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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3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Jobs9 2024. 10. 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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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3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 철학 계보에 소피스트 학파가 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이었던 자연의 본질에 대한 관찰보다는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인간 자신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철학자들을 소피스트 학파라 부른다. 소피스트란 '지혜로운 자' '현명한 자'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언으로 대변되는 소피스트 학파는 철학의 중심 영역을 신과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 처음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평가 받을만 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소피스트 학파의 상대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였던 철학자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순탄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다양한 철학 사상에 정통하고 웅변술과 대화법에 능통한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당시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다소 기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금욕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의 의미를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자신의 수양만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 모두의 심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느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과 달리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남기지 않았다. 단지 그의 사상은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와 크세노폰의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보편적 진리, 절대미, 절대선의 개념을 인정한다. 그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분석, 비교, 변증, 종합 등의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문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언변은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대화를 통해 상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막연하고 정확하지 않은 지식을 확실한 개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즉,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대화자에게 개념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크세노폰, 디오게네스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는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항소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독배를 마셨다. 

 

이데아론의 플라톤

명문가의 자제였던 플라톤을 철학의 바다로 이끈 이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였다. 한때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아테네 올림픽에 참여했던 젊은 귀족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친구로 혹은 스승으로 모시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고 새로운 철학 세계를 열어 나갔다. 

플라톤은 스무 살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자 아테네를 떠나 몇 년간 여러나라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시실리아 섬을 방문한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오스의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자신의 철학적 이념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388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교육기관을 건립했다. 아카데메이아는 기숙사, 강의실, 박물관 등을 갖춘 일종의 종합대학이었다. 플라톤은 이곳에서 약 20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는데, 아카데메이아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이 곳을 폐지할 때까지 약 9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뿐 아니라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걸쳐 광법위한 학문 탐구가 이뤄졌다. 원뿔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기원전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은 모두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뤄낸 업적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다. 

플라톤의 사상은 이데아론이라는 학설로 대변된다. 이는 "우주의 모든 현상 뒤에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이데아라는 영원한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은 이데아 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절대적인 정의, 미, 진리는 이데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철학, 과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저술활동을 했으며, 그의 정치 사상은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프로타고라스』『국가론』『법률론』『정치가론』 등이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가 배출한 최고의 수재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스티기라 출신으로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백과사전적인 인물,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으며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학자 등은 그를 설명하는 표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생리학, 해부학, 식물학, 박물학, 심리학, 정치학, 논리학, 시학, 수사학, 미학, 신학, 형이상학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어찌 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플라톤의 아케데메이아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았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친구 헤르미아스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헤르미아스가 죽은 후 고향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요청으로 기원전 343년부터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오전에는 고급반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웅변이나 수사학 같은 일반적인 강의를 진행했는데 이때 산책을 하며 수업을 진행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원전 32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반마케도니아파가 대두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불경죄'에 기소되었다. 그 옛날 무고한 죄목으로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를 상기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는 철학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위해 아테네를 떠난다"라는 메세지를 아테네 시민에게 남기고 미련없이 아테네를 떠났다. 그리고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보이아에서 제자인 안티파테르를 후계자로 삼고 아내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제자였지만 사상적으로는 스승과 노선을 달리했다. 그는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실제는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영원한 것으로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서 우주의 본질적인 성격이 부여된다는 일원론적인 사상을 주장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목을 강조했으며 중용이야 말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길이라 강조하였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위대한 철학자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모든 지식 분야에 걸쳐 개척을 이룬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하늘, 아리스토텔레스의 땅

탈레스가 활동했던 밀레토스에서 에게 해를 건너 동쪽으로 건너가면 지금의 그리스가 나온다. 그리스에서는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을 겪으며 정치적인 부침을 많이 겪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바다 건너 사람들이 만물의 아르케가 뭐냐고 따져 묻는 게 배부른 소리로 들릴 법하다. 지정학적인 위치와 정치 환경이 다르면 철학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주주의도 발달한 아테네에서는 만물의 아르케보다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해 권력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소위 ‘말빨’, 즉 언술, 변론, 수사 등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줬던 일종의 과외 선생들이 바로 소피스트였다. 소피스트하면 흔히 궤변론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당시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정치의 시대 소피스트로 살았던 소크라테스였던 만큼 그의 관심사는 바다 건너 동네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물의 아르케가 어떻고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보다 현실에서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주제, 즉 정치학이나 윤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두고 하늘에서 철학을 땅으로 끄집어 내린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본인이 직접 남긴 글은 전해지는 게 없다. 다만 자신 못지않게 유명한 제자를 둔 덕에 후대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위대한 제자의 이름은 바로 플라톤이다. 

