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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가톨릭, 동방 정교회, The Orthodox Church, Ecclesia Catholica Romana, 동서 교회 분열

Jobs9 2021. 3. 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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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

(1) 동방교회(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The Orthodox Church)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를 중심으로 설립된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교회는 초대교회로 부터 계승된 정통기독교라는 의미로 정교회, 동방교회, 동방정교회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를 중심으로 동유럽 그리스,불가리아,폴란드,러시아,체코 등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희랍정교회 또는 헬라정교회라고도 불리워지는것은 신학사상과 교리가 희랍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어서 칭하는 것입니다

1세기초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교구를 시작으로 안디옥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콘스탄티노플교구, 로마교구 등 5개교구를 중심으로 상호협력하며 하나의 교회로 성장 해 왔습니다. 이러한 전례가 4세기 이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안디옥,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4개교구가 로마대교구로 부터 실질적인 영향력으로 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8세기 성상숭배 금지령 문제와 9세기 포티우스 분쟁으로 로마교구의 영향력은 급감하였고, 1054년, 케룰라리오스(Cerularius)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안디옥,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와 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는 실질적인 분리단계에 있었으며,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로마교회 소속군대가 동방교회 국가의 성당과 제단의 성물까지 약탈과 방화하는 사건으로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15세기 피렌체 공의회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일부 합의가 있었으나 동방교회 평신도들이 강하게 거부하는 가운데 비잔틴제국 패망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영구적으로 동서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동방교회는 교황청을 절대중심으로 하는 로마카톨릭과는 달리 강제성이 없는 연합체 조직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명예상 세계총대주교로 추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동로마제국시대에는 그리스정교회가 중심이었으며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러시아정교회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동방교회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그리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루지야, 마케도니아, 키프로스 등의 국가에 퍼져 있습니다

동방교회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제자 12사도를 통한 사도전승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동방교회, 즉 정교회는 성경과 7회의 공의회를 통해 확립된 교회규범(Canon)을 포함하는 거룩한 전승(Sacred Tradition)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에서 확정된 삼위일체를 신학의 기초로 삼았으나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로마카톨릭교회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발(proceeds)’한다”고 한 반면 동방 정교회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한다”라고 하여 대립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동방정교회의 성사는 로마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세례, 견진, 결혼, 고해, 신품, 성유(=病者聖事), 성체성혈 등 7대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교회가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동방정교회는 "성체성혈성사"를 함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함께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로마카톨릭의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은 동방정교회 역시 삼위일체에 따른 "주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마리아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Deipara,신성神性출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테오토코스, 또는 데오토코스(그리스어: Θεοτόκος, 라틴어: Deipara, Dei genetri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즉, 예수는 사람이 된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론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人性)과 함께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신성 출산'을 의미하는 그리스도교의 용어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삼위일체 하느님인 성자, 예수를 낳은 '하느님인 예수의 어머니'가 된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말한다.-위키
 
동방정교회의 성직 또한 로마카톨릭교회와 동일하게 주교, 사제, 보제(부제)로 구분하며 주교외에는 결혼이 가능함으로서 로마카톨릭과 구별이 되고 있습니다. 성모마리아 안식축일 또한 로마카톨릭과 동일하게 8월15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으나 성모승천에 대하여는 로마 카톨릭과 달리 교리에 포함시키지 않고 거룩한 전승으로 여기고 있다는 측면에서 기독교와는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죄없는 성령의 잉태와 관련해서도 로마카톨릭은 예수님의 죄없음을 정론으로 하지만 동방정교회는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함을 취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평생동정녀론도 로마카톨릭과 동일하게 교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2) 서방교회(로마카톨릭교회,Ecclesia Catholica Romana)

서방교회(西方基督敎, Western Christianity)는 라틴식 전례를 따르는 로마카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여기에서 분리된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을 총칭해서 부르는 것으로 1세기초 로마대교구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교구, 안디옥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콘스탄티노플교구 등 5개 교구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 로마교구를 제외한 4개교구가 로마교구에서 분리되어 동방교회로 불리워지고 로마교구는 서방교회라고 불리워진 것입니다

