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왕국
České království
1198년 ~ 1918년
해체 이후
보헤미아 공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역사
1198년 건국
1212년 9월 26일 세습 왕국으로 인정
1310년 12월 룩셈부르크 왕조 개창
1348년 4월 7일 보헤미아 왕관령의 핵심지로 부상
1356년 12월 25일 선제후국 승격
1526년 12월 16일 페르디난트 1세 보헤미아 국왕 선출
1749년 5월 1일 보헤미아 왕관령 사실상 해체
1918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위치
중부 유럽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국왕
주요 국왕
오타카르 1세
오타카르 2세
카렐 1세
인구
2,000,000명 (1400년)
공용어
체코어, 독일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국교)
후스파
루터교회
유대교
민족
체코인, 독일인 등
통화
데나리우스, 그로스헨, 탈러, 플로린, 코루나
언어별 명칭
체코어
České království(체코 왕국)
독일어
Königreich Böhmen(뵈멘)
라틴어
Regnum Bohemiae
현재 체코의 전신이 되는 왕국.
엄밀하게 정의하면 보헤미아 왕국이라고 일컫는 보헤미아 국왕이 다스리는 영토 전체는 보헤미아 왕관령이라고 하고, 보헤미아 왕국은 모라바 변경백국, 슬레스코 공국, 루지체 변경백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가리킨다.
프르셰미슬 왕조의 번영과 몰락
신성 로마 제국 왕조 교체기의 혼란한 시국에 유력 가문들이 서로 황제가 되고자 선심을 쓰는 와중에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오타카르 1세는 차기 황제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지지하는 대가로 어부지리로 공작(공국)에서 왕(왕국)으로 승격을 보장받았고 이후 5대 100여 년 동안 프로셰미슬 가문이 왕위를 계승하며 보헤미아를 번영시켰다.
내부의 혼란을 끝낸 프로셰미슬 가문과 보헤미아는 곧장 외부 진출을 꿈꾸었다. 심지어 엄청난 야심가로 부왕 바츨라프 1세를 상대로 왕위 반역을 일으켰었던 오타카르 2세는 독일왕위까지 노렸다. 능력과 욕심을 겸비한 오타카르 2세는 원래 강제로 성직자가 될 운명이었다가 후계자였던 형이 갑자기 죽은 덕분에 하루아침에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는데, 왕태자 작위인 모라바 변경백이 된 이듬해 1248년, 만 16 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렸다. 결국 반란에 실패했지만, 다른 계승권자가 전무해서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요란했던 오타카르 2세는 평생 동안 제국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1250년 모라바 변경백의 신분으로 오스트리아 공국을 정복하여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킨 것을 시작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프로이센 십자군 참가,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공격, 케른텐 공국 합병,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전쟁 등 결혼해서 신혼생활 시기를 빼면 평생 전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왕국을 거대하게 키워내었다. 결국 죽을 때도 전장에서 죽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독일왕이었던 루돌프 1세와 자웅을 겨루다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결국 자신의 죽음과 함께 황제의 꿈은 사라졌고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까지 루돌프 1세에게 빼앗겼지만, 루돌프 1세 역시 보헤미아 왕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오타카르 2세의 일곱 살짜리 아들인 바츨라프 2세를 동갑내기인 자신의 막내딸 유타와, 차남 루돌프를 오타카르 2세의 딸 아네슈카와 결혼시킴으로써 패권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그 일곱 살짜리 아이였던 바츨라프 2세는 나이를 먹자 아버지 시절의 위용을 되찾은 것을 넘어, 아버지보다 더 큰 왕국을 건설하였다. 결국 또다시 아버지처럼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노리기 시작해 루돌프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형인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슬라브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프로셰미슬 왕조가 최전성기에 달한 시점, 즉 바츨라프 2세가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관을 받은 바로 다음해,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바츨라프 2세가 고작 33세의 나이에 급사하며 왕국은 하루 아침에 최전성기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은 것은 바츨라프 2세의 외아들인 바츨라프 3세였는데, 너무 놀기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다가 불과 16세의 나이에 올로모우츠에서 폴란드의 보텐슈타인의 콘라트라고만 알려진 무명 기사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 폴란드 정벌을 앞두고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올로모우츠에서 머물다가 암살이 벌어진 것. 왕이 점심을 먹고 혼자 낮잠, 혹은 산책 중에 벌어진 사건인데다가 사건 직후 분노한 왕의 수하들이 콘라트를 죽여버렸기에 암살의 배후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 보헤미아와 모라바의 지방 귀족들이 의심을 받았지만, 당연히 당사자들 모두 부인했고, 어느쪽이든 사실은 당시 바츨라프 3세를 상대로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쓸 필요는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아예 특별한 배후가 없고 그냥 바츨라프 3세의 술친구였던 콘라트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홧김에 저지른 살인이라는 가설도 있다.