나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는 그저 ‘옆집 아저씨’일 뿐이다. 플라톤 하면 그 유명한 이데아론만 떠오를 뿐 그의 철학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20세기의 유명한 철학자인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 2000년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 고 말한 걸 보고 플라톤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플라톤이 과학의 역사를 논할 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은 주로 《티마이오스》라는 저작 덕분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플라톤은 앞선 세대의 엠페도클레스가 주창했던 4원소를 정다면체로 설명한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란 흙, 물, 불, 공기이다. 이 넷이 만물의 근본요소라는 얘기이다. 탈레스의 물에 세 개가 추가되었다. 4원소론은 이후 오랫동안 서구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의 작품 중 《천사와 악마》에서는 4원소와 관련된 연쇄살인이 일어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한편 정다면체란 모든 면이 똑같은 모양의 정다각형인 입체도형으로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다섯 개가 있다. 이 다섯 도형을 플라톤 입체라 부르기도 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정사면체는 불, 정육면체는 흙, 정팔면체는 공기, 정이십면체는 물, 그리고 정십이면체는 우주 전체에 대응시켰다. 지금 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꽤나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실제 《티마이오스》는 이런 내용들로만 가득 차 있어서 아마 일반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티마이오스》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자연의 대상에 수학적 구조물을 대응시켜 자연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런 접근법이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자연과 우주를 신화로 설명하던 시대에 수학적인 도구를 써서 이들을 설명한다는 기획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플라톤 이전에도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아르케가 수학이라고 말했었고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수학을 통해 자연을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은 역시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과 관련한 플라톤주의라고 하면 대개는 플라톤의 이런 수학적인 기획을 뜻한다. 그러니까 정사면체가 왜 불과 연결이 되느냐 하는 디테일보다 정사면체를 불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그 패러다임 자체가 중요하다. 플라톤의 기획은 먼 훗날 케플러와 갈릴레오, 뉴턴에게까지 이어졌다. 21세기의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소립자 세계를 관장하는 표준모형은 SU(3)xSU(2)xU(1) 같은 수학적 군을 기초로 구축돼 있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자연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학적 구조물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세기의 뛰어난 물리학자였던 유진 위그너는 1960년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유효성”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을 기술하는 데에 수학이 왜 이렇게 잘 들어맞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얘기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수리물리학자가 한 말이니까 이 언명은 아주 믿을 만하다. 물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릴레오의 말마따나 이 우주가 애초에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수많은 후손들이 수학이라는 ‘외계어’로 쓰인 과학을 배우느라 골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플라톤은 자신이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철학자의 제자였듯이 플라톤도 자기 못지않게 아주 위대한 제자를 두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에 플라톤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아에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제자인지라 스승의 이분법적 세계관(이데아계와 현실계)을 꽤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는 천상계와 지상계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스승과 다른 점도 많았다. 스승이 천상의 이데아에 관심이 많았다면 제자는 땅위의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은 수학을 좋아했던 반면 제자는 감각경험을 중시했다. 게다가 제자는 그런 방면에 재능도 뛰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을 관찰하고 분류한 결과는 린네가 근대적인 분류체계를 세운 18세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무려 2천 년이 넘는 세월이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철학, 종교 등 서구의 거의 모든 지성사에 2천 년 가까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려면 대략 14세기의 르네상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과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활약했던 17세기는 돼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적인 차이는 르네상스기의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바티칸 시국의 바티칸 박물관 안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 벽에 그려져 있다. 방은 그리 크지 않다. 천정이 돔형이라 벽면은 천정으로 가면서 원형으로 모아진다. 이 그림은 그렇게 휘어진 벽면을 따라 위쪽이 반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50여 명의 철학자가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는 외모만으로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듯한 스승과 제자는 그 몸짓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림을 보는 사람 시각에서 왼편(그림 속 등장인물의 위치에서는 오른쪽)에 서 있는 플라톤은 오른손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추구했던 철학의 핵심을 라파엘로는 각자의 손의 위치로 시각화했다. 스승과 제자는 모두 각자의 왼손에 책도 한권씩 들고 있다.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은 《윤리학》이다. 역시 각자의 관심사를 제대로 반영한 표현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른 철학자들도 이런 식으로 표현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의 기준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큰 자취를 남겼고 그 영향력이 중세 1천 년 또는 그 너머까지 지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점이라면 그가 자기 시대에 비해서 지나치게 똑똑하고 명석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근대과학이 태동한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흙, 물, 불, 공기가 각각 두 가지 성질을 갖고 있어서 이 성질이 바뀌면 4원소가 서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흙은 건조함과 차가움을 갖고 있고 물은 차가움과 습함, 공기는 습함과 따뜻함을, 불은 따뜻함과 건조함을 갖고 있다. 불이 가진 건조함은 흙 또한 갖고 있는 성질이다. 만약에 따뜻함과 건조함을 갖고 있는 불이 차가워지면 차가움과 건조함을 그 성질로 갖고 있는 흙이 된다.  

이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훗날 연금술의 이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납이나 구리 같은 흔한 금속으로 금이나 백금 같은 귀금속을 만들겠다는 속된 욕망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헛된 망상으로 이끌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 ‘원흉’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금술과 결별하고 이제 alchemy가 아닌 chemistry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게 17세기의 일이다. 심지어 뉴턴마저 30년가량 연금술에 매진했다고 한다. 뉴턴을 일러 최초의 근대적인 과학자라기보다 최후의 연금술사였다고 하는 게 빈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현대적인 원자론에 입각해서 100개가 넘는 기본 원소들의 규칙성을 주기율표로 정리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자연에 없는 원소들도 인공적으로 종종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만물의 아르케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금술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다. 물론 금이나 백금을 만드는 일은 지금도 쉽지는 않다. 지난 2017년 과학자들은 우주의 중성자별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금이나 백금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합성되는 정황을 포착했다. 최고의 연금술사는 우주에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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