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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 - 안톤 체홉

Jobs9 2021. 12.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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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

 

안톤 체홉/작

 

등장인물

 

라넵스까야 (류바) --- 여지주 40대 중반

 

아냐--- 그녀의 딸, 18세

 

바랴--- 그녀의 양녀, 20대 중반

 

가예프--- 라?스까야의 오빠, 51세

 

로빠힌--- 상인, 20대 후반

 

뻬쨔--- 대학생, 20대 후반

 

삐닢--- 지주, 50대 초반

 

샤를로따--- 가정교사, 30대 후반

 

에삐호도프--- 사무원, 20대 중반

 

두냐샤--- 하녀, 19세

 

피르스--- 늙은 하인, 90세

 

야샤--- 젊은 하인, 20대 중반

 

행인

 

역장

 

우체국장

 

손님들

 

하인들

 

라넵스까야 부인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

 

[페이지] 001

 

[막] 1막

 

아직도 "꼬마들 방" 이라고 불리고 있는 방. 문 하나는 아냐의 방으로 통하고 있다. 새벽, 곧 해가 뜨려한다. 벌써 5월이라 벗나무엔 꽃이 피었는데 아직 밖은 쌀쌀하다. 방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다.

 

두냐샤는 촛불을 손에 들고 등장, 멀리서 기차 소리, 로빠힌은 잠에서 깨난다.

 

[로빠힌] 기차가 도착했어? 몇 시나 됐지?

 

[두냐샤] 네 시가 넘었어요 (촛불을 끈다) 벌써 날이 밝았어요.

 

[로빠힌] 도대체 기차가 얼마나 연착하는 거야? (시계를 보고) 어이구 두 시간이나 됐네.(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볼래? 기차역으로 마중 나가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는 그냥 잠들어 버렸어--- 앉자 마자 그냥 잤어. 제기랄, 너라도 좀 깨워 주지.

 

[두냐샤] 저는 벌써 떠나신 줄 알았어요. (귀를 기울인다) 어마, 벌써 오나?

 

[로빠힌] (귀를 기울인다) 아니야---

 

(사이)

 

라넵스까야 아주머니가 프랑스에서 5년이나 사셨으니--- 지금쯤 얼마나 변하셨을까--- 참 좋은분이지--- 부드럽고, 뭐랄까--- 담백하고--- 기억나--- 내가 열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따만한 주먹으로 내 코를 때리는 바람에 코피를 흘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버지하고 난 어떻게되선지 여기 정원으로 오게 됐거든. 울 아버진 한잔 들이킨 후 였구. 그러자 아주머니가, 그땐 정말 젊고 정말 날씬하셨지. 나를 세면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그래, 이 방이야, 바로이 "꼬마들 방"이었어. 그러고는 "농사꾼 도련님, 울지 마세요. 장가갈 때 까진 나을 거에요" 라고 말씀하셨지.

 

(사이)

 

농사꾼 도련님이라--- 맞아, 우리 집은 대대로 농사꾼이었어. 내가 지금 이렇게 쫙 빼 입고 있지만, 이게 어울리나! 지금은 어쩌다 돈이 많아져서 부자 소릴 듣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농사꾼 출신에 지나지 않거든 (들고있는 책을 들쳐본다)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읽다가 그만 잠들고 만 거야.

 

(사이)

 

[로빠힌] 아니, 너 왜 그래?

 

[두냐샤] 손이 떨려요.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아요.

 

[로빠힌] 연약한 척 하지마. 게다가 하녀 주제에 옷차림이 이게 뭐야, 응?

 

((에삐호도프, 꽃다발을 손에 들고 등장. 신사복을 뽑아 입고, 윤이 나게 닦은, 삐걱삐걱 소리 나는 장화를 신고 있다. 들어오면서 꽃다발을 떨어뜨린다.))

 

[에삐호도프] (꽃다발을 줍는다) 정원사가 이걸 식당에 놓으라고 보냈어. (두냐샤에게 꽃다발을 내준다)

 

[로빠힌] 마실 것 좀 갖고 와.

 

[두냐샤] 네. (퇴장)

 

[페이지] 002

 

[에삐호도프] 에, 또, 지금은 영하 3도의 아침인데, 에, 벚꽃은 활짝 피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런 날씨는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한숨을 짓는다) 러시아는 계절 따로, 온도 따로예요, 그죠? 에, 음, 저, 그런데, 로빠힌 선생님, 한 가지 물어도 되죠? 나는 엊그제 장화를 한 켤레 샀는데, 이것 보세요.(걸으며 소리나는 것을 보인다)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정도라니까요.

 

도대체 무얼 발라야 좋을까요?

 

[로빠힌] 그만하지. 지겨워, 이젠.

 

[에삐호도프] 전 매일같이 꼭 한가지씩 불행한 일이 일어나죠. 하지만 이제 불평하지 않아요. 익숙해져서, 오히려 웃어넘길 정도지요.

 

((두냐샤 등장. 로빠힌에게 음료수를 내준다.))

 

[에삐호도프] 에, 음, 그럼, 가 봐야지. (가다가 의자에 부딪쳐 의자가 쓰러진다) 이거봐요! (마치 장한 일이라도 한 듯이) 보시다시피예요.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거든요! 죄송합니다.(퇴장)

 

[두냐샤] 실은 저 아저씨가 저한테 결혼하자고 했거든요.

 

[로빠힌] 아!

 

[두냐샤] 정말 난 몰라잉--- 사람은 좋은 것 같은데, 어쩌다 말을 꺼내면 도대체 알수없는 말만 해요. 하지만 나쁜 말, 같지는 않고 뭔가 느낌이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죠. 어머, 나도 관심이 있나 봐! 저 아저씨는 나를 미칠듯이 사랑하고 있거든요. 근데 매일같이 꼭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별명이 뭔지 아세요?" 스물 두 살의 불행" 이예요.

 

((두대의 마차가 집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로빠힌] (귀를 기울인다) 오셨다, 오셨어.

 

[두냐샤] 오셨어요! 어마, 어쩌면 좋아! 온몸이 찌릿찌릿해.

 

[로빠힌] 결국 오셨군. 자, 마중하러 나가자. 날 알아 보실까? 5년이나 서로 만나질 못했는데---

 

[두냐샤] (아픈 사람처럼) 저 당장 쓰러질 것 같아요--- 아, 쓰러지겠어요!

 

((로빠힌과 두냐샤, 급히 퇴장. 무대는 텅 빈다.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정거장으로 일행을 마중 나갔던 피르스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바쁜 듯이 무대를 가로질러 간다. 그는 낡은 하인 제복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다. 무어라고 혼자서 중얼거리지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가 없다. 무대 뒤의 소음은 점점 높아 간다. "자, 이쪽이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라넵스까야, 아냐, 개를 맨 쇠사슬을 든 샤를로따, 모두 여행복 차림이다. 외투를 입고 머릿수건을 쓴 바랴, 가예프, 삐쉭, 로빠힌, 보따리와 우산을 든 두냐샤, 짐을 든 하인들-모두 방을 지나간다.))

 

[아냐] 이리 오세요 모두! 엄마, 여기가 어떤 방인지 기억나?

 

[라녜스까야] (기쁜 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꼬마들 방!

 

[아냐] (환성)

 

[페이지] 003

 

((아냐와 두냐샤만 남고 모두 퇴장하며.))

 

[바랴] 엄마 방의 보라색 벽도 모두 그대로예요.

 

[가예프] 기차가 두 시간이나 연착을 했어. 정말이지, 뭐 하자는 건지---

 

[샤를로따] (삐쉭에게) 내 개가 호도도 먹는 거 아세요?

 

[삐쉭] (놀라서) 아니 정말이랍니까요?

 

[두냐샤] 정말 기다렸어요. (아냐의 외투와 모자를 벗긴다.)

 

[아냐] 오는 동안 나흘 밤을 잠 못잔거 알아? 그리고 지금은 너무 추워.

 

[두냐샤] 고생하셨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그런데 지금 당장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아냐] (맥빠진 표정으로) 또 뭔데---

 

[두냐샤] 에삐호도프 아저씨가 제게 청혼을 했어요.

 

[아냐] 에고, 에고, 휴!(머리를 고치면서) 머리핀을 몽땅 잃어버렸어.(몹시 지친 듯 비틀거리기까지 한다)

 

[두냐샤] 난 뭘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그 아저씬 날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

 

[아냐] (자기 방의 문을. 바라보면서 정답게) 어딜 갔다 온 것 같지 않아. 아! 집에 왔다! 내일 아침 일어나서 벚꽃동산으로 갈 거야--- 아니,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는데! 오는 도중 한잠도 못 잤어, 나흘 밤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아---

 

[두냐샤] (귓속말) 그저께 빼짜 선생님이 오셨어요.

 

[아냐] (기뻐서) 빼쨔 선생님이?!!

 

[두냐샤] 다락방에서 주무시고 계셔요. 방해하기 싫다나요. (자기의 주머니 시계를 들여다본다.) 깨웠으면 좋겠지만, 바랴 언니가 명령했어요. "너 빼짜를 깨우면 안된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바랴 등장. 허리에 열쇠 뭉치를 차고 있다.))

 

[바랴] 두냐샤, 커피 좀 빨리, 응! 엄마가 커피를 드시고 싶으시데!

 

[두냐샤] 네, 금방 끓여 올게요.(퇴장)

 

[바랴] 하!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서 참 다행이야. 아냐!(다정스럽게) 에이구, 우리 이쁜 내 새끼!

 

[아냐] 정말 힘들었어.

 

[바랴] 그랬을 거야!

 

[아냐] 정말 추웠지. 샤를로따는 가는 동안 계속 지껄이기만 하고, 결국 마술까지 나왔어.(웃음) 왜 샤를로따를 딸려 보냈어?

 

[바랴] 그럼 열 여덟짜리 꼬마를 혼자 보내?

 

[아냐] 우리가 빠리에 도착해 보니, 거기도 춥고 온통 눈이었어. 하하! 내 프랑스 말 실력은! 엉망진창이지! 엄마는 5층에 살고 계셨어. 내가 갔을 때는 어떤 프랑스 사람들과 아줌마들, 책을 든 늙은 신부님이 와 있었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기분이 나빠 혼났어.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정말이지 얼마나 가엾게 생각되었던지, 두 손으로 엄마의 머리를 꼭 껴안고는, 도저히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그 다음 엄마는 나를 어루만지며 자꾸 우시는 거야.

 

[페이지] 004

 

[바랴] (눈물을 글썽이며) 그만 해.

 

[아냐] 우리 별장도 벌써 다 팔아 버리고, 엄마한테 남은 돈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어, 그야말로 아, 무, 것, 도, 게다가 난 또 돈이 있나? 정말 여기까지도 간신히 왔어. 그런데도 엄마는 그걸 몰라. 역 앞에서 식사를 할때에도,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웨이터들에게도 1루불씩 척척 팁을 주는 거야. 글쎄, 샤를로따까지도 그러더라니까. 그리고 야샤까지 버젓이 1인분을 주문하니, 정말 무서울 정도였어. 엄마가 프랑스로 데리고 간 하인, 몰라?

 

[바랴] 봤다, 그 면상.

 

[아냐] 그래, 어때? 이자는 갚았어?

 

[바랴] 그럴 돈 있니.

 

[아냐] 아아, 큰일났네, 어쩌지!

 

[바랴] 8월이면 여기도 팔리게 될 거야.

 

[아냐] 어떡해!

 

[로빠힌]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송아지 우는 소리를 흉내낸다) 음매애--- (퇴장)

 

[바랴] (눈물을 글썽이며) 에잇, 그저 한 대 콱! (주먹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한다.)

 

[아냐] (바랴를 껴안고, 조용히) 언니, 저 아저씨가 청혼했어? (바랴,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저 아저씬 언니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고백들을 않는 거지. 뭘 들이 기다리고들 있는 거야?

 

[바랴] 난 이렇게 생각해, 우리 사이엔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여기서 끝이야. 저 사람은 하는 일이 많아서, 나한테까지 신경이 안 와. 관심도 없어. 그런 사람이야. 제멋대로 하라 그래. 난 저 사람을 보기가 민망해 죽겠어. 모두들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말하면서 축하해 주지만, 실제론 아무런 진전이 없으니 말이야. 모두 꿈 같은 얘기지.

 

[아냐] (자기 방으로 가면서 어린애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난 빠리에서 큰 풍선을 타 봤다![바랴] 에이구, 우리 이쁜 내 새끼!

 

((두냐샤, 이미 커피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커피를 끓이고 있다.))

 

[바랴] (문 옆에 서서) 난 말이야, 아냐, 하루종일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면서도 늘 이런 공상을 하곤해. 너를 부잣집에 시집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되면 나도 마음을 놓고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끼예프로 모스크바로 이렇게 자꾸 성지순례나 했으면,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면서 순례나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야! (새 소리)

 

[아냐] 지금 몇 신데 벌써 새들이 울어?

 

[바랴] 다섯 시. 이제 자.(아냐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정말 그러고 싶어!

 

((망토를 입은 야샤, 여행용 가방을 들고 등장))

 

[야샤] (무대를 가로지르면서 공손하게) 이리 지나가도 괜찮습니까?

 

[두냐샤] (놀라) 야샤, 정말 몰라보겠어요. 외국에 다녀오더니, 아주 딴사람이 되셨네.

 

[야샤] 흠--- 아가씬 누구시죠?

 

[두냐샤] 그때 전 요만했죠. (손으로 키를 가리켜 보인다) 두냐샤요. 두냐샤. 꼬조예도프의 딸, 두냐샤예요. 생각이 안 나세요!

 

[아샤] 으음--- 먹음직스러운데! (주위를 둘러보고 덥석 여자를 껴안는다. 여자는 켁 소리를 지르면

 

[페이지] 005

 

서 접시를 떨어뜨린다. 야샤, 재빨리 퇴장)

 

[바랴] (문간에서 불만스러운 어조로) 또 무슨 일이니?

 

[두냐샤] (눈물을 글썽이며) 접시를 깨뜨렸어요.

