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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전투, 프랑스, 뫼즈 강, 페탱

Jobs9 2024. 8. 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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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장소
교전국
지휘관
 총사령관 빌헬름 2세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5군 사령관 빌헬름 황태자
 5군 참모장 콘스탄틴 폰 크노벨스도르프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
 2군 사령관 필리프 페탱(~ 5.1)
 2군 사령관 로베르 니벨(5.1 ~)
병력
1,250,000명
1,140,000명
피해
사상자 : 336,000명 ~ 434,000명
사망자 : 143,000명
사상자 : 37만 9,000명
사망자 : 150,000명 ~ 162,000명
결과
프랑스군의 승리

 

"인류는 미쳤다.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들을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인류는 미쳤다!"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

 

베르됭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프랑스군 간에 1916년 2월 21일부터 동년 12월까지 벌어진 전투.

앞선 마른 전투, 이후 솜 전투와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유명한 대전투 가운데 하나다. 특히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나타내며 공격자인 독일, 방어자인 프랑스 양측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살육을 강요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제1차 마른 전투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간 후, 육군 상급대장 몰트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은 전선 재정비를 위해 공세를 지양하고 수세적으로 임하였다. 이를 통해 1914년 겨울 ~ 1915년 동안 전선 전반에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물자부족에 시달리자 팔켄하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실상 요새가 된 전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봤다. 이때 제시된 작전이 일명 사형터 작전으로 전선의 한곳에 적군을 끌어들여서 적을 소모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전선을 붕괴시킨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쪽이 공격하면 저쪽도 물량 공세로 밀어붙일 것이 뻔하니, 그걸 이용해 병력을 전부 고갈시켜서 파리까지 진격하고 덤으로, 영국이 철수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기존의 전투는 몇 번의 야전에서 승리한 쪽이 적의 거점을 공격하는 형태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유럽의 생산력과 동원력, 그리고 참호와 기관총의 결합은 이 양상을 바꾸었다. 수십만을 죽여도 그만큼 충원되고, 기껏 이겨봤자 1km 뒤에 새 참호가, 1km 뒤에 또 새로운 참호가 이어지는 참호전. 독일은 이 참호전을 겪으며 전략을 수정해 이제는 거점 점령도 야전 승리도 아닌, 그저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이미 프랑스 영내로 어느정도 들어온 독일군이었기에 그저 적국 영토를 한 뼘 더 얻어내려고 자국군의 피해만 무차별적으로 늘리는 무의미한 공세는 중단하고 만일 프랑스군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만 점령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면 프랑스가 영토 수복을 위해 그곳에 대규모 공세를 들이박아 주리라 기대했으며 독일군은 이를 격퇴하기만 하면 되었다. 독일군의 이 전략은 최소한의 피해로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강요하는 일종의 전진 벙커링이라 할 수 있었다. 

소모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전략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효과적인 교환비로 깎아먹어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많이 죽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말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규모는 전쟁에서 질적인 우위를 무력화하는 데 유용하며, 이는 란체스터 법칙으로 증명된다.

이 작전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었을 경우에 적과 아군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되었으며,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프랑스군에게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강요할 장소로 요새 지대인 베르됭을 선택, 공세를 펼치게 된다.

당시 프랑스 육군 대위로 참전했던 샤를 드골의 말을 빌리면 20세기의 30년 전쟁. 기간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잔인했다는 이야기다.

 


1915년 말 ~ 1916년 초의 전략적 상황


1915년 전역에서 협상국은 서부전선 공세, 동부전선 수세의 전략을 유지했는데 그 전력과 별개로 전황은 영 시원찮았다.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모조리 말아먹고 말았다. 1915년 전역에서 필리프 페탱이 대장으로 진급한 이유가 이 대차게 실패한 공세에서 유일하게 진격에 성공했다는 건데, 그 진격 거리가 3 ~ 4km다. 즉, 협상국은 1915년 서부전선에서 1년 내내 어떠한 전략적, 전술적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동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이 대규모 공세에 나서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거의 쓸어버리고 전선을 동쪽으로 크게 밀어냈으며 러시아군의 피해는 가공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지중해 방면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전역이 전황이 동맹국 측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몬테네그로 왕국은 항복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전 국토를 점령당한 채 망명정부와 함께 잔존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 왕국으로 후퇴했다. 영, 불 연합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여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군과 대치에 나섰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협상국의 회심의 수였던 갈리폴리 전투는 대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중동 전선 역시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는 바그다드 하나 점령 못하고 지지부진했고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서는 수에즈 운하를 향한 오스만군의 공세를 막는데에 급급했다. 

