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미쳤다."
-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프랑스군 간에 1916년 2월 21일부터 동년 12월까지 벌어진 전투. |
베르됭 전투(프랑스어: Bataille de Verdun 영어: Battle of Verdun)는 1916년 2월 21일에서 동년 12월 18일까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육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가장 거대한 전투 중 하나였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프랑스 북동부에 소재한 베르됭쉬르뫼즈(Verdun-sur-Meuse) 고지의 북쪽이었다. 독일군 제5군은 프랑스군 베르됭 요새군단(RFV)을 공격하는 한편, 베르됭을 내려볼 수 있는 포격전상 요충지 뫼즈 고지(Côtes de Meuse)를 접수하기 위해 뫼즈 강 우안의 프랑스 제5군 주둔군을 공격했다. 독일의 전략은 고지를 선점한 뒤 프랑스군이 고지 위의 독일군을 공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출혈을 유도하고자 함이었다. 전투 초반에는 독일군이 우세를 점하였으나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베르됭 북쪽에서 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1918년 연말이 될 때까지 베르됭에서 잃어버린 구역 대부분을 수복했다.
독일의 전략은 프랑스가 뫼즈 강 동안 고지를 탈환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상정하고, 프랑스가 고지를 탈환하려 시도하면 포병의 포격을 통해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미치는 한편 유리한 고지를 접수한 독일 보병의 피해는 프랑스군보다 적으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은 1915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샹파뉴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샹파뉴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공세를 물리치면서 프랑스군에게 독일군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힌 바 있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독일의 베르됭 공세는 2월 21일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고, 그 사이 프랑스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증원까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3월 6일까지 프랑스군 20.5개 사단이 베르됭에 배치되었으며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매우 광범위한 수비가 준비되었다. 프랑스의 페탱 장군은 후퇴는 없다는 명령을 내리고 독일 포병에게 프랑스 보병이 노출되는 한이 있어도 반격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3월 29일이 되자 뫼즈 강 서안의 프랑스 포병이 동안의 독일군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고, 독일 보병은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강 너머를 통해 독일군 보병의 측면을 포격하는 프랑스 포병을 잡기 위해 독일군은 뫼즈 서안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독일군은 상당한 전진을 이루어냈지만 프랑스군의 증원으로 인해 본래의 목표는 이루어내지 못했다. 5월 초가 되자 독일군은 전술을 바꾸어 국지적인 공격 및 반격을 시도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두오몽 요새에 대한 공격 기회를 얻었다. 요새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반격하여 요새를 재탈환할 때까지 무수한 포로를 붙잡아 갔다. 독일군은 재차 전술을 바꾸어서 이번에는 뫼즈 양안을 번갈아 공격, 6월에 보 요새를 함락시켰다. 독일군은 보 요새 너머로 공세를 지속하여 본래 계획의 마지막 지리적 목표 플뢰리와 소빌 요새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혀 플뢰리를 함락시키고 베르됭 성채 밖 4 킬로미터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솜 전투에 포병지원 및 보병 증원을 돌리느라 베르됭의 독일 공세는 주춤했고, 그 틈을 타 프랑스군은 7월 1일부로 공세를 개시했다. 6월 23일에서 8월 17일 사이에 플뢰리 점령군은 열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7월 초 독일군은 소빌 요새를 함락시키려 시도했으나 프랑스군의 포격 및 소화기 세례의 반격을 받았다. 또다시 솜 방면을 증원하기 위해 베르됭의 독일군 공세는 한층 더 지연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군이 솜 방면에 증원을 하지 못하도록 베르됭에서 실제보다 많은 공격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만전술을 펼쳤다. 프랑스군은 8월에서 12월 사이에 역공을 펼쳐 그동안 잃었던 뫼즈 강 동안 대부분을 탈환하고 두오몽 요새와 보 요새를 되찾았다. 베르됭에서 총 714,231 명의 전몰자가 발생(2000년 추정치)했고, 이 중 프랑스군이 377,231 명, 독일군이 337,000 명이었다.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한 달에 평균 70,000 여명이 죽어나간 셈이다. 보다 최근의 추정치에서는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베르됭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1,250,000 명에 이르고 이 중 사망자는 976,000 여명이라고 추산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는 총 303일간 계속되었으며,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베르됭 전투 전체의 양측 손실 비율은 5:4였지만,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 기간 동안의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비는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이는 이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던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으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베르됭 전투 이후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 1917년 내내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12]
이 작전의 실패로 팔켄하인 장군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고, 베르됭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끈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페탱은 후일 2차대전 초 나치에게 항복하고 수립된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베르됭에서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으며, 전후에는 반역죄로 여생을 연금상태로 마쳤다.[13]
페탱을 변호하는 쪽에선 이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페탱으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또 다시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챙 초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냐는 의문이 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페탱이 내린 조치도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 병사들 개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본래 연합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고,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제정 러시아 최후의 공세 작전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당시 패탱과 함께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니벨은 조프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17년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 최악의 참패를 만들어내고 만다.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도 위관급 장교로서 해군 육상 포병 부대의 일원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 육군 보병 대위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독일군에서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수의 지위에 오르는 자들이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포병 소령도 참전했다.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던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 그리고 아직 일부지역은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한다. 이유는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및 지뢰.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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