바츨라프 3세는 나이가 어려 놀기 좋아했던 탓에 중세 기록자들에게는 안 좋은 얘기를 듣긴 했지만, 오늘날 체코 역사가들은 오히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외교적인 수완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알브레히트 1세와의 불화는 교섭을 통해 무난하게 해결했고, 튜튼 기사단를 지원하며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수완까지 발휘했다. 선왕 때 발을 들이게 된 헝가리 왕위 문제도 고집스레 왕위를 주장하지 않는 대신 실질적인 이득만 챙기고 빠지는 현실감각을 보이기도 했다. 10대 중반의 나이에 이 정도 정치 감각을 지녔으니 성인이 되어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인근 여러 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암살당함으로써 명군은 커녕 '놀기 좋아하다가 암살까지 당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채 본인뿐 아니라 프로셰미슬 왕조까지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후 보헤미아, 폴란드, 케른텐은 각각 프로셰미슬 가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가 각자의 역사를 밟게 되었다.
그나마 이전에 오타카르 2세의 사생아가 슬레스코의 오파바 공작위를 받아 그의 후손들이 공작위를 이어갔지만,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방계 가문이었고, 이들마저도 1521년 마지막 공작이 후손없이 사망하여 프로셰미슬 가문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룩셈부르크 왕조
젊은 바츨라프 3세가 죽고 프르셰미슬 왕조가 단절되자 왕국은 즉시 혼란에 휩싸였다. 명목상 후계자가 없지는 않았는데, 주인공은 왕의 매제로서 케른텐 공작이자 티롤 백작으로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 가문의 수장 중 한 사람인 케른텐의 하인리히였다.
케른텐의 하인리히는 프로셰미슬 왕조가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전략적으로 손을 잡은 외부 동맹 세력이었다. 원래 하인리히의 누나 엘리자베트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 유지를 위해 알브레히트 1세와 결혼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쟁자였던 바츨라프 2세가 즉각 자신의 딸을 하인리히와 약혼시키며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급사하여 결국 프로셰미슬-마인하르트 결혼 동맹이 무산될 수 있는 상황에서 바츨라프 3세가 마인하르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불화에 휩싸인 타이밍을 틈타 선왕의 옛 약속을 지키겠다며 바츨라프 3세 사망 2년 전인 1304년에 결혼을 성사시켰다.
2년 후 바츨라프 3세는 폴란드 원정을 떠나며 하인리히에게 보헤미아 공작위를 맡겼다. 모라바 변경백으로 삼으려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프라하에 없는 동안 섭정을 맡긴 것이었으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암살이 발생하였으니...
어쨌거나 명목상, 법률상으로는 보헤미아 공작위가 곧 왕의 후계자이기에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왕위 계승권자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바츨라프 2세의 딸이자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이 아내이기에 결혼을 통한 권리도 획득한 상태. 보헤미아 귀족들로선 프로셰미슬 왕조의 피는 1도 섞이지 않은 케른텐 공작이 자신들의 왕이 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대안이 없기에 의회 역시 일단 하인리히를 승인했다.
