행을 막는 이 이데아가 왜 좋음이냐면, 플라톤은 그에 대해 아름다움이나 호의와 같은 얘기를 한다. 약간 종교적이 되기도 하는데, 뭐 예를 들어서 말해 보자면 이 세상을 이루는 수학적 원리나 그에 따라 운행되는 천체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세상은 수학적이고 아름다운 원리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바로 절대자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의 신적인 조화에 가까운 세상의 여러 초월적인 현상이나 신비를 볼 때 신적인 존재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왜 호의가 아니라 악의를 내뿜겠으며, 수학이나 그에 기준을 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근원적인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뭐 글라우콘 패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소크라테스 밑에서 수련이나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논의를 하는 모양새를 볼 때 머리가 좋은 패거리들에 속하니 이런 이데아론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이렇게 이데아에 의한 정의의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그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이데아만이 정의이므로 실재 세계에서 완전히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회, 체제, 국가 등과 정의의 결합은 철학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데아를 아는 자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플라톤은 철학이 정치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들을 설득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기술이 필요하다. 철학은 옳기 때문에 수사학을 동원하면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크세노폰과는 달라서 초지일관 철학이 제일 행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철학자는 오직 철학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그 입장을 따를 때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공동체를 위해서 강제 동원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도시를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하기 싫어할 텐데, 보통 도시민들은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 패거리들이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나 보고 우끼우끼 우끼끼하면서 그것만이 진실이자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진짜 사물을 알고 있는 철학자들을 자신들의 안온함을 깨려고 헛소리하는 불한당 같은 패거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철학자들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면 들수록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깨부숴서 멍청하고 되먹잖은 부모라는 인간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지 말고 10살 정도 되면 무조건 국가에서 길러서 올바른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제시한 정의에 관한 어려운 물음들은 여전히 대단히 애매한 상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명확해진 상태이긴 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억지로, 혹은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것을 따라야 하는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불의에 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하면서 하나씩 알아보게 된다. 좋은 순서순으로,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과두정체(ὀλιγαρχία), 민주정체(δημοκρατία), 참주정체(τύραννος)로 구분된다. 최선자정체는 지성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명예지상정체는 명예, 과두정체는 돈, 민주정체는 모든 충동, 그리고 마지막 참주정체는 사악한 탐욕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정체)와 시민과 정의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정치철학적으로 타당한 얘기인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훗날 군주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군주의 도덕성과 정치환경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에는 학문도 그렇고 인간들의 생활상 자체가 공동생활과 분리되기 어려웠다.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선택되었던 예술, 종교, 정치 모두 도시국가의 시민적인 공동생활 속에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것이며, 현대처럼 개인의 예술이나 종교 등의 개념은 상정하기 어려웠다. 이와 더불어 소크라테스가 추구했으며 플라톤이 그 유산을 이어받은, 시민의 도덕성 함양이라는 테마 역시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사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곧 한 국가의 도덕적 올바름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이자 도덕적 올바름이 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껏 우리가 수립하면서 언급해 온 나라, 즉 이론상으로나 성립하는 나라에서 그러려 할 것이란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지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 『국가』 9권, 592b

플라톤 자신도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제시한 다음,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하나의 본으로써 이를 제시한 것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마음속에 이성 속에 이런 본을 지니고 정치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화편 국가에서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상사회이며, 대화편 법률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법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역이 아니다. 

대화편 정치가는 테아이테토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순으로 지어진 저작이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수학자가 나오고, 소피스트에서는 당연히 소피스트가 나오고, 정치가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정치가가 주요 주제이다. 또한 작중 내용도 등장인물이나 시기가 이어지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다. 즉 플라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앎에 관련된 것을 논의해보고 정치와 다시 한 번 연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 철인왕은 여러 가지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철학 즉 진리를 모르고 그저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날뛰며 울부짓는 무리들을 위해 '이 바보들아! 저건 그림자잖아! 저건 버드나무의 잔가지가 바람에 일렁거리는 그림자고, 저건 여우가 도약하는 그림자 아냐!'하고 분별해서 가르칠 수 있는 그림자에 관한 지식, 즉 현실 정치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이상국가를 그리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 정치적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응 그건 철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하면서 넘어간 바 있다. 

대화편 정치가에서 엘레아 사람은 그럼 과연 실제 정치가가 무엇인지에 관해 주장을 펼친다. 아마 당연히 엘레아 학파일 이 엘레아 사람은, 여러 가지 근본 원리나 기술로부터 정치의 기술까지 천천히 논의를 옮긴다. 그 결과 무릇 정치가니 왕이니 하는 것의 본질은 기술이나 앎으로서,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지위이건 간에 상관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기술이니까. 또한, 도시와 가정에는 차이가 없으며 정치가와 가장 사이에도 차이는 없다. 

이와 같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치의 기술은, 실제 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힘, 무력 등과는 무관계하다. 힘이나 무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치를 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일지는 몰라도 실제 정치의 기술과는 무관계하다. 정치는 기술이되, 일종의 지식이나 앎에 속하는 기술로서, 그런 종류에 속하는 기술이 그러하듯이 명령을 내리는 기술이다. 다른 모든 명령을 내리는 기술처럼 정치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정치란 곧 인간을 출생시키고, 양육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그런데 의술이나 성생활에 관련된 기술도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다. 정치술이 이들 기술과 차별화되는 점은, 인간과 동물의 특별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또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신화를 끌어들인다. 옛날에는 크로노스 시대였는데, 그때는 신들이 각기 동물들을 이끌고 이래라 저래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제우스 시대는 신이 그냥 인간들을 포함한 동물더러 알아서 하라고 놔둔 시대라는 것이다. 옛날 크로노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가 시행되던 시대였으나 현재 제우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도 불가능하고 불의와 무질서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인간들끼리 알아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즉, 국가에서 얘기했던 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절대적 공유제 그런 거 신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알아들었냐. 이렇게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정치는 이렇게 정치가나 왕이 신일 경우와 신이 아닐 경우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정치가나 왕의 지배가 합법적인가, 올바른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과연 피지배자들이 동의했는가, 동의하지 않았는가로 구본된다. 엘레아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정치가의 기술에 대해서 검토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 진정한 정치가들의 기술과 자웅을 겨루고 있는 기술은 바로 소피스트 모리배들의 기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절찬 활용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지배는 세 가지고 나뉘는데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로 나뉜다. 이 세 가지 지배는 앞서 얘기했듯 피지배자들의 동의했는가, 아닌가 두 가지로 인해 6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과 금권정, 민주정으로 나뉜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하의 민주정에서 자유와 법의 구분에 있어서 주요 쟁점은 소수의 유산계층이 다수의 빈민계급에 의한 지배에 대해 동의하느냐 마느냐인데, 플라톤은 유산계층이 동의하나 마나 별 차이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플라톤의 정체는 1) 왕정 2) 참주정 3) 귀족정 4) 과두정 5) (강압하는) 민주정 6) (동의하는) 민주정 이렇게 6가지의 정치이다.

이 6가지 정체는 올바른 통치의 기술인 철학과 무관계하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도 큰 신빙성이나 공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큰둥하다. 플라톤은 이를 자신이 주구장창 사용하는 의술의 예시를 들면서 정당화한다. 의사가 진정한 의술의 기술을 활용하는 한 환자가 동의하건 말건 환자의 신체를 지지고 볶건 간에 의사는 옳은 일을 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지배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쨌건 공동체에 최선의 선택을 통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피지배자들이 동의를 해주건 말건, 불법을 자행하건 말건, 사람들을 조지건 말건 외국인을 어떻게 쓰건 상관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법 없는 지배를 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엘레아인의 주장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엘레아인은 침착하게 소크라테스를 상대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현대사회에서조차 법 조항의 미비로 인해 뻔히 보이는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불의에 속 끓는 일이 제법 많다. 그런데 이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돌때기에 글자 좀 새겨넣고 '에헴! 이것이야말로 우리 도시국가가 앞으로 준수해야 할 신성한 법률이라니까!'하고 뻐기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일일까? 각 사건이나 상황은 항상 건 바이 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시대와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데 돌에 법률을 새겨놓고 뻐기는 일이란 과연? 현행 법률들이 사회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성문이건 불문이건 간에 현행 법률이란 물건들을 살펴 보면 모두가 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신성을 지닌 사람을 마치 짐승 무데기인 것마냥 취급한다.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이유이고, 법이란 것은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마저 제약하기 때문에 나쁘다. 실제로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유연하고 정확하게 각 상황과 사건에 맞춰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이 있다면, 동굴 속에서 우끼끼끽~ 우끼이후~ 하는 무리들이 법률에 비춰 진정한 지배에 계속 토를 달면서 방해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동굴 속의 무지한 무리들은 눈깔이 없기에 현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고, 고맙게도 현자가 그들을 다스려준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계속 의심할 것이다

국가에서도 얘기되는 바지만 무지몽매한 무리들은 현행법을 떠받들면서 현자에게도 현행법의 절대성을 인정하길 바라고, 현자가 그를 무시하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재판정에 보내서 요단강 저 너머로 현자를 보내버릴 것이다. 현행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백치 아다다들은 어떤 변화나 개정, 토론을 원하지 않으므로, 현자는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지 굳이 대가리 터진 원숭이들을 다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법의 지배는 인정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법도 현자도 지배하지 않을 경우 욕심 많고 사악한 야심가가 국가를 다스리며 민중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도 현행법이 아무리 병신 같을지라도 존경을 표해야 한다. 아니면 모가지가 뽑힐 테니까. 법의 지배는 아무리 쓰레기 같은 법이라도 일단은 이성적 고찰이 조금이나마 섞여 있을 것이기에 무법천지보다는 낫다. 또한 실제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참주 같은 놈들이 그 법을 지 맘대로 바꾸면 그것은 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근거해서 각 정체들의 순위가 매겨진다. 당연히 법이 없는 정부보다 법을 따르는 정부가 나으며, 개중에서도 법을 따르는 민주정이 짱이다. 물론 제대로 된 통치의 기술을 가진 정치가나 왕은 법을 맘대로 바꿔도 상관없지만. 엘레아인은 현실적으로 자기자신은 현자가 만든 법이 존재한다면 똥멍청이들이 나라를 지배해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엘레아인은 통치의 특별한 기술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작중에 뜨개질 기술을 예시로 들기도 했고, 인간을 출생시키고 보육시키는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통치자는 균형 잡힌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각 집안과 집안을 이어줘야 한다. 어떤 한 기운이 지나친 집은 반대편 기운이 지나친 집과 맺어줘서 도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각 시민 개인의 기질을 균형잡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와 같은 마담뚜의 기술이 바로 왕의 특성이다. 즉 왕은 인간 무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이상국가의 모습


플라톤이 생각하던 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계급으로 구성된다.


