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북송 멸망(1127년), 여진족 , 금나라, 아구타, 해상의 맹약, 정강의 변

Jobs 9 2021. 3. 1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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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 부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발해 멸망 이후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 이미 요의 지배하에 편입된 세력은 '숙여진', 그렇지 않은 부족들은 '생여진'으로 불리었다. 생여진 중에 하얼빈 남쪽 아십하(阿什河) 강 유역에 거처하던 완안부(完顔部)가 추장 완안아구타를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하여 12세기 초 동아시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여진 부족의 통합은 아구타의 할아버지 오고내 때 시작되어 숙부인 영가(盈歌) 때 가속화되었다. 아구타(阿骨打)는 취약한 요의 내부를 간파한 후 마침내 1115년, 여진족 최초의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대금이라 하니, 그가 금 태조이다. 금은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요의 진압군에 연전연승하였으며 요동 · 요서로 남하하여 종횡무진으로 세력을 떨쳐나갔다. 요나라 황제인 천조제 야율연희는 70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당시 요나라는 서하와의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도 치열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금 태조는 이를 틈타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태조는 여진 전통의 씨족 구조인 맹안 · 모극 제도를 군사조직으로 재편함으로써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맹안은 1000을 뜻하는 여진어의 '민간', 모극은 100을 뜻하는 '무게'의 음역이다. 태조는 300호를 1모극, 다시 10모극을 1맹안으로 삼아, 1모극에서 100명의 군사를 뽑아 1모극군을, 10모극군을 모아 1맹안군을 만들었다. 맹안모극제로 사회 · 행정조직과 군대가 일치되고 유목민 특유의 강한 결속력이 가미되어 금군은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한편, 이 무렵 송나라는 왕안석의 개혁도 실패하고 당쟁은 격화되어 급격하게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휘종은 정치에는 뜻이 없어 그가 신종의 아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틈에 채경 같은 처세술에 능한 관료가 환관 동관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휘종은 도성 동북 면에 인공산을 만들고 향락생활에 빠져 들었고 채경과 동관은 이를 부추겨 전국의 기화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게 되니, 이를 운반할 때 민간집의 담장이나 집이 방해가 되면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신흥국 금나라의 소식을 접한 송은 형세를 오판하여 연운 16주를 회복할 심산으로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를 협공하게 된다. 1120년의 이 동맹은 육지의 요를 피해 해상으로 사신을 교환하였기에 '해상의 맹약'으로 불린다. 금 태조는 요의 수도 상경과 중경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대승을 올렸으나 송은 연경 공격에 연패하여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지경이 되었다. 송은 방납의 난이 일어나 그 군대를 국내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방납은 강남의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 한때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한편, 산동의 양산박에서는 송강의 난이 일어나 관군을 크게 괴롭혔는데, 이들이 바로 유명한 《수호지》에 등장하는 양산박 108명 호걸들의 모델이다.

해상의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장성 이북의 땅을 모조리 점령했지만 송나라는 연경조차 점령하지 못했다. 송의 요청으로 연경마저 점령한 금군은 연경 출병 대가로 은 20만 냥, 비단 30만 필, 전 100만 관, 군량 20만 석을 요구했고 송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군은 거의 독자적 힘으로 요의 본거지를 석권했다.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하여 한때 서하에 몸을 의탁했지만, 1125년 금나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첫 번째 정복왕조 요는 건국 이래 210여 년 만에 멸망했다. 요의 귀족들이 서쪽으로 도망하여 요나라를 재건하였는데 이를 서요라고 부른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송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단 회군했던 금군은 다시 남하하여 송의 수도 변경을 향해 밀어닥쳤다. 당시 금의 군대가 도성에 육박했다는 보고를 들은 휘종은 신하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금나라가 설마 우리 도성을 공략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기절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채경 등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결사대를 결성하여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당황한 휘종은 스스로 퇴위하고 장남인 조환을 즉위시키니 이가 흠종이다. 흠종도 두려움에 떨며 마지못해 도성에 머무를 뿐이었다.

결국 송은 금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굴욕적 조건들인 황금 5백만 냥, 백은 5천만 냥, 비단 1백만 필, 우마 1만 마리 등을 바치기로 하고, 흠종이 금나라 황제의 조카가 될 것 등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금군이 철수하자 다시 이를 파기함으로써 금군을 격분시켰다. 금의 대군이 또다시 쳐내려와 수도 변경을 함락시키니 송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때가 1127년이다. 후대의 사가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변경에 도읍했던 북송은 멸망했다. 휘종과 흠종, 3,000명의 종실들은 포로로 잡혀 옛 땅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때마침 금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떠나 있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왕이 금의 추격을 피해 강남으로 이동하여 임안(항주)을 수도로 삼고 송의 피난정권을 수립하였다. 그가 고종이다. 남송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중국은 북중국을 완전히 빼앗기고, 회하를 경계로 금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없이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화북지방에도 여러 의병장들이 활약했다. 송은 주전파와 강화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강화파 진회가 악비, 한세충 등 명장들을 제거하고, 1142년 다시 금과의 화의를 수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때 송이 금에게 제출한 서약서에는 대대로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는 약조가 담겨져 있었다. 이전까지의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던 중국인들에게 악비는 영원한 민족의 영웅으로 두터운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투옥한 후 끝내 옥사시켰던 진회는 대표적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진회는 주전파였으나 북송 멸망 당시 금의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후부터 강화파로 돌변함으로써 세간의 의심을 받았다. 악비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남송 때 무한과 양양을 거점으로 대군벌이 되어 유광세, 한세충 등의 군벌과 힘을 합쳐 금군을 회하 진령에서 저지하는 등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강화파인 재상 진회가 악비의 군대지휘권을 박탈하여 중앙군으로 개편하고 저항하는 악비를 무고한 누명을 씌워 투옥한 뒤 살해했다.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진회가 죽은 후 명예회복 되었으며 중국인들의 중원 복귀의 꿈을 상징하는 인물로, 구국의 영웅으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관우와 함께 무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무묘에 합사되었다.

한편 금나라는 연운16주를 지배했던 요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대한 지역, 화북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점차 여진족 고유의 질박함을 잃어버리고 중국문화에 동화되었다. 대체로 북방민족 중에서 여진족이 거란이나 몽골에 비해 중국화 경향이 더 컸다.

중국화를 가속시킨 왕은 4대 해릉왕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중국식 국가조직과 황제독재체제를 수립하고 한인들을 중용하였으며, 수도도 발상지인 상경 회령부에서 오늘날의 북경인 중도로 옮기고 여진인을 대거 화북에 이주시켰다. 그는 1161년 무리하게 남송까지 지배하려 친정을 일으켰다가 남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참패한 후 훗날 부장에게 살해당했다.

해릉왕 이후 집권한 세종은 내치에 힘쓴 명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가난한 여진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으며, 여진족 고유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여진 문자를 장려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여진 문자는 태조 때 완안희윤이 거란문자를 참고하여 여진 대자를, 희종 때 희종 스스로 여진소자를 만들었다. 명나라 때까지도 쓰이다가 사라져서 청나라 때는 몽골문자를 차용하였다.

금나라의 몰락은 몽골 초원에서 새로이 일어난 강력한 영웅, 칭기즈칸에 의해 재촉되더니 마침내 건국 120년 만인 1234년에 마지막을 맞았다. 훗날 그들의 후손들은 다시 금나라를 세워 한인들을 아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청나라가 바로 그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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