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에서 물질과 공 또는 공과 물질의 관계를 표현한 불교교리.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함.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그리고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구 또한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 속에서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은 많지만, 가장 명쾌하고 독창적으로 해설한 이는 신라의 원측(圓測)이다. 원측은 그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유식삼성(唯識三性)의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였다.
원측은 색즉시공에 대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공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마치 공화(空華)와 같고 그 자체가 또한 공한 것이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변계소집에 의하여 일어난 색은 본래 없는 것을 망념으로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고, 의타기성에 의하여 생겨난 색은 인연 따라 존재하고 멸하는 가유(假有)의 색이기 때문에 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원성실성의 입장에서 보면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는 뜻이다.
원측은 계속하여 색과 공이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를 밝히면서, 만약 하나라고 하면 일집(一執)에 빠지게 되고 다르다고 하면 이집(異執)에 빠지게 되며,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 되고,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면 희론(戲論)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구의 가르침은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이 나오는 구문을 발취해 한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舍利사리子자 色색不불異이空공 空공不불異이色색 色색卽즉是시空공 空공卽즉是시色색 受수想상行행識식 亦역復부如여是시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ㆍ생각ㆍ행동ㆍ의식도 그러하니라.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부처가 사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설명한 것이다.
'색'은 물질로 이뤄진 몸이다.
'수'는 느낌이다. 느낌은 즐거움 괴로움 덤덤함 이 세 가지가 있다.
'상'은 대상을 판단하는 작용이다. 즉, 대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행'은 '수'와 '상'을 제외한 모든 마음작용이다.[4]
'식'은 앞의 사온(四蘊)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식'은 단지 대상이 있음을 알아차림하는 것이지만 '상'은 구체적으로 대상이 무엇인지 지각하는 것이다.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은 '식'이지만 그 대상이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상'의 작용이다. 이 '색, 수, 상, 행, 식' 다섯 가지를 오온이라 하며 이것이 모두 공(空)하다는 의미다.
공(空)과 무(無)를 혼동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무(無)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고, 공(空)이란 어떤 존재가 실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고, 공이란 있는 듯 보이지만 따져보면 그 존재의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실제로는 없다란 의미다.
이 오온이 모두 허상(空)인 것을 깨달으면 모든 고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이 불교에서 그렇게 큰 위상을 가지는 것은, 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깨닫는 인지 작용조차 공하다는 가르침을 통해 삼라만상과 석가세존의 모든 가르침 역시 궁극적으론 공하다는 파천황의 궁극설이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색(色)을 '존재'로, 공(空)을 '변화'로 해석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색즉시공은 불교의 교리에 대해 잘 모르는 지식 유튜버, 사회저명인사, 물리학자들(특히 양자역학 등)이 흔히 어떤 이론이나 학설 등이 불교적인 심오한 뜻도 가지고 있다는 걸 대중적으로 호소하는 경우로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5] 한자어 색(色)은 물질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 물질화되어 펼쳐지는 현상을 뜻하며 공(空)은 물질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지 않는 상태로서의 비어 있다는 개념이 아닌 법공(法空)을 뜻 한다. 이를 보다 불교 원래의 뜻으로 생각하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계는 인연생기하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법(法), 불성에 의해 나타난다' 는 해석이 가능하며, 보다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된다. 공(空)을 에너지로, 색(色)을 물질로 생각한다면 그나마 본 뜻에 가까워진다. 에너지와 물질이 상호변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면[6] 물질은 곧 에너지요, 에너지가 곧 물질이니라로 해석 가능한데, 오히려 이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이 역시 비판적이게 바라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원문 자체가 한자가 아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훨씬 길고 이를 초월 번역한 한자어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8자의 한자어로 바꾼 것이기 때문에 한자어의 색이나 공의 뜻에만 집착하는 해석도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할 수 있다.