그런데, 이 혼란을 지켜보던 알브레히트 1세가 갑자기 보헤미아를 집어삼키겠다며 침공했다. 결국 힘으로 하인리히를 쫓아낸 뒤 장남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를 바츨라프 2세의 미망인을 결혼시키는 꼼수로 장남을 보헤미아 왕위에 올렸다. 누가 봐도 무리수에 억지였던데다가 프로셰미슬 왕조의 경쟁자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했다는 점이 보헤미이아인의 심기를 건드려 하인리히 때보다도 더한 혼란과 반발이 발생했으나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된 1307년 루돌프 3세가 급사했다. 추정 사인은 위궤양 혹은 크론병. 이 짧고도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루돌프가 얻은 것은 죽 왕(král kaše)이라는 별명 뿐(...). 검소한 성격이라 사치스러운 음식을 멀리하고 죽을 즐겨 먹었다곤 하는데, 사인에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냥 위가 원체 안 좋아서 죽만 먹을 수 있는 신세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쫗겨났던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보헤미아로 귀환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여기서 보헤미아를 포기할 알브레히트 1세가 아니었지만 맏아들이 죽은 몇 달 뒤 1308년 봄, 어처구니없게도 바츨라프 3세와 마찬가지로 본인 또한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하며 모든 야망이 공중 분해. 그렇게 하인리히와 마인하르트 가문이 보헤미아의 주인이 되나 싶었으나...
1310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너희가 보헤미아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면, 우리도 보헤미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며 보헤미아 왕위에 개입했다.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예정자이자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맏아들 요한을 바츨라프 2세의 딸이자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며 왕위를 주장하고 나섰다. 훗날 룩셈부르크 가문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기에 기록은 엘리슈카가 하인리히 7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고 되어있지만, 정말로 그랬을지는 미지수. 그냥 룩셈부르크 가문도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를 집어삼키기 위해 결혼이라는 꼼수를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여계를 통한 계승 순위만 놓고 봤을 때 언니와 결혼한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동생과 결혼한 룩셈부르크 가믄보다 명분상 더 우위에 있었다.
결국 또 보헤미아 계승 전쟁이 일어났고, 힘에서 밀린 케른텐의 하인리히는 또 쫓겨나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의 주인이 되었다. 또 반란이 일어나서 또 힘으로 제압하는 과정이 되풀이 된 과정은 덤. 어쨌거나 루돌프 3세에 비해 새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된 얀 루쳄부르스키로 즉위한 요한은 장수했고 보헤미아 왕위를 굳히는 데는 성공하였다. 참고로 쫓겨난 케른텐의 하인리히는 같은 처지가 된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을 만한 힘이 없었고 심지어 아들마저 얻지 못해 직계 후손조차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보헤미아 왕관령
이후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는데 있어 최중요 근거지로 작동하였고, 룩셈부르크 가문과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나날이 올라갔다. 보헤미아를 자기 세력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던 얀 루쳄부르스키와 카를 4세에 걸쳐 룩셈부르크 가문 국왕들은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특히 <금인 칙서>로 유명한 황제 카를 4세는 보헤미아를 자신의 근거지로 여겼고 보헤미아의 중심 도시인 프라하에 거주했다.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에 보헤미아 국왕을 선제후로 확정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보헤미아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카를 4세의 통치기인 14세기 중후반 보헤미아는 금융, 무역,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프라하 대학교도 이때 세워졌다. 보헤미아 왕국은 30년 전쟁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에 최고의 국력을 가진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가문은 결국 이방인이었다. 잉여인간 바츨라프 4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탓에 예상치 못하게 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가 후계자로 지명되며 문제가 터지나오기 시작했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상속 가능성이 없어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1세의 딸 마리어와 결혼해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았기에 보헤미아를 물려받는 것은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지기스문트가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미래 지분을 앞세우며 보헤미아 내부 문제, 즉 후스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보헤미아인의 불만이 표출되어 조직화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기스문트가 바츨라프 4세 사후 정식으로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물려받자 대립이 급가속되어 최악, 최대치에 이르러 터져나온 것이 바로 후스 전쟁. 최종적으로 겉으로 보이기에는 평화 협정이라는 게 맺어지긴 하였으나, 실상은 누가 봐도 지기스문트의 굴욕적인 패배였다. 그리고 승패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보헤미아인들이 단합하여 그릇된 신앙을 믿는 이방인 왕에게 대립하는 형세가 성립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어쨌든 지기스문트마저 후스 전쟁 패배 이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 왕국은 두 가지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보헤미아 왕위가 다시 불안정해졌다는 것. 그리고 둘째,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지만 보헤미아인은 독일인과는 다른 이방인으로서 특수한 정체성이 있고 이로인해 보헤미아 귀족들에게는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로 형성된 보헤미아만의 특수한 정체성은 이후로도 시대를 거치면서도 계속되어 바로 오늘날 체코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후스파-가톨릭 내전