이 시점에서 협상군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요소는 1915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으로 참전했다는 것 하나였다. 캅카스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전체적인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때문에 1915년말 연합국 간 회의를 통해 1916년에도 프랑스와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고, 러시아는 방어에 전념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맹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다. 독일군 역시 지지부진한 서부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고 엄연히 열강인 이탈리아가 중립을 깨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오히려 부담해야 할 전선이 하나 더 늘었다.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러시아의 평원은 너무나 넓었고,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하는 것은 공상 속의 일이었다.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인게, 차량화된 25년 후의 독일군이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하고 포위하긴 했는데, 서부전선이 사실상 종료된 상황에서 그조차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의 허리가 부실해진 소련군을 상대로였다. 서부전선이 유지중인 상황에서, 보병 중심의 군대로 동프로이센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한다는 건 엄청난 무리였다.

단순히 지도에서 거리를 재도 동부전선의 경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의 직선거리가 800km가 넘는데, 서부전선의 경우 이미 최전선에서 파리까지 직선거리 200km 이내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즉, 동맹군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허황된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서부전선에서 파리를 점령함으로써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까지나 그나마 합리적인 거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훨씬 짧은 대신 서부전선의 병력밀도는 동부전선을 훨씬 상회했다. 프랑스는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식민지군까지 동원하여 있는 족족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대륙원정군도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었다. 거리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병력밀도만 놓고 생각하자면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자는 말이 더 합리적이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는 서부전선을 뚫긴 뚫어어야겠는데 마땅한 묘수가 안나오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이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에 주목하게 된다. 베르됭이었다. 베르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로 두오몽과 보 요새 등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진 방어물로 감싸진 지역으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할 때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그렇기에 독일이 공격할 경우 당연히 프랑스군이 저항할 장소였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공세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독일군의 베르됭 공략 시도를 포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독일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 중포를 베르됭 공격 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코앞까지 옮기는 동안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프랑스군 전열을 가다듬고 1916년의 새로운 공세 준비에 몰두했으며 베르됭 일대는 주전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말았다. 더구나 주전장이 아니었기에 베르됭 지역의 병력과 장비들이 하나둘 차출되어 전투가 개시될 무렵 이 일대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크게 허술해진 상황이었다. 사실 독일군의 보안이 철저하긴 했어도 워낙 대규모 군세가 동원되는지라 몇몇 징후가 사전에 노출되어 대비할 기회가 있긴 했는데 조프르와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일종의 역정보공작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현장지휘관인 정치인 출신 에밀 드리앙 예비역 대령이 방어준비가 허술하다, 독일군의 공세시 막아낼 수 없다, 무언가 심상찮은 징후가 보인다고 몇 달 전부터 보고했지만 조프르는 이를 무시했다. 사실 드리앙 대령은 본래 군 출신으로 군무에 문외한이 아니었으며, 무려 프랑스가 사력을 다해 싸웠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전용사였던 데다가 전역한 뒤 정계에 진입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개전 후 현역소집되어 부대를 지휘 중이었는데, 보고가 씹히자 열받아서 정식 보고계통이 아닌, 자신의 정치권 인맥을 활용해 동료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조프르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로 조프르는 "정식 지휘계통 외의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군에 엄명을 내렸고, 드리앙이 원했던 베르됭 방어력 강화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조프르는 솜 공세 등을 위해 베르됭 일대의 요새지대에서 중포 일부를 철거해 재배치하고 있었다.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독일은 최종적으로 해당 지역을 선택하였고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작전을 승인한다. 단숨에 베르됭 일대를 휩쓸기 위해 독일은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 14만명, 1,200여문의 야포, 그리고 본토에 배치한 예비대까지 투입하였다. 1916년 2월 21일 최정예 사단들을 투입해 공세에 나섰다. 그런데 포격만 했지 본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실질적인 작전지휘관인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포탄만으로 일대 프랑스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판단을 작전 총사령관 빌헬름 황태자에게 했고 황태자는 그저 칭찬만 했다. 포격 이후 뫼즈 강 줄기를 따라 부아 도몽만을 점령한게 유일한 성과였다. 만일 이때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면 이후의 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포격 종료 후 독일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돌입했지만 남은 프랑스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드리앙 대령이 자신이 지휘하던 2개 대대를 이용해 필사의 지연전을 펼쳤고, 독일군도 철저하게 선 화력제압 후 진격 방식을 선택하여 신중히 진격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귀한 시간을 벌을 수 있었다. 덕분에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이미 독일군이 뫼즈 강과 베르됭 요새까지 도달했어야 할 정도의 전력비였음에도 실제 독일군은 간신히 1차 목표선에 도달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드리앙 대령이 지휘하던 2개 대대는 거의 전멸했고 드리앙 대령 본인도 2월 22일, 후퇴전을 지휘하며 아군을 엄호하다가 전사한다.  

