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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Belle Époque, 팍스 브리타니카, 19세기 말, 1차 세계대전 전, 1914년, 백년평화, 빈 체제,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Jobs 9 2024. 8. 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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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Belle Époque)

 

유럽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태평성대를 뜻한다.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인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아울러 '백년 평화(Century of peace)'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시작과 끝


정확한 연도를 따지자면 벨 에포크의 끝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벨 에포크의 시작을 정확히 몇 년도로 잡는지는 역사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르준은 1896년으로 잡고 또다른 역사학자 도미니크 칼리파는 1900년으로 잡으며(출처), 크리스티 경매의 공식 웹사이트의 벨 에포크 시기 미술품 소개 페이지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의 붕괴(1870년)를 시작으로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1815~1914)가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의 평화롭던 시기라는 것은 비슷하나, 팍스 브리타니카는 정치외교적 의미가 강한 시대 구분인데 비해 벨 에포크는 단순히 평화 뿐만 아니라 경제와 과학기술, 문화적 양식이나 스타일까지 포함한 의미의 시대구분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두 시기 모두 역사상 전쟁이 별로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벨 에포크와 팍스 브리타니카 두 용어를 혼용하는 편이며, 따라서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를 '백년 평화'라고 역사학계에서는 지칭한다. 

 


평화로운 국제관계


백년평화라고 지칭된 이 시기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존속한 시기(1804 ~1918), 독일 제국이 존속한 시기(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의 평화가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메테르니히는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유럽에 다시는 나폴레옹과 같이 유럽의 균형을 뒤엎는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서 유럽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평화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그와 프랑스의 탈레랑 등 당대 명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형성된 체제는 빈 체제라고 불리워지며 향후 백년평화의 토대가 된다. 그렇기에 1800년대 초중반은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이 평화롭던 체제의 균형이 한번 휘청이는데, 각국에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해서 전근대적인 귀족 세력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빈 체제에 여러 불만을 제기했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국력이 빈 체제 형성 시기보다 강해지면서 균형의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 프로이센은 자신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러시아는 오스만과 영국을 상대로 갈등을 키워나갔다. 이런 갈등은 결국 보오전쟁, 보불전쟁, 크림전쟁 등으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런 갈등이 대전쟁으로 확전되지 않게 빠르게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균형을 되찾은 것에는 비스마르크의 기여분이 컸다.

비스마르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외교적 수단을 더 선호하고 외교적 수단을 다 써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쓰는 최종 수단으로만 전쟁을 했다. 독일 제국 성립 후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에 대해서 회의적인 편이었던 데다가 아직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에 싸우기에는 독일의 힘이 부족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최소한 대립관계는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특히 그는 전쟁을 외교의 연장선으로만 여겼기에 전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이해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전했음에도 패배한 국가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의 평화조약을 제시해 빠르게 종전하고, 그들이 독일에게 쉽사리 보복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도록 영국,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어 대국적인 판세를 독일에게 유리하게 조성해놨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크림전쟁에서도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조율해 종전을 빠르게 끌어내는 협상자 역할을 잘 수행했다. 게다가 독일 국내에서 성장한 시민계급들이 주장하는 복지 정책, 의회 개편 등의 의견도 잘 수용해서 체제 내부 갈등도 무마했다. 그렇기 때문에 1800년대의 후반기는 비스마르크 체제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걸출했던 두 사람을 포함한 당대 집정자들과 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이전까지 약 10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도 전쟁은 있었지만 대부분 발칸 반도 등 동남유럽이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났고 주요 열강(영, 프, 독, 오, 러) 사이의 전면적 전쟁은 거의 없었다. 있었다 해도 크림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정도였으며, 다 합쳐도 44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와 여러 사상의 발전


이 시기에 시민혁명이나 참정권 확대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과 2월 혁명,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이 있다.

또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꽃핀 시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 1830년에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분열된 상태를 끝내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독일에서는 1834년에 프로이센 주도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었으며, 1848년에 독일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의회가 열렸고, 1867년에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전개된다. 결국 1870년에 이탈리아의 통일이,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반면,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1867년에 헝가리와 대타협을 하여 이중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게 된다.