지기스문트를 마지막으로 룩셈부르크 왕조가 단절되면서 왕조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과의 동군연합 관계도 수시로 변했다. 일단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3국에서 모두 지기스문트의 유언에 따라 사위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현지 귀족들에게 넘어갔고, 곧 명목상 섭정이지만 실제로는 왕위나 다름없던 자리를 놓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귀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알브레히트가 죽자, 헝가리는 알브레히트의 아들 라디슬라프를 불신임하고 폴란드 왕국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선출한 반면 보헤미아는 아예 왕을 선출하지 않아 동군연합은 해소되고 왕위는 비어 있었다. 1453년에야 당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어 있던 라디슬라프를 추대해 동군연합이 재결성됐으나 국왕의 실권은 없었다. 그도 후사 없이 사망하자 라디슬라프의 섭정으로, 앞선 1419년 지기스문트 통치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신앙을 인정받았던 후스파의 우두머리 귀족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르지는 보헤미아 국왕, 폴란드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과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이 모두 참여하는 대연방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그의 치세는 후스파와 가톨릭의 갈등으로 채워졌다. 교황이 보헤미아에 간섭하여 후스파의 개종을 요구하자 자신이 후스파였던 이르지 왕은 거부했고 끝내 파문당했다.
이르지를 파문한 교황은 보헤미아 내의 가톨릭파 귀족들과 헝가리-크로아티아를 끌여들여 보헤미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르지는 군사적으로 헝가리군에 맞서는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제치고 라디슬라프의 누나 엘리자베트와 결혼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맏아들인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계승자로 선언하였는데, 이후 이르지 왕이 갑자기 죽어버리면서 장성한 이르지의 아들들 대신 15세의 외국 출신의 어린 왕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전쟁 중이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까지 등에 업은 폴란드 왕국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므로 왕으로 모시기는 하였으나, 경험없는 소년 왕은 귀족들 사이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여기에 블라디슬라프는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므로 후스파 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1478년,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헝가리-크로아티아를 침공한 것을 틈타 보헤미아가 헝가리-크로아티아와 종전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블라디슬라프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귀족들은 후스파에 의해 추대된 왕을 좋지 않게 여겼으며, 후스파는 왕이 가톨릭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에 반발했다. 폴란드 출신이었던 블라디슬라프는 보헤미아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가톨릭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왕권을 약화시켰고, 귀족들은 무력해진 왕을 무시하고 원래 보헤미아에는 없었던 농노제를 도입하는 등 자신들의 힘을 늘려나갔다. 어쨌든 새 왕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와 전쟁을 끝내고 후스파 우세지역인 보헤미아 왕국에선 블라디슬라프가, 가톨릭 우세지역인 모라바·슬레스코·루지체에선 마차시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1490년,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선출되면서 모라바·슬레스코·루지체와 보헤미아 왕국은 다시 통합되었고,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동군연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함께 리투아니아계 왕가인 야기에우워 왕조가 다스리는 지역이 되어서 엄청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에게는 이 영토에 대한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귀족들이 블라디슬라프를 선출한 이유도 멍청하고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야기에우워 왕조는 1526년, 블라디슬라프의 아들 루드비크가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2대 만에 단절되었고, 보헤미아 의회는 루드비크의 매부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수십 년 만에 보헤미아의 왕위를 다시 얻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후로도 계속하여 보헤미아를 다스렸다. 처음으로 보헤미아 왕위 획득을 꾀했다가 실패한 것이 어언 220년 전인 알브레히트 1세 때의 일. 