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사물object이 아닌 사건event이다. 근본적인 시각교정이 필요하다. 구조는 사건의 구조다. 사건과 사물은 방향이 다르다. 방향이 다르므로 갈수록 차이가 벌어진다. 이 세계를 방문하는 자는 준비되어야 한다. 뇌구조를 통째로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은 내부가 있다. 내부에는 구조가 있다. 구조는 의사결정한다. 거기에 시간적인 과정이 있다. 절차가 있고 질서가 있다.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있다. 사물은 그것이 없다. 하나도 없다. 사물은 밖에서 자동차의 껍데기를 보고 사건은 자동차 내부로 들어가서 운전해 본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세상을 사건으로 보는 관점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질이 아닌 에너지로 보고, 정靜이 아닌 동動으로 보고, 지목되는 대상이 아닌 자체의 메커니즘으로 보고,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로 보고, 귀납이 아닌 연역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 그대는 낯선 세계에 초대받은 것이다.
우리는 공간의 사물을 분간하는데 익숙할 뿐 시간의 사건을 추적하지 못한다. 관점이 잘못되었다. 원인에서 결과를 봐야 하는데 결과에서 원인을 보는 오류를 저지른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포착했을 때는 사건이 종결된 다음이므로 자연히 결과를 보게 된다. 틀렸다. 원인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냥 보이는대로 보면 안 되고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은 연역이다. 연역과 귀납은 사유의 방향이 다르다. 연역은 완전한 전체에서 부분을 하나씩 쪼개고 귀납은 부분을 모아서 전체를 구성한다. 연역적 사유체계를 뇌에 세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전체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뇌 안에 자연의 완전성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사물object의 집합이 아닌 사건event의 연결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사물로 보는 오류를 저지른다. 객체의 반대편에 주체Subject가 있다. 인간의 사유는 주체와 객체의 대칭을 따라간다. 이 방법으로는 공간의 정지해 있는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뿐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사건을 추적할 수 없다.
주체와 객체의 공간적 대칭에 매몰되어 사건의 시간적 진행을 놓친다. 문제는 인간의 언어다. 언어는 공간에서 타인과 대화하는 핑퐁식 대칭구조이므로 인간은 자연스럽게 관측자인 자신과 객체를 대칭시킨다. 자극한 다음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형태로 사유한다. 잘못되고 만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 사건의 추적은 현재 확인된 결과에서 과거에 격발된 원인을 되짚는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자연히 과거를 주목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므로 자연의 순리와 맞지 않다. 이것이 귀납추론의 오류다. 인간의 사유는 모두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자연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순방향인데 인간의 추론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는 역방향이므로 실패한다. 경찰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살인이 벌어진 후다. 그 상태에서의 추론은 사건의 흐름과 반대된다. 방향이 틀렸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이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야 한다. 자연이 미래로 가므로 사유도 미래로 가야 한다. 연역추론으로 가능하다.
세상은 대칭이다. 관측자인 자신과 대칭시키지 말고 객체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찾아야 한다. 객체 안에서 대칭을 찾고 의사결정구조를 찾아야 한다. 조절장치가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그것이 구조다. 대칭과 축의 구조에서 축을 움직여 대칭을 바꾸는 방법으로 우리는 사건을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뇌구조다. 고양이가 놀이개에 달려들듯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객체object에 현혹된다. 자연스럽게 눈이 그리로 간다. 귀납하게 된다. 생각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자연을 인간에 맞추지 말고 인간을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사물의 집합으로 본다. 집합은 플러스다. 자연은 마이너스다. 우리는 세상을 원자의 집합으로 이해하지만 자연에 집합은 없다. 집합시키는 데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변화한다. 변화에는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는가다. 자연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한 방향으로 간다. 그 방향은 마이너스다.
세상을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둘 사이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관계를 보려면 더 큰 단위로 올라가서 둘이 공유하는 토대를 찾아 닫힌계를 지정해야 한다. 자연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 것은 둘 사이의 거리가 어떻기 때문이다. 그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떤 것을 볼 때는 일단 한 단계 위로 올라간 다음 거기서부터 하나씩 빼는 방법을 써야 한다. 사과를 얻으려면 과수원을 먼저 찾아야 한다. 거기서 해당되지 않는 것을 빼면 사과가 남는다. 바늘을 찾으려면 헛간을 찾은 다음 지푸라기를 하나씩 걷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마이너스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필요한 것을 들여와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방해자를 제거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부동산 문제든 뭐든 규제를 플러스 하기 보다 방해자를 마이너스해야 한다. 플러스로는 잠시 시간을 벌지만 풍선효과에 의해 원래대로 된다. 내부에서 조절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환경에 붙잡혀 있다. 부동산은 시장에 잡혀 있고 범인은 패거리에 잡혀 있다. 더 큰 단위로 올라가서 조절장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시장에서 방해자를 제거하고 패거리에서 배후세력을 소탕해야 한다.
외부의 개입 없이 닫힌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마이너스다. 우주공간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것은 마이너스다. 외부와 단절된 채로 우주유영을 하는 우주인은 자신을 쪼개는 방법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세상은 변화다. 정지해 있는 것도 내부적으로는 끝없이 상호작용한다. 변화에는 비용이 든다. 닫힌계 안에서 외부 도움이 없이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변화에 드는 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 축 1이 대칭 2를 대표하는 방법으로 외력의 작용에 맞서는 내부효율을 생산한다.
의사결정을 하려면 외력의 작용을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효율적이어야 한다. 빛이 빠른 길로 가듯이 자연은 이기는 길로 간다. 그 길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는 외길이므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재현할 수 있다.
플러스로 가는 귀납적 세계관을 버리고 마이너스로 가는 연역적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게 아니라 내게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기다. 그 방법으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증대시키고 그 다음은 확률에 맡긴다. 환경변화에 잘 대응하면 이기고 환경변화가 없으면 망한다.
세상은 정이 아니라 동이며, 공간에서 막힌 것을 시간으로 풀어내는 것이며, 안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굳센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이며, 완벽한 것이 아니라 모순된 것이다. 플러스에 집착하는 원자론적 세계관을 버리고 마이너스로 에너지 모순을 풀어내는 양자론적 세계관으로 갈아타야 한다.
존재는 원자가 아니라 양자다.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어떤 하나는 존재를 성립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둘이 대칭된 쌍으로 존재한다. 그 둘의 간격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자연은 세상의 온갖 변화를 만들어낸다. 존재는 간격이다. 그 간격이 자연의 효율과 물질의 관성과 사건의 기세와 사회의 권력과 자본의 이윤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존재의 조절장치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김동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