결국 24일 방어선이 무너진데 이어 25일에는 최후의 전방 보루인 두오몽 요새(Fort Douaumont)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이 때 전술이 우선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붓는 압도적인 포격으로 요새를 마비시키고, 그 뒤를 이어서 보병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대략 1km 단위로 포격과 진격을 반복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육군 사상자가 10만 가까이 나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카리가 철군 명령을 요청하자 뚝심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조제프 조프르 장군은 카리를 날려버리고 필리프 페탱 장군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방어전에 나서게 했다. 전선에 도착한 페탱 장군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독일군을 격퇴시키기 위해선 독일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안겨서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최단기간에 20만 병력과 그에 필요한 군수 물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페텡은 이를 위해 베르됭 남부 60km 지점에 위치한 바르르뒤크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해 군수물자와 병력을 보충하였다. 병력 보강이 끝나자 페탱은 일선에서 지쳐있던 부대는 뒤로 빼고 보강된 병력을 전투에 투입했으며, 그 병력들이 지치면 후방에서 휴식을 취했던 병력들과 교대시키며 전투에 들어갔다. 이렇게 페탱은 독일군에게 무지막지한 피해를 주었으며, 덕분에 프랑스 육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쪽도 치명타를 입지만 어쩔 수 없다던 팔켄하인의 5:2 플랜까지도 깨져서, 마지막 순간에는 5:4까지 근접하게 된다.   

독일군의 공세도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철저한 화력엄호 후 공세라는 독일군의 방침은 폭우가 쏟아지고 라스푸티차 뺨치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의외의 상황에 직면한다. 화력지원을 위해 준비한 포병들은 아군 보병의 전진에 맞추어 역시 앞으로 전진해 재배치되어야 했으나 전장이 온통 진창길이 되어버리면서 무거운 포들을 재배치하는 작업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고 결국 독일군은 제때 포병대를 재배치하지 못해 초기 성공적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후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고 이는 프랑스군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주고 말았다.   

작전의 전개가 지지부진하자 팔켄하인은 작전 지속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작전 총사령관 빌헬름 황태자는 작전 중지를 건의하였다. 그런데 독일군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계속해서 공격을 외쳤고 결국 이것이 관철되어 작전은 계속되었다. 한 술 더 떠서 크노벨스도르프는 가장 전투가 격렬한 지역에 배치된 제3군단장을 공격에 미친 에발트 폰 로호브로 교체하면서 더 강한 공세를 주문하였다.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 또한 잃어버린 영토를 당장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탱의 방식에 불만을 갖게 된다. 결국 조프르는 페탱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키며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그 후임으로 로베르 니벨을 임명한다. 공격적인 니벨은 부임하자마자 바로 무조건적인 공세를 명령했으며, 그 뒤부터는 철조망과 기관총, 포격으로 병력이 증발하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지게 된다. 공세에 공세로 대응하는 그야말로 동반자살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의 전략적, 전술적인 의미가 없어졌다.   