색(色)은, 색깔이 아니라 '흔히 생각하는 물질을 포함한 실체가 있는 모든 현상' 혹은 눈에 비치는 만물만생(萬物萬生)을 말한다.[7] 물질은 법에 의해 인연생기 하여 변화하고[8] 또한 변화해 사라지더라도 금세 다시 다른 것으로 변화하여 생겨나는 작용을 뜻한다. 그러므로 집착과 번뇌의 대상이 원래 없으므로 이분법적인 관념으로부터 스스로 깨어나라는 뜻이 된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공을 텅 비어 있다는 식으로 쓰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흔히 불교를 공허한 가르침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최근의 불교 연구와 해석에 의하면 공은 인연생기하는 법이 가득찬 상태, 즉 생명력이 가득찬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한다.[9] 이를 원자에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원자 내 빈 공간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 집합체로 볼 수 있다.[10]
물론 전문적 해석을 너무 전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좋은 태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해석의 자유와 연구의 엄밀한 적용은 구분되어야 한다. 수 많은 해석이 각각의 의미를 지닌 것이 될 수는 있으나 진정 화자가 이야기한 뜻이 이러한 뜻인지 알 수 없기 때문. 특히 불교는 연기론을 비롯해 심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한자의 경우 느슨한 해석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게다가 현대어화된 한자 직역을 하면 제대로 된 해석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자로 쓰인 반야심경 역시 번역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물리학자가 자신은 불교의 법공 같은 걸 믿지는 않으나 물리학적 차원에서 한정하여, 사실상 원자의 크기에 비해 원자와 전자 사이는 엄청난 거리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든지 하는 예를 들며 공(空)을 물질이 없는 텅 빈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는 말을 하면 그것은 그의 자유이기는 하나 과신하지 말아야 하고 불교에 대한 몰이해를 만들어 내는 원인되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도가의 경전인 태상동현영보승현소재호명묘경(太上洞玄靈寶昇玄消災護命妙經)에서도 색즉시공 및 관련 문구가 있다.[11]
그러면서, 이 색즉시공에서 중요한 것은 불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변화의 개념이라고 한다.
공(空)과 무(無)
무(無)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고, 공(空)이란 어떤 존재가 실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공(空)은 공(空)마저 공(空)해야 진정한 공(空)이고,
무(無)는 없음(無)마저 없어야(無) 진정한 무(無)다.
공은 마냥 텅 비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 있다고 해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잡으려 하는 순간 변해버려
원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없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으로, 그것은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세상만법이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다는 것은, 있지만 있다 할 것이 없는 있음이고,
없다는 것은, 없지만 없다 할 것이 없는 없음이다.
이것을 아주 적적하게 말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라는 것이다.
공을 다른 표현으로 하는 것이 무(無)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과 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다름이 없어 반야심경의 이 말을 무와 유로 표현하면
“모양 있는 것(有)은 모양 없는 것(無)과 다르지 않고 모양 없는 것과 모양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모양 있는 것이 곧 모양 없는 것이요, 모양 없는 것이 곧 모양 있는 것이다.”
라고 표현이 된다.
우리는 공이니 무니 하는 말에서 옳고 그름이 없고, 양변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공과 색의 관계를 분명히 안 뒤의 알게 되는 것이고,
이 공부에서 말하는 공과 색, 무와 유는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을 말함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우주의 원리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칭하는 그 법칙과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이 연기법에 의해 생기고 변하고 흩어지고, 그 흩어진 것이 다시 다른 인연으로 모여 생기고 변해가는 것이어서 어떤 것도, 어떤 순간도 정해진 모양이 있거나 머무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양을 만들면서 변해간다.
또 이 모양이라는 것도 보는 존재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즉 같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보는 물건과 새가 보는 물건, 또 벌레가 보는 물건, 세균이 보는 물건의 형태가 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물건이라 하는 것도 동물에게는 하나의 물체로 보일지 몰라도 식물의 촉수나, 세균의 감각에서는 무수히 나누어진 것들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같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공통으로 느끼는 것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세상 만법의 이름일 뿐, 이 만법이 본래부터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 공과 색, 무와 유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살림살이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그것의 진실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분명히 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한 법(不二法), 불성(佛性), 자성(自性), 진여(眞如), 도(道) 등으로 부르는 무엇이다.
왜 무엇이라 하는가? 그것은 모양은 없고 오직 법칙과 작용만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자체의 모양은 없고 오직 법칙과 작용으로 생겨나는, 매순간 변하는 모양으로만 자신(法))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법이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일러 우리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연기법은 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과 작용일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근본 본성이 되느냐?’
고 부정적으로 되묻는 사람이 많다.