 

[바랴] (사이) 아이, 시원하다!

 

[아냐] (자기 방에서 나오면서) 뻬쨔 선생님이 와 있다구 엄마에게 말해야 돼.

 

[바랴] 그사람을 깨우지 말라고 하인들에게 일러 뒀는데.

 

[아냐] (생각에 잠겨) 6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로 한 달이 지나서 남동생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어. 일곱 살밖에 안됐는데--- 엄마는 참을 수가 없어서 집을 나가셨던 거야, 나갔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르르 몸을 떤다) 엄마의 심정, 이해해. 엄마도 내 맘을 알아줬으면. (사이) 하지만 뻬쨔 선생님이 동생을 가르쳤으니까, 만나면 또 옛날 일이 생각날 지도 몰라.

 

(피르스 등장. 양복에 흰 조끼를 입고 있다.)

 

[피르스] (커피 주전자 옆으로 가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여기서 드시겠다는데--- (흰 장갑을 낀다) 커피는 준비는 다 됐니? (두냐샤에게 엄하게) 크림이 없잖아!

 

[두냐샤] 어머나! (재빨리 퇴장)

 

[피르스] (커피 주전자 옆을 서성이며) 에잇, 저 바보같은 계집애.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빠리에서 돌아오셨어--- 언젠가 돌아가신 주인 나리도 빠리에 가신 적이 있었지. 마차를 타시고(웃는다)

 

((라넵스까야, 가예프, 로빠힌, 삐쉭 등장. 삐쉭은 엷은 나사로 만든 소매 없는 외투에 두툼한 바지를 입고 있다. 가예프는 양손과 허리로 당구라도 치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등장.))

 

[가예프] 어떻게 하더라? 가만 있자--- 노랑은 구석으로! 이건 한가운데로! 아니, 구석으로 잘라야지! 옛날에 우리 둘이 함께 이 방에서 자곤 했는데, 이제 내가 쉰 한 살이라니, 정말 믿어지지 않아. 근데, 이건 무슨 냄새야?

 

[아냐] 난 가서 잘래요.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엄마에게 키스한다)

 

[라넵스까야] 에이구, 우리 이쁜 내 새끼. (아냐의 손에 키스한다) 집에 오니까 좋지? 난 아직 실감이 안 나.

 

[아냐] 안녕히 주무세요, 삼촌.

 

[가예프] (아냐의 손과 얼굴에 키스한다) 기도하고 자라. 어쩌면 넌 그렇게도 엄마를 닮았니! (여동생에게) 류바, 너도 이애 나이 때는 꼭 이랬지, 하하.

 

((아냐, 로빠힌과 삐쉭에게 손을 내주고 퇴장. 뒷손으로 문을 닫는다.))

 

[바랴] (로빠힌과 삐쉭에게) 여러분, 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벌써 5시가 지났는데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요.

 

[라?스꺄야] (웃는다) 바랴, 넌 여전하구나.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키스한다) 커피 한잔 마시고, 우리 모두 헤어지기로 하자, 응?

 

[페이지] 006

 

((피르스, 그녀의 발밑에 쿠션을 놓는다))

 

어머, 고마워라. 난 이제 커피 중독이야, 고마와요, 피르스, 우리 할아버지! (피르스에게 키스한다)

 

[바랴] 짐을 다 날라 왔는지 봐야지. (퇴장)

 

[라넵스까야] 정말 여기 앉아 있는 건 나일까요? (웃는다) 근데 이게 꿈이면 어쩌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나는 정말로 우리 고향을 사랑해요. 그래서 나는 기차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요,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울먹이는 소리로) 그렇지만 커피는 마셔야지.

 

고마와요, 피르스. 고마와요.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우리 할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있어서.[피르스] 그저께 였습니다.

 

[가예프] 잘 못 알아들어.

 

[로빠힌] 전 이제 곧, 하르꼬프로 떠나야 합니다. 정말 아쉽네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며 실컷 얘길 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삐쉭]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더 예뻐졌지. 그리고 이젠 옷까지 빠리식이니--- 날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가예프] 아, 참, 네가 없는 사이에 유모가 돌아가셨어.

 

[라넵스까야]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좋은 세상으로 가세요, 유모. 편지 받았었어.

 

[가예프] 그리고 아니스따 씨도 죽었지. 사팔뜨기 뻬뜨루쉬까는 여길 나갔고--- 딴 데서 살고 있고--- (호주머니에서 얼음사탕이 든 조그만 곽을 꺼내서 빨아먹는다)

 

[삐쉭] 우리 집 딸내미가 안부를 전했습니다.

 

[로빠힌] 저--- 저도 여기서 정말 즐겁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시계를 본다) 저, 간단히 몇 말씀 만 드리죠. 이미 아시겠지만, 이 벚꽃동산은 빚 때문에 팔리게 되어, 오는 8월 22일이 경매일로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근심하실 건 없습니다. 안심하고 주무세요, 탈출구는 있습니다. 바로 저의 생각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이곳 영지는 시내에서 20킬로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게다가 옆으로 철도가 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벚꽃동산과 강가의 토지를 조그맣게 별장지로 구획해서 빌려준다면, 아무리 못 받아도 1년에 2만 오천 루블의 수입이 있을 겁니다.

 

[가예프] 이봐, 미안하지만, 어리석은 수작 부리지마!

 

[라넵스까야] 나도 그 말을 통 이해할 수가 없는데.

 

[로빠힌] 별장을 빌린 사람에게서 300평당 최소한도 1년에 25루블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광고를 내시면, 가을까진 한 치의 노는 땅도 없이 모두 세를 놓을 수 있을 것으로 장담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축하드립니다! 위치가 좋은 데다가 강도 깊으니까요. 그야 물론 다소 정리를 하고 깨끗이 할 필요는 있겠죠. 이를테면, 낡은 건 모두 철거해 버려야 합니다 첫째, 이런 집 같은 것도 이젠 구식이니까요. 그리고 쓰잘데기 없는 벚꽃 동산도 말끔히 벌목해버려야겠죠.

 

[라넵스까야] 벌목? 뭘 모르네. 만약 이 지방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 재미있다기보다 훌륭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오직 우리 집 벚꽃동산 뿐인 거 몰라?

 

[로빠힌] 이 동산이 훌륭하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굉장히 넓다는 것뿐입니다. 열매라 봐야 쭉쨍이 같은 것만 2년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고, 또 열린다 해도 팔 데가 있어야죠.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데!

 

[페이지] 007

 

[가예프] 이 벚꽃동산에 대해서는 <백과사전> 에까지 실려 있단 말이야.

 

[로빠힌] (시계를 보고) 만약 우리들이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결심도 내리지 않는다면, 8월 22일에는 벚꽃동산은 물론 영지 전체도 경매에 붙여지고 마는 겁니다. 제발 결심을 하세요!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로, 딴 방법은 절대로 없어요.

 

[피르스] 옛날 4, 50년 전엔 버찌를 말리기도 하고 설탕조림을 하기도 하고, 초에 절이기도 하고, 잼을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또---

 

[가예프] 조용히 해, 피르스.

 

[피르스] 그리고 또 곧잘 말린 버찌를 차에 싣고 모스크바나 하르꼬흐프 보내곤 했습죠. 굉장한 돈 벌이였어요! 게다가 말린 버찌도 그때는 말랑말랑하고 물기가 있고 달고 향기도 좋았답니다. 그렇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삐쉭] (라넵스까야에게) 빠리는 어땠어요. 네? 개구리 요리를 드셨습니까?

 

[라넵스까야] 악어를 먹었어요.

 

[삐쉭] 아니, 정말이랍니까요!

 

[로빠인] 예전까지는 이런 시골에 지주 분들과 농사꾼들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별장 거주자라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도시란 도시, 아주 조그만 도시조차도 지금은 별장으로 둘려싸여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베란다에서 차나 마시는 게 고작이겠지만, 이제 그 사람들이 한치의 땅이라도 가지고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 여기 이 벚꽃동산도 그야말로 행복하고, 풍요롭고, 호화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가예프] (반항적으로) 말도 안돼는 소리! 너 수작 부리지마!

 

((바랴와 야샤 등장.))

 

[바랴] 엄마, 여기 전보가 두 장 와 있어요. (열쇠를 골라서 잘까닥거리며 낡은 책장을 연다) 이거예요.

 

[라넵스까야] 이건 빠리에서 온 거야. (읽지도 않고 전보를 찢어 버린다) 빠리하곤 이제 끝장이 났어.

 

[가예프] (라넵스까야에게) 얘, 너 이 책장의 나이를 알고 있니? 1주일쯤 전에 아랫서랍을 열어 보았더니, 만든 날짜가 새겨져 있더라구. 이 책장은 꼭 백년 전에 만든거야. 어때? 기념제라도 해줄 만하지. 생명은 없다곤 하지만, 이래도 역시 책을 넣는 장이 아니야 말야.

 

[삐쉭] (놀란 듯이) 백년? 아니 정말이랍니까요?

 

[가예프] 암, 이건 아무튼 (책장을 만져 보며) 귀중하고도 존경할 만한 책장이여! 나는 이미 백년이상이나 선과 정의의 빛나는 이상을 향해 전진해 온 너의 존재를 축복하노라! 유익한 지식으로 우리를 부르는 너의 말없는 호소는 지난 백 년 동안 한시도 시들 때라곤 없었으니! 그리고 (울먹이는 소리로) 이 집 대대손손에게 보다 좋은 미래에 대한 신앙과 용기를 주고, 선을 향한 이상과 사회적 자각을 길러 주었느니라.

 

(사이)

 

[로빠힌] 네.

 

[라넵스까야] 오빤 변한 게 없어.

 

[가예프] (다소 겸연쩍은 듯이 당구치는 모습) 그 공에서 오른쪽으로! 가운데를 잘라서!

 

[로빠힌] (시계를 본다) 자, 전 이만.

 

[페이지] 008

 

[야샤] (러?스까야에게 알약을 내준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삐쉭] 약 같은 걸 무엇 때문에 드세요? 물론 해로울 것도 없지만 이로울 것도 없어요. 이리 줘 봐. (알약을 받아 손바닥 위에 놓고 후우 한번 불고 입에 넣고는 꿀꺽 삼켜 버린다)

 

[라넵스까야] (깜짝 놀라며) 어머나 세상에! 돌았어요?

 

[삐쉭] 자, 보시다시피! 다 삼켜 버렸습니다.

 

[로빠힌] 혼자 먹기예요? 나도 좀 주지.

 

((두 웃음을 터뜨린다.))

 

[피르스] 이분들, 연말에 저희 집에 오셔 가지고는 오이 피클을 반 통이나 잡수시더니--- (중얼거린다)

 

[라넵스까야] 뭐라는 거야?

 

[바랴] 벌써 3년째 저렇게 중얼대요. 엄마도 곧 익숙해 질 거예요.

 

[야샤] 이젠 나이도 나이니까요.

 

샤를로따, 몹시 여윈 몸에 흰옷을 꼭 끼게 입고, 허리에 오페라 안경을 늘어뜨린 채 무대를 지나간다.

 

[로빠힌] 아이구 죄송합니다, 샤를로따 선생, 아직 인사를 못 드렸었군요. (그 손에 키스하려고 한다)

 

[샤를로따] (거절한다)

 

[로빠힌] 아하! 오늘은 일진이 안 좋네.

 

((모두 웃는다))

 

샤를로따 선생, 어디 마술이나 한번 보여 줘요.

 

[라넵스까야] 샤를로따, 마술을 보여 줘!

 

[샤를로따] 졸려서 싫어요.(퇴장)

 

[로빠힌] 3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라넵스까야의 손에 키스한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가예프에게)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삐쉭하고 키스한다) 안녕. (바랴에게 손을 내주고 그 다음 피르스와 야샤하고 악수를 나눈다) 가기 싫은데--- (아녜스까야에게) 별장 일을 잘 생각하셔서 결심이 서시면, 저한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5만 루블 가량 마련해 보겠습니다.정말 심각하게 생각 하셔야 해요.

 

[바랴] (화를 내며) 그만하고 어서 가요!

 

[로빠힌] 네, 갑니다, 갑니다. 숑! (퇴장)

 

[가예프] 에이 농사꾼 자식! 아, 미안! 바랴가 저 녀석한테 시집간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바랴의 신랑이군 그래.

 

[바랴] 삼촌. 그런 말씀 마세요, 쓸데없는 일이에요.

 

[라넵스까야] 아니, 왜 그래, 바랴. 난 무척 기쁜데! 저 사람 좋은 사람이야.

 

[삐쉭] 인간은 솔직해야 해--- 존경받고--- 우리 집 딸내미도--- 다른 말인데--- (코를 골다가 곧 눈을 뜨고는) 그건 그렇고 저--- 내게 240루블만 좀 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내일 이자를 갚아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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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바랴] (깜짝 놀라며) 우리 돈 없어요, 없어요!

 

[라넵스까야] 난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삐쉭] 어디선가 돈은 나옵니다. (웃는다) 난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아요. 요전만 해도, 이젠 완전히 틀렸구나, 파산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아, 글쎄, 갑자기 철도가 우리 땅을 지나가는 바람에--- 보상금을 받게 되었죠. 그러니, 두고 보세요, 오늘, 내일 중에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고 말테니--- 우리 딸내미가 복권에 당첨될 지도 모르죠. 그 애가 복권을 한 장 가지고 있거든요.

 

[라넵스까야] 커피를 다 마셨네, 이젠 자야지.

 

[피르스] (솔로 가예프의 옷을 털어 주면서, 훈계조로) 또 다른 바지를 입으셨군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바랴] (조용히) 아냐는 자고 있어요. (조용히 문을 연다) 벌써 해가 떴어요. 안 춥네! 보세요, 엄마, 벚꽃 좀 봐요! 너무 아름답죠! 그리고 이 공기 두요! 찌르레기가 울고 있어요!

 

[가예프] (다른 창문을 연다) 동산이 온통 하얗구나. 기억나니, 너? 저기 저 긴 가로수 길, 달밤이면 반짝반짝 빛나고 말야. 기억나니?