그 오랜 세월 끝에 최종 승자는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 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중심이 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보헤미아는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조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받아들인 것은 오스만 제국의 계속되는 위협과 인접한 동군연합 국가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처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26년, 루드비크 왕이 전사하자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고,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혈연에 근거한 선출 국왕이었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무력을 통한 정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고 상속받은 각국 귀족들의 고유 권한과 자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핵심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상하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후백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트 자유도시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중 가장 큰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인구가 적지는 않았지만 합스부르크 왕조는 무리하게 오스트리아를 왕국으로 격상시키거나 선제후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수도인 빈 역시 인구가 적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정치적 위상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종교 개혁 초창기에는 슈타이어마르크나 크라인, 티롤 같은 지방에는 루터파의 영향력이 강해 합스부르크 왕조의 고민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보헤미아는 충분한 인구와 영향력을 갖추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에서 징수되는 세입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게다가 보헤미아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였다. 실제로 금인칙서 공인 이후 보헤미아 국왕은 황제선거에서 몇 차례 밖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주들이 황제선거에서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보헤미아 왕위가 크게 작용했다. 그런 만큼 보헤미아는 정치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중요한 땅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초창기 보헤미아 왕국은 충분한 자치권을 누렸다. 선출제인 왕위와 선제후 지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헝가리 왕국을 온전하게 얻기 위해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원을 얻을 필요가 있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상황을 이용하여 역으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이후 귀족들을 억압하고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보헤미아 왕위에 선출될 때 페르디난트 1세는 선거군주제 협약을 준수하고 보헤미아 귀족들과 체코 문화를 존중하며, 거주지를 프라하로 옮기겠다고 맹세했지만 이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1540년대에 들어 반(反) 합스부르크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제압하였고, 1556년에는 예수회를 초빙하여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더불어 보헤미아 왕국에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자유도시를 대상으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특권을 서서히 억압했고, 생전에 맏아들 막시밀리안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할 것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개인적으로 루터파에 호감을 보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헤미아 신앙고백을 승인하여 보헤미아 귀족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주어 종교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했으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보수적인 가톨릭 교육을 받았던 루돌프 2세는 빈 대신 프라하로 궁정을 다시 옮기고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하면서 보헤미아 왕국 문화 발전에 공헌한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매우 무능력하여 칙령으로 개신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했다가 위기에 몰리니 뒤늦게 개신교 출신 보헤미아 귀족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반면 형 루돌프 2세를 밀어내고 추대된 동생 마티아스는 강경책보다는 유화적으로 귀족들을 회유하려 했다.
예수회 교육을 받은 골수 가톨릭 페르디난트 2세의 선출에 개신교 신자가 다수였던 보헤미아 귀족들이 반발하여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하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하면서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페르디난트 2세는 복위했으며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를 거치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보헤미아 지배는 공고해졌다. 보헤미아는 스웨덴군을 포함한 각종 외국군에게 유린당하며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페르디난트 3세가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여 30년 전쟁을 끝낸 1648년 무렵 보헤미아 왕국의 인구는 전쟁 전의 1/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체코 역사 관점에서는 30년 전쟁 종결부터 독일인 이주와 독일화, 경제 침체, 개신교 체코인 귀족들의 추방 등을 들어 합스부르크 시대를 암흑시대 취급한다. 체코어 위키백과를 보면 합스부르크 국왕들에 대한 평가는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 레오폴트 2세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후진성과 민족 억압의 상징으로 치부한다.