통치자: '수호자 중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국가의 '왕'에 대응되는 존재이지만 1명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몇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국가에서 가장 극소수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또한 철학자이다.
수호자: 일반적인 국가의 귀족, 혹은 전사 계급에 해당한다. 당시 폴리스들의 가장 일반적인 군대 모습은 '시민군'이었는데, 플라톤은 소수의 전문적인 군인들이 군대를 구성해야 한다고 봤다. 
생산자: 일반적인 국가의 평민 계급에 해당한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인구가 너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도록 성생활이 통제되는데, 제비뽑기를 통하여 누가 누구와 성교를 할지 결정된다. 다만 제비뽑기는 통치자가 교묘하게 조작하여, 실제로는 (아마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비판 받는 부분이겠지만) 우수한 남성과 우수한 여성이, 열등한 남성과 열등한 여성이 성교하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성교의 횟수 역시도 '우수집단'이 되도록 많이, '열등집단'이 되도록 적게 하도록 유도되며, 열등집단의 아이나 장애아는 유기되어서 죽도록 방치된다. 한편 모친에게는 '정상적으로' 탁아소에 맡겨진 것이라고 속인다. 플라톤은 이러한 우생학적 개량으로 국가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살아남은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양육되며, 기본적으로 '수호자 양성'을 전제로 한 교육을 받는다. 이들의 영혼은 시가(詩歌)로 단련되고 육체는 체육으로 단련되는데, 혹시나 타락하지 않도록 시가는 엄선한다(나쁘게 말하자면 검열한다). 그리고 양성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일부러 쾌락에 노출시키는 시험을 치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적성이 맞지 않는자는 떨어져나가고, 다시 말해 생산자 계급이 되고 마침내 엄선된 수호자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양성된 자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은 통치자가 된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상국가는 철저한 능력제 사회로, 구조상 누가 누구의 아들, 딸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혈통적인 신분세습은 불가능해진다. 또한 수호자, 통치자는 사유재산이 없는 등 철저하게 사욕을 배제시켜야 하는 '국가의 봉사자'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굉장히 금욕적이고 재미없는 삶일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국가의 중대사를 맡길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여성 역시도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여성을 집안에 묵혀두는 건 인력낭비라고 봤는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수컷 경비견이든 암컷 경비견이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비유한다. 

결국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보는 이상국가란 "가장 적합한 사람이 그 일을 한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즉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 농사를 짓고, 군대에 적합한 사람이 군인이 되며, 정치에 적합한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폴리스들의 인간관과는 반대인데, 특히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각각 비슷한 재능을 신들로부터 받았다고 봤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정치라는건 '전문적' 프로 정치인이 아니라 '전인적'인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했던 것이며, 능력의 차이가 부정되므로 '추첨을 통해' 국가 중대사를 맡긴 것이며, 조국을 지키는 것은 전문적 직업군인들이 아니라 전인적 시민군들이 수행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란 순수한 인간들이 아니라 반신(半神)들이라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생산자는 절제의 미덕을 지녀야 하는데, 열등한 그들에게 가장 적은 몫이 돌아가게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수호자가 절제의 미덕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플라톤 본인을 포함하는 통치자 계급도 용기의 미덕까지 지니고 있다. 즉, 절제 -> 용기 -> 지혜 순으로 갖기 어렵고 고차원적인 미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우월감에 심취했던 플라톤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자신을 가장 위에, 나머지 흔한 사람 중 그나마 용기라도 있는 사람을 그 밑에 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된다. 

 

 

철인 정치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 『국가』 5권, 473c-d

플라톤은 '철인(哲人) 정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국가론'에서 자세하게 설명된다. 이 '철인'이란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영역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지식의 소유'에 대한 개념도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상이한 지점들이 많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와 법률 등 다수의 저작에서 '의사와 환자의 비유'를 종종 사용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병에 걸려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과 치료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 역시 '정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똑똑한 사람이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철인 정치가 아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인왕'은 이미 플라톤 생전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인왕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되기까지 한다'고 깠으며, 3세기의 테미스티오스도 '아무리 위대한 플라톤이어도 이건 좀....'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의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금 달라지긴 한다. '국가(혹은 정체)'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중기 사상에서는 철인왕에 의한 일방향적인 통치 외의 다른 방식은 거의 비중이 없지만, 후기 대화편인 "정치가"에서 "법률"로 넘어가면 피통치자에 대한 설득과 소통이나 법률 등을 제법 고찰을 하는 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실 일관적으로 "철학자왕(즉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혼이 조화된 상태의 사람)"에 의한 통치를 기본바탕으로 깔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비유를 그대로 따르자면 환자를 치료하는데 환자의 설득은 본래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설득의 과정이 없었다간 의사가 맞아 죽거나 환자가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정도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가 주장한 철인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면모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철인 지배자는 신분이나 성별, 인맥, 지연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들은 다음의 절차에 따라서 선발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공정한 시험으로 뛰어난 인재를 선발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도태시킨다. 이때가 20세 무렵이다.
그 뛰어난 인재는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거친다.
수학, 과학, 음악 등의 집중교육을 받는다. 다시금 10년간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이 끝날 무렵이 30세.
다시 공정한 방법으로 인재를 거른다.
5년간 철학 교육을 받는다.
5년간의 교육이 마무리 된 후 15년 동안 현실세상에서 실무적인 경험을 쌓는다.
그중 살아남고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맡긴다.(이때가 대략 50세 즈음) 이때는 따로 시험이 필요가 없는데 15년의 실무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주변 동료들과 대중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평가를 받아 자신의 우수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자 왕(Philosopher king)의 개념은 동아시아에서는 공자의 유교 사상에서 성인 지배자(Sage Emperor / ruler of Saint)라는 개념과 흔히 유사성이 지적받는다. 유럽 문명이 중국 문명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시작했을 때, 유럽의 사상가들은 중국의 통치 체계에서 이러한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호메이니가 플라톤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즉,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아야톨라라는 직책이 이러한 '철학자 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기사 그 외에도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역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국가론과 유사하다. 

플라톤의 철인통치를 이념적으로 계승하여 구체화한 것이 레닌의 전위정당론이다. 이때의 전위조직은 민중의 대리자가 아닌 체제의 수호자적 기구를 말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전위만이 대중의 불가피한 소부르주아지적 동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불가피한 노동조합 활동가적인 편협성이나 편견, 전이나 문제의 되풀이 논쟁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고,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활동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근로대중 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 많이 쓰이는 인용구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 1권 347c에서, 소크라테스는 "돈이나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기를 승낙하지 않게 할 것일세. ... 따라서 그들이 지배하길 승낙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처벌이라는 것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안되네—이것이 아마 강제당함이 없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게 된 까닭인 듯하네—그러나 가장 큰 벌은, 만약 자기 자신을 지배할 생각이 없다면, 자기만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일세."라고 한다. 이 문장은 민주국가에서 투표 독려의 격언으로 쓰인다. 물론 분명히 하자면 플라톤은 민주정을 싫어했다. 앞의 발언은 일반적인 대중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철학자(즉 통치자)에게 하는 말이다. 즉 철학자가 정치를 외면한다면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의 발언은 민주주의와는 오히려 정반대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철저히 검증된 소수의 엘리트들, 곧 '수호자(guardian)'를 상정하고 이들만이 정치 권력을 잡아 다른 모든 (열등한) 이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민주정이라기보다는 철저한 능력제에 가깝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언이 현대 민주국가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은, 아테네 민주정과 현대 민주정이 지닌 차이점 때문이다. 아테네 민주정은 모든 사람 이 통치에 적합한 능력을 완전히 똑같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능력의 차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추첨 민주정 체제있다. 즉 정치에 특화된 전문적인 프로 정치인이 아닌,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걸쳐있는 전인적인 아마추어 시민들이 이끌어야 한다는게 아테네 민주정의 대전제였다. 이는 현대 민주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통치에 특화된 전문적 '프로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해 선거를 치른다. 이는 아테네와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계몽주의의 대두 이후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의무교육을 제공하며 국민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확보한 채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매우 큰 차이점인데, 과거엔 의무 교육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며 당연히 기본 지식조차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우리나라 교육과정만 봐도 국어를 통해 자국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수학을 통해 탐구와 활용, 응용력을 만들게 하며 영어를 통해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역사를 통해 과거의 과오, 선행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미래로 나아갈 사고력과 탐구력을 제공한다. 그외 많은 탐구 과목들을 통해 교육한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유하는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므로 과거의 시민과 작금의 시민은 차이가 많다. 무엇보다 일부 계몽주의자들이 왕권신수설과 같은 전제군주체제를 옹호했음에도 결국 권력의 분산화가 일어난 것은 절대적 1인이 유능하느냐 무능하느냐 50:50에 기대는 것보다 시민을 교육시켜 합리적 인간을 많이 만들면 최소한 51:49 정도는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법 개념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이 국가의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보다 상위에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법률》 편에서이다. 《법률》 편에 개진된 생각의 정도와 범위가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는 미약한 것일지라도, 이런 생각은 비교적 독립된 사법권과 이에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제도화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행정관의 신뢰성과 그들에 대한 통제는 아테네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플라톤의 제안은 행정관들의 모든 조치와 영역에 이런 통제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대로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반대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 못지 않게 《법률》 편이 제시하는 법의 지배와 혼합정체론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법률》(김남두, 강철웅, 김인곤, 김주일, 이기백, 이창우 옮김) 옮김이 해제

플라톤 철학에서 언급되는 민주정체는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아테네의 직접민주정체이다. 상술된 바 있지만 플라톤의 전성기 시절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겪은 고통, 그리고 패배가 끼친 후유증 등으로 인해 개판이었다. 이 와중에 소크라테스도 시민의 투표로 죽는 등, 플라톤 입장에서 민주정은 지배자들(참정권을 지닌 시민)의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주제에 중우정치로 흘러가는 정치 체제였다.