삼신불(三身佛)은 하나다.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 하나로, 본성, 또는 본체의 이름인 법신과, 그것의 행위인 보신, 그리고 그 행위로 드러나는 세상만물의 낱낱인 화신이 모두 하나의 몸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법신은 모양도 기미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작용과 그 작용의 원리, 즉 법칙으로 그것을 감지할 뿐이고, 그 작용과 법칙은 이 세상에 드러난 것들이 인연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작용과 법칙에 연기(緣起)라는 이름 붙이고는 법(法)이라는 이름도 함께 붙인 것이 연기법(緣起法)이다.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나누면 이미 이 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행위가 낱낱이 다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듯이, 세상에 드러난 만법들이 낱낱이 그 인연으로 다른 모양을 띠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이 법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법신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으로 그것을 공이니 색이니 무니 유니 하고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규정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그 실체를 보아야만 기준이 옳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감지(感知)하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으면 어떤 규정도 마련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공이니 색이니, 무니 유니 하고 논해봐야 그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그런 논의가 우리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그것을 읽고 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것을 하거나 하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즉 나라는 존재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 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는 그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그렇게 하는 무엇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임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움직이고, 동물 식물, 그리고 계절의 순환과 별과 달이 늘 저렇게 규칙적으로 뜨고 지는 것 등을 보면서 이 우주의 근본이 분명히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처음 밝히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이다.
즉 고행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고행을 내려놓고는 니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또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죽을 먹고는 보리수아래 앉아 있다가 새벽별을 보고 문득, 매일 같이 저렇게 규칙적으로 뜨는 것은 세상에 분명히 뭔가는 모르지만 한결같고 분명한 법칙과 작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칠일 밤낮을 사유하시며 모든 진리를 꿰뚫어 파악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경에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는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시며,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도대체 뭔지 모르지만 이 우주를 움직이는 무엇이 있다는 것에서는 부처님처럼 가끔 깨닫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왜? 직접 그 모양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직접 모양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법신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이야 붙일 수는 있어 불성(佛性), 자성(自性), 진아(眞我) 등으로 붙이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으로 부르지만 정작 그 실체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법칙과 작용과 그것으로 드러난 세상만법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바라제존자는 이견왕을 만나
“불성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말에
“작용하는 데 있다.”
고 했고, 그것이 우리의 몸과 눈, 코, 귀, 입 등에서 작용할 때의 공용(功用)과 세상만법에서의 작용을 말했을 뿐, 그것에 대한 실제 모양에 대해서는 어떤 묘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약산이 그냥 앉아 있을 때 대우선사가 뭣하냐고 물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말에 대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한가롭겠구나.”
라고 되물으니
“한가롭다면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그러자 대우가 다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니
“천성인(千聖人)이 와도 모릅니다.”
라고 하였으며,
달마조사와 양무제의 대화에서도 양무제가 달마와 대화를 하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자, 약간 화가 나서 묻기를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대는 누구요?”
라고 하니 달마조사가 대답하기를
“나도 모르오.(不識)”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달마불식(達磨不識)인데, 달마조사가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게 하고, 또 그렇게 양무제와 대화를 하게 하는 법칙과 작용의 근원인 이 한 법의 본체 즉 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 자성, 하느님, 진아 진여 등등으로 불리는 이 법신은 법칙과 작용과 그것으로 드러난 것들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이 만약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가 그가 있음을 알려면 그가 움직여야 하고 우리는 그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그를 알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이 한 법 법신(法身)도 그 움직임의 법칙과 작용인 보신(報身)으로 한 법의 모양인 화신인 세상만법을 드러내어 우리가 그것과 함께할 수 있게 하므로 그것을 총칭하여 연기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는 것 자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매순간의 나의 행위로 나를 알 듯이 그것과 나의 행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처럼,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역시 한 몸이므로 ‘연기법’을 일러 ‘이 한 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 이름일 뿐이니, 그렇게 알아들으면 될 뿐 이름을 가지고 시비하지 말라.