사회주의가 대두된 것도 이 시기이다. 당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잉여 자본으로 인한 엄청난 빈부격차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되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상을 총집대성하여 자본론을 집필하고, 공산당 선언을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각국은 사회주의 사상가와 단체에 대해 엄청난 탄압을 가했으며,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사회주의 탄압 정책이 한계에 달하자 러시아 혁명, 스파르타쿠스 봉기 등의 형태로 사회주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으며,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이 조용히 힘을 키워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산업과 기술 발전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혁신적인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진보적 사상에 많은 이들이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책없는 낙관주의라고 탓하기도 뭐한게, 수세식 화장실부터 전화, 무선통신, 철도, 엘리베이터, 자가용, 여객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의 초기형태가 이 시대에 만들어져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관광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보고 자란 노인들이 자기 손자가 주말에 기차타고 바캉스를 가는 걸 보고 있으면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두운 이면


식민지 착취
아동 노동

인간 동물원

 


식민지 착취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적 절차를 형성한 시민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선도하는 지역이 되었으나 이는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경쟁을 펼쳤고, 백인의 짐과 같은 식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식민지들은 서구 열강에게 자원을 강탈당하고 대신 종주국의 상품을 떠맡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술과 아편의 제조 및 판매를 독점했듯이 돈이 되는 상품들은 서구 열강이 독점하는 사례 역시 있었다.

식민지의 문화와 관습, 사상은 야만으로 묘사되었고 식민지인들은 외양이나 협력 여부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졌다. 당연히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이 되는 이들은 서구 열강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들이었다. 영국 인도청이 인도 내 민족들의 사진집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영국인들은 이 책에서 세포이 항쟁에 가담했던 민족들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야만인이라 묘사한 반면 동인도회사에 호의적이고 세포이 항쟁에 가담하지 않은 민족들은 그나마 문명화된 민족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시각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사회진화론이 보편적인 기저 사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들이 독립할 수 있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기존 식민제국들의 힘이 어느 정도 빠지고, 완벽한 열강인 미국과 소련이 모두 식민 경제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동의한 뒤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절 상전이었던 유럽 국가들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과 유럽의 인종차별 문제 역시 이 시기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벨 에포크 시대에 식민지와 유럽에 드리운 어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


비단 식민지 지역뿐 아니라 열강 역시 자국 내에서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렸다. 하층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십수시간에 달하는 노동과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했음에도 주어지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러시아 등지에서 반정부 혁명과 뒤이은 러시아 제국 정부 전복 등으로 나타난다. 

토마 피케티는 178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의 상속문서와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부의 불평등정도를 조사했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이란 대사건이 있었음에도 프랑스의 부의 불평등도는 줄기는 커녕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늘어만 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이 불평등은 벨 에포크 시대(1880~1914년) 때가 정점이었다고 하며 1900년대 기준으로 프랑스 상위 1%의 전체 부의 점유율은 55%에 근접했고 파리의 경우는 1%의 점유율이 1910년 기준 68%에 근접했었다. 1789~1914년까지 상위 10%에게 평균적으로 국부의 80~90%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지 제도, 고용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독일, 영국 등 몇몇 국가에서 서서히 시작되긴 했지만 제대로 갖춰져 있지는 않았던 시대라 유럽 내에서도 노동자들에겐 매우 힘들었던 시기이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공산당 선언을 쓴 카를 마르크스 또한 이 당시 사람이다. 차티스트 운동 등의 치열한 투쟁 끝에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은 인정받게 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정치적 참여에서 배제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1차대전이 끝나서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이마저도 전쟁 이후 풀려나온 자본에 의한 잠시의 호황기 때문이 아니라, 1차 대전으로 공장에 남자들이 비어버리자 그 자리를 급하게 대체한 여성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그래도 그나마 벨 에포크 이전 시기보다는 대우가 좋아지고 사회적 인식이 향상된 시기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이전 시대와 견줘 나아졌을 뿐 여전히 절대적인 삶의 질 개선은 미미하고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남성 노동자 못지 않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여성들의 임금은 낮았고 그들의 노동 역시 하찮게 취급되었다. 아동 노동자 역시 이전보다는 법령상 보호규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높은 강도의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했다. 3D산업 노동자들은 온갖 산업재해로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사망하더라도 제대로 보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였기에 파업 등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무섭게 벌어지고, 그 결과로써 공산주의 담론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

사회에 반대한 가시적인 사회운동들도 벌어졌으나, 대부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당했고 주동자들은 처형당했다.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19세기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열악한 환경은 매한가지였다.

이 당시에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에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의 이민이 성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며 이들 후예는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인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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