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내가 아는 천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완전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 - 버트런드 러셀 흔히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비트겐슈타인 이전까지'라는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 - 와스피 히잡,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철학자.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현대 영미분석철학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성을 갈망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지성계에 언어 사용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였다. 또한 듀이, 하이데거와 함께 체계 철학에 대비되는 3대 교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라고 그 스스로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삶을 그의 철학과 분리해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 누구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답기를 바랐던 인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항공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논리학과 수학에 흥미를 느껴 당시 수리철학 교수였던 러셀을 만나게 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철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 수용소에서 집필한 책이 《논리 철학 논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용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저 《논리 철학 논고》라는 책에 나오는 명언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은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것에 대하여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 반영된 《논리 철학 논고》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그 문제들이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 데에서 생긴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나는 모든 본질적인 점들에 대한 문제의 최종 해결점을 찾았다고 믿는다.”
기존 철학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언어를 실재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보았다. 여기서 그림이라는 말은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동일하며,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언어로 세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은 얼핏 한자와 같이 애초부터 그림과 관련된 상형문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예컨대 ‘천(川)’은 시냇물의 흐름에서 나온 글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그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낱말’이 아니라 ‘문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담 밑에 민들레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담 밑에 민들레 꽃이 피어 있다”는 언어 표현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를 통해 사실을 그려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 표현이란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의 사실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와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은 각각 1 대 1로 짝을 이루고 있으며 똑같은 논리 구조로 되어 있다.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주기 때문에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주변의 여러 현상을 직접 보지 않고 언어 표현만 듣고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구상하는 데 교통사고를 다루는 재판에서 장난감 자동차와 인형 등을 이용한 모형을 통해 사건을 설명했다는 기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모형을 가지고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모형이 실제의 자동차와 사람 등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세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 관점에서 보면, 언어의 기능이란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면 그에 해당하는 세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 알 수 없는 세계는 보여줄 수 없는 세계가 된다. 이 점에서 “언어의 한계는 즉 세계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때 언어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가 정확히 일치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지, 언어가 갖고 있는 그 의미 자체는 사실을 왜곡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로 그릴 수 있는 세계는 정확히 그리고, 그릴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은 기존 철학의 문제에 대한 그의 진단과 처방이었다. 지금까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언어 사용 때문이라는 것이 진단이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처방전이다. 기존 철학의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혼란과 거짓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릴 수 없는 세계,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던 것이다.
《논리 철학 논고》 이후 철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확신 속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그만두고 떠났다. 언어게임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이 그에게 오기 전까지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 관점에서 보면, 언어의 기능이란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면 그에 해당하는 세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 알 수 없는 세계는 보여줄 수 없는 세계가 된다. 이 점에서 “언어의 한계는 즉 세계의 한계”라는 것이다. |
언어게임 그런데 비트겐슈타인 언어관에서 ‘그림’에서 ‘게임’으로의 전환은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이다. 그는 후기에 오면서 자신이 그토록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시 철학계로 발을 돌리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아직 철학계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문제를 파악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크게 잘못됐다고 비판한 일상 언어에서 나왔다. 새로운 관점에서 일상 언어를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획일적인 법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한 양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한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그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에게 “나 배고파”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그림 이론에서라면 ‘나 배고파’란 말의 의미는 ‘나’는 현재 배고픔이란 상태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렸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언어 게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우스운 설명이 될 것이다. ‘나 배고파’라는 말은 엄마에게 “빨리 밥을 줘”라고 요청하는 말일 뿐, ‘나’가 현재 느끼는 배고픔 상태를 지시해 보여 주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의 그림 이론이 간과한 점이다.
철학계로 돌아오다
비트겐슈타인이 떠났던 철학계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언어관에 대한 그의 새로운 철학적 통찰에 기인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뒤 출간된 《철학적 탐구》는 언어관에 대한 그의 새로운 통찰인 ‘언어 게임’ 이론을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여기서 언어 게임이란 언어라는 것은 문맥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언어가 의미가 있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에서 정한 규칙에 따르듯이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의 다양한 삶의 양식이라는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잘못 사용되고 이해돼 철학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봤다. 당시의 많은 철학적 문제 역시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이해한 결과라고 그는 파악했다. 그래서 그에게 철학은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사용된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 일, 즉 사람들의 생각을 분명하고 확실히 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언어 게임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서로 상황과 맥락에 맞게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제대로 말을 주고받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 미국에서 생활하다 한국에 돌아온 어떤 아이가 부모에게 학교에 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 사정을 들어보니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시켜서 영어책을 읽는데 뒤에서 친구들이 “죽인다 죽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아이의 영어 발음이 미국인과 같아서 친구들이 “영어 발음 죽인다 죽여”라고 칭찬한 것을 가지고 자녀는 이 말을 오해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그만 웃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맥락에 따라 위협적인 말도 되고, 칭찬의 말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 즉 언어의 쓰임새가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가 아니라 콘텍스트(context)다’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그림이론에서 게임이론으로
일반적으로 철학자가 자신의 주장을 도중에 부정하는 일은 드물고 때로 억지까지 동원해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우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의 그림 이론에서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 철학의 언어 게임 이론으로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면서 전기에 자신이 취한 입장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철학을 개척해 언어 철학에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이런 그에게 일관성을 잃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언어게임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맥락에 따라 위협적인 말도 되고, 칭찬의 말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 즉 언어의 쓰임새가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가 아니라 콘텍스트(context)이다’라는 말로 바꿔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