 

[라넵스까야] (창 너머로 정원을 본다) 어렸을 땐 정말 순진했던 시절이었어. 비로 이 "꼬마 방"에서 자고 여기서 벚꽃동산을 내다보곤 했지. 매일 아침 난 정말 행복에 겨워 잠에서 깨어나곤 했었지. 그 때도 그 동산은 바로 지금 이 모습이었어,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어.

 

[가예프] 그래, 하지만 이 동산까지 빚 때문에 팔리게 되었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야---

 

[라넵스까야] (멍하니 동산을 보다가) 엄마!

 

[가예프] 응? 어디?

 

[바랴] 엄마, 정신차리세요.

 

[라넵스까야] 으, 응. 교회로 가는 길목에 저기 하얀 나무가 비스듬히 있는 게 꼭 사람처럼 보였어.

 

뻬쨔 등장. 다 닳아빠진 대학생 제복에 안경을 쓰고 있다.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동산이 또 있을까! 저 수많은 하얀 꽃들 좀 봐, 저 하늘---

 

[뻬쨔] 안녕하세요.

 

그녀, 뒤돌아본다.

 

전 잠깐 인사만 드리고 곧 돌아가겠습니다. (열렬히 손에 키스한다) 저보고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넵스까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바랴] (눈물을 글썽이며) 뻬쨔예요.

 

[뻬쨔] 전에 아드님의 가정교사였던 뻬쨔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요?

 

라녜스까야, 그를 껴안고 조용히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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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예프] (당황한 듯이) 그만 해, 그만, 됐어.

 

[바랴] (운다)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요, 뻬쨔,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라넵스까야] 그리샤--- 내 새끼--- 그리샤--- 우리 애기---

 

[바랴] 그만 하세요, 엄마. 모두 하늘의 뜻인데---

 

[뻬쨔] (부드러운 어조로, 눈물을 글썽이며) 자, 그만, 그만 하세요---

 

[라넵스까야] (조용히 흐느낀다) 그 애는 죽고 말았어, 물에 빠져서--- 대체 왜? 그 어린것이--- (다시 뻬짜에게) 그 때만 해도 마치 어린 소년 같은 귀여운 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머리까지 빠지고 안경까지 쓰고 있네. 아니, 아직도 대학생인가? (문 쪽으로 걸어간다)

 

[뻬쨔] 아마 저는 만년 대학생일 겁니다.

 

[라넵스까야] (오빠에게 키스하고, 이어 바랴에게 키스한다) 자, 이제 어서들 가서 자요--- 오빠도 많이 늙었어요.

 

[삐쉭] (그녀를 뒤따른다) 취침 시간이란 말씀이시죠--- 아이구, 이 놈의 다리 통풍! 오늘은 여기서 좀 묵겠습니다. 그런데 라넵스까야 부인, 부탁해요, 내일 아침 나는 이백 사십 루블을---

 

[가예프] 그야, 당신 사정이지!

 

[삐쉭] 이백 사십 루블--- 저당의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라넵스까야] 하지만, 난 돈이 없어요.

 

[삐쉭] 꼭 갚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니깐---

 

[라넵스까야] 아, 알았어요. 오빠가 주실 거예요--- 오빠, 좀 꿔 줘요.

 

[가예프] 나 보러 주라고? 내 주머니 볼래?

 

[라넵스까야] 할 수 없잖아, 오빠. 돈 좀 줘. 필요하다잖아요. 꼭 갚을 거죠?

 

라넵스까야, 뜨로피모프, 삐쉭, 피르스 퇴장. 가예프, 바랴, 야샤 남는다.

 

[가예프] 저 앤 아직도 돈을 마구 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어. (야샤에게) 저리 좀 비켜, 너한테 닭고기 냄새가 난단 말야.

 

[바랴] (야샤에게) 너희 엄마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어제부터 네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를 만나시겠다면서 말야.

 

[야샤] 이런 젠장! 오려면 내일 올 것이지.(퇴장)

 

[바랴] 엄마는 예전 그대로예요, 전혀 달라진 데가 없어요. 만일 그대로 둔다면 모든 걸 남들에게 줘 버릴실 거예요.

 

[가예프] 맞아.

 

(사이)

 

내가 머리를 짜내서 아주 많은 방법들을 생각해 냈지만, 실속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어. 누구에게라도 유산을 물려받거나 아냐를 아주 돈 많은 부잣집에 시집을 보내면 좋을 거다. 아니면 야로슬라브로 가서 백작 부인이신 숙모님한테 부탁을 해 보는 방법도 있고--- . 근데 사실 어떤 병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많은 치료법들이 있다면, 그건 그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야. 숙모님은 굉장한 부자지만, 우릴 좋아하지 않아. 무엇보다 내 동생이 귀족이 아닌 변호사 따위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지---

 

아냐가 문간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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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지방법원에 갔을 때,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문득 약속어음으로 돈을 빌려서 은행 이자를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다.

 

[바랴]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어요!

 

[가예프] 화요일에 가서 다시 한번 말해 봐야지--- 네 엄마는 아마 로빠힌하고 상의할 게다. 로빠힌도, 물론, 거절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아냐를 여독이 풀리는 대로 야로슬라브의 백작 할머니 한테 보내는 거야. 이렇게 세 방향으로 노력하면--- 일이 다 잘 풀릴 거야. 이자는 틀림없이 갚을 수 있을 게다. 아무렴!--- (얼음사탕을 입에 넣는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해.

 

우리 영지는 팔리지 않을 거야! (흥분하여) 내 행복을 걸고 맹세한다! 자, 약속할께. 만약에 내가 경매일까지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 땐 나를 실없는 놈, 파렴치한 놈. 마음대로 불러도 좋아.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해!

 

[아냐] (안정된 기분으로 들어오며,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는다) 삼촌, 삼촌은 정말 훌륭하고 현명한 분이세요! (가예프를 껴안는다) 이젠 안심이 돼요! 마음이 놓여요! 행복해요!

 

피르스 등장.

 

[피르스] (핀잔 투로) 도련님,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언제 주무실 거예요?

 

[가예프] 알았어, 알았어, 이제 곧 갈께. 가 봐, 피르스. 걱정하지 말구, 나 혼자 옷을 갈아입을께. 자, 얘들아, 잘 자라---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가서 자야지. (아냐와 바랴에게 키스한다) 나는 구세대 사람이야--- 사람들이 우리 세대를 좋게 평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 그래서 농부들이 나를 좋아하는 거지. 농부들의 생리를 알아야 해! 알아야 하구말구---

 

[아냐] 삼촌! 또 시작이세요!

 

[바랴] 조용히 좀 계시라구요!

 

[피르스] (화가 나는 둣이) 도련님!

 

[가예프] 갈께, 간다니까--- 잘 자라. 양쪽에서 가운데로! 깨끗하게 처넣어야지---

 

(퇴장. 뒤이어 피르스 뒤뚱거리며 따라간다)

 

[아냐] 휴, 이제 좀 마음이 놓여. 근데 야로슬라브엔 가고 싶지 않아. 난 할머니가 싫어. 뭐.하지만 어쨌든 이젠 안심이야. 삼촌 고마워요. (자리에 앉는다)

 

[바랴] 그만 자자. 나도 자야겠어. 아, 참, 네가 없을 때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났었어. 너도 알지? 저쪽 낡은 하인방 말이야, 거긴 늙은 하인들이 살고 있는 거 알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떤 떠돌이들을 끌어다가 재우기 시작한 거야.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있었어. 그런데 좀 있으니까, 내가 죽만 먹이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지 않겠어. 내가 구두쇠가 돼서 그렇다구 말이야--- 다 늙은 하인들이 낸 소문이지. 그래서 나는, 좋다, 정 그렇다면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 전부를 불렀지--- (하품을 한다) 모두 오길래 "이봐, 이 노망난 늙은이들아! 이 멍청한 놈들아--- "(아냐를 보고) 아냐--- (사이) 이런 잠들었네!--- (아냐의 팔을 잡는다) 자, 침대로 가자--- 어서!--- (아냐를 데리고 간다) 우리 예쁜이가 잠들었군 그래! 가지--- (두 사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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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동산 저쪽에서, 목동의 피리부는 소리가 들린다. 뻬쨔가 무대를 지나가다가 바랴와 아냐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쉿--- 아냐가 자고 있어요--- 자고 있어--- 자, 가자.

 

[아냐] (조용히, 꿈이라도 꾸듯이) 졸려--- 종소리가 들려--- 삼촌--- 사랑해요--- 엄마도--- 삼촌도---

 

[바랴] 자, 가자, 그래, 어서--- (아냐의 방으로 퇴장)

 

[뻬쨔] (무어가를 메모한다. 그리고 그 메모한 것을 읽는다.) 오오, 나의 태양! 나의 청춘!

 

[페이지] 013

 

[막] 2막

 

들판,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채 내버려진, 기둥이 굽은 낡은 예배당. 그 옆에 우물. 예전에는 틀림없이 묘비였으리라 짐작되는 커다란 돌. 낡은 벤치. 가예프의 영지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한쪽엔는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들이 검게 빛나 보이고, 거기서부터 벚꽃동산이 시작되고 있다. 멀리 전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보다 더 멀리, 까마득한 지평선상에, 대도시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아주 밝게 갠 날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곧 해가 지려 한다. 샤를로따, 야샤, 두냐샤, 벤치에 앉아 있고, 에삐호도프는 그 옆에 서서 기타를 치고 있다. 모두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앉아있다. 창이 달린 낡은 모자를 쓴 샤를로따는 어깨에서 총을 내려 멜빵의 고리쇠를 고치고 있다.

 

[샤를로따] (생각에 잠긴 어조로) 나는 정식 신분증이 없어서, 지금 정확히 몇 살인지는 잘 몰라. 그래서 항상 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어린 계집애였을 때, 우리 엄마아빠는 장터를 떠돌아 다니면서 공연을 했어. 그리서 나도 공중 곡예(Salto mortale) 와 여러가지 공연을 했지. 그런데, 엄마아빠가 돌아가시자, 어떤 독일 부인이 나를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켜 주었어. 운이 좋았지. 그렇게 자라서 가정교사가 된거야. 그러니까, 나는 내가 어디 출신인지, 또 내가 누군지도 몰라---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아마 정식 결혼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는 지도 모르지--- 아뭏든 난 알 수 없어. (호주머니에서 오이를 꺼내서 먹는다) 아무 것도 몰라. (사이)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내겐 아무도 없어---

 

[에삐호도프]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세상의 만사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친구건 적이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기분이 좋은데, 만돌린을 치니까!

 

[두냐샤] 그건 기타예요, 만돌린이 아니라. (손거울을 들어다보며 분을 바른다)

 

[에삐호도프] 사랑에 눈이 먼 사람에겐 이게 만돌린으로 보리는 겁니다--- (노래한다) <당신이 나의 사랑을 가져준다면 내 가슴은 얼마나 불타 오를까!>

 

야샤, 따라 부른다.

 

[샤를로따] 아유,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네! 정말! 마치 들개들이 짖는 것 같아.

 

[두냐샤] (야샤에게) 외국여행을 했으니 정말 좋았겠어요!

 

[야샤] 물론이지. 전적으로 당신에게 동의하는 바야. (하품을 한다. 이윽고 시가를 피우기 시작한다)

 

[에삐호도프] 그야 그렇지.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게 퍼팩트하게 되어 나가고 있으니까.

 

[야샤] 말이라고 하나, 촌닭 아저씨.

 

[에삐호도프] 난 교양있는 사람이고, 여러 가지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지. 하지만 어떻게 인생의 방향을 잡아야 할 지 알 수 없단 말야.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지, 자살을 해야 할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언제나 권총을 가지고 다니지요.자, 보라구요--- (권총을 꺼내 보인다) [샤를로따] 그만, 난 가겠어요. (총을 둘러멘다) 에삐호도프. 당신은 아주 똑똑하면서도 아주 무서운 사람이군요. 틀림없이 여자들이 당신에게 홀딱 반할 테죠. 부르르--- (걷는다) 똑똑한 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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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하나같이 모두 바보들이니, 말할 상대가 있어야지--- 결국 모두 혼자야, 혼자. 나한테 아무도 없어--- 그건 그렇고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살고 있는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천천히 퇴장)

 

[에삐호도프] 다른건 둘째치고, 솔직히, 내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즉 내 운명은 사나운 폭풍우 속의 조각배처럼 너무나 비참하단 말입니다. 그건 증거로서, 오늘 아침에만 해도 눈을 떴더니, 가슴 위에 크고 무시무시한 큰 거미가 올라 와 있었어요--- 이따만한 게--- (두손으로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또 물을 마시려고 컵을 집어들었더니, 여지없이 바퀴 벌레가 들어있더라구. (사이) 두냐샤양, 당신에게 할 말이 있는데.

 

[두냐샤] 말씀하세요

 

[에삐호도프] 실은 단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요--- (한숨을 짓는다)

 

[두냐샤] (당황해하며) 좋아요--- 하지만, 우선 제 외투를 좀 가져다 주세요--- 옷장 옆에 있어요--- 어쩐지 좀 습기가 차는 것 같아서---

 

[에삐호도프] 그러죠--- 가져다 드리죠--- 이제야말로 권총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것 같은데--- (기타를 들고 연주하며 퇴장)

 

[야샤] 스물 두 살의 불행! 멍청한 녀석.

 

[두냐샤] 자살을 할까 걱정이예요. (사이) 난 요즈음 점점 불안해지고 항상 걱정만 해요. 야샤, 자기가 만약 날 속인다면, 난 미쳐버리고 말거예요.

 

[야샤] 음--- (그녀에게 키스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뭔지 알아? 분수에 맞지않게 행동하는 여자야---

 

[두냐샤] 난 정말 미치도록 자길 사랑해요. 자긴 현명하니까 뭐든지 판단할 있을거 아녜요.어떡하면 좋아요?