민주주의와 귀족정을 구분짓는 것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가 아니면 일반대중에게 있는가하는 차이이다. 민주주의자란 대중이 어리석고 비열하며 천박하다 할지라도 권력을 나누어 주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현대의 '민주주의' 개념과 고대 플라톤의 직접 민주정체와 과두, 참주정체는 의미가 다르다. 플라톤은 '능력검증 없이 명문귀족 혈통이란 이유만으로 통치자격을 부여하는 형태의 귀족정'은 부정했으며,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교육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플라톤 이론에서의 '철인'은 능력에 의해서 그 자리를 쟁취한 인간에 가깝다. 플라톤의 주장은 "통치에 적합한 소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능력주의(meritocracy)적이고 수호자주의(guardianship)적이다. 여기에 혼합정치를, 곧 현대적으로 말해서 권력분립을 결합한 것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政體) 이론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전체주의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은 있다.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로버트 달(『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등의 관점에 따르면, 플라톤은 열린 사회의 적, 수호자주의자이다.

로버트 달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모든 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통치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뻗어나온다. 로버트 달은 현대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필요성 등에서 능력제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전문가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인 "최종적 주권자인 평등한 시민들이 중요한 사안에 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을 돕는 데 한정되며, 최종적 결정권은 평등한 시민들이 갖는 것이라고 논한다. 즉, 대의제와 선거를 플라톤적 개량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리인 선출이라는 대의제적 요소를 갖게 된 것은 근대국가의 큰 규모를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모든 시민들이 단 30초만 직접 발언한다고 해도 1억 5천만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공간적인 제약을 결코 극복할 수가 없으므로 분업의 차원에서 유일한 대안인 대의제가 등장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적인 "통치에 적합한 소수"를 결코 상정하지 않는다. (정신질환이나 연령에 따른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을 예외로 하면) 누구도 평등한 성인 시민 가운데 일부는 통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점만 보아도 그러하다. 이는 의원내각제-비례대표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특정 인물이 "통치에 적합한 소수"라고 믿기 때문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다만 고전적 민주정이 현대의 민주정으로 발전한 것이 플라톤적 개량의 의도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현대 민주정에서도 플라톤적 호소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위에서 인용하듯, 로버트 달 역시도 현대 민주정이 능력제적 요소를 어느정도는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민주정은 '자기통치능력'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지언정, '통치능력'에서의 차이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통치능력'의 차이를 부정한다면, 대의민주정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제비뽑기를 통한 대표 선출이다. 인구수의 문제로 순수한 직접민주주의가 힘들었던건 아테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으며, 그렇기에 아테네는 '제비뽑기'라는 방법으로 관료를 선발했다. 왜냐하면 통치능력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테네의 방법을 21세기 민주국가들이 과연 따라하고 있을까? 아니다. 비록 대의민주정이 직접민주정의 현실적 한계(시간, 비용 등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일지언정, 선거라는 제도는 명백히 '더 알맞은' 사람을 가려내는 제도이다. 심지어 총선에서의 비례대표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비례대표제 항목에서 보듯이, 부적합 인물의 출마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는 비례대표제가 가진 문제점으로 여전히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사람들은 비례대표에서조차 적합한 인물이 좋은 순번을 받았는지, 혹시나 부적합한 인물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지를 않았는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검토한다. 이는 '통치에 적합한 누군가'라는 관념이 민주사회에서도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현대 민주정이든 아테네 민주정이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자"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플라톤의 비판이 현대 민주정도 공격하는 것이기는 하다.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를 막으려 한 플라톤의 생각은 21세기 관점으로도 가혹하다. 그러나 21세기의 평범한 사람들은 비록 목소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다시 말해서 선거가 참정권의 유일한 발현은 절대로 아닐지언정, '적합한' 대표를 선별해야 할 상황은 인생에서 끊임없이 닥쳐온다. 바로 그 상황에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적 호소는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플라톤의 이런 철학을 엘리트주의로 말하며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현대 민주주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국민들을 엘리트로 만들고자 교육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고대에서부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시대에 이미 플라톤은 내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혹은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하는 얘기도 많았으며, 아리스토파네스나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등에서도 어느 정도 플라톤 사상의 혁신적인 부분과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


출생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 왕국 스타게이라
사망
기원전 322년 (향년 62세)
마케도니아 왕국 에우보이아 섬
소요학파
후임자
테오프라스토스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양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모든 이가 통곡했고, 세상의 등불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새벽녘의 별 같았고, 세상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손제자, "철학자들의 신"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그들은 물론 그들 이전 학자들의 학문들까지 섭렵, 비판적 계승하였다. 그 스스로도 특히나 논리학과 자연학, 문예비평 등을 비롯해 무수한 영역에서 독창적인 학적 위업을 남김으로써 고전 그리스 정신사의 대단원을 장식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는 서양 세계의 분석적, 과학적 정신의 주된 토양이 되었다. 어느 학문의 개론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조 격으로 거론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후대에 "만학(萬學)의 아버지", "철학자(The Philosopher)"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의 주석이라면, 올바르게 사고한다는 건 곧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서구 철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플라톤을 철학의 '아이디어 뱅크'라고 칭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철학 '문법서' 혹은 '백과사전'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과는 달리,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원고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입장이 일관되지 않고, 문체가 건조하고 난삽하며, 학술어와 일상어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거기다 내용 자체부터가 원체 고차원적인지라, 해석하기에 몇 중첩의 애로사항이 있다. 게다가 논거나 예시를 소실된 저작을 참고하라든지 하며 비약하는 경우 등도 있다. 

그럼에도 근현대까지도 중요하게 거론되는 학술적 핵심 개념들과 사고방식, 문제의식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연원한 것이 많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다. 2000년 전 미처 정리하지 않은 말들이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도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BCE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에서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의 궁중의 의사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와 어머니 파이스티스 아들로 태어났다. 성씨는 따로 없던 시대라서 이름이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와 어릴 적부터 친구로, 궁정에서 함께 자랐는데 아주 어려서부터 양친을 여의고 프로크세노스가 그의 후견인이었다. 17세 때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이아'에 들어가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을 와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을 그곳에서 수학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부르며 칭찬했다. 한번은 플라톤이 《파이돈》을 낭독하는 중에, 다른 제자들은 다 나갔음에도 아리스토텔레스만 혼자 남아 들었다는 일화에서 그의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영특했고 플라톤이 살아있을 때 아카데미아에서 서로 많은 논쟁을 치렀던 모양이다. 이 시기부터 플라톤의 저작을 본뜬 대화편들부터 기타 여러 글들을 썼던 모양이나 많은 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소중한 벗이다. 하지만 진리는 더 소중한 벗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스승과 학문적으로 결별했으며 누차에 걸쳐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의 저술 중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그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는 문장이 있을 정도. 다만 그가 비판한 것은 주로 중기 이데아론이고, 플라톤의 후기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플라톤이 죽은 직후 아카데미아의 원장이 될 것이라 원생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당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준비 중이었고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팽배했던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장직을 포기하고 소아시아의 도시 아타르네우스로 넘어간다. 그곳의 참주 헤르미아스는 아카데미아에서 함께 수학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친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헤르미아스의 이복동생(또는 조카) 퓌티아스를 첫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딸을 낳고 그 이름으로 부인과 같은 퓌티아스를 붙여주며 잘 살아가다가 참주 헤르미아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붙잡여 죽임을 당하자,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기원전 356년부터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그의 궁전에 머무르면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필리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아주십시오. 실로 저는 신께 감사드리는데, 그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태어난 것이 그의 행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교육과 훈련으로 아들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왕국을 계승하기 걸맞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 필리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청하는 편지. 

2~3년간의 개인교습으로 제자 알렉산더를 충분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자리를 친척에게 물려주고 기원전 335년, 50살의 나이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아폴론 신전 경내의 공공운동장이던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원 초기에 그는 리케이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오가면서 학생들과 함께 철학을 논하곤 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아진 뒤로부터는 그도 앉아서 강의를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 제자들의 강의노트이다. 그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어마무시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지만, 현재는 다 소실되었다.

이렇게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케도니아인이 아테네에서 설치는 것이 보기 싫었던 사제 에우뤼메돈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가 이전에 지었던 헤르미아스의 죽음을 기렸던 찬가가, 아폴론 신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양식의 찬가라는 이유로, 그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이었다. 이 억지스럽고도 한참 뒤늦은 고발에 은퇴를 결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원 리케이온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물려준 뒤, 어머니 쪽 고향인 에우보이아의 칼키스(Χαλκίδα)라는 작은 섬나라로 탈출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탈출하면서, "아테네로 하여금 철학에 두 번 죄 짓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의식한 것. 하지만 1년 뒤 질병을 얻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상
앞에서 말한 듯이 스승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이데아론에 반기를 들어 형이하학적인 자연탐구를 중시하는 현실적 입장을 취한다. 이렇기 때문에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물리학, 생물학, 철학, 윤리학, 미학, 정치학 등 문이과 가리지 않고 전방위에서 모조리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의 학문에서도 물론 연구와 관찰은 있었으나 그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진일보. 최초로 신이 아니라 자연에 원인을 돌리는 거대한 전환을 탈레스가 이루어냈지만,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수준에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를 주장했던 것보다 한 단계 더 거대한 전환을 한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의 관념적 주장 중 상당수를 반박했다. 

현대와 비교해보면 그의 연구와 관찰은 초보적이었고 따라서 결론도 엉성한 부분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과거의 학자들)를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과학적 사실이 정답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현대 기준으로 과학자가 아니냐 맞냐에 대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물론 현대과학에서는 실험을 통해 물리적 증거를 쌓아가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확한 물리적 증거가 없는 우주 탄생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는 모른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 증거를 쌓아가면서 연역적으로 정의하기보다 목적론적 세계관에 따라 결론을 정해놓고 추론했기 때문에 과학자가 아니라고 하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생물학이나 지질학, 기상학 등 과학의 다른 분과에 있어서는 관찰을 바탕으로 한 정밀한 연구를 했다고 여겨진다. 애시당초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로 대표되는 성질을 가진 매질에 대해 깊은 연구를 단행했던 인물로, 당연히 다양한 임상 연구를 토대로 그의 학설들을 정리했다.

