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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유네스코 세계 유산, 작센안할트, Wittenberg

Jobs 9 2025. 3. 24.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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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Lutherstadt Wittenberg

Wappen Wittenber...

 

작센안할트

 

면적

240.4km²

인구

45,588명(2023년 12월)

인구밀도

190명/km²

 

엘베강 연안에 위치한 독일 작센안할트의 도시. 드레스덴 이전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였으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시작된 도시로, 이를 기념하여 시의 주요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1180년,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영지에 플란데런 이주민이 정착하였다는 기록으로 처음 언급된다. 같은 해, 안할트 백작 베른하르트가 작센 공작을 칭하면서 이 지역이 작센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1260년부터는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 분가의 거주지가 되었다.

 

13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발표한 금인 칙서에 따라 작센 선제후로 공인되었으나 작센-비텐베르크 분가는 3대 5명만에 절손되었다. 카를 4세의 차남인 독일왕 지기스문트는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라우엔부르크 분가의 요청을 무시하고 1422년,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을 수여하면서 베틴 가문의 영지에 편입되었다. 토르가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마이센, 바이마르 등과 더불어 베틴 가문의 중요 도시가 되었으며 '현자(der Weise)'로 불린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비텐베르크에 궁정을 마련하였다.

 

150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비텐베르크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내걸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고 프리드리히 3세를 필두로 한 에른스트계는 루터를 보호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루터교회 맹주를 자처하였다. 그러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6촌인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에게 패한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1547년, 황제 카를 5세에게 비텐베르크의 항복으로 알려진 항복을 하면서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계가 선제후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새로 선제후가 된 모리츠는 베틴 가문의 오랜 중심지 중 하나였던 드레스덴으로 천도하면서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7년 전쟁 도중에는 선제후의 궁전도 파괴되었다. 1815년, 빈 회의로 프로이센 왕국에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시가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냉전 시기에는 동독에 속했으며, 독일 재통일 후 부활한 작센안할트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광

 

시 곳곳에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건물들이 있다. 루터의 집이 가장 유명하며, 바로 옆에는 루터의 동료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의 집도 있다. 비록 선제후 궁정은 7년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성 부속 교회가 남아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처음 내건 교회가 이 곳이다. 이 교회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박제된 철판 95개조 반박문이 남아있다. 교회 내부에는 루터와 멜란히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동생인 작센 선제후 요한이 묻혀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유명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집도 있으나 현재는 협회로 사용하고 있어 관광은 불가능하다.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1817년, 할레 대학교와 통합되었기 때문에 옛 건물만 남아있으며 현재는 교육기관 본부로 사용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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