 

(사이)

 

[야샤] 내가 현명하긴 하지. (하품을 한다) 근데 내 생각은 이래. 만약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한테 반했다면, 그건 벌써 끝난 일이야. 방법이 없어. (사이) 맑은 공기 속에서 시가를 피우니 정말 기분이 좋군---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이 이리로 오는군---

 

두냐샤, 그를 와락 껴안는다.

 

집으로 돌아가. 강에 목욕 하러 갔던 것처럼 행동하라구. 이 샛길로 가. 다른데로 가면 사람들이랑 마주칠거 아냐! 그러면 모두들 내가 너하고 무슨 짓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할 거라구. 난 그런건 못 참아.

 

[두냐샤] (조용히 기침한다) 시가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퇴장)

 

야샤, 남아서 예배당 옆에 앉는다. 라넵스까야, 가예프, 로빠힌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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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빠힌] 이젠 정말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문제는 아주 간단해요. 영지의 일부를 별장지로 내놓는 걸 동의하세요, 동의하지 않으세요? 그저 한 마디로 대답해 주세요. 네, 아니오, 단 한 마디입니다!

 

[라넵스까야] 누가 여기서 이런 지독한 냄새의 담배를 피웠지?--- (앉는다)

 

[가예프] 철도가 놓인 후로는 교통이 편리해졌어. (앉는다) 시내에 나가서 외식을 하고 올 수도 있으니 말이야--- 노란 공은 가운데로! 먼저 집에 가서 한 게임하고 싶은데---

 

[라넵스까야] 좀 있다가 가, 오빠. 여기!

 

[로빠힌] 그저 한 마디만! (애원하듯) 대답을 해 주세요!

 

[가예프] (하품을 하며) 뭐!

 

[라넵스까야] (자기의 지갑을 들여다보고) 어제는 돈이 꽤 많았었는데, 오늘은 조금 밖에 안 남았어. 우리 바랴는 절약을 한답시고 우리에겐 우유 수프를 주고, 하인들에겐 콩만을 먹이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아무 생각없이 돈만 쓰니--- (돈주머니를 떨어뜨린다. 금화가 흩어진다) 어머나! (화가 나는 듯한 표정)

 

[야샤] 제가 줍겠습니다. (돈을 줍는다)

 

[라넵스까야] 고마와, 야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내까지 나가 외식을 하고 왔을까--- 게다가 음악이 있다는 그 음식점 이란게, 더럽고--- 테이블보 에서는 비누 냄새가 풍기질 않나--- 도대체 무슨 술을 그렇게도 마셔요, 오빠? 또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예요? 그리고 왜 또 그렇게 밀이 많으세요? 오늘도 음식점에서 오빠는 공연히 쓸데없는 말만 지껄이시더군요. 칠십년대가 어떻다니, 데카당이 어떻다니 하면서, 그것도 누구하곤지 아세요? 종업원들을 붙들고 데카당을 논하다니요!

 

[로빠힌] 그러셨군요.

 

[가예프] (한 손을 내 젓는다) 아무래도 내 버릇은 고칠 수 없나 봐--- (짜증을 내며 야샤에게) 넌 왜 만날 내 옆에서 얼쩡 거리지?

 

[야샤] (웃는다) 전 주인님의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나는걸요.

 

[가예프] (여동생에게) 이놈을 보낼거냐 아니면 내가 갈까?

 

[라넵스까야] 야샤, 들어 가---

 

[야샤] (라넵스까야에게 돈주머니를 내준다) 네, 가겠습니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면서) 가겠습니다. (퇴장)

 

[로빠힌] 이 영지를 부자인 제리가노프가 사려고 해요. 소문에 의하면, 자기가 직접 경매에 나온다는 거예요.

 

[라넵스까야] 어디서 그 말을 들었지?

 

[로빠힌] 시내에 소문이 좍 퍼졌어요.

 

[가예프] 야로슬라브의 백작 숙모님이 돈을 보내준다고 약속했어, 언제 얼마를 보내 주실지, 알수는 없지만.

 

[로빠힌] 얼마나 보내 주실까요? 십만? 이십만?

 

[라넵스까야] 글쎄, 만이나, 만 오천 정도만 보내줘도 감사합니다지.

 

[로빠힌] 정말 실례되는 말이지만, 저는 두분들처럼 아무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한 분들을 생전 처음 보겠어요. 지금 전 우리나라 말로 얘기하는 거예요. 이곳 영지가 넘어가게 되었다구요. 그런데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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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넵스까야] 우린 그럼 어떡하면 좋지? 좀 가르쳐 줘.

 

[로빠힌] 매일 말씀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매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요. 벚꽃동산도 땅도 별장지대로 임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그것도 지금 당장, 될 수록 빨리 서둘러야 해요. 경매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이 점을 잘 생각하세요! 그저 별장으로 내놓겠다고 결단만 내리시면, 돈은 얼마든지 들어온다구요.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게된다는 말예요.[라넵스까야] 별장이니 별장객이니 하는 말은--- 어쩐지 저속한 생각이 들어---

 

[가예프] 나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야.

 

[로빠힌] 정말, 환장해서 졸도 할 것 같군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두분은 저를 지치게 만드시는군요! (가려고 한다)

 

[라넵스까야] (놀란 듯이) 아니, 가지 마. 여기 있어 줘, 응? 부탁이야. 혹시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로빠힌] 무슨 생각이 떠오른다는 겁니까!

 

[라넵스까야] 가지 마, 제발 부탁, 부탁, 응? 같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구---

 

(사이)

 

[가예프]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두 번 치기는 구석으로--- 그리고 이건 가운데로!

 

[라넵스까야] 우리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로빠힌] 죄라니요?

 

[가례프] (얼음사탕을 입에 넣는다) 사람들은 내가 사탕을 너무 많이 사먹어서 재산을 몽땅 탕진했다고들 말하더군--- (웃는다)

 

[라넵스까야] 내가 지은 죄--- 나는 밤낮 미친 듯이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써댔어, 그리고 그저 빚이나 질 줄 밖에 모르는 남자와 결혼했지. 남편은 술 때문에 죽었어. 정말 대단한 술꾼이었으니까--- 게다가 불행하게도, 나는 또 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어. 그런데, 바로 그 때, 이게 내게 가해진 최초의 천벌이야, 바로 저 강에서--- 내 아들이 빠져죽은 거야. 그래서 나는 외국으로 떠난 거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두 번 다시 이 강을 보지 않을 생각으로--- 나는 눈 질끈 감고 정신없이 도망친 거야--- 그런데 그 자가 날 따라왔어--- 염치도 없고 뻔뻔스럽게---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서 병에 걸렸기 때문에, 나는 니스 근처에 별장을 사서, 그 때부터 삼년 간 밤낮없이 간병하느라 녹초가 되었고, 마음까지 바싹 말라버릴 정도였어. 그리고 작년, 빚 때문에 그 별장을 팔아 버리고 빠리로 갔는데, 거기서 그 사람은 내 모든 것을 빼앗고는, 딴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나 버렸어. 그래서 난 자살하려고 약까지 먹었지--- 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고 너무도 창피해서--- 그러자, 불현 듯 우리나라로, 내 딸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눈물을 닦는다) 하느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더 이상 저를 벌하지 마세요! (호주머니에서 전보 한 장을 꺼낸다) 오늘 빠리에서 온 거야, 용서를 빌면서 돌아와 달래--- (전보를 찢는다)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귀를 기울인다)

 

[가예프] 저건 그 유명한 유태인 악단이야. 너도 기억할걸, 바이얼린 넷에 플루트와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악단말야.

 

[라넵스까야] 아! 그 악단이 아직도 있어요? 그럼, 우리 집에 불러다가 파티라도 열어야 겠네.

 

[로빠힌] (귀를 기울인다) 제 귀엔 안 들리는데요--- (사이) 저의 아버지는 바보 같은 농사꾼인 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서, 내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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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죠. 술에 취해 나를 때리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것도 언제나 몽둥이로 말예요. 실제로 나도 아버지와 다름없는 멍청한, 얼간이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 것도 배운 거라곤 없고, 글씨는 개발 새발 엉망이고 남부끄러울 정도죠.

 

[라넵스까야] 어서 결혼을 해야지?

 

[로빠힌] 네--- 그건 그래요.

 

[라넵스까야] 우리 바랴는 어때? 참 좋은 아이야.

 

[로빠힌] 그렇죠.

 

[라넵스까야] 그 애는 가난한 집 출신이지만, 하루 종일 일밖에 모르는 근면한 이이야. 게다가 그애는 그쪽을 사랑하고 있잖아? 그리고 그쪽도 예전부터 그 애를 좋아하잖아.

 

[로빠힌] --- 하기는 저도 싫지는 않아요--- 좋은 여자죠.

 

(사이)

 

[가예프] 은행에서 나에게 일자를 제의해왔어. 연봉이 육천 루블로--- 그 말 들었니?

 

[라넵스까야] 오빠, 가만 좀 있어---

 

피르스, 등장. 외투를 들고 있다.

 

[피르스] (가예프에게) 도련님, 어서 입으세요. 제법 습기가 있어요.

 

[가예프] (외투를 입는다) 할아범한테 정말 질렸어.

 

[피르스]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아침에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나가 버리시고선. (그를 살펴본다)

 

[라넵스까야] 피르스도 꽤 늙었군요!

 

[피르스] 뭐라고 하셨죠?

 

[로빠힌] 할아버지가 많이 늙었다고 말씀하셨어요!

 

[피르스] 너무 오래 살았죠. 마님의 아버님께서도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시지 않았을 때 제가 장가를 들었으니까요.(웃는다) (사이)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 땐 모두가 즐거웠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즐거웠는지 잘 몰랐지만 말입니다.

 

[로빠힌] 옛날엔 정말 좋았었죠. 적어도 마음대로는 싸울 수 있었으니까.

 

[피르스] (알아듣지 못하고) 그렇구 말구요. 농부들은 주인들에게 의지하고, 주인들은 농부들을 보살펴줬고, 일도 착착 돌아가고--- 근데 지금은 모두가 제각기예요. 질서가 없어요. 요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어요.

 

[가예프] 조용해 봐, 피르스. 내일 시내로 나가봐야 해. 어떤 장군을 소개받기로 되어 있어.어음으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2만 루블.

 

[로빠힌] 소용도 없을 겁니다. 그런 푼돈으론 이자도 물지 못합니다. 그저 가만히 계세요.

 

[라넵스까야] 오빠, 실없는 소린 그만해요. 무슨 장군이 있다고 그래?

 

뻬쨔, 아냐, 바랴 등장

 

[아냐] 엄마, 여기 있었어?

 

[라넵스까야] (정답게) 이리 와, 이리--- 내 새끼들. (아냐와 바랴를 안으면서) 자, 이 옆에들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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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그렇게.

 

모두, 앉는다.

 

[로빠힌] 우리 만년 대학생께서는 언제나 아가씨들과 함께 다니시는군.

 

[뻬쨔] 남 일에 신경 쓰지 마.

 

[로빠힌] 이제 곧 쉰 살이 된다는데도, 여태까지도 대학생이시라니.

 

[뻬쨔] 그런 농담은 집어치워.

 

[로빠힌] 어, 이런 별 이상한---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뻬쨔] 내게 신경 끄란 말이야, 알았어?

 

[로빠힌] (웃는다) 한가지 묻겠는데, 뻬쨔, 날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뻬쨔] 배부른 돼지! 혹은 일벌래.

 

모두,웃는다.

 

[바랴] 뻬쨔 선생님은 별자리 얘기하는 게 더 잘 어울려. 여름에 뜨는 별자리 얘기 좀 해 줘.

 

[라넵스까야] 아니, 그보다 어제 하던 이야기를 해 봐.

 

[뻬쨔] 무슨 이야기였죠?

 

[가예프] 인간의 자존심에 대해서였지.

 

[뻬쨔] 우리는 어제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무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자존심이 있는 인간에게는 무언가 신비로운 점이 있다는 게 어머님의 의견이었던 가요? 그야 어떤 의미에선,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사심 없이 다순하게 행각한다면, 자존심이니, 긍지니 하는 것이 도대체 뭔지 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생리적으로 연약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대부분이 거칠고 몽매하고, 게다가 그지없이 불행하니 말입니다. 자신에 도취되어서는 안됩니다. 단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가예프] 그래도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지.

 

[뻬쨔] 누가 알죠?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어쩌면 인간에게는 백 가지의 감각이 있어서, 그 중에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오감뿐이고, 나머지 아흔 다섯 가지는 살아 남을지도 모릅니다.

 

[라넵스까야] 뻬쨔는 정말 똑똑해!

 

[로빠힌] (비꼬듯이) 대단하네요!

 

[뻬쨔] 인류는 자기의 능력을 완성하면서 앞으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현재엔 이해하기 힘든 것도, 언젠가 가까운 장래엔 반드시 친숙하고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열심히 일을 해야하는 겁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진리를 찾는 이들을 도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제가 아는 한 지식인들 대부분은 아무 것도 탐구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 현재론 어떻게 일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텔리이며 지도층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공부도 하지 않고 책은 거의 읽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둥이로만 학문을 지껄이고, 예술에 대해선 전혀 이해조차 못하죠. 그러면서도 모두들 심각한 척 얼굴을 찡그리고는, 고상한 말만 지껄이며 철학자연하고 있습니다만, 보십시

 

[페이지] 019

 

오 노동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베개도 없이 삼. 사십명씩 한방에 쳐박혀 지고, 가는 곳마다 빈대와, 악취와, 습기와, 정신적인 타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미사여구는 우리자신과 상대방의 눈을 속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요즈음 그렇게도 자주 떠들어 대고 있는 탁아소는 어디에 있고, 도서관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제게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런 건 다만 소설에서나 쓰고 있을 뿐,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지저분함과 저속함, 야만스러운 방법뿐입니다--- 저는 그 심각한 표정들이 싫습니다. 저를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심각한 대화들도 싫습니다.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게 낫지요!

 

무대 뒤에서, 에삐호도프가 지나가며 기타를 타고 있다.