심지어는 과학적 방법론 같은 경우 르네상스를 강조하기 위해 데카르트나 베이컨 같은 사람들로부터의 단절이 시작되어서 과학과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는 말이 종래의 정설이었으나 연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역시 중세의 사상으로부터 그렇게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점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에도 번역된 저명한 철학사 책을 쓴 앤서니 케니 같은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을 발명해냈다고 단언하는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의 전체 원칙에 대한 기원이기 때문이며 과학이 물려받고 물려주는 유산이라면 그 시작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같은 단어가 주는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직접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세히 살펴보면 정작 그가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면 목적론적인 얘기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귀찮을 정도로 세세하게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가면서 논지를 전개한다. 단지 그 내려진 결론에 비추어서 그 결론이 목적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의 4원인 가운데에 형상인과 목적인을 구분되는 일은 별로 없고 실질적으로 동일시되며 아리스토텔레스 본인도 그것은 그렇다고 말한다. 즉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이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 났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귀납적 관찰로부터 자연에 대한 공리를 얻고 그 공리로부터 사실을 연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앎을 총 4단계로 나누었는데, 최초의 단계는 신체의 각 기관으로 받아들이는 감각(αἴσθησις), 감각이 머리속에 남은 기억(Μνήμη), 지적 능력으로 기억을 종합하여 다른 대상에 확대 적용하는 경험(ἐμπειρία), 그리고 경험을 통해 자연의 공리를 얻는 지혜(σoφíα)로 나누어 관찰을 통한 지식의 생성을 강조하였다. 관찰이라는 것은 정확한 측정도구가 없으면 오차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공학이 발달하고 통제된 환경에서의 실험, 그리고 통계적 처리가 가능하게 된 현대 이전에는 그 한계로 잘못된 추론에 의한 공리가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공리들은 그러한 상태로 남아서 극복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정 자체를 과학사의 발달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서양 학문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 어느 학문의 개론서를 봐도, 학문의 역사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먼저 나오지 않는 학문은 흔치 않다.  

철학사가 슈퇴리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대한 사설 도서관도 세우고, 세계 각처의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학적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은 각지의 동식물 표본들을 모아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한 비교 연구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려 158종이나 되는 헌법을 수집했다고 한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모든 일이 기원전 300년대에 이루어졌다. 현대의 학자들도 함부로 하기 힘든 일을 고대인이 해낸 것.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술문을 구성하는 방법인 4배열법을 고안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수사학'에서 글을 서론-진술부-논증부-결론의 4문단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 서론은 짧고 인상깊은 표현을 통해 독자의 주목을 끌고, 진술부는 논제를 제시하며, 논증부는 진술부에서 제시한 논제를 논증하고, 결론은 논증부를 요약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서론과 결론은 상대에게 인상을 주는데에, 진술부와 논증부는 상대를 설득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4배열법에서 서론은 글을 읽는 독자들의 흥미를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짧으면서 강렬한 표현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 격언, 속담이나 고사성어로 서론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술적인 글의 경우 개념의 정의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질문으로 시작하거나 도입부에서 관심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진술부는 논제를 제시하는 부분으로 필자의 주장이 여기서 드러나기 때문에 논증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진술부의 글은 미사여구를 되도록 붙이지 않는게 중요하며 최근에는 서론에 포함되기도 한다. 진술부에서 제시된 주장은 논증부에서 증명되는데 논증부는 설득력있는 논증과 적절한 근거자료로 진술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삼단논법을 좋은 논증법의 예시로 들었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보존과 전파에 특히 많은 기여를 한 곳은 서양이 아니라 이슬람권이었다.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수학과 천문학, 의학, 연금술 등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각종 연구들은 이슬람 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알 파라비, 이븐 시나와 이븐 루시드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이를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인과 교류하며 그들이 근대철학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사실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가 증명하듯이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슬람이 기여한 부분이 많다.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는 흔히 오르가논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저작들이다. 하단의 저서 목록에도 있지만 범주론, 분석론, 변증론 등이다. 논리학에 관한 아이디어나 희미한 개념 등은 아리스토텔레스 전에도 이미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희미한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의 체계로 승화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내에서 일종의 예비학문으로 취급받고 있다. 학문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익히고 지나가야만 하는 과목인 셈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에서도 논리학적인 개념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자체는 현대의 논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논리학하면 많은 사람들은 말을 사리분별에 맞게 잘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대학교 등의 강연에서 논리학을 조금 배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비형식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간단한 형식논리를 알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라고 하면 단순히 a=b b=c 따라서 a=c 정도의 수식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수식은 예시를 들면서 풀어 보자면 인간은 포유류이다. 포유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이다와 같은 명제를 a, b, c, 따라서, = 등의 기호를 이용해 보기 좋게 치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언어는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 경우의 발언은 자신의 발언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형식 논리학의 형식을 빌어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보통 우리는 논리학처럼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설령 우리가 논리학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경우의 대부분은 현실 언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형식 논리의 언어가, 역으로 현실의 언어에 영향력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냐면,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a, b, c, = 등의 기호를 통해서 수식으로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고전 형식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형식 논리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은 논리학에서 변항에 해당하고 현대에는 a, b, c 등으로 깔끔하게 표현하는 이것들을 만들었어야만 했다. 이것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이런 변항들이 변항이 될 수 있는지, 어떤 말이나 개념들이 변항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즉 그래도 제법 교양과 상식을 갖춘 사람들 그리고 특히 이공계 쪽에서 논리학하면 흔히 수식을 연상하는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적 탐구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철학적인 탐구를 담고 있으면서,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하고 고안한 것들이며, 이 문서에서도 논의되고 있듯이 대중적인 고려를 하지 않은 일종의 강의록들만 남아 있으니 제법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기체, 안은 기체, 범주, 형상, 실체 등의 영문을 알기 어려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의된 채로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귀납논증
우리 안에 있는 첫 번째 것들은 필연적으로 '귀납'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각은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분석론 후서』 2권 19장 (역자 강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에서 '귀납논증'을 처음으로 명문화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과 다른 개념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전서』 제2권 23~24장에서 실제로 들었던 연역법과 귀납법의 예시를 살펴보자. 

연역법
피가 깨끗한 모든 생명체는 수명이 길다. (B는 A이다.)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피가 깨끗한 생명체이다. (C는 B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수명이 길다. (∴ C는 A이다.)
귀납법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수명이 길다. (C는 A이다.)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피가 깨끗한 생명체이다. (C는 B이다.)
그러므로 피가 깨끗한 모든 생명체는 수명이 길다. (∴ B는 A이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단 논법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은 그 삼단논법에서 순서를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법과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법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수립한 것으로, 수많은 경험들 a, b, c, d, ... 등등이 계속해서 추가될 때마다, 개념을 계속해서 갱신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의 귀납에서는 새로운 반례가 나오면 그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 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은 전제가 '필연적으로' 참인 것들의 귀납으로, 애초부터 반례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논증은 베이컨의 의도한 근대과학의 방향성과 큰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논증은 이미 '참'인 지식을 가지고 귀납을 하여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를 구분할 수 있겠끔 보편적 개념을 형성하는 것에 불과했던 반면에, 베이컨의 귀납 논증은 '실험'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자료들을 계속해서 추가하여 자연의 법칙을 끊임없이 해석,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지식'을 끊임없이 고쳐 나가자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치학
정치 체제의 종류는 세 가지이며, 각각에서 빠져나온, 말하자면 그것들의 타락한 형태들도 세 가지이다. [기본적인] 정치 체제들은 군주정과 귀족정(ἀ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셋째로 재산의 등급에 기초한 정치 체제인데, 이것은 원래 금권정으로 불러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헌정(πολιτεία)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것들 중 최선은 군주정이며 최악은 금권정(Τιμοκρατία)이다. 참주정은 군주정의 타락한 형태이다. 양자 모두 일인 통치체제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참주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지만 군주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족적이며 모든 좋은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지 않고서는 군주라 할 수 없는데 그러한 사람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그렇지 않은 사람은 제비를 뽑아서 선출된 군주일 것이다.) 반면 참주는 군주의 반대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니까. 참주정의 경우 그것이 최악이라는 사실은 [금권정이 최악이라는 것보다] 더 분명하다. 최선의 것에 반대되는 것은 최악이다. 

참주정은 군주정으로부터 나온다. 참주정은 일인 지배의 타락한 형태로 못된 군주가 참주가 된다. 귀족정으로부터 과두정으로의 이행은 지배자 집단의 악덕에 기인하는데, 그 지배자 집단은 도시의 소유물들을 [사람들의] 가치에 걸맞지 않게 배분하여, 좋은 것들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자기 자신들에게 배분하고, 공직들을 항상 똑같은 사람들에게 배분한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소수만이 다스리게 되고 훌륭한 사람들 대신 못된 사람들이 다스리게 된다. 민주정은 금권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서로 경계를 공유하고 있다. 금권정 역시 다중의 지배를 지향하며, 일정 재산 이상의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치체제 중에서는 민주정이 가장 덜 나쁜 것이다. 제헌정의 기본틀(εἶδος)로부터 약간만 타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체제들은 주로 이러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런 방식의 이행들이 최소한의 변화로 가장 쉽게 이루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체제들과의 유사성, 혹은 이것들을 이른바 범형(παραδειγμα)으로 삼는 것이 가정 안에서도 발견된다.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하는 공통의 교제는 군주정의 형태를 가진다. 아버지는 자식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호메로스도 제우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군주정은 아버지처럼 다스리기를 원하니까. 그런데 페르시아에서는 아버지의 다스림이 참주적이다. 아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리기 때문이다. 주인이 노예와 함께하는 공통의 교제 또한 참주정의 성격을 가진다. 그 공통의 교제에서 주인의 이익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교제 관계는 제대로 된 것으로 보이지만, 페르시아의 [참주적] 교제 관계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교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다르면 다스림(ἀρχή )도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공통의 교제는 귀족정의 성격을 보이는 것 같다. 가치에 따라 남편이 다스리되 다스려야 할 것만 다스리며, 부인에게 합당한 것은 그녀에게 양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면 과두정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이 일을 가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이며, 보다 나은 자로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부인들이 상속녀로서 다스리기도 하는데, 이때의 다스림은 탁월성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재산과 능력의 결과로써 일어난 것이다.