어쨌든 실제로 윤기붕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윤기붕의 용모와 말버릇, 또는 행동하는 버릇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지,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듣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윤기붕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존재하며 형체를 가진 사람도 우리가 보지 못하면 그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데, 형체도 없는 이 하나가 오직 법칙과 작용으로만 세상에 드러나는데 어찌 우리가 그것을 직접 보거나 알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법, 또는 도, 즉 법신을 직접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하고, 그러한 생각이 망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 법신은 절대로 직접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고 단지 그 법칙과 작용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법칙과 작용은 이름 붙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엄정하게 적용이 되고, 또 그것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법칙 자체가 사사로움이 없고, 또 그 사사로움이 없는 법칙을 작용으로 생기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어, 이 세상에는 그것을 떠난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법칙의 이름을 연기법이라 하며 감히 본성을 대신하는 것으로 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법을 공부하면서 말하는 공(空)과 무(無)는 그것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드러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말하고 있고,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과 용모를 알고 안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통해 이 법을 아는 것이니,
이 법의 법칙과 작용이 공과 무이므로 이 법이 역시 공과 무이며, 이 공과 무는 공하기만한 공이 아니고 무이기만 한 무가 아니라, 만법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나 공과 현상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흘러가니,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이니 무니 한다고 해서 늘 공한 것은 공하고 없는 것은 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만법이 이 법칙과 작용은 연기의 원리로 서로 인연이 되어 공이라 하는 순간에 공 아닌 모양이 되고, 공 아닌 모양이 되었다 하는 순간에 그 모양은 다시 사라져 공이 되는 이런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니, 반야심경에서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양이 사라져 공이 된다는 것은 표현일 뿐, 사라져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이라 하는 순간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에 앞의 모양의 입장에서 볼 때 공이어서 공이라 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공일 수가 없다.
그리고 모양도 마찬가지로 모양이 있다 하는 순간 변해버리니 단 한 번도 모양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에 집착해도 망상이고, 색에 집착해도 망상이라 하는 것이니 그것을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이 법의 공과 무는 절대로 공과 무와 함께 하지 않고 색과 유 역시 색과 유와 함께 하지 않는다. 즉 공은 색과 함께 하고 무는 유와 함께 하는 것으로 절대로 영원히 공한 무기공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색과 공이란,
색은 인연만 되면 그것에 응하여 드러나니 색이라 하고,
공은 그러면서도 잠시도 머물지 않아 자취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지 않아 공(空)이라 하고, 그 머물지 않는 것이 끊임없이 인연에 응하여 모양으로 드러나니 색(色)이라 하니, 이 법의 공은 공도 공(空)하고 무(無)라는 것조차도 무(無)하기 때문에, 또한 공(空)이라 하고 무(無)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이니 무니 하는 것은 머물지 않는 이 법칙과 작용의 특성 때문에 붙이는 이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중요하게 말하는가?
머물지 않는 이 법칙과 작용으로 세상만법이 생겨나, 그 법칙과 작용으로 살아가듯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고, 그런 삶에서 이 법칙과 작용을 알아 모든 것이 본래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야 망상에 빠지지 않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법칙과 작용을 알아 우리가 본래 그러함을 알면 마음에서 쓸데없는 망상이 없어지고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함께 흘러가게 되므로 늘 마음이 한가로워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이 법칙과 작용이 그러하듯 어떤 것도 머무는 것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 역시 절대로 머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세상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도 집착하거나 시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이 생각이란 놈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에 기대어 세상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깨달은 눈으로 본다.’라고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을 붙이면 무기공(無記空)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한 법이 이러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념(無念)이라 하면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 착각하고는 텅 빈 생각으로 앉아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무기공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념이라는 것이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망상심(妄想心)이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주혜해스님은 누가 무념에 대해 물으니
“무념은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이다.
바른 생각은 이 둘을 알아 모든 것이 이 한 법의 연기법의 발현일 뿐 법아님이 없으므로 일체에서 시비분별이 떨어진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삿된 생각인 망상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텅 비어지지 않는 머리를 텅 비우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각이 인연을 지어 만들어낸 모양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좋다 나쁘다 하는 모양을 짓는 것이 그것이다.
즉 공(空)에 집착하는 망상과 색(色)에 집착하는 망상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망상심은 이 법을 양변으로 나누어 한 쪽만 취하여 생긴 것으로, 실재의 이 세상은 법칙과 작용이 그러할 뿐 공도 없고 색도 없어 양변이 없으므로 망상이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앎과 세상을 고집하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깨달은 그 마음은 곧 망상심이 없는 무념의 상태요, 반야심경의 말처럼 공과 색, 그리고 무와 유의 의미를 아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