 

[라넵스까야] (생각에 잠긴 듯이) 에삐호도프가 가고 있네---

 

[아냐] (생각에 잠긴 듯이) 에삐호도프가 가고 있네---

 

[가예프] 해가 졌습니다. 국민 여러분. (나직하게 낭독 조로) 오, 자연이여, 경이로운 자연이여, 그대는 영원한 빛으로 빛나는 도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심한 자연이여, 우리가 엄마라고 부르는 그대는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채, 삶을 주고 또 죽음을 주나니---

 

[바랴] (애원하듯이) 삼촌!

 

[아냐] 삼촌, 또 시작이시네요!

 

[뻬쨔] 삼촌께선 역시 노란 공을 가운데로 두 번 치기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가예프] 그래, 그만두지, 그만들게.

 

모두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정적. 나직이 중얼거리는 피르스의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별안간, 하늘에서 울리는 듯, 멀리서 줄이라도 끊어진 듯한, 점차 사라져 가는 슬픈 음향이 들려온다.

 

[라넵스까야] 무슨 소리죠?

 

[로빠힌] 모르겠어요, 어디 먼 광산에서 나무통의 줄이라도 끊어진 것 같은데요. 어딘지 굉장히 먼곳 같아요.

 

[가예프] 아니, 어쩌면 황새같은--- 새일지도 모르지---

 

[뻬쨔] 아니면 올빼미던가---

 

[라넵스까야] (부르르 몸을 떤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사이)

 

[라넵스까야] 자, 이제 모두 들어가죠. 어두워졌어요. (아냐에게) 너 우니? 왜 그래? (그녀를 껴안는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그냥.

 

낡아빠진 흰 모자를 쓰고, 외트를 입은 행인이 나타난다. 적당히 취해 있다.

 

[행인] 저 말 좀 묻겠습니다, 여기서 곧장 가면 기차역으로 갈 수 있습니까?

 

[가예프] 네, 이 길을 따라 쭉 가세요.

 

[행인] 대단히 감사합니다. (기침을 한다) 날씨가 참 좋군요--- (낭송 조로) 나의 동포여, 고통받는 형

 

[페이지] 020

 

제여--- 볼가 강으로 나가거라, 그러면 누구의 신음인지 알리니--- (바랴에게) 아가씨, 제발 이 굶주린 당신의 동포를 도와주세요.

 

바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른다.

 

[로빠힌] (화를 내며) 아무리 거지라 해도 예의가 있어야지, 응!

 

[라넵스까야] (얼빠진 표정으로) 자, 이걸 받아요--- (돈주머니를 뒤진다) 은화가 없네--- 에이, 마찬가지지 뭐, 자 이 금화를 받아요---

 

[행인]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퇴장)

 

[바랴] (놀라서) 전 정말 이 집에 못 있겠어, 엄마! 집엔 하인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그런 사람한테 금화를 주는 거야!

 

[라넵스까야] 그래, 내가 바보라서 그런다! 어쩔 수가 없어! 이제 집에 가서, 내가 가진 모든 걸 너한테 넘겨줄게. 로빠힌군, 돈을 좀 더 꾸어 줘요!

 

[로빠힌] --- 그러죠.

 

[라넵스까야] 자, 가요. 시간이 됐어요. 바랴, 우린 여기서 네 혼담을 완전히 결정해 버렸어.축하해.

 

[바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 농담하지 마세요.

 

[가예프] 왜 이리 손이 떨리지--- 오랫동안 당구를 못 쳐서 그런가.

 

[라넵스까야] 자, 모두 가요. 여러분, 이제 곧 저녁 식사시간이에요.

 

[바랴] 아까 그 사람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로빠힌] 지주 가족 여러분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팔월 이십 이일에는 벚꽃 동산이 경매에 붙여집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뻬쨔와 아냐를 남겨놓고, 모두 퇴장.

 

[아냐] (웃으면서) 그 이상한 사람에게 감사를 해야겠어요. 바랴가 놀라는 바람에, 이제야 겨우 단 둘이 되었으니까요.

 

[뻬쨔] 바랴는 우리가 갑자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될까 봐, 하루종일 우리 곁을 서성거리는 거야. 그런 좁은 소견으론, 우리가 사랑을 초월해 있다는 걸 모를거야.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저속한 환상 깨트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목적인 동시에 의의인 거야. 전진! 우리는 저 멀리 빛나는 밝은 별을 향해 지체하지 말고 전진해야 돼! 앞으로 전진! 친구들이여, 낙오하지 마라!

 

[아냐] (손뼉을 치면서) 정말 너무 멋있는 말만 해. (사이) 오늘은 이곳이 너무 아름다워요![뻬쨔] 그래. 아주 좋은 날씨야.

 

[아냐] 뻬쨔 선생님, 선생님은 절 변화시켰어요, 어찌된 일인지 전 그전처럼 이 벚꽃 동산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이 벚꽃 동산을 너무나 사랑해서,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이 세상 아무 데도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뻬쨔] 이 러시아 전체가 우리의 동산이야. 이 지구는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얼마든지 훌륭한 곳이 많이 있어.

 

[페이지] 021

 

(사이)

 

잘 생각해 봐, 아냐. 너의 할아버지도, 증조 할아버지도, 모든 선조가 땅과 농노를 소유하고 있었어.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거야. 이 동산의 모든 벚나무와 그 잎사귀와 줄기 사이에서 가련한 영혼들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 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살아있는 영혼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그 소유자들을 모두 변질시켜 버린 거야.전에 살았던 사람은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말야. 그래서 너의 엄마나, 너나, 삼촌이나 모두 자신들이 빚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지. 전엔 이 집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의 돈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거야--- . 분명한 건,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과거에 대해 속죄하고, 그것을 깨끗이 청산해야 돼. 그리고 과거에 대해 속죄하고 청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직접 특별한 노동에 종사하는 것뿐이야. 열심히 끊임없이 일을 하는거라구.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해, 아냐.

 

[아냐] 전 여기서 나가겠어요. 맹세해요. 그리고 열심히 일할 거예요.

 

[뻬쨔] 모든 걸 우물 속에 내동댕이치고 떠나는 거야. 그리곤 바람처럼 자유로워지는 거야.[아냐] (환희에 불타며) 너무 멋져!

 

[뻬쨔] 나를 믿어, 아냐! 믿어 줘! 나는 아직 삼십도 안 된 풋내기이고 만년 대학생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경험했어! 겨울이 되면 나는 거지처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거지처럼 가난한 처지가 되는 거야. 그리고 운명이 내 모는 대로 하염없이 방랑을 하는 거지! 그러나 나의 영혼은 밤이건 낮이건 어느 때를 막론하고 형용할 수 없는 예감에 넘쳐있어. 나는 행복을 예감해. 아냐! 나는 벌써 그 행복을 보고 있어---

 

[아냐]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달이 떴어요.

 

에삐호도프가 슬픈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달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포플러나무 옆에서 바랴가 아냐를 찾으며 부르고 있다.

 

[바랴의 목소리] 아냐! 어디 있니, 아냐!

 

[뻬쨔] 그래, 달이 떴군. (사이) 바로 저거야, 저게 행복이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난 벌써 그 발소릴 들을 수 있어. 설령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 해도, 그건 상관없어.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될 테니까!

 

[바랴의 목소리] 아냐!

 

[뻬쨔] 또 바랴가 야단이군! (화가 난다는 듯이) 정말 귀찮아!

 

[아냐] 뭐 어때요? 우리 강가로 가요. 거기가 좋을 거 같아요.

 

[뻬쨔] 가자.(두 사람 퇴장)

 

[바랴의 목소리] 아냐! 아냐!

 

[페이지] 022

 

[막] 3막

 

아치에 의해 홀과 구분되고 있는 응접실. 샹들리에가 눈부시다. 현관에서 유태인 악단의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제2막에서의 그 악단이다. 밤. 홀에서는 원무를 추고 있다. 씨메오노프 ―삐쉭의 목소리―" 프롬나드 아 윈느 뻬르" <Promenade a une paire!> (한쌍씩 행진) . 모두들 응접실로 나온다. 첫 번째 조는 삐쉭과 샤를로따 이바노브나, 두 번째는 빼쨔와 라넵스까야, 세 번째는 아냐와 우체국원, 네 번째는 바랴아 역장 등등. 바랴는 남몰래 울고 있어서, 춤을 추면서도 눈물을 닦고 있다. 마지막 조에 두냐샤가 끼여 있다. 모두들 응접실을 지나간다.

 

찌쉭이 소리친다- "그랑―롱 발랑쎄" <Grand-rond balancez!> (다시 원무로 좌우 정렬!) , 그리고 "레 까발리에 아 쥬느 에 르메르씨에 보 담므" <Les cavaliers a genoux et remerciez 팬 dames!) (남자들은 무릎을 꿇고 파트너에게 인사) 라고 외친다.

 

연미복 차림의 피르스, 쟁반에 미네랄 수를 받쳐들고 등장. 삐쉭과 뻬쨔 응접실로 들어온다.

 

[삐쉭] (헐덕이며) 나는 고혈압이라서 춤추는 건 좀 무리지. 헉헉, 벌써 두 번 이나 졸도한 일까지 있고 해서--- 하지만 적토마는 늙어도 적토마라고 난 아직 건강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 조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시곤 했어. 우리 씨메오노프―삐쉭의 집안은 저 깔리큘라가 원로원으로 임명했다던 그의 애마가 조상이라고 말이야--- (말달리는 시늉, 앉는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건 돈이 없다는 거지! 배고픈 말은 당근만 생각하거든 (코를 골다가 다시 눈을 뜨고) 나도 그래--- 돈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어.

 

[뻬쨔] 그러고 보니 어딘지 말을 닮은 데가 있군요.

 

[삐쉭] 말은 좋은 짐승이야--- 말은 팔 수가 있거든---

 

옆방에서 당구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홀의 아치 밑에 바랴가 나타난다.

 

[뻬쨔] (놀린다) 장사꾼 부인! 장사꾼 마누라!

 

[바랴] (화를 내며) 이런 애 늙은이!

 

[뻬쨔] 그래, 나는 애 늙은이야. 그게 나의 자랑이지!

 

[바랴] (생각에 잠긴 씁쓸하게) 저렇게 악단까지 불러다 놓고, 대체 무슨 돈으로 지불하려는지! (퇴장)

 

[뻬쨔] (삐쉭에게) 만약에 아저씨가 이자 돈을 마련하는데 소모한 정력을 다른 일에 쏟았다면, 아마 이 나라를 혁명했을지도 몰라요.

 

[삐쉭] 니체가 말했지. "위조지폐를 만들어도 괜찮다"고 말야.

 

[뻬쨔] 아니, 니체를 읽어 보셨나요?

 

[삐쉭] 아, 아니, 우리 딸내미가. 어쨌든, 나는 지금 위조지폐라도 만들고 싶은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어--- 내일 모레 삼백 십 루블을 갚아야 하거든--- 백 삼십 루블은 이미 구했는데---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돈이 없어졌어! 잃어버렸나봐! (눈물을 글썽이며) 어디 갔

 

[페이지] 023

 

지? (희색이 만면해지며) 아, 여기 있었군, 안쪽에 달라붙어 있었어--- 아이구, 식은땀이 다 나네---

 

라넵스까야와 샤를로따 등장

 

[라넵스까야] (콧 노래를 부르며) 오빠가 왜 이렇게 늦지? 시내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두냐샤에게) 얘, 저 악사들에게 차를 갖다 줘---

 

[뻬쨔] 아마 경매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보죠.

 

[라넵스까야] 사실 지금 악사를 부를 때도 아니고, 무도회를 열 때도 아닌데--- 하지만 괜찮아--- (앉아서 조용히 노래한다)

 

[샤를로따] (삐쉭에게 트럼프 카드를 내준다) 자, 여기 카드가 있어요. 그중 어느 것이든 한 장을 생각해 두세요.

 

[삐쉭] (호기심 있게) 생각했습니다.

 

[샤를로따] 그럼, 카드를 잘 섞어보세요. 네, 좋습니다. 이리 주세요, Ein, zwei, drei! (하나, 둘, 셋!) 자, 이제 찾아보세요. 그 카드가 옆 주머니에 들어 있을 테니---

 

[삐쉭] (옆주머니에서 카드를 끄집어낸다) 스페이드 팔! 맞아! (놀라면서) 아니 이게 정말이랍니까요?

 

[샤를로따] (손바닥 위에 카드 한 묶음을 놓고, 빼쨔에게) 빨리 말해 주세요, 맨 위에 있는 카드가 뭐죠?

 

[뻬쨔] 그러죠, 스페이드의 퀸.

 

[샤를로따] 좋아요! (삐쉭에게) 자, 멘 위 카드는 뭐죠?

 

[삐쉭] 하아트의 에이스.

 

[샤를로따] 좋아요! (손을 한번 치자, 한 묶음의 카드가 사라진다)

 

[삐쉭] (놀라며) 정말 대단합니다요! 샤를로따는 정말 매력적이야--- 나는 당신한테 홀딱 반했어.

 

[뻬쨔] (삐쉭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야말로 발정난 말이군요.

 

[샤를로따] 자, 주목하세요, 한 가지 더 마술을 보여드리겠어요. (의자 위에서 망토를 집는다) 이건 아주 좋은 망토죠. 이걸 팔까 하는데--- (흔든다) 누구 살 사람 없어요?

 

[삐쉭] (놀라며) 정말 대단합니다요!

 

[샤를로따] Ein, zwei, drei! (재빨리 망토를 치켜든다)

 

망토 뒤에 아냐가 서 있다.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하고는 엄마 곁으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뒤쪽 홀로 사라진다.

 

[라넵스까야] (박수를 친다) 브라보! 브라보!---

 

[샤를로따] 다시 한번! Ein, zwei, drei!

 

망토 뒤에 바랴가 서서 인사를 한다.

 

[삐쉭] (놀라며)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요!