형제들 간의 공통의 교제는 금권정과 비슷하다. 나이에 따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로 동등하기 때문이다.(이것이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을 경우 그들 사이의 친애가 형제적인 우애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민주정은 주인이 없는 가정에서 주로 발생하거나(그곳에서는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혹은 주인이 약하고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8.10,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공역.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학은 그의 실천철학의 최종 목적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을 통해서 무엇이 행복한 혹은 유덕한 삶인지를 논한 다음, 정치학은 공동체의 모두가 그러한 상태에 놓이기 위한 탐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정치학에 대한 언급은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서두에 (1.2) 최고선은 정치학이라는 언급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다룬 선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최대한 많이 가져야 함다고 주장한 다음 이제 정치적 논의를 '시작하자'는 말로 끝난다. 이 다음에는 아마도 논의의 흐름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았다고 하는 158개의 정체에 대한 논의가 나와야 할 것이겠지만, 이는 안타깝게도 아테네 정체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내려오지 않는다.

여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체제를 일인정(一人政), 소수정, 다수정으로 나누고는 앞의 세개를 각각 타락 여부에 따라 군주정(좋은 일인정), 참주정(나쁜 일인정), 귀족정(좋은 소수정), 과두정(나쁜 소수정), 제헌정(좋은 다수정), 민주정(나쁜 다수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군주정>귀족정>제헌정>민주정>과두정>참주정 순으로 나쁘다고 봤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의하면 다수의 통치는 비록 최고의 효율을 낼 수는 없지만, 제아무리 타락해봤자 일인정이나 소수정의 타락보다는 그 해악이 덜하게 된다. 물론 당대 그리스의 제헌정은 실질적으로 금권정이였기에 오늘날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다수의 통치가 비록 영웅적 소수의 활약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언정 '안전하다'는데는 오늘날에도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의 최후기 저서이자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같이 읽어야 하는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분류가 다소 변형된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자가 올바른지(=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혹은 타락하였는지(=통치하는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는 입장은 인정하지만, 통치자의 수에 따른 구분보다 통치자들이 어떠한 정의관을 가졌는지에 따라 체제가 구분된다는 점을 더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서 통치자들의 정의관은, 그러한 사람들이 지향할 법한 정의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즉 1인정에서 통치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참주정,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면 군주정이며 (전부는 아닌) 다수 통치 체제에서 통치자들이 덕, 그러니까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면 귀족정으로, 부를 추구하면 과두정으로 분류하고, 통치자들이 다수이고, 다수가 가질 수 있는 덕(이를테면 군사적 덕)을 발휘하여 모두에게 선이 되는 경우를 추구하는 경우는 혼합정 내지는 시민정(폴리테이아, 위에서는 제헌정. 금권정이란 말은 사라진다), 자유(=자유민, 시민일 조건, 현대의 평등과 유사)를 추구하여 통치하는 다수를 위해 부자를 착취하면 민주정이라 분류한다. 또한 "정치학"에서는 민주정, 과두정, 참주정 순서대로 더 나쁜것은 받아들이지만, 왕정, 귀족정, 폴리테이아 간의 순위는 제시되지 않는다.

여튼 총 8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이러한 분류에 대한 3권에 등장하며, 1권은 가정에서의 다스림의 방식과 국가공동체의 다스림의 차이와 같은 개론적 내용이, 2권은 플라톤과 여타 현실 정체에 대한 (주로 그들의 단점에 치중한) 논의가 나온다. 4권은 이어지는 정체의 성격과 최선 정체에 대한, 혹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의 최선 정체에 대한 논의 및 정치학에서 필요한 앎의 여러 종류가 나오며, 이에 따르면 정치적 앎은 1) 단적인 최선 정체 2) 특정한 시민이 정해 졌을 때의 최선 정체 3) 어떤 가정 하에서의 최선 내지는 각 정체의 최선의 보존 방법 4) 일반적인 경우에 최선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제시된다. 다소 혼란스럽지만 확실한 것은 이 중 2)는 3권에, 4)는 4권에서 지나가면서 언급되며, 이에 따르면 두번째 앎에 대해서는 신과 같은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유덕한 가문이 있는 폴리스에게는 군주정이, 덕을 지닌 다수의 가문이 있는 폴리스에게는 귀족정이, 다수가 다수로서의 덕을 발휘할 수 있는 폴리스에게는 혼합정이 최선이며, 네번째 앎, 대체로 모든 폴리스에게는 최선인 정체는 혼합정으로 제시된다.

5-6권은 정체의 보존과 멸망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나타나며, 7권은 최선 정체에 대한 두 번째 논의 혹은 단적인 최선 정체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지고, 마지막 8권은 최선의 정체 하에서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룬다.
7-8권의 내용을 최종 정체에 대한 그의 최종 입장으로 본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 사회는 모두가 덕을 지향하도록(=훌륭해지도록) 이끌어지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는 덕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이 지배하면서 지배받는 (=일정 나이가 될때까지 덕을 키우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지배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은퇴하는) 사회이고, 어릴때부터 공교육을 통하여 덕을 추구하도록 교육받으며, 덕을 가지기 힘들 정도로 여가가 없는 수공업자와 농부같은 생산 계층들은 시민이 아니게 되고 이러한 통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 사회의 시민들은 모두들 덕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아주 특출한 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 어울리는) 왕정이 아니라 귀족정적으로 돌아가면서 지배하는 것이 어울리고, 모두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파당이 없으며, 모두 통치에 참여하기에 민주정적으로 쇠퇴하지 않고, 또 공교육과 법률을 통해 모두 덕을 추구하도록 이끌리기에 아주 좋은 상태에 있으면서 그러한 상태가 아주 잘 보존되는 사회일 것으로 서술된다. 그리하여 이 사회를 위에서 서술한 정치적 앎에 따라서 보면 1) 이 정체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최선의 목적인 덕을 최대한 많은 수의 시민들이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선의 정체이며 2) 시민의 특성에 따른 통치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이 사회엔 유덕자가 많기에 그들이 번갈아가며 통치하고 통치받는 방식으로 통치되고, 3) 보존에 있어서는 적절한 교육을 통해 모두 그러한 동일한 목적으로 이끌리기에 정치집단들 간의 분열의 가장 원인인 파당, 즉 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이 없어 잘 보존되기도 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입장이 현대의 정치철학과 가장 다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그의 윤리학의 핵심인 '덕', 즉 이성에 따르는 활동과 관조로부터의 행복이라는 하나의 보편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한 이상정체를 목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의 정치철학, 특히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하나의 공통된 목적, 혹은 가치관이 있기 매우 어렵다는 보다 심원한 다원주의적 상황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보기에 이러한 통일적인 가치관 하의 이상국가와는 시작점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체의 공통 가치관을 잘 갈고 닦아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는, 공동체주의로 불리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 정치철학적 후손이 된다. 

다만, 정치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당대 비판자들에게 가장 논란이 되는 어구 중 하나가 바로 아테네의 노예 제도를 인정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노예제에 대한 전반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는 좋은 국가에 있어 필요악이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로 태어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재질이 둔하며 기질이나 심성이 독립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은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노예가 어울린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인데, 사람이란 것이 먹고 살고 하는 일에 심력을 쏟다 보면 제대로 된 정치참여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예는 필수불가결이자 필요악이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어느 정도 완화조치를 취했는데, 노예들은 우정으로 대해주고 좋게 대해주고 사람답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살다 보면 그 기질이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도 문제라고 말했으며, 이에 따라 노예 중 노예답지 않은 재능과 본질을 가진 사람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방법을 통해 그도 노예제에 대한 어느 정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예 제도를 인정했다는 그 자체로 인해 칸트와 같은 다원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반발심을 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본인 역시 그리스 사람들이 타고나길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개인으로 태어났고 타 민족들은 수동적이라 노예에 어울린다고 주장한 적이 있어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본인 조차도 위대한 철학가라고 하지만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목적론적 방법론 또한 후대 여러 사상가들조차도 "이렇게 토의하다가는 결론이 안 나오겠다!"라며 어느 정도 거르게 되었다.

또한 여성에 대한 대우에서 스승인 플라톤보다 더 차별적인 면모가 있다.

 

 