1세기, 교회의 공동체는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되었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한 문제로 유대교와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의 중심었던 예루살렘교회를 파괴함과 동시에 극심한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의 중심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59~61년 경계에 로마에 도착했을때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로서 로마가 기독교의 중심지로 형성되었는데 정확한 근거는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64년 7월19일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네로황제는 화재의 원인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기독교인들을 화재 방화범으로 몰아 4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박해와 화형으로 처형을 하였으며 이 기간중에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는 기독교 박해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도화선이 되어 기독교의 전파속도는 급속히 증가되기에 이러렀습니다. 박해와 순교속에서 저항하였던 로마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속에 신앙과 공동체 일치의 기준이 되었고 로마주교는 스승과 같은 위치와 자격으로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들에 교훈과 법적 가치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100년까지에 이르는 1기를 중심으로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250년까지 이르는 2기에는 교회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종교로 규정하고 교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대상이 되어 박해가 정점에 이르렀고, 313년에 이르는 3기에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하기위해 희생시킨 박해기였습니다. 로마제국과 로마교회와의 대립각은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로마제국의 절대적 제국주의 사관과 개인과 국가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앙하는 로마교회의 신관으로 일치되는 지점이 없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312년, 콘스탄틴 대제는 당시 열세이었던 상황에서 이탈리아로 출정하여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쟁을 앞두고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함께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콘스탄틴 대제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X)와 로(P)로 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전쟁을 하여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전을 기점으로 하여 313년 콘스탄틴 대제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동하여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고 기독교를 공인하였으며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기독교화의 발판을 구축하였습니다

밀라노칙령은 첫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둘째, 기독교인들이 박해시대에 몰수당하거나 이미 처분된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강제명시한 것으로 로마교회가 세계 교회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재정적 후원이 되었습니다. 324년, 콘스탄틴 대제가 반교회적 정책으로 악명높은 리치니우스를 제거함으로서 기독교 정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당시 모든 국가적 조치에 기독교정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습니다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다음 로마 제국 동부는 리시니우스(Licinius)와 막시미누스(Maximinus Daja)가 다스리고, 로마 제국 서부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와 막센시우스(Maxentius)가 다스렸다.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티베르 강변에서 막센시우스를 제압하여 홀로 제국 서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리시니우스를 만나 자기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와 겨루어 이김으로써 홀로 제국 동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승리자들인 콘스탄티누스와 리치니우스 두 대제는 317년부터 사이가 벌어지더니 드디어 324년 패권 전투를 시작하여, 324년 11월 8일 비잔티움 맞은편 동쪽 포구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현재 아시아 쪽 위스크다르)에서의 최후 결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380년 2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 반포함으로서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가종교가 되었으며 이로서 기독교는 제국교회, 국가교회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제국의 국가교회로 성장한 로마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권력화 함으로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교회의 세속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를 거부한 쇄신파들이 사막으로 은거하거나 수도원 운동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영토확장과 함께 예루살렘교구, 안디옥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콘스탄티노플교구 등 4개 교구에 대하여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위개념의 교회가 되었으며 4세기 이후 10세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교구, 안디옥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콘스탄티노플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와 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가 분리되는 절차를 점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교회의 세계교구 통치는 로마제국의 흥망성쇄와 직결되어 있었으며 4세기경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로마교구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영향력 또한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교회의 동방교회와의 분열은 교리상의 문제라는 인식과 함께 로마제국의 멸망과 영토의 급격한 감소 등으로 인한 제국적 영향감소가 더욱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1204년 십자군 원정에서 빚어졌던 동방교회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약탈과 방화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인 로마교회가 완전히 분열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틴노플 침략전쟁에서 콘스탄틴노플 총대주교가 로마교황청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유럽정세와 지역문제들로 로마교회가 동방교회를 지원할 여력이 부족하여 지원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콘스탄틴노플이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에게 함락됨으로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에 걸쳐 무려 200년동안 교황의 주도로 계속 되어진 8차례의 십자군원정은 초기 승리로 인한 교황권 신장과는 달리 십자군이 지속적으로 패하거나 4차원정과 같은 오류를 범함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은 변질되고 엄청난 희생과 권력의 희생자로 전락하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영주들의 권력이 함께 무너지면서 봉건제도가 종료되고 왕권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교회의 부정과 부패, 도덕적 헤이도 갈수록 지나쳐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증가하였습니다