 

[샤를로따] 이것으로 끝! (망토를 삐쉭에게 던지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홀로 뛰쳐나간다)

 

[페이지] 024

 

[삐쉭] (허둥지둥 그녀 뒤를 붸으며) 샤를로따! 샤를로따! 나 오늘 밤 책임 져 줘! (퇴장)

 

[라넵스까야] 오빠는 왜 여태 안 돌아오는 거지? 이렇게 늦게까지 시내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다 끝났을 텐데. 영지가 팔렸거나, 아니면 경매가 안 됐거나 간에, 왜 이렇게 감감 무소식이지!

 

[바랴] (엄마를 위로하려고 애쓰면서) 삼촌이 샀을 거예요. 전 확신해요.

 

[빼쨔] (비웃는다) 히히히

 

[바랴] 할머니가 빚을 떠안는 조건으로 영지를 사겠다는 위임장을 보내주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아저씨가 꼭 사실 거라구, 하늘이 도와 줄 거예요.

 

[라넵스까야] 숙모님은 자기 명의로 영지를 사라고 하면서, 만 오천 루블을 보내 주셨어. 그렇지만 그 돈으론 이자도 못 갚아, 알아? 말하자면 우릴 못 믿는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오늘은 내 운명의 날이야, 운명---

 

[뻬쨔] (바랴를 놀려 준다) 장사꾼 마누라!

 

[바랴] (버럭 성을 내려) 만년 대학생! 벌써 두 번이나 대학에서 붸겨난 주제에!

 

[라넵스까야] 왜 그렇게 화를 내니? 로빠힌 일로 너를 놀란다구 그렇게 화를 낼 게 뭐야? 너만 좋다면 로빠힌과 결혼를 해도 상관없어. 그 사람은 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러나, 정 싫다면 그만두고--- 누구도 뭐랄 사람 없어.

 

[바랴] 엄마, 솔직히 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좋은 분이고 저도 그 사람을 좋아해요.

 

[라넵스까야] 그럼, 결혼을 해. 무얼 기다리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구나!

 

[바랴] 하지만, 여자 쪽에서 먼저 청혼을 할 수는 없잖아요. 벌써 이 년 동안이나 모두들 저에게 그 사람의 일로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없거나, 농담으로 돌리거나 할 뿐이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점점 부자가 돼가고 있는데다가 일에 푹 빠져 있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것엔 관심도 없을 거라구요. (사이) 만약 제게 조금이라도 돈이있다면, 단돈 백루블만이라도 있다면, 저는 모든 걸 다 버리고 멀리 떠났을 거예요. 어디 수녀원에라도 갔을거예요. 엄마, 전 일을 하지 않곤 못 살아요. 한시도 일 없이는 못 배기겠어요.[뻬쨔] 좋은 일이야!

 

야샤, 등장.

 

[야샤]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에삐호도프가 당구 큐두대를 부러뜨렸어요--- (퇴장)

 

[바랴] 아니, 에삐호도프가 왜 여기 와 있어? 누가 당구를 치라고 허락했지? 정말 사고뭉치들이야--- (퇴장)

 

[라넵스까야] 뻬쨔, 바랴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애라는 걸 잘 알잖아.

 

[뻬쨔] 너무 극성스러워 그렇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참견만 하거든요. 여름내내, 나와 아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줄곧 귀찮게 따라다녔어요.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는지? 하지만 저는 그런 눈치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어요. 나는 그런 속물이 아니니까요. (강조한다) 우리는 사랑을 초월하고 있으니까요.

 

[라넵스까야] 그렇다면, 내가 하는 건 사랑 이하의 것인가--- (몹시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오빠가 왜 여태 안 오지? 팔렸는지 안 팔렸는지---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나는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질 않아. 무엇을 생각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조차 없어, 난 지금 제 정신이 아닌 것

 

[페이지] 025

 

같아---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야---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뻬쨔, 제발 나를 도와줘. 아무 말이든 좋으니, 얘기를 좀 해 줘, 응? 아무 말이라도---

 

[뻬쨔] 오늘 영지가 팔리건 안 팔리건 어차피 그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겁니다. "지난 길을 뒤돌아보지 마라"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진정하세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참된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셔야 해요.

 

[라넵스까야] 어떤 진실 말하는 거야? 뻬쨔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장님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아. 모든 중대한 문제를 거침없이 척척 해결해나가는 건 아직도 자기가 젊고 또 여태까지 자신의 문제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로 무모하리 만치 용감하게 앞길을 내다보고 있어, 빼쨔는. 그러나 그것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직 젊은 눈에 가려저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무서운 것도 없고, 예상하지도 않기 때문이야. 젊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용감하고, 정식하고, 진진해. 하지만, 손톱만큼이라도 좀 너그럽게 생각해 봐 줘. 그리고 날 가엾게 좀 생각해 줘. 나! 여기서 태어났어. 나의 아버지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여기서 사셨구. 나는 이 집을 사랑해. 이 벚꽃 동산 없는 나의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구. (사이) 그러니까, 만약에 이 집을 꼭 팔아야만 한다면, 이 벚꽃 동산과 함께 나도 팔아줘--- (뻬쨔를 껴안고 그 이마에 키스한다) 내 어린 아들이 바로 여기서 물에 빠져 죽었어--- (운다) 뻬쨔, 제발 나를 이해해줘.

 

[뻬쨔] 아시다시피 저는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습니다.

 

[라넵스까야] 동정?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런 식이 아냐--- (손수건을 꺼낸다.

 

이 때 바닥에 전보가 떨어진다) 오늘 난 정말 괴로워, 죽을 것 같아. 신경이 예민해져서 작은 소리에도 몸하고 마음이 떨리지만, 내 방에 혼자 가 있을 수도 없어. 혼자 있기는 더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뻬쨔, 제발 나를 한심하게 보지마, 응? 나는 뻬쨔를 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기꺼이 우리 아냐를 내주겠어. 맹세해도 좋아. 하지만 뻬쨔, 공부는 해야죠. 대학은 마쳐야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고만 있잖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내 말이 틀렸나? 응? 그리고 그 지저분한 턱수염도 좀 보기 좋게 손질을 해야 하고--- (웃는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웃기게 생겼네.

 

[뻬쨔] (전보를 집는다) 저는 미남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라넵스까야] 이건 빠리서 온 전보야. 매일 같이 와. 어제도, 오늘도. 그 야만인 같은 사람이 또 병에 걸려서 건강이 좋지 않데나---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돌아와달래. 정말 빠리로 가서 그 사람 옆에 붙어 있어야 되는지도 모르지. 뻬쨔, 얼굴을 찌푸리고 있군.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 사람은 병들고, 외롭고, 불행해요. 거기에는 돌봐줄 사람이라곤 없어. 누가 이 사람의 잘못을 감싸주겠어? 누가 제 때에 약을 먹여 주겠어? 게다가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고, 시치미를 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이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이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야.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이건 내 목에 걸린 무거운 돌이야.

 

나는 그 무거운 돌 때문에 자꾸 나락으로 가라앉는다고 해도 나는 그 돌을 사랑하고, 그 돌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 어떡하겠어, 응? (뻬쨔의 손을 꼭 쥔다)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지 말아, 뻬쨔. 아무 말도하지 말아, 아무 말도---

 

[뻬쨔] (눈물을 글썽이며) 이런 무례한 표현을 용서해 주십시오.아무튼 그 사람은 어머닐 울궈먹고 빈털터리로 만들었잖아요!

 

[라넵스까야] 아냐!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귀를 막는다)

 

[뻬쨔] 그 남자가 날건달이란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어머니 혼자만 그걸 모르고 계세요! 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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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짝이 없는 날건달, 아무 데도 쓸모 없는 망나니예요---

 

[라넵스까야]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으며) 너! 벌써 스물 여덟인가 아홉 이지? 그런데도 아직 중학교 이 학년 짜리 같애!

 

[뻬쨔] 뭐라시건 좋습니다!

 

[라넵스까야] 이젠 남자가 될 만한 때도 됐잖아. 그 나이쯤 됐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쯤은 알아야 해.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해야지! (화가 난 어조로) 그래! 너! 순결한 체하지만, 실제로는 결벽증 환자지! 이 괴짜, 얼간이야!

 

[뻬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니,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라넵스까야] "사랑을 초월했다!"구? 사랑을 초월한 게 아니라 사랑을 모르는 거겠지. 그 나이에 애인 하나 없다니! 우리 피르스의 말마따나, 등신, 칠뜨기지 뭐야.

 

[뻬쨔] (불쾌해서) 세상에 어이가 없네요!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황급히 홀 쪽으로 간다) 어이가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가겠어요--- (나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이제 어머님과의 관계는 이걸로 완전히 끝났어요!(현관 쪽으로 퇴장)

 

[라넵스까야] (뒤에서 소리친다) 뻬쨔, 기다려! 농담이야! 뻬쨔!누군가가 현관 층계를 급히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냐와 바랴의 외침 소리가 나고, 곧 뒤이어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냐, 뛰어들어온다.

 

[아냐] (웃으면서) 뻬쨔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달려 나간다)

 

역장이 홀 한가운데 서서, 알렉세이 똘스또이의 시 (죄 많은 여인) 을 낭독한다. 일동 그의 낭독을 듣는다. 그러나 몇 줄 읽기도 전에, 현관 쪽에서 왈츠 음악이 울려 나와 낭독은 중단된다. 일동 춤을 춘다. 뻬쨔, 아냐, 바랴, 라넵스까야가 나온다.

 

[라넵스까야] 자, 우리 뻬쨔! 정말 순진한 마음을 가졌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같이 춤을춰요--- (뻬쨔와 춤춘다)

 

아냐와 바랴 춤춘다. 피르스가 들어와서, 지팡이를 문 옆에 세운다. 야샤도 응접실에서 나와 춤을 구경한다.

 

[야샤] 왜 그래요, 할아버지?

 

[피르스] 기분 나빠. 옛날 무도회에는 장군, 남작, 해군대장같은 분들이 와서 춤을 췄지. 그런데 지금은 우체국장이나 역장 따위를 초대해도, 그들마저 썩 내켜하지 않는단 말이야.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보는군.

 

[야샤] 나도 이젠 할아버지가 보기가 지겨워. (하품을 한다) 빨리 장례식이나 치르세요.

 

[피르스] (중얼거린다)

 

뻬쨔와 라넵스까야, 홀에서 춤을 추고는 응접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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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넵스까야] Merci! 아휴, 좀 앉아야지. (앉는다) 아이, 피곤해.

 

아냐가 들어온다.

 

[아냐] (흥분한 어조로) 엄마, 지금 어떤 사람이 부엌에서 말하는데, 오늘 벚꽃 동산이 팔렸대요.

 

[라넵스까야] 누가 샀대?

 

[아냐] 누구라곤 말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어요. (뻬쨔와 춤을 춘다. 두 사람, 홀로 나간다.)

 

[야샤] 어떤 낯선 노인이 왔었습니다---

 

[피르스] 도련님이 아직도 안 보이시네--- 왜 이렇게 안 돌아오시는 거지? 엷은 외투를 입고 가셨는데,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인데. 젊은 분이라 어쩔 수가 없어!

 

[라넵스까야] 나는 지금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애. 야샤, 어서 누구에게 팔렸는지 알아 봐.

 

[야샤] 그 노인네는 벌써 아까 가 버렸는데요. (웃는다)

 

[라넵스까야] (다소 짜증을 내며) 아니, 넌 뭐가 우스워? 뭐가 그리 좋아서?

 

[야샤] 저 에삐도호프가 우스워서 죽겠군요. 한심한 사람이에요. 스물 두 가지의 불행 말입니다.

 

[라넵스까야] 피르스, 만약에 이 영지가 팔리면, 할아범은 어디로 가죠?

 

[피르스] (못알아 듣고) 어디 가냐구요? 이 파티가 끝나기 전 까지 전 아무데도 안갑니다, 염려마세요.

 

[라넵스까야] (사이) 안색이 안 좋아요. 어디 몸이 편찮아요? 가서 좀 쉬도록 해요---

 

[피르스] 제가 가서 쉬면, 이 파티 마무리를 누가 합니까, 하하하!

 

[야샤] (라넵스까야에게) 주인님. 감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다름이 아니라, 만약에 다시 빠릴로 가시게 되면,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여기 남아 있는 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어요.(사방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만, 실로 무식한 나라이고, 사람들은 몰상식하고 따분한 데다가, 음식도 형편없거든요. 게다가 피르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리고 있거든요. 제발 부탁이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삐쉭 등장.

 

[삐쉭] 저--- 아름다우신 부인께 왈츠를 한번 부탁드려도 좋을까요--- (라넵스까야, 그와 함께 간다) 정말 매력적이십니다. 부인, 헌데 백 팔심 루블만을 꼭 빌려야겠습니다--- 부탁이에요--- (춤을 춘다) 백 팔십 루블---

 

두 사람, 홀 쪽으로 옮아간다. 홀 쪽에서 회색 실크 해트에 바둑무늬의 바지를 입은 사람이, 두 손을 흔들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기고 한다. <브라아보, 샤를로따!> 하는 외침소리가 들린다.

 

[두냐샤] (분을 바르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아가씨가 나보고도 춤을 추랬어요, 남자는 많은데 여자가 적다면서요, 그런데 춤을 너무 추어서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뛰어요. 피르스 할아버지, 지금 말이에요, 우체국 직원이 제게 굉장한 말을 했어요. 전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니까요.

 

음악이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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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스] (잘 못알아 듣고) 응?

 

[두냐샤] 글쎄, 나보고 꽃과 같대요.

 

[야샤] (하품을 한다) 아이구, 졸려 (퇴장)

 

[두냐샤] 꽃과 같대요--- 저도 아주 예민한 여자예요. 달콤한 말들을 아주 좋아하죠.

 

[피르스] 응?

 

에삐호도프 등장.

 

[에삐호도프] 두냐샤양! 내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내가 무슨 징그러운 벌레라도 된단 말입니까? (한숨을 쉰다) 정말 비참해서, 이거!