중세의 재수용
오히려 중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라틴어로 번역한 번역 대본들은 상당 부분 아랍어 번역본들이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서구 문화의 업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근거가 있지만, 이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방이 우리 서구 문화의 업적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중세 유럽은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로부터 직접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시리아·페르시아·아랍의 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질송은 말한다. 그럼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이미 9세기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포기타의 작품들이 아일랜드와 프랑켄 지역의fränkisch 수도자들에 의해 변역된 것처럼, 직접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될 수 없었는지 의문이 생길지 모른다. 이에 대해 바로 디오니시우스 번역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을 방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런 답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기원후 첫 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플라톤 정신에 가까웠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현상이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솔즈베리의 요한 같은 인물은 구체적으로 만나는 세상의 실재 현실에 자신을 개방하려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마음 자세가 서구 사유 속에 얼마나 깊이 무르익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그런 마음 자세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하는 기본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이 아랍어라는 우회로를 거쳐 번역되었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랍 사람들에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말해 주지 못한다. 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치적 이주移住라는 데 있다. 그것은 이오니아 철학이 소아시아 연안에서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결국 아테네로 가게 된 것이나, 오늘날 기호논리학이 미국 대학들에 정착하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 사이에는 처음부터 이질성異質性이 있었고, 그런 이질성은 많은 종류의 뿌리에서 양분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질성은 5세기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us이 명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연합하게 되자 명백한 형태로 나타난다.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 태생으로, 그의 이론은 안티오키아Antiochien 신학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체성과 가시성可視性,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를 보는 눈과 어떤 의미에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네스토리아니즘의 중심이면서 독특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은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시리아의 에데사Edessa 학파였다. 그런데 이제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이 에페소Ephesus 공의회(431년)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자, 이 그리스도론은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는 더 이상 공적으로 주장될 수 없게 된다. 당사자들인 많은 수의 "이단자들"과, 이들과 동일시되지 않는 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에데사를 떠나 인접해 있는 페르시아로 이주한다. 이들 대부분은 국경 너머에 직접 이접해 있는 니시비스Nisibis에 머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시에도 곧 이어 약 천 명가량이 다닌 유명한 학교가 생긴다.(이 학교가 바로 100년 후 카시오도르가 그 모범을 따라 로마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그 학교이다.) 말하자면 시리아에 있는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의 학교와 수도원들이 당시에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들, 특별히 이 유산에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적 실타래를 잘 보관하고 전수해 준 보호 구역保護區域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뿐 아니라 유클리드Euklid,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갈레노스Galenos,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학자들의 철학적·수학적·의학적 문헌들은 처음에는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가, 어쩌면 페르시아어라는 중간 단계를 하나 더 거쳐, 아랍어로 확실히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중동 지역 전체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국Sassanid까지 침범해 들어가고, 대부분 시리아인과 페르시아인이던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들이 바그다드Bagdad에 있는 칼리프Kalif의 궁정으로 초빙되었을 때의 일이다. 800년경에는 아랍어가 세계적인 학문 언어나 다름없었다. 아랍어로 한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모든 곳, 다시 말해 동쪽으로는 인더스Indus 강, 서쪽으로는 피레네Pyrenäen 산맥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이런 문화 공간 안에서 이제 훌륭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들도 생겨나는데, 그 저자들의 이름은 13세기 신학적 대전들 안에서 거의 매 쪽마다 등장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아비첸나Avicenna를 들 수 있다. 그는 980년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궁정 주치의이면서 동시에 철학자, 신학자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올바른 통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마흔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그 텍스트를 외우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 전체의 의미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주게 했다고 한다.) 아비첸나에 이어 우리는 아베로에스Averroes를 들 수 있다. 그는 1126년 코르도바Cordoba에서 태어난 법학자요, 의사요, 철학자였다. 13세기에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자라고 하면 "바로 이 아베로에스"를 지칭했다. 라틴 서구에서 그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유럽 르네상스 철학을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볼 때 그가 미친 영향이 어떤 방향의 것이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아랍 사상가들은 진기하게도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같은 것을 전혀 모르며, 오히려 "성전 지상주의적"聖典至上主義的이기 때문에, 코란Koran에만 한정된 신학의 역사는 대체로 철학에 대한 자기 방어의 역사였다.
- 요셉 피퍼Josef Pieper, 김진태 옮김,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 150-154쪽

흔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천 년 동안 인정받아 온듯이 설명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반대다. 성 보에티우스의 죽음 이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틴-게르만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고, 심지어 그리스권에서도 매우 미묘한 대우를 받았다. 때문에 (언어적 접근성에 따른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저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12세기 중반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까지 서유럽에서 접할 수 있었던 라틴어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오직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범주론과 명제론 두개 뿐이었다. 다만, 플라톤이라고 상황이 그리 좋았던 것도 아니라, 서로마 제국에서 번역한 플라톤 저서의 라틴어 번역본 중 중세 서유럽에 보존된 거라곤 고작 <티마이오스> 한개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어려운 저서가 남았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은, 플라톤의 저서를 직접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플라톤 저서를 보고 사상체계를 구축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하에 중세 철학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자였던 에리우게나가 동방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신학 문헌들을 번역한 덕분도 있지만.

심지어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 전해진 과정만 보더라도, 그동안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권에서 미묘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되지 않았으며, 그리스어에서 우선 시리아어와 (어쩌면) 페르시아어를 거쳐 아랍어로 번역된 것을 카스티야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울 다중 번역이 행해졌다. 이는 "정치적 이주"였다한 그나마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어져 왔지만, 후대인들처럼 열광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아베로에스 등은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처음 번역된 것은 11세기 베네치아의 수도자가, 유일하게 아랍어로 번역되지 않은 저작 중 하나인 <분석론 후서>의 그리스어 원문을 직접 비잔티움 제국에서 구해다 번역한 것이 최초이다. 이후 12세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아랍어를 통해 중역이 시작되어, 12세기에는 주로 <혼에 관하여>, <자연학>, <형이상학> 등 자연철학, 형이상학적 저서들과 나머지 논리학 저서들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중 특히 <혼에 관하여>를 비롯한 저서들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하여, 13세기 이후로는 대학들의 철학 교육 및 연구의 필수 저서가 되기까지 했다. 

13세기에는 뫼르베케의 윌리엄의 노력이 독보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던 그는, 아랍어로 번역되지 않은 또다른 저서인 <정치학>을, 이전에는 아랍어 중역이었던 <혼에 대하여>도 원전번역했으며, <수사학>도 최초로 번역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원전번역하려는 노력은 좌절되었고, 이후로는 아랍, 특히 아베로에스의 주석이 달린 번역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 번역들 대부분은 이전에 이미 한번 번역된 적 있는 논리학 저서들과, 이전까지 서유럽에 번역이 없었던 나머지 저서들이었다. 아베에로스의 주석이 들은 이 번역본은 서유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아베에로스는 아랍 세계에서 최초로 신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대로 이슬람 사변철학에 접목한 인물이었던 만큼, 이베리아를 통해 들어온 그의 주석은 서유럽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체계와 내용을 명확히 인식하게 해준 것이다. 이 시기 번역은 주로 이베리아 반도, 특히 톨레도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주도한 톨레도 번역학파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소개되었다. 이후로는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남부를 중심으로 고전을 번역하는 노력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시칠리아 왕국은 여전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였기에, 원전 번역이 활성화되기 꽤나 용이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번역들을 기반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등 핵심적인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다시금 형성해 나갔다. 

아무튼 재수용때의 충격이 너무 강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움직임이 나올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엄연히 이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까지 변화시킬 정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덕분에 물리 천문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화학에서는 라부아지에한테 교정될 때까지 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 유럽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녀였던 플라톤주의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였던 철학이기도 하고, 신의 정체성과 영혼의 존재 가치에 대한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사상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모든 사물을 범주화하고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 본질을 통해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역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안의 사물의 위치변화 또한 에너지나 힘과 같은 역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이 그 자신의 본성에 따른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는 자연적 경향에서 찾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미신적이고 우매해 보이는 물리적 설명이 가끔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무식한 고대인이라고 비웃어서는 안 되는 게, 사실 이 사람이야말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최초의 단계적 분석을 시도했고 논리학만 기초를 놓은 게 아니라 그 분석을 기초로 경험을 통한 일반화라는 과학뿐 아니라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무리한 해석이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시대적 한계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현대인 천재론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생각해 보자) 애당초 이 시대는 자연과학 자체가 분리된 학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한 묶음이었던 시대다.

근대에 와서 흔히 까이는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과학이 바로 그의 방법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앞선 시대의 방법론이라는 '자료'로만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과학의 방법론은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맞서 싸우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문이 유럽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이 바로 근대과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4원소설 + 천상의 제5원소 떡밥 덕택에 연금술의 기반이 되었다. 연금술이 근대 화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의도치 않게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물리, 천문, 화학에서 전방위로 까이는 바람에 마치 과학의 원수인 양 여겨지지만 동물 분류학에서는 뛰어났다. 섬게의 크기가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크고 작아진다고 쓰기도 했고, 그 시절에 이미 고래를 포유류에 가까운 종류로 따로 분류했다(포유류 자체에 포함시킨 것은 아님). 정작 이 부분은 제자들에게 "쯧쯧, 우리 선생님 실수하신 듯. 고래는 어류"하는 바람에 묻혔다.제자란 놈들이 스승님 실수할 때는 못 알아채면서 맞는 말 할때는 틀렸다고 착각하냐

윤리학 부분에서는 자격, 목적, 좋은 삶, 중용 등이 주요 개념이다.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대접이 적절한지는 그 행위나 대상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은 좋은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웰빙인 셈. 중용은 적절하신 그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적절한 행동을 강조한다.

논리학과 삼단논법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닦아놓은 논리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형식논리학'의 틀을 이루게 된다. 이후 프레게, 조지 불, 버트런드 러셀이 등장하여 '기호논리학'으로 불리는 현대 논리학의 새로운 조류가 나타날 때까지는 사실상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문학에서는 시학을 통해 체계적인 문학비평의 효시가 되었다. 시학에서 비극의 작동원리를 카타르시스라고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허나 카타르시스는 전문을 걸쳐 단 한 번 언급되어질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시학 전체에 걸쳐 플롯을 가장 강조하였다. 시학은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제작학적인 성격이 짙으므로 본격문학보다는 대중문학 이론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스승인 플라톤이 예술 곧 '모방'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세계의 2차적 모방이라고 규정하고 천시하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지만 시(서사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므로 시가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문학의 존재가치를 역설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역사는 우연적인 인간의 행위에 크게 좌우되며,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전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물론 최고 수준의 문학이 그 기준이지만 대단히 아름다우며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보다 문학이 더 우월하고 추종할 만하다는 것이다.