1740년, 카를 6세가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남기고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1741년, 일부 보헤미아 귀족들의 주도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립왕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1743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고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다시 보헤미아를 통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 왕국군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보헤미아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자신을 배신한 보헤미아 귀족들을 고깝게 보았고, 이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헝가리와 비교하여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보헤미아 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역사
180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언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보헤미아 민족 문화 연구와 부흥운동의 바람이 불었고, 이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퍼지면서 보헤미아에서도 서서히 민족 세력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보헤미아의 민족 세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848년 혁명(3월 혁명) 당시 슬라브-체코인 민족 세력의 혁명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19세기부터 체코인 민족 정체성은 서서히 성장했지만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본격적인 분리 운동에 이르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부분의 분리 시도는 일부 지식인이나 상공 시민층의 운동에 가까웠다. 수백 년에 달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긴 지배 기간을 거치는 동안 체코인의 사상도 오스트리아(독일계)에 가까워졌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 분산 정책에 힘입어 많은 독일인이 보헤미아에 이주하기도 했다.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다른 국가인 헝가리와 비교하면 본격적인 분리 주장은 적은 편이었으나 다문화 제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체코인 차별은 암암리에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체코인과 독일인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중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일단 보헤미아 전반적으로 다른 유럽 열강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던 이중 제국의 영토 중에 그나마 가장 도시화와 산업화가 잘 된 지역이었고, 소득과 삶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덕분에 제국 내의 체코인의 입지는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다르게 확연히 대접받는 것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축구 국가대표팀 창설인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이 3개국이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엄연한 주권 국가인 만큼 그럴 수 있다 쳐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에 귀속된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권 국가가 아님에도 유일하게 참가했다는 것이 이들의 입지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코인의 위상은 스스로 노력해서 끌어올린 것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전후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비교하여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만 하더라도 헝가리인이나 크로아티아인의 주권은 존중한 반면 체코인의 자치 요구는 끝까지 묵살했다. 보헤미아 민족 운동을 주도한 상공 시민층이나 지식인 계층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벗어나면 러시아의 타겟이 되어 위험하다는 점을 이미 전부터 알고 있어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등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 아래서 자치를 추구한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를 내세우며 최대한 자치권을 요구하였지만 체코인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오스트리아 관할 내의 슬로베니아인, 폴란드인이나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타 슬라브 민족의 자치 요구가 거세질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 입장에서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무턱대고 들어주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주데텐란트와 프라하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보헤미아 내의 독일계는 체코인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면 반대급부로 그만큼 자신들의 이권이 사라질 것이라 여겨 체코인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으며, 시스라이타니아에서 체코인이 자치를 획득하면 헝가리 내 슬라브인의 자치권 요구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 예측한 헝가리는 대놓고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차별 조치에도 불구 현지 체코인들의 노력으로 보헤미아 왕국은 이미 1850년대 문맹이 실질적으로 완전 퇴치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 은행 예금 중 1/3이 체코인들이 저축한 예금이었을 정도였다. 1880년대 기준으로는 체코인들이 보헤미아 왕국 공직의 80% 가까이를 차지했으며 중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프라하 대학교의 통제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이르렀고, 이는 독일 민족주의 측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체코의 분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만 해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제국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군주를 모시는 연방 내 자치 국가를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분리를 요구하는 수준의 강성 민족 세력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할 분위기가 되어서야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중반으로 들어설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어떠한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판단하였고, 이대로 가면 체코인도 패전국의 전범 신세 취급 당할 것을 우려하여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분리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독립 이후의 보헤미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전이 임박하자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를 필두로 체코인은 슬로바키아인과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언하였고, 카를 1세는 퇴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