 

[두냐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에삐호도프] 어쩌면, 그 쪽이 옳을 지도 모르죠.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씀드려서 안됐습니다만--- 이런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나를 완전히 농락했어요. 나는 내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게는 매일같이 어떤 불행이 일어나지만 난 이미 그건 것에 익숙해 버렸기 때문에, 웃으며 그 운며을 받아들이고 있죠. 당신은 내게 약속을 해 줬어. 그래서 비록 나는---

 

[두냐샤] 제발 부탁이니, 우리 나중에 얘기하기로 해요. 지금은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저는 지금 황홀한 상상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부채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에삐호도프] 내게는 매일같이 어떤 불행이 일어나요. 그러나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저 웃으며 받아들이죠. 아니, 오히려 비웃어 넘기고 있을 정도예요.

 

홀에서 바랴, 등장.

 

[바랴]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정말 어떻게 된거 아냐. (두냐샤에게) 너도 저리가, 두냐샤.(에삐호도프에게) 당구를 치면서 큐대를 부러뜨리지 않나, 손님처럼 응접실에서 거들먹거리질 않나.

 

[에삐호도프] 이렇게 말하긴 뭣합니다만, 그쪽이 나를 구박할 권리는 없어요.

 

[바랴] 널 구박하는 게 아니야. 사실을 말하는 거지. 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쏘다니기나 하고 일을 통 하지도 않잖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널 회계으로 두고있는지, 알 수가 없어.

 

[에삐호도프] (모욕을 느끼듯이) 내가 일을 하건, 돌아다니건, 먹건, 당구를 치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리판단을 하실 수 있는 분이거나 더 나이가 드신 분들뿐이에요!

 

[바랴] 뭐라구!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발끈 성을 내며)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래, 그럼,나는 사리판단을 하지 못한단 말야? 당장 여기서 나가! 당장!

 

[에삐호도프] (겁에 질린 듯) 좀 교양있는 어조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랴] (제 정신이 아닌 듯) 당장 여기서 꺼져 버려! 꺼져! (에삐도호프 문 쪽으로 가고, 그녀 뒤따른다) 스물 두 가지 불행같으니! 꺼져! 다신 내 눈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 (에삐호도프 퇴장. 문 저편에서 그이 목소리가 들린다)

 

[에삐호도프] 나 고소할거야!

 

[바랴]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피르스가 문 가에 세워놓은 지팡이를 집어든다) 와라--- 올 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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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본때를 보여 줄 테니--- 그래, 이거나 받아라! (지팡이를 휘두른다)

 

바로 이때 로빠힌 등장. 바랴가 휘두른 지팡이에 머리를 맞는다.

 

[로빠힌] 악!(아픔을 참고 바랴를 본다) 대단한 환영식인데!

 

[바랴] (사이) 미안해요!

 

[로빠힌] 천망의 말씀을. 그렇게 정중히 맞아 줘서 정말 고마워.

 

[바랴]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요. (옆으로 물러난다. 이윽고 뒤돌아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묻는다) 다치진 않았어요?

 

[로빠힌] 아니, 괜찮아. 큼직한 혹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삐쉭] 이게 누구야, 로빠힌이 왔어. (로빠힌과 키스한다) 어, 이거, 코냑 냄새가 나는데! 우리도 여기서 한 판 벌이고 있는 중이야.

 

[홀에서의 목소리] 로빠힌이 왔어! 로빠힌이 왔다구!

 

라넵스까야 등장.

 

[라넵스까야] 왔어요? 왜 그렇게 늦었어? 오빠는?

 

[로빠힌] 저하고 같이 왔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라넵스까야] (갈피를 못 잡으며) 그런데, 어떻게 됐지? 경매는 이뤄졌어? 어서 말해봐!

 

[로빠힌] (자신의 기쁨을 드러낼까봐 두려운 듯이, 망설이는 어조로) 경매는 네 시경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린 기차를 놓쳐서 아홉 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괴롭게 숨을 몰아쉰다) 후우!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가예프, 등장. 오른손엔 물건을 사 들고, 왼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라넵스까야] 오빠, 어떻게 됐어요? 오빠? (초조하게 울먹이는 소리로) 어서 말해 줘요, 제발---

 

[가예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내젓는다. 피르스에게, 울면서) 이걸 받아--- 여기 생선을 좀 사왔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질 못했어--- 아주 힘든 하루였어! (당구실의 문이 열려 있어서, 당구를 치는 소리와"칠과 십 팔"하는 야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예프의 표정이 변한다. 이미 울고 있지는 않다) 후, 완전히 녹초가 됐어. 피르스, 좀 도와줘.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 (홀을 거쳐 자기 방으로 간다. 피르스 뒤따른다)

 

[삐쉭] 경매는 어떻게 됐어? 어서 얘기 좀 해 봐!

 

[라넵스까야] 벚꽃 동산이 팔렸어?

 

[로빠힌] 예, 팔렸습니다.

 

[라넵스까야] 누가 샀는데?

 

[로빠힌] 제가 샀습니다.

 

(사이)

 

라넵스까야, 파랗게 질려 버린다. 만약에 옆에 안락의자와 테이블이 없었다면, 아마 졸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랴는 허리춤에서 열쇠뭉치를 끄른 다음, 응접실 한복판 마룻바닥에 던지고는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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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빠힌] 제가 샀습니다! 모두 좀 기다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네요--- (웃는다) 우리가 경매장에 갔더니, 제리가노프는 벌써 거기 와 있었어요. 우리 가예프 선생은 일만 오천 루블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제리가노프는 부채 위에다 삼만 루블을 더 불렀어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 나는 그 자를 상대로 사만을 올렸죠. 그러자, 그 자가 사만 오천을 불렀고, 난 오만 오천으로 응수했어요. 이렇게 그 자는 오천루블씩 올려가는데, 나는 일만씩 올렸죠--- 마침내 끝이 났어요. 부채 위에 구만 루블을 불렀더니, 결국 내게로 낙찰되었어요. 이 벚꽃 동산은 이제 제 꺼예요! 제 꺼라구요! (호탕스럽게 웃어댄다) 오오, 하나님, 벚꽃 동산이 이제 내 꺼예요. 제가 술에 취해 미쳐 버렸다고 해도 좋고, 제가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좋아요--- (발을 구른다) 그러나 저를 비웃지는 말아 주세요!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덤 속에서 저를 보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노상 매나 맞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돌대가리,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바로 이 동상 걸린 로빠힌이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지를 샀으니까요.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농노로 지냈고, 여기 부엌에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 영지를 내가 산 거예요. 이건 생시가 아니에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죠. 이건 마치 뭐랄까--- 이것은 당신들이 상상했던 것이에요. 다만 불확실한 것처럼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것이죠. (정답게 미소지으며, 열쇠를 집는다) 열쇠를 집어던졌군요. 이젠 이 집 살림을 하지 않겠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겠죠--- (열쇠를 잘랑거린다) 상관없어.

 

오케스트라의 리듬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봐! 악사들! 연주를 부탁해요. 내가 듣고 싶으니까! 모두 와서 봐요. 이 로빠힌이 벚꽃 동산을 도끼로 베어 없애는 것을요! 우린 여기에다 여름 별장을 세울 거고, 우리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여기에서 새 삶을 살 거예요--- 음악을, 연주해요! 음악이 연주된다. 라넵스까야, 걸상 위에 쓰러진 채 서럽게 울고 있다. (나무라듯이) 도대체 왜, 왜 제 말을 듣지 않으셨어요? 아주머니, 정말이지 안됐지만, 이젠 돌이킬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아, 이 모든 게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군요. 이 혼란스럽고 불행한 생활이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삐쉭] (그의 팔을 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울고 계셔. 우린 홀 쪽으로 가자구. 혼자 계시게 놔둬--- 자, 가자구--- (그의 팔을 잡고 홀로 끌고 간다)

 

[로빠힌] 어떻게 된 거야? 좀더 크게 연주해요! 이젠 내가 하라는 대로하면 돼요! (비꼬는 어조로) 이 벚꽃 동산의 새 주인이 나가신다! (탁자에 부딪쳐 하마터면 촛대를 떨어뜨릴뻔 한다) 괜찮아, 난 뭐든지 다 살 수 있어! (삐쉭과 퇴장)

 

홀과 응접실에 라넵스까야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쭈그리고 서럽게 울고 있다. 악단은 조용히 연주하고 있다. 아냐와 뻬쨔, 빠른 걸음으로 등장. 아냐, 엄마곁으로 다가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뻬쨔는 홀 입구에 멈춰 선다.

 

[아냐] 엄마--- 엄마, 울어?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예쁜 우리 엄마, 난 엄마를 사랑해--- 엄마,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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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 잘된 일이야, 응? 벚꽃동산은 팔렸어. 이젠 없어.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울지 마, 엄마. 엄마한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잖아. 그리고 아름답고 순수한 엄마의 그 마음도 남아 있구--- 가자, 나하고 같이 가. 엄마, 응, 여기서 떠나!--- 우리 여기보다 더 훌륭한 새 동산을 만들자, 응. 그러면 엄마도 아주 행복해질 거야. 그때 엄마도 웃게 될 거야. 엄마, 가요. 응? 우리 모두 떠나는 거야! 우리 모두! 막

 

[페이지] 032

 

[막] 4막

 

제1막과 같은 무대. 창문에는 커튼도 없고 그림 한 장 걸려 있지 않다. 그저 약간의 가구가, 팔려고 내놓은 듯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을 뿐이다. 공허감이 감돈다. 출입문 옆과 무대 안쪽에 트렁크와 여행용 보따리들이 쌓여 있다. 왼쪽 문은 열려져 있고, 거기서 바랴와 아냐의 목소리가 들린다. 로빠힌은 서서 기자리고 있다. 야샤, 샴페인을 따른 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있다. 현관 앞에서는 에삐호도프가 상자를 묶고 있다. 무대 뒤 안쪽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들이 작별 인사를 온 것이다.

 

[가예프의 목소리]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앞으로 좋은 농작 일 부탁합니다. 저희들도 잘 살겠습니다.

 

시끄러운 소음이 멎는다. 현관 쪽에서 라넵스까야와 가예프 등장. 부인은 울고 있지는 않지만, 얼굴은 창백하고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녀는 한 마디도 입을 열 수가 없다.

 

[가예프] 너 제 정신이니? 지갑을 통째로 주면 어떡해, 응?

 

[라넵스까야] 어쩔 수 없었어! (두 사람 퇴장. 나가며) 불쌍하잖아.

 

[가예프] 뭐가 불쌍해?

 

[로빠힌] (문을 향해, 두 사람 뒤로) 자, 모두, 이별주를 한 잔씩 들죠. 시내에서 사온다는 걸 미처 깜박 잊고, 역전에서 간신히 한 병 구해 왔어요. 자, 어서! (사이) 왜 그러세요? 안 드시겠어요? (문에서 떨어져) 이럴 줄 알았다면, 사오지 않는 건데--- 그럼, 나도 마시지 않겠어.

 

(야샤,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쟁반을 내려 놓는다) 야샤, 너나 마셔.

 

[야샤] 그럼,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남아있는 분들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마신다) 어, 이거 진짜 샴페인이 아닌데요.

 

[로빠힌] 한 병에 팔 루블이나 준건데. 벌써 시월인데도 밖은 아직 햇빛이 따뜻하고 조용해.일 하기엔 좋은 날씨야. (시계를 보고, 문 쪽을 향하여) 여러분, 기차 시간까지 사십 육 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십 분 후엔 역으로 떠나야 해요. 좀 서두르셔야 겠어요.뻬쨔, 외투를 입고 뜰에서 들어온다.

 

[뻬쨔] 헌데 제기랄, 내 덧신이 대체 어디 간 거야?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문을 향하여) 아냐, 내 덧신 못 봤어? 보이지가 않아!

 

[로빠힌] 나는 하르꼬프로 가. 겨우내 하르꼬프에서 지낼 작정이지. 요샌 일도 안하고 여기서 계속 노닥거리기만 했는데--- 난 할 일이 없으면 정말 괴롭거든. 일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인데--- 내 손으로 뭘해야 될지 모르겠거든. 마치 남의 손처럼 이렇게 건들건들 이상하게 늘어져 있는 것 처럼 느끼긴 처음이야.

 

[뻬쨔] 우리가 사라지면, 예전처럼 돈버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겠지.

 

[로빠힌] 자, 한 잔 합시다.

 

[뻬쨔] 아니, 생각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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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빠힌] 그럼, 이제 모스끄바로 가나?

 

[뻬쨔] 내일. 오늘은 여기 사람들을 전송하고---

 

[로빠힌] 음, 그럴 테지--- 교수들이 강의를 하지 않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뻬쨔]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

 

[로빠힌] 도대체 대학에서 공부한 지 몇 년이나 됐냐?

 

[뻬쨔] 좀 더 색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지. 그건 너무 많이 쓴 방법 아냐? (덧신을 찾는다) 내가 헤어지는 마당에 한 마디 충고를 하지--- 너무 설치지마. 설치는 버릇을 고치라구! 그거니까 여기에 별장을 짓고, 그 별장 거주자들이 앞으로 독립된 농장 경영자가 되려는 것도 일종의 설치는 거야.

 

[로빠힌] (그를 껴안는다) 잘 가. 돈 필요하지 않아? 학비는 있어? 내가 좀 줄까?

 

[뻬쨔] 나한테? 필요 없어. 내가 거지야?

 

[로빠힌] 그럼 빌려 줄게. 돈이 없잖아?

 

[뻬쨔] 아니, 있어. 번역료로 받은 게 있어. 이 가방 안에. (근심스러운 듯이) 헌데 내 덧신이 어디 갔지?

 

[바랴] (옆방에서) 여기 있어요. 가져가! (덧신 한 짝을 무대 위에 던진다)

 

[뻬쨔] 왜 화는 내고 그래요? 흠--- 이건 내 것이 아냐!

 

[로빠힌] 지난 봄에 난 3000평 땅에 양귀비를 심어서 사만 루블의 순이익을 올렸어. 그렇게 사만루블을 벌었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난 여유가 있으니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래? 난 원래 농사꾼 출신이라 무식하고 단순하지만 없으면 빌리고 갚고 하는게 경제 논리 아냐?