 

저서
알렉산드로스 왕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에게 전달했던 자신의 강의와 저서들에 있어 두 가지 형태를 취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부용'(ἐξωτερικά)이라 불렸고, 다른 하나는 '내부용'(ἀκροατικά)이라고 불렸다. '외부용'이라 말해지는 것은 수사학 훈련, 논리적 능력, 정치적 지식으로 이끌었고, 반면 '내부용'이라 불리는 것에서는 자연학적 고찰이나 변증법 논쟁이 속한 보다 깊이 있으면서 정교한 철학이 논의되었다. 내가 언급한 이 '내부용' 교육에 그는 리케이온에서 오전을 보냈고, 재능과 기본적 지식, 배움에 대한 열정과 근면을 시험하기 전까지는 이 시간에 그 누구도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앞서 말한 '외부용' 강의와 말하기 연습은 실제로 저녁에 같은 장소에서 열렸고, 구별 없이 대중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이것을 '저녁 산책'이라 불렀고, 앞서 언급한 다른 하나는 '아침 산책'이라고 불렀다. 두 경우 모두 그는 걸으면서 논의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이 모든 기록이 담긴 자신의 책들을 따로 나누어, 한 부분을 "외부적인 것들", 일부분을 "내부적인 것들"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왕은 그가 '내부적인' 종류의 책들을 출판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시 그는 전쟁으로 거의 모든 아시아를 점령하고 있었고, 공격과 승리로 다리우스 왕 본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지만, 이런 많은 일들 속에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편지를 보내 내부적인 가르침을, 자신이 직접 교육받았던 것을 책으로 출간해 밖으로 발표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저희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들 전부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게 된다면, 도대체 저희가 다른 어떤 일 방법으로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힘과 재산보다 배움에 있어 앞서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이런 말로 답했다. '왕께서 출판되었다고 불평하시는 내부용 책들은 감춰진 듯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출판되거나 출판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직 우리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 『아티카의 밤』 20.5 #

카이사르가 전쟁 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태워먹어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원전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때 불탄 서적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책들이었고 그나마 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20만 권을 선물했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좀 복잡하게 저작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이유는 아리스토텔리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탓이 컸다. 이후 지하 창고 안에서 썩어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책수집 덕후가 사들여서 수집하고 보관한 덕에 지금 남아있는 정도의 저작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남아있는 저작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저작의 반도 안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후에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들이 소실되어서 어려운 강의 노트들만 남았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일단 헬레니즘 철학자들이나 세네카나 키케로 같은 로마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한 경로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내부적' 저작이 아닌, 대화편 같은 '외부적' 저작이었다. 즉 그들이 인용한 구절들이나 감탄하는 문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재 남아있지 않은 저작들에서 나온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출판을 염두에 둔 19편의 대화편을 포함한 '외부적' 저작들은 대부분 소실됐다. 그 이유를 꼽아보자면 첫째로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미 대화편이라는 형식이 이미 크게 쇠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가장 핫한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 또한 대화편보다는 논문 형식으로 저술을 했다. 두 번째로 1세기부터 묻혀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내부적' 저작들이 재발굴되며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대화편같은 '외부적' 저작들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이후 내부적 저작들이 플라톤을 연구하기 위한 신플라톤주의의 커리큘럼에 편입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도 내부적 저작들을 해설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정작 외부용 저작들은 한 두 줄씩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단 시기상으로 외부용 저작들은 최소한 5~6세기까지는 남아있던 것으로 보이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등을 위시한 그리스, 로마의 작가들과 주석가들이 직접, 간접 인용한 단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아있는 저작들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연구자들 나름대로 재구성을 하는 상황이다. 특히 철학으로의 권유(Προτρεπτικός) 같은 경우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자 이암블리코스가 많은 부분을 발췌해 놓아서 상당한 단편이 확보된 상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의 노트와 미출판용 저서들은 살아남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은 플라톤의 것들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은 대화편의 각 권마다 서문을 첨부했으며, 항상 소크라테스만을 화자로 등장시켰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직접 대화편의 등장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주제던 양쪽 입장에서 서로 상반된 연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는 키케로의 증언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은 플라톤적인 짧은 문답보다는 서로 상반된 긴 연설들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단 이는 추정일 뿐 키케로의 이 증언이 아리스토텔레스 대화편의 형식을 가르키는 거라고 볼 증거는 없다.

아카데미아에서 짬이 덜 찬 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 자신의 스승을 모방하여 대화편들을 저술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완성도가 절대적으로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스타일을 바꿔나갔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를 키케로는 '황금의 물결', 테미스티오스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프로디테가 퍼져있고 카리스 여신들이 피어났다', 암모니오스는 '문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라고 격찬하는 등 그의 대화편은 공을 들여서 수려하고 격조높은 문체로 씌였을 것이라 추측하나, 남아있는 직접 단편이 몇 개 없어서 아쉬운 부분. 그 중 하나가 대화편 『철학에 대하여』 단편으로, 키케로의 라틴어 번역으로만 남아있는 이 단편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연상케 하는 비유법과 수사학적 열거법을 사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와 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만약에 항상 땅 아래에 있으면서, 조각상과 그림들로 치장되고, 유복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풍성히 즐기는 저 모든 것들로 꾸며진 아름답고 좋은 집에 거주하며, 땅 위로는 결코 나온 적이 없지만 소문과 풍설에 의해 어떤 신들의 능력과 힘이 있다고 배운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어느 순간 땅의 목구멍이 열려서 그들이 저 숨겨진 처소로부터 나와서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올 수가 있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면, 방대한 구름들과 바람의 힘을 느꼈다면, 태양과 그것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또 그것이 온 하늘에 빛을 흩어 낮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느꼈다면, 그리고 밤이 땅에 어둠을 드리웠을 때 온 하늘이 별들로 수놓아지고 장식되는 것, 때로는 자라나고 때로는 늙어가는 달의 빛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뜨고 지는 것과 온 영원 동안 정해져 변치 않는 궤도들, 이런 것들을 그들이 본다면 확실히 그들은, 신들이 존재하며 이토록 대단한 것들이 신들의 업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철학에 대하여』 단편 13a. 강대진 역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19세기에 독일의 고전학자 임마누엘 베커가 편집해 번호를 붙였고 현재 모든 번역본도 이 베커 번호를 문단 옆에 붙이며 이것을 기준으로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 인용할 때 쓰인다. 물론 베커 번호가 붙고 난 다음에 발견한 저서들이나 부분들만으로 복원된 저서들은 이 번호가 붙어있지 않지만 대부분 연구 중이기 때문에 fragments라고 불리고 밑의 저서 리스트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취소선으로 표시된 저서들은 위작이라고 판명됐거나 의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theoretical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 practical (무언가를 하려는 지식), 그리고 productive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지식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지식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그리스어로 Ὄργανον)가 논리학이다. 

 

 

What did Socrates, Plato, and Aristotle Think About Wisdom?

 

Socrates (469 – 399 B.C.E), Plato (427 – 347 B.C.E), Aristotle (384 – 322 B.C.E), and many of their followers understood their own intellectual activity –  the search for wisdom or philosophy – both as theoretical and practical in its aims. Their goals were very different from the goals of contemporary philosophy, to say the least. To better understand that, we need to know what they thought about wisdom and its place in a well-lived life. 

By the time that Socrates was born, the pre-philosophical tradition of the ancient Greeks, composed by poets and playwrights, had already explored the theme of the well-lived life in some ways, taking inspiration from the Greek myths and other sources available then. The ancient Greek word for happiness, “eudaimonia”, originally signified “being favored by the gods/good spirits”. This fact suggests that originally, human prosperity in ancient Greek culture was thought to rely on the idea  that the gods are in control of our happiness. 

Greek Society Before Socrates, Plato, and Aristotle
It was through this perspective that Homer (circa 850 – 750 B.C.E) and Hesiod (c. 750 – 650 B.C.E) delineated models of conduct (or virtue) for their readers and listeners. However, it’s important to note that these models conflict with one another. There was a tension between the individualism of the heroic code in Homer’s work and the more collectivist and work-related values in Hesiod’s work. This tension echoed socio-political events that occurred in ancient Greek societies. 

At the same moment that pre-Socratic philosophy seemingly reached a point of stagnation, Socrates began to put the question of the good life in the center of his philosophical inquiries. As suggested above, there was already some tension amongst the pre-philosophical ideals regarding what a good life is supposed to be. These types of tensions also resembled the conflict between mythologies in the Greek colonies that incited the first philosophers to inquire about nature. It is possible that this was known by Socrates, who was first attracted to the kind of naturalistic philosophy of his predecessors. 

With Socrates, a new way of thinking about human happiness emerged, in a moment of apparent philosophical stagnation – a way of thinking that will be rationally argued for, not merely represented through art: the idea that human knowledge (or wisdom) is essential to the well-lived human life. 

From that moment, human action rightly conducted by reason would be considered as the key to happiness – at least amongst philosophers. This line of thought will be articulated in different ways by the main successors of Socrates: first by Plato and then by Plato’s best student, Aristotle. It was also because of this general idea that the schools ofEpicureanism and Stoicism developed their theories: they were variations of the socratic idea (so much so that the Stoicsrecognized Socrates as their direct predecessor). 

But if we want to better understand this story, we need to start from the beginning. We will see, in very broad lines, what Socrates thought about the good life and the place wisdom takes in it. After that, we will see what Plato and Aristotle thought about the concept of wisdom. 

Socratic Wisdom: The Importance of Knowledge for a Good Life
Socrates is considered a paragon of wisdom to this day, even though he didn’t consider himself wise. When the Pythia at the Oracle of Delphi said that no one was wiser than Socrates, it only motivated him to engage even more in philosophical debate. This consciousness of his own ignorance propelled him to test the word of the Oracle. 

In many of his conversations, reconstructed especially in the works of Plato and Xenophon (430 – 354 B.C.E.), we encounter Socrates repeatedly putting the question of the good life in the center of his discussions. That is, he asks his interlocutors and himself: how to live well? However, many other times he addresses other questions, only secondary to this matter. Every reader of the early platonic dialogues knows that Socrates spends a lot of time discussing the virtues of courage or piety, for example. 

Already during Socrates’s lifetime, human virtue (areté, in ancient Greek) was associated with success, even though in the pre-philosophical traditions of ancient Greece, virtue wasn’t considered something completely under human control, and it was common to think that the favor of the gods could not be dismissed. The lives of Achilles and Odysseus, respectively in the Iliad and the Odyssey of Homer, are examples of that. This begins to change with Socrates. 

If we believe in what Plato says in his early dialogues (which are the main references for the analysis of Socrates’s thought), the relation between virtue and a good life, or at least between virtue and a life of success in some specific activity like war, navigation, or carpentry, wasn’t only suggested to Socrates by elements of his culture, but by his own independent reflection. His analysis is both simple and original: he begins by pondering everyday objects. 