5월 말, 프랑스 제5군 사령관 니벨은 휘하 제5사단을 두오몽으로 진격시켰지만 독일군의 요새는 단 이틀만에 세상에서 제5사단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독일군 또한 프랑스군에게 가로막혀 막대한 피를 뿌린 채 물러났다. 6월 초 독일군이 시체고지와 보 요새를 점령했지만 거기에 멈췄고, 다시 프랑스군의 살육의 장이 열리고 닫히기만 반복하였다. 6월 23일의 독일군 대공세에서 프랑스군은 절망에 빠졌고, 더 이상 남은 예비병력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솜 전투의 영국군 지원을 위해 빼놓았던 예비사단 4개를 황급히 전용했을 정도였다. 이 병력은 솜 공세에서 영국군과 협동작전을 위해 조프르가 절대로 내놓지 않으려고 했던 병력이었지만 베르됭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니 영프 공동작전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독일군도 공세한계점에 도달하고 예비병력이 더 없어서 목표를 눈 앞에 두고 공세를 멈춰야 했다.  

사실 양군의 무의미한 소모전은 진작 중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2월 이래 베르됭에서 독프 양군이 혈전을 치르면서 베르됭은 이제 전략적, 전술적 의미를 넘어서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독일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독일 투입 전력의 두 배를 넘는 40만의 병력 손실을 겪었다는 잘못된 보고를 접하면서 작전이 먹혔다는 오판을 하여 계속해서 병력을 갈아넣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현장 최고지휘관이 공격밖에 모르는 니벨과 크노벨스도르프인 이상 전장은 끊임없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6월에 러시아군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 직전까지 몰리고, 7월에 영국군의 솜 공세가 실시되자 팔켄하인은 베르됭 공세를 전면 중단하고 제5군에게 방어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크노벨스도르프는 이 와중에도 계속 진격만 외쳤고, 결국 작전 총사령관 빌헬름 황태자에 의해 동부전선으로 전보당했다. 팔켄하인 또한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동부전선 총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후임으로 자리에 올랐다. 힌덴부르크는 9월 베르됭을 시찰한 이후 기동방어전략을 채택하여 전선의 안정을 꾀했다.  

독일의 공세가 중지되자 프랑스는 실지회복에 나섰다. 10월 말 니벨은 반격을 지시해 두오몽 요새를 회복하였고 12월 말이 되자 시체고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회복해 전선은 최초 작전개시 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갔고 공식적으로 베르됭 전투는 막을 내렸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 육군 43만 4000명, 프랑스 육군 55만 여명 정도였다. 전사 및 실종자는 이 가운데 각각 10~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오죽 지독했으면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분쇄기라고 불렀다. 

 

전투 이후 영향
베르됭 전투 전체의 양측 손실 비율은 5:4였지만,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 기간 동안의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비는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이는 이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던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으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베르됭 전투 이후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 1917년 내내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베르됭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끈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페탱은 후일 2차대전 초 나치에게 항복하고 수립된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베르됭에서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으며, 전후에는 반역죄로 여생을 연금상태로 마쳤다.

페탱을 변호하는 쪽에선 이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페탱으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또 다시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챙 초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냐는 의문이 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페탱이 내린 조치도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 병사들 개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게다가 친독 부역 시기에 '우리가 진 건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빨갱이들이 사보타주를 해서다!' 라며 '배후로부터의 중상'스러운 명분으로 자국 좌익을 열심히 탄압하기까지 했다. 

베르됭 전투는 전쟁을 대하는 각 국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았다. 각 국의 국민과 정계는 종전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전시 거국내각(Union Sacree)은 종전 여부를 논제로 분열되었고 독일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군부 독재체제가 마련되었다.