15세기, 마틴루터가 동일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항에 이르는 대자보를 게시함으로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며 마틴루터 추종자들의 루터교회를 기점으로 쯔빙글리와 장칼뱅의 장로교회 등 새로운 기독교가 로마교회로 부터 독립 출현함으로서 로마교회의 세속화와 영향력 감소는 더욱 가속화 되어 갔습니다

16세기, 예수회를 중심으로 로마 카톨릭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회 운동의 개혁적 성과는 영성생활지도,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선교사역, 자선사업과 청소년 교육, 신학교설립과 연구를 통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신앙회복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서유럽국가를 중심으로 지속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교회는 오늘날에 까지 이르게 되었고,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교황청의 권한과 영향력은 여전히 세계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3)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와 차이점

207년경, 제 2차 터툴리안 총회(Trullian Synod)를 기점으로 동서교회 분열의 조짐이 시작되었습니다. 성화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권위를 강조한 102권징(??) 조문 문제로 로마교회(서방교회)는 우위성을 강조하며 맞서는 가운데 양측의 대립은 보다 심화되어 갔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포티우스(Photius,850~886)는 "헬라세계의 루터"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동방교회의 독립을 강화하는데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동방교회 포티우스 대주교가 로마교황 니콜라스(Nicholas) 관할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서 양측이 파문을 선언하고, 이에 동방교회는 스스로를 정통교회라고 칭하고 서방교회를 정통성이 없는 교회로 지칭함으로서 양측의 분열은 감정적 대립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로마교회는 이에 맞대응하여 동방교회와 의논없이 니케아신조에 "필리오케"(Filio Que)를 삽입함으로서 교리적으로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필리오케"(Filio Que)는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동방교회 또한 삼위일체를 신앙하고 있으나 "성자예수님"을 삭제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 필리오케논쟁
비잔티움교회의 신조는 "성신은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로마교회는 거기에 '그리고 성자에게서'를 의미하는 '필리오케(filioque)'를 덧붙였다. 말하자면 로마교회의 신조는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교황청은 6세기부터 서구의 교회에서 사용해 온 필리오케를 11세기에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두 교회의 예배 방식 등에 상당한 차이를 초래했다.
로마교회와 비잔티움교회가 860년대에 불가리아교회의 귀속 문제로 대립하던 때에 이미 발생한 필리오케 문제가 1054년에 다시 논쟁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11세기에 남이탈리아를 차지한 노르만족이 남이탈리아의 교회를 교황청에 귀속시키자 그 손실을 애통해하던 비잔티움교회의 총대주교가 보복하는 차원에서 필리오케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문제 해결을 위해 추기경 훔베르트를 비잔티움에 파견했다. 그러나 두 교회의 만남은 서로 상대 교회를 파문하는 것으로 끝났다.
 
869년, 콘스탄틴 공회에서 동서교회는 일시적으로 상호존중과 일치를 의결하였으나 그후 비잔틴 제국은 흥하는 반면 로마제국은 급격히 쇠퇴함으로서 로마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 영향력도 급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 위험에 빠진 콘스탄틴 9세는 로마교황 레오 9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로마의 사정 또한 여의치 않아 지원을 하지 못함으로서 양측의 감정은 골이 더욱 깊어 갔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1054년, 콘스탄티노플 미가엘 케롤라리오스(Michael Cerularius,1043~1058)대주교는 서방교회로 부터 완전독립하여 세계총대주교로서의 권한을 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8세기 성상숭배 금지령과 9세기 포티우스 분쟁으로 촉발된 동서교회의 분열은 1054년, 케룰라리오스(Cerularius)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안디옥,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와 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는 실질적으로 완전 분리되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로마교회 소속군대가 동방교회 국가의 성당과 제단의 성물까지 약탈과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서 그동안 화해와 일치를 위한 훔버트(Humbert) 등 여러가지 사절단의 왕래도 무산으로 돌아가는 등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렇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양 교회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으며, 동방교회는 정교회로, 서방교회는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등 여러가지 교단과 교파와 교회로 분열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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