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땐 서른이 중년, 지금은 46세
김광석이 이 노래 ‘서른 즈음에’를 발표한 건 1994년 6월이다. 이 노래가 나올 때 태어났다면 올해로 서른이다. 이들은 당시 이 노래가 중년에 접어드는 쓸쓸함을 주제로 공감을 얻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 한다. 저출산·고령화가 급격히 진행하면서 30세와 중년의 거리는 멀어졌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청춘 안 멀어졌고, 잔치 안 끝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4년의 중위연령은 28.8세였다. 중위연령은 국내 인구를 출생연도별로 줄 세웠을 때 가운데 위치한 나이다. 같은 해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가수 김광석이 “청춘이 멀어져 간다”고 부를 때, 시인 최씨가 “잔치는 끝났다”고 쓰던 당시엔 30세라면 전체 인구에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올해 중위연령은 46.1세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17세 높아졌다. 연간 출생아 수가 100만명에 이르렀던 1960년대와는 달리 최근 출생아 수가 20만명대로 떨어졌고,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이 50대가 되면서다.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출판 시장도 30년 전과 다르다.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김미경의 마흔 수업’ 등 40대 또는 마흔이 제목이나 부제에 들어간 책이 올해에만 19종 나왔다. ‘나의 마흔에게’,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등이다. 인생의 중반부에서 고민하는 독자를 위한 책들은 30대가 아닌 40대를 겨냥하고 있다.
높아진 초혼연령, 삼순이는 어린 축
높아진 중위연령은 결혼·출산‧취업‧은퇴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2005년 방영된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이른바 ‘노처녀’ 역할로 나오는 삼순이(김선아)의 극 중 나이는 30세다. 삼순이는 결혼정보업체 매니저로부터 “여자 나이 서른에, 이런 조건으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구박을 받는다.
1994년 25.1세, 2005년 27.7세였던 여성의 초혼연령은 최근 32세로 높아졌다. 삼순이보다 나이가 많다. 혼인 건수는 크게 줄었다. 2005년 31만4304건이었던 연간 혼인 건수는 지난해엔 19만1690건으로 39% 감소했다. 결혼을 아예 안 하거나 한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늦게 했다는 의미다.
인구 전문가는 이 같은 사회 변화를 인구 압박으로 설명한다. 윗세대 인구가 많을수록 현세대를 짓누르는 압박이 강해지고, 사회적 진도가 늦어진다는 뜻이다. 조 교수는 “서른 즈음에가 나올 땐 29세면 위보다 아래가 많은 사회적 어른으로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해야 했다”며 “지금은 위가 가득 찼으니 사회 진출 연령대가 늦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으니 연령과 사회적 위치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특정 나이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나 호봉제를 완화하는 게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신입사원은 30대, 60대도 일할 나이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 평균 나이는 2019년(30.9세)에 30세를 넘어섰다. 1998년엔 25.1세였다. 인구 압박이 사회 진출을 늦췄다는 풀이가 나온다. 정연우 인크루트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은 "경쟁 심화로 지금의 신입사원 평균 나이는 더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사회생활의 시작이 그만큼 늦어졌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 국무조정실이 지난해 만 19∼34세 청년 1만496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7.5%는 부모 집에 거주하는 이른바 ‘캥거루족’이었다. 이들은 생계비를 이유로 부모와 함께 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들 중 3분의 2(67.7%)는 뚜렷한 독립 계획이 없었다.
한편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김광석이 1990년 공개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는 인생의 끝자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한 노인의 독백이다. 이 역시 지금의 60대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됐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베스트셀러 제목이었다. 30년 전 일이다. 같은 해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발표했다. 갓 서른이 된 친구들이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를 따라 부르며 술을 펐다. 그때는 서른만 돼도 인생 큰 고개를 넘은 양 폼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작품이 발표된 1994년 한국의 중위연령은 28.8세였다. 서른이면 많은 나이에 속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중위연령은 46.1세다.