This is why we see Socrates repeatedly speaking of tools and domestic utensils in the early platonic dialogues. Take knives as one example. For Socrates, the virtue of a knife is, obviously, to cut well. To do this, it needs to have some specific characteristics, like being sharp, having an adequate weight and providing a good grip, and so forth. It’s because of this specific set of characteristics that the knife can do what it is supposed to do well (or virtuously). That is, it’s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ese characteristics that it can perform with excellence the proper function (ergon) that is the end (telos), or purpose, of it. Absent these characteristics, a knife cannot be any good. 

We can apply the same rationale to living beings. A good horse or a good dog are those that have the specific set of characteristics that enables them to fulfill the fullest expression of their potential as horses and dogs. The specific set of characteristics varies, of course, according to the nature of each thing. The main thing to note here is that this general thought pattern could be applied to humans too. 

That’s exactly what Socrates did. To summarize a long story, we can say that Socrates tried to answer the question of the good life starting from these considerations. For him, all human activities are conducted by reason or, as the ancient philosophers usually said, by the soul. More than that, Socrates thought that we are motivated to do what, at any time, appears to be good according to our minds (this thesis is known today as Socratic intellectualism). 

However, it’s evident that what seems to be good to us and what in fact is good for us are not always the same. For Socrates, that means that we can only act well, even in our own interest, when we have the knowledge of how to act well, that is, when we possess the knowledge of how things are, what is good, what to do to obtain and preserve these things, how to best utilize them, how to avoid what is bad, and so forth.

That means that it is only when we know what is good, without error, that we can confidently act to obtain that good. Hence, human excellence is an excellence of the mind. That is a state where the mind is in possession of knowledge. That state of the mind is also what Socrates calls wisdom (sophia). 

The exact nature of wisdom and its relation with eudaimonia in Socrates’ ethics is a matter of academic dispute to this day. This subject is too vast to discuss in this article. What is important to notice is that, taking into consideration what has just been said about wisdom, many questions are left unanswered. In fact, that’s a constant feature of Socratic philosophy. It’s not clear, for example, if Socrates thought that any specific domain (or domains) of knowledge should have priority above others. 

As I noted above, he spends a lot of time talking about virtue, and virtue is a kind of knowledge for him. Should we learn about the specific virtues before any other knowledge? Are they any good in isolation or only when we grasp all of the virtues that they become truly good? Some other passages suggest that Socrates thought about what we ordinarily think of as goods, like money and health (see Plato’s Euthydemus, 208e, and Menon, 88a-c), as good. Apparently, Socrates thought that even these things are the subjects of specific kinds of knowledge. But we can’t know if he thought that this knowledge is to be searched for before or after we acquire others. 

One thing we can know for sure: Socrates was aware of our cognitive limitations as humans. He never thought that we can be wise – that is, completely wise, with our minds being in the possession of all possible knowledge. In his opinion, that is something that only the gods can achieve. Every knowledge we can acquire is only provisional and fallible. And not only that, but we also cannot know everything. All we can do is to keep searching, keep revising our concepts and conclusions. That is, all we can do is to search for wisdom or, in other words, to philosophize. 

Platonic Wisdom: The Virtue of Philosophers in the Ideal City-state

Socrates’s pupil Plato, of course, was also interested in epistemology and stated the practical importance of knowledge for human beings. The allegory of the cave is not meant to encourage ignorance, after all.  Here, however, I’ll only briefly explore what Plato has to say about wisdom in his most famous dialogue, the Republic. 

Like Socrates, Plato also was interested in thinking about the relation between areté and eudaimonia as a way to answer the question of the good life. However, not only does he not consider wisdom as the main virtue, but he also conceptualizes it completely differently. Plato traces a distinction between wisdom and knowledge almost like Socrates. But, for Plato, wisdom is something different than the state where the mind has perfect knowledge of everything. 

It’s important to consider his psychological theory first if we want to understand his concept of wisdom and its place in his ethics. Plato thought that the human mind is divided into three parts: the rational part (logistikon), the spirited part (thumoides), and the appetitive part (epithumêtikon). Each is responsible for a function of the human mind: thinking, feeling, and desiring, respectively. Even though every mind is formed by these three parts, in each one of us – so the theory goes – one of these parts is always more prominent. 

As a consequence, Plato says that there are three types of character, which he presents in the myth of the three metals:  there are those that have souls made of gold (dominated by the rational part), those who have souls of silver (dominated by the spirited part) and those who have souls of bronze (dominated by the appetitive part). 

The platonic discussion of wisdom appears in the course of the exposition about the kallipolis, the ideal city-state. It’s here that we find Plato’s idea that wisdom is a form of euboulia, that is, the capacity to give good advice, or for sound judgment. Far from being a universal virtue, available to all, this capacity is a form of intellectual excellence that can be achieved solely by trained philosophers, that is, for those who have a soul made of gold. In his ideal polis, those people should lead the government as kings or queens. 

It is for that reason, at least in the context of the Republic, that Plato considers that wisdom, as euboulia, can be achieved only by some people who can submit to an extensive educational program. But, once they became governors, this virtue could confer benefits to all the citizens of the polis. That’s one of the reasons why the kallipolis is the ideal city. 

As for the individuals with souls of silver or bronze, even though we can assume that Plato would concede that they could develop some degree of euboulia in some limited affairs, they would never be able to be wise. In any case, we should notice that Plato’s ethics differ considerably from Socrates’. That contrast becomes even clearer in Plato’s later work; but that’s an entirely different topic.  

Aristotelian Wisdom: Two Virtues Instead of One 
In his Nicomachean Ethics, Book VI, Aristotle presents a more detailed account of wisdom than that of his predecessors. It’s interesting to consider some other basic aspects of his ethics before we enter into his discussion of wisdom. 

For Aristotle, areté and eudaimonia are also correlated. Like Plato, Aristotle didn’t believe that all human beings have the same capacity for virtue. Unlike Plato, he thought that only those who received a good education, from childhood to early adulthood, could become virtuous one day. That’s a sine qua non for him: a necessary condition. However, this initial education could only raise decent people. True virtue requires a special kind of practical knowledge and education. And that, in fact, is what Aristotle aims to provide with his ethical theory. 

Aristotle also thought that the human mind is divided into three parts: the rational, the sensitive, and the vegetative. It would be impossible to discuss all of the nuances that differentiate his psychological theory from Plato’s here; for our purposes, I’ll only highlight that Aristotle thought that human virtue was the same for all human beings (well, at least for all the aristocratic Greeks that formed his main body of students). That means, in other words, that Aristotle considered virtue to be more accessible than Plato thought it was. 

According to Aristotelian ethics, human virtue could be divided into two general categories: intellectual virtues and moral virtues (or virtues of character). And, in Aristotle’s opinion, wisdom is not one virtue, but two distinct intellectual virtues. That is, for Aristotle, there are two kinds of wisdom. I’ll explain them later. Let’s first get a better grasp of what moral virtues are. 

Moral virtues are related to the irrational aspects of the human soul, like sentiments and desires – it’s here that we find virtues like courage and generosity. Aristotle thought that when guided by the rational part of the soul – that is, when our irrational dispositions are regulated by reason (orientated by the doctrine of the mean) – these dispositions become virtuous. If our irrational dispositions are well-regulated by reason, we feel and desire in a way that is most adequate to our nature as human beings. 

Training our dispositions is not easy. It requires a lot of effort and time. But, as Aristotle himself says, even if we acquire moral virtues, their possession is not sufficient to live a virtuous life. We need to correctly apply them in the different circumstances that life presents to us. That is, we need to be sensitive to the specific ethical dimensions of our circumstances; we need to know what we should prioritize at the moment of action; we have to know what we should do to achieve that end, and how, in detail (if possible), we can do it. And that’s an intellectual capacity, one that Aristotle calls “phrónesis”: practical wisdom or prudence. 

Practical wisdom, however, cannot be acquired in the same way as moral virtues. While it’s possible to be brave and imprudent, Aristotle thought that it’s not possible to be practically wise without full comprehension about the human good, including the possession of all the moral virtues. True practical wisdom is not a domain-specific ability. It requires full comprehension of what is good for a human being in general and in all aspects of one’s life, in all the different phases of one’s life. It’s the end goal of a person’s moral development. 

Thus, practical wisdom is different from the other kind of wisdom that exists: theoretical wisdom (sophia). While practical wisdom is general knowledge about the good for human beings, as human beings, theoretical wisdom is a different type of knowledge. Sophia is knowledge about the most excellent beings of the cosmos, the most general categories of Being, the laws of nature – and so forth. To have it is to possess an excellent comprehension of the universein which we live. And that’s a purely theoretical matter. 

So, in the light of all that, what’s the happiest life a human being can live? How does Aristotle answer the philosophical question about the good life? Aristotle thought that the happiest life is the contemplative life of the philosopher who has both kinds of wisdom. That’s because theoretical knowledge provides him with a kind of good in itself, a good that cannot be used to achieve any of the other human goods. In second place, there is the life of the practically virtuous citizen, who doesn’t have sophia but is guided by phrónesis, and thus, they can achieve a happy human life. 

Is Wisdom According to Socrates, Plato, and Aristotle Making a Comeback?
We saw the contextual reasons that made Socrates, Plato, and Aristotle reflect on wisdom, along with their different concepts of it. Their aim was practical, since they were interested in finding an answer to the question: how can we live well? In this context, “wisdom” generally is meant to refer to some kind of connection between knowledge and action, to some mental capacity that enables us to better orient ourselves in the world that we live in because of the knowledge that we have. 

Contemporary philosophers typically don’t deal with the problem of the good in this way anymore. I will not comment on whether that’s a good or bad thing here, but I suspect that in our scientific age, where knowledge on many of the most important aspects of human life is abundant, the concept of wisdom will eventually return to prominence in philosophical discussion. In particular, Aristotle’s concept of wisdom is becoming more relevant: some philosophers and psychologists already think so too, apparently. In any case, any serious reflection about wisdom has to begin with an understanding of what Socrates, Plato, and Aristotle once thought about it. 

About the author: Julian M. Dutra is a Brazilian philosophy teacher from the Universidade do Vale do Rio dos Sinos (UNISINOS). His primary interest is in the fields of epistemology and ethics. His main academic interest is in the field of ethics of belief, where he can work at the intersection of his favored philosophical fields. He is also interested in topics from virtue ethics, logic, educatio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metaphilosophy, and politic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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