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동맹 (三国同盟, Dreimächtepakt)
추축국 : 樞軸國 [명사] 제2 차 세계 대전 때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 동맹을 지지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과 대립한 여러 나라 1936년에 무솔리니가 '유럽의 국제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으로 변화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데서 유래한 말.
추축 : 樞軸 [명사] 1. 사물의 가장 긴요한 부분. 2. 정치나 권력의 중심. |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 움직임은 1938년 여름부터 1939년 여름까지 진행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방공협정의 강화와 더불어 1940년 여름부터 삼국동맹 체결까지의 움직임, 두 부류로 나눈다. 전자는 소련에 맞서기 위한 동맹을 목적으로 했고 후자는 독소불가침 조약이 성립되자 이후 소련을 더하여 4개국에 의한 대미동맹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격렬히 저항하는 영국 본섬의 공략을 반쯤 진행시킨 상황에서 사상과 지리적으로 대립중인 소련을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 확대를 위해서는 격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소련과 몽고, 만주국의 이권다툼을 벌이던 일본과 손잡으면 일본이 대소전에 참가하면 소련군 병력이 동서로 분단되어 전쟁에서 우위에 설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의 오산으로, 중일전쟁의 격화로 인해 자원획득을 최우선으로 하던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피하여 히틀러가 참전을 우려했던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에 있어서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무솔리니에겐 타격이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영국과 협상을 강하게 추진하다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수포가 되고 말았다.
또 영국과 미국의 여론도 무솔리나가 세게평화를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묘사되자 미국과 영국과 더 이상 협상은 어렵다고 생각한 무솔리는 같은 파시즘 국가로서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면 아시아에서 파시즘의 영향력이 강해져 전후 세계에서 이탈리아의 발언권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에 독일과의 동맹체결도 이탈리아의 조약참가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있었는데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중이었다. 유럽전선에서 잘나가는 독일을 보고 일본정부는 독일과 손잡고 미국을 견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을 사전에 독일에 이해시킬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 외무국이 기안한 <일본, 독일, 이탈리아 제휴강화안>에는 전술한 지역이 일본의 생존권 내에 있음을 독일이 인식한다는 사항이 명기되었었다. 삼국동맹의 체결에 대해 미영화친파가 비교적 많았던 일본해군은 반발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 요나이 미츠마사는 <조약반대의 삼족오>라고 조약추진파로부터 비아냥을 들었다.
해군은 기본적으로 조약체결엔 반대여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비롯해 나가노 오사미, 오카다 케이스케, 오자와 지사부로, 스즈키 칸타로 등 육군에선 이시하라 간지등이 조약체결에 반대했다. 내각에서도 요시다 젠코 해군대신, 이시구로 타다아츠 농림대신이 반대했지만 요시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후임 해군대신에 오른 오이카와 코시로가 조약찬성에 돌아서면서 반대를 눌렀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9월 19일에 어전회의에서 하라 요시미치(原嘉道) 추밀원 의장은 일본의 삼국동맹 참가를 공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본의 동맹참여를 정당화하는 연설을 했다.
1940년 9월 27일, 조약조인식은 독일의 베를린에서 거행되어 독일 외무장관인 립벤트로프, 이탈리아의 외무장관인 치아노, 일본에서는 특명전권대사인 쿠르스 사부로(来栖三郎)가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원문은 영문 텍스트로 정리되어 베를린에서 서명조인 후 약 3주 후에 일본판으로 다시 고쳐져 주일 독일대사이던 쿠리에가 이를 독일로 가져가 재서명 조인했다. 현재 이 일본판 삼국동맹 문서는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전시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