중위연령이란 국민을 나이순으로 줄 세웠을 때 딱 중간 나이를 의미한다. 나라를 지탱하는 허리와 같다. 1975년 한국의 중위연령은 무려 19세였다. 반세기 만에 19세가 아닌 46세의 허리로 살아가려니 오늘날 한국인의 삶이 지치고 삐걱거릴 만도 하다. 김광석은 노래 제목처럼 서른 즈음에 훌쩍 세상을 떠나 영원한 청춘으로 남았다. 그때 함께 청춘을 노래하던 또래들은 이제 60대가 됐다.
사람을 따라 책 제목들도 나이를 먹었다. 대형 서점에 가니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오십에 읽는 논어’가 쌓여 있다. 두 책이 인기를 끌면서 비슷한 제목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흔에 읽는 소크라테스’도 있고, ‘오십에 읽는’ 맹자, 장자, 주역도 있다.
마흔은 ‘불혹(不惑,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의 나이, 오십은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앎)’의 나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위연령 46세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40대, 50대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수 세기 전 철학자에게라도 묻고 기대고 싶은 헛헛한 마음들이 매대에 쌓여 있다. 옆으로는 ‘어쩌다, 예순’ 하는 책도 보이고 ‘백세 수업’이란 제목도 눈에 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나라, 대한민국 서점가의 풍경이다.
‘중위연령 46세 시대’가 스며 있는 건 책 제목만이 아니다. TV를 켜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강호동, 유재석 등 50대 예능인들이 2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게임을 하고 벌칙을 수행하며 뛰어다닌다. 교복이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말이다. 연말 시상식 때면 이들이 여전히 트로피를 손에 쥔다. 이들 1970년대생은 이십 대 때부터 계속 중위연령대를 따라가고 있다. 꾸준히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만큼 부담도 크다.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부양하느라 허리가 두 번 휘는 세대다.
TV 예능의 주요 소재로 낚시와 골프가 등장하고, 트로트가 쇼 프로그램을 점령한 건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이 멈춰버린 결과다. OTT와 소셜미디어가 흡수한 젊은 세대를 포기하고 방향을 틀었겠지만, 어쨌든 현재 대중문화의 핵심 수요자가 10대, 20대였다면 TV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시대변화의 안테나와 같은 대중문화가 고령사회의 징후를 드러내는 사이,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활력과 혁신의 저하다. 앞서 고령화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은 1995년 생산연령인구 정점에 있었다. 이후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됐다. 한국의 생산연령인구 정점은 2016년이었다. 우리는 종종 일본의 아날로그 문화에 의아한 눈길을 보내곤 한다. 종이 서류와 도장, 팩스를 고집하고 디지털도어록 대신 열쇠를 들고 다니는 문화를 보며 한국은 다르다며 으쓱해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기술 진보의 시대를 선도할 수 있을까. 아니, 현재 잘 따라가고 있기는 한 걸까.
초유의 정치적 혼란으로 어지러웠던 연말, 신문 한편에 한국이 12월23일 자로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됐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보다 더 고령화된 나라는 많다. 일본은 2005년에, 핀란드는 2015년에 이미 초고령사회였다.
문제는 진행 속도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 즉 노인 인구가 전체의 14%에서 20%에 도달하기까지 일본은 10년, 이탈리아는 20년, 영국은 50년이 걸렸다. 한국은 단 7년 만에 도달했다. 준비하고 적응할 새도 없이 급속도로 늙어버린 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앞으로는 더 빨라질 것이다. 불과 5년 뒤인 2030년, 한국은 중위연령 50세에 이를 전망이다. 2055년에는 중위연령이 60세가 된다.
초고령국가 대한민국이 직면한 담론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노동인구 감소에 따른 저성장, 연금 고갈과 재정 부담, 복지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고민, 노인 빈곤과 고독 문제 등을 넘어 국가 소멸 우려에까지 이른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치열하게 부딪쳤어야 할 담론이 정치적 혼돈 속에 묻혀 있다. 안타까운 건 힘겨운 오르막길 끝에 겨우 올라선 고갯마루에서, 역사상 유례없이 잘사는 나라가 되고 높은 문화의 힘까지 꿈꾸게 된 정점에서 휘청이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실존적 위기를 앞에 두고 국론마저 분열된 대한민국을 세계가 우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 잔치는 끝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