 


본래 협상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고,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러시아 제국 최후의 공세 작전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는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이며 이곳을 존 루주(Zone Rouge)라고 부른다. 불발탄과 지뢰가 너무 많고 비소나 납, 수은, 독가스 문제도 심해서 일부 지역은 현재까지도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한다. 폭탄 제거반이 1년에 50여 톤의 불발탄을 수거하고 있지만, 이 정도 속도로는 최대 300년은 더 있어야 모두 수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재 베르됭 인근의 마을 모습. 지도상에도 존재하며 시장도 뽑지만, 실제로는 흔적조차 없는 숲으로 변해버렸다.

 


이 전투의 프랑스군 주역들은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필리프 페탱의 경우 전후 한동안 추앙받았고, 특히 베르됭에서는 베르됭의 영웅, 베르됭의 해방자라 하여 베르됭 전투 수훈자 명단을 적은 명판을 만들어 최상단에 페탱의 이름을 걸었고, 전투를 기념하는 건물 안에는 페탱의 초상화가 제일 크게 걸려져 있었다. 
왜 과거형이냐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페탱의 대독 부역혐의 때문에 죄다 철거되거나 명단에서 삭제당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베르됭 전몰자 묘역에는 본래 페탱이 묻히기로 예정된 장지가 있었으나 지금도 텅 비어있다. 
페탱이 경질된 이후 지휘를 맡아 승리를 이끌어낸 로베르 니벨은, 조프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17년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 최악의 참패를 만들었다.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도 위관급 장교로서 해군 육상 포병 부대의 일원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 육군 보병 대위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독일군에서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수의 지위에 오르는 자들이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포병 소령도 참전했다. 
6월 초 보 요새에서 고립된 프랑스군이 구원을 청하는 마지막 전서구를 보내 기적적으로 프랑스군 진영에 도착한 뒤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 전서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 박제하여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는데 각주에 적힌 출처에서도 정확한 출전이 나오지 않고 있고 웹상에서도 해당 전서구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는 언급은 있지만 수훈 명단에서는 확인이 안 된다. 아마 사람이 아닌 생물이어서 공식 명단에는 없거나, 일종의 착오가 있었던 듯.
다만, 이 전서구는 본의 아니게 더 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희생시켰다. 함락된 줄 알았던 보 요새가 아직 저항 중이라는 소식에 열광한 프랑스군 지휘부는 고립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1주일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펼쳤고 모조리 실패하여 최소 수천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참고로 보 요새에 고립되어 있던 병력은 최대 600여 명 추산. 고립된 부대 입장에서야 구원을 청하는 게 당연하고, 지휘부 입장에선 아군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는 게 당연하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1916년 5월 프랑스의 두오몽 요새를 점령한 독일군 병사들 중 일부가 물자가 떨어져가는 상황에 커피를 끓이려고 보니 장작이 없어서 화염방사기 연료로 불을 때웠는데, 155mm 포탄을 쟁여놓은 자리 바로 옆에서 끓이는 바람에 이들이 연쇄폭발을 일으켜 600명 가량이 즉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더 불쌍한 일은, 기적적으로 몇몇이 요새를 탈출했는데 난데없는 대폭발에 놀란 요새 밖 병사들이 폭발로 인한 연기와 검댕으로 피부가 새까매진 생존자들을 보고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가 몰래 침투하여 공격해온 것으로 오인하여 모조리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 측도 이 폭발로 솟아오른 연기를 목격했고, 이 기회를 타 두오몽을 재탈환하는 공세를 개시했으나 여러 번 실패했고, 10월이 되어서야 식민지군이 점령에 성공했다. 독일은 요새에서 즉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기로 하고 터널을 막았는데, 이 터널은 오늘날 전쟁기념물이 되었다.
전투 중 프랑스군은 탈환한 자군 참호에서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참호선이 통째로 매몰되어 있었고 그 위로 총검들이 솟구쳐 있었던 것이다. 발굴해보니 총검 바로 아래에 수백여 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 생매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들이 총을 꼭 쥔 채 참호를 굳건히 지키다 포격에 의한 산사태로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죽은 이들을 추앙하며 이를 참호선의 총검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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