 

[뻬쨔] 당신 부친이 농사꾼이었거나, 나의 아버지가 약제사였건 출신은 아무 상관없는거야.(로빠힌 돈지갑을 꺼낸다) 됐어, 그만둬---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나는 받지 않을 거야.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야. 그러니까, 부자건 가난뱅이건 간에, 뭇 사람들이 고상하고 고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내게는 하찮은 거라 이거지. 나는 그런 도움 없어도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어. 나는 강하고! 자존심이 있다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최고의 진리와 최고의 행복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맨 첫 대열에 서 있구!

 

[로빠힌] 그런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뻬쨔] 물론, 꼭! (사이) 도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길을 가르쳐 줄 거야.

 

멀리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들려 온다.

 

[로빠힌] 자, 그럼 떠날 시간이야. 우린 서로서로 잘난 체 하지만, 이 지구상에서 하찮은 존재일 뿐이지. 농사를 짓다 보면 자연만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하지만 열심히 일만 한다면, 마음이 편해지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아는 것 같아. 그런데 이 땅에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며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거든. 아니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가예프 선생은 은행에 취직해서 연봉 육천 루블을 받는다던데요--- 하지만 오래 견디어 내지 못할 거예요. 게으름벵이시니까---

 

[아냐] (문간에서) 엄마가 벚꽃 나무를 자르지 말아 달래요. 떠나기 전까지 만이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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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쨔] 그래, 이건 정말 심한 거야--- (현관을 지나 퇴장)

 

[로빠힌] 맞아--- 바보같은 놈들. (뻬쨔을 따라 퇴장)

 

[아냐] 피르스를 병원에 보냈겠지?

 

[야샤] 아침에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이 보냈겠지.

 

[아냐] (홀을 지나가는 에삐호도프에게) 아저씨, 피르스를 병원에 보냈는지 좀 알아봐 줘요.

 

[야샤] (기분나쁜 듯) 오늘 아침에 내가 말했다니까. 왜 같은 말을 자꾸 몇 번씩이나 묻는 지 모르겠네!

 

[에삐도호프] 내가 장담하는데, 피르스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이번만은 수리가 되지 않을 겁니다. 조상님 곁으로 찾아갈 때가 됐죠. 정말 부러울 정도로 오래 살았어. (트렁크를 보자 상자 위에 올려놓자, 상자가 눌려 찌그러진다)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퇴장)

 

[야샤] (비웃는 어조로) 스물 두 가지 불행같으니라구---

 

[바랴] (문 밖에서) 피르스를 병원에 보냈대?

 

[아냐] 보냈대.

 

[바랴] 근데, 이 편지는 왜 두고 갔지? 의사선생님한테 보내는 건데.

 

[아냐] 어머, 그럼 빨리 따라 보내야겠네--- (퇴장)

 

[바랴] (옆방에서) 야샤는 어디 있지? 엄마가 찾아.

 

[야샤] (한 손을 내젓는다) 아이구, 지겨워.

 

두냐샤, 줄곧 짐 옆에서 바쁜 듯이 서성거리다가, 이제 야샤가 혼자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그 옆으로 달려온다.

 

[두냐샤] 어쩜 눈길 한번 주지 않죠, 야샤! 떠나시는 거죠--- 저를 버리구요--- (울면서 그의 목에 매달린다)

 

[야샤] 아니, 왜 울어? (샴페인을 마신다) 인제 엿새 후면 나는 디시 빠리에 있을 거야. 우린 내일 급행열차를 타고 떠나. 두 번 다시는 우리를 보지 못할 거야. 믿어지지 않아. 비브 라 (안녕) 프랑스!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여기선 살수가 없다구. 그러니 어쩌겠어. 무식한 것들도 신물이 나도록 봤지. 이젠 지겨워. (샴페인을 마신다) 아니, 왜 우는 거야?

 

[두냐샤]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을 바른다) 빠리에 가면 꼭 편지 주세요. 사랑했어요! 야샤! 정말로 사랑했어요!

 

[야샤] 사람들이 온다. (트렁크 옆에서 바쁜 듯이 서성거리며 낮게 노래를 부른다)

 

라넵스까야, 가예프, 샤를로따 등장

 

[가예프] 이제 우리도 떠날 때가 됐어.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야샤를 바라보며) 도대체 어지서 이런 생선 냄새가 나지?

 

[라넵스까야] 한 십 분만 더 있다가 마차를 타요--- (방안을 한 번 둘러본다) 안녕, 잘 있어.

 

그리울 거야. 정말 오래된 집이야.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테고, 그러면 더 이상 여기 없겠지. 아, 이 벽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아 왔을까요!(딸에게 열렬히 키스한다 ) 아냐. 넌 기쁘니?

 

[아냐] 난 너무 기뻐, 정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걸, 엄마!

 

[가예프] (쾌활하게) 그래 이젠 모든 게 다 잘됐어. 벚꽃 동산이 팔리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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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말고 괴로워 했었잖니. 그런데 이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없게 되니까, 모두 안정이 되고 오히려 활기까지 띠게 됐어. 이제 나는 은행원이야, 금융인이란 말이야. 연봉 육천 루블을 받는--- 노란 공은 가운데로, 그리고 아무튼 너도 전보다 좋아 보여. 이건 사실이야. 정말이야.

 

[라넵스까야] 그래요, 한결 신경이 안정돼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하인들한테서 모자와 외투를 받는다

 

잠도 잘 오구요. 야샤, 내 짐들을 가져 와. (아냐에게) 아냐,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는 빠리로 가서, 네 백작 할머니가 영지를 사라고 보내 준 돈으로 살 생각이야. 할머니도 건강하셔야 할텐데! 하지만 그 돈도 오래 가지는 못하겟지.

 

[아냐] 엄마, 빨리 돌아올 거지? 응? 나도 공부를 해서 대학에 입학을 할거야. 그리곤 일을 해서 엄마를 도울게. 좋지? (엄마 손에 키스한다) 엄마, 꼭 돌아 오세요---

 

로빠힌 등장. 샤를로따,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가예프] 우리의 행복한 샤를로따는 노래를 다 부르는군!

 

[샤를로따] (갓난아이 비슷하게 싼 꾸러미를 든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응애 응애) 울지 마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응애!--- 응애!--- ) 아이구, 가여워라, 우리 아기! (꾸러미를 있던 자리로 던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로빠힌] 샤를로따, 걱정 마세요. 찾아보죠.

 

[가예프] 모두들 우릴 떠나는구만! 바랴도 가고--- 갑자기 우리는 필요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

 

[샤를로따] 시내엔 내가 살 곳이 없어. 떠나야 해--- (노래한다) 마찬가지야---

 

삐쉭, 등장.

 

[삐쉭] (숨을 헐떡이며) 아이구, 숨차--- 숨 좀 돌려야겠어--- 아, 누구, 물을 좀 주세요---

 

[가예프] 또 돈을 꾸러 온 거야. 정말 미치겠어--- (퇴장)

 

[삐쉭] 오랫동안 못 찾아뵈었습니다--- 부인,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로빠힌에게) 자네도 여기 있었어?--- 만나서 반가워---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자, 받게--- 어서 받아--- (로빠힌에게 돈을 내준다) 사백 루블--- 이젠 팔백 사십 루블만 갚으면 되는 거지?

 

[로빠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를 흠칫 한다) 아니 이건 꿈인가? 도대체 어디서 났어요?

 

[삐쉭] 기다려봐--- 아이구, 더워!---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 영국 사람들이 찾아와선, 내 땅 속에서 흰 찰흙인가 뭔가를 발견했단 말이야--- (라넵스까야에게) 자, 여기 사백 루블입니다.

 

아름답고 훌륭하신 부인--- (돈을 내준다) 나머지는 다음에 드릴께요. (물을 마신다) 지금 오는데 기차 안에서 어떤 젊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 어떤 위대한 철학가가 지붕에서 뛰어내리도록 권하고 있다는 거야--- "어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만사는 해결된다는 거지, (놀란 표정으로) 대단합니다요! 물 좀 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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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빠힌] 뭐하는 영국인들인데요?

 

[삐쉭] 나는 그 사람들에게 흰 찰흙이 나오는 땅을 24 년 간 빌려주기로 했어. 미안하지만,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 아직도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하거든. 즈노이꼬프한테도 가야만 하고--- 까르다모노프한테도 가야 해. 전부 진 빚을 갚아야지--- (물을 마신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부인, 목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땐 제가 드릴 말씀있습니다.

 

[라넵스까야] 우린 지금 시내로 나가는 길이에요. 그리고 전 내일 프랑스로 떠나요---

 

[삐쉭] 예에? (깜짝 놀라며) 아하, 그래서 가구니--- 트렁크니--- 그렇군요--- (눈물을 글썽이며)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거든요--- 그 영국 사람들은---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살피어 주시겠죠---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세상의 모든 것엔 끝이 있는 법이죠--- (라넵스까야의 손에 키스한다) 만약 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시거든, 바로 이 늙은 말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옛날에 그--- 씨메오노프.삐쉭라던가 하는 사내가 있었지. 그가 천국에 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주세요. 날씨가 참 좋군요--- 아아--- (갈팡질팡 당황하며 퇴장. 그러나 곧 다시 되돌아 와서, 문간에서) 우리 집 딸내미가 안부를 전해 달래요! (퇴장) [라넵스까야] 자, 이젠 떠나야겠어. 떠나긴 하지만 걱정되는 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늙고 병든 피르스야. (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직 5분은 더 있을 수 있군---

 

[아냐] 엄마, 피르스는 벌써 병원으로 갔어요. 야샤가 아침에 보냈대.

 

[라넵스까야] 또 하나의 걱정은 우리 바랴야. 그 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는 버릇이 있는데, 요새 할 일이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처럼 되고 말았어. 창백하게 여윈 데다, 가엾게도 자꾸 울고만 있으니--- (사이) 거기도 그걸 잘 알지--- 그리고 나도 실은--- 그 애를 너에게 시집보내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게다가 거기도 그 애를 데려갈 것 같은 눈치였으니까. (아냐에게 귓속말을 한다. 아냐는 다시 샤를로따에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두 사람 퇴장) 그 애는 그쪽을 사랑하고 있고, 그쪽도 그 애가 싫지는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서로 피하기만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정말 이해가 안 가!

 

[로빠힌] 솔직히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지 자꾸 이상하게 꼬여버렸어요--- 시간이 있다면,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당장 결정을 지어 버릴 수 있지만, 아주머니가 안 계시면, 아무래도 청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라넵스까야] 좋아. 그런 건 단 일 분이면 충분해. 내가 그 애를 불러 줄께.

 

[로빠힌] 마침 샴페인도 준비 됐으니. (컵을 보고는) 저런, 다 마셔 버렸군, 누가 다 마셔 버렸지. (야샤, 기침을 한다) 한 방울도 안 남겼어!---

 

[라넵스까야] (쾌활하게) 좋아, 우린 나갈께--- 야샤! 그 애를 불러줄께--- (문 쪽을 향해) 바랴, 다 두고 이리 좀 나와. 빨리! (야샤와 함께 퇴장)

 

[로빠힌] (시계를 보고) 그래--- (사이)

 

문 밖에서 가까스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 속삭임, 이윽고 바랴, 등장.

 

[바랴] (오랫동안 짐을 살펴본다) 이상한데, 아무 데도 없어---

 

[로빠힌] 뭘 찾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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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랴] 내가 챙겨 놓고도 생각이 안 나서 그래요. (사이)

 

[로빠힌] 이제 어디로 가지.

 

[바랴] 저 말인가요? 라굴린댁으로 가요--- 그 집 일을 돌봐주기로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가정부죠---

 

[로빠힌] 그 집은 야쉬네보 마을에 있는 거지? 아마 여기서 칠십 킬로쯤 될 거야. (사이) 그럼, 이 집에서의 생활도 마지막이네---

 

[바랴] (짐을 둘러보면서) 어디다 두었지--- 트렁크 속에 넣었나--- 그래요, 이 집에서의 생활은 끝났어요--- 그런 생활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로빠힌] 나는 하르꼬프로 가--- 오늘 기차로. 일이 많거든. 이 집에 에삐호도프를 남겨 두기로했어--- 내가 고용했지.

 

[바랴] 그렇군요!

 

[로빠힌] 작년엔 이맘때쯤 눈이 왔었지. 기억나? 그런데 올해는 조용하고 햇빛이 비치는데--- 약간 쌀쌀하긴 하지만--- 영하 삼 도쯤 될까?

 

[바랴] 전 내다보지 않았어요. (사이) 집의 온도계가 깨져버린 걸요--- (사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 로빠힌씨! 어디계세요!

 

[로빠힌] (마치 이 소리를 오랫동안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지금 가! (바삐 퇴장)

 

바랴는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옷 보따리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흐느낀다. 문이 열리고,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라넵스까야 등장.

 

[라넵스까야] 괜찮니? (사이) 자, 이젠 떠나야지.

 

[바랴] (이미 울음을 그치고, 눈을 비비면서) 네, 시간이 됐어요. 엄마, 오늘 안에 라굴린 댁으로 가려면, 기차를 놓치지 않아야 해요---

 

[라넵스까야] (문간을 향해) 아냐, 옷을 입어!

 

아냐, 뒤이어 가예프, 샤를로따 등장. 가예프는 두건이 달린 방한의 외투를 입고 있다. 하인과 마부들이 모인다. 짐 옆에서 에삐호도프가 서성거리고 있다.

 

[라넵스까야] 자 이젠 떠나야지.

 

[아냐] (기쁜 듯이) 출발!

 

[가예프]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 여러분들! 이제 영원히 이 집을 버리고 떠남에 있어, 내 어찌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이 감정을 위해, 내 어찌 고별의 말을 남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냐] (애원하듯이)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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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랴] 그만하세요!

 

[가예프] (울적한 표정으로) 두 번 치기로 노란 공을 가운데로--- 그만 두마---

 

뻬쨔, 이어 로빠힌 등장.

 

[뻬쨔] 자, 모두 가시죠!

 

[로빠힌] 에삐호도프, 내 외투 좀 줘!

 

[라넵스까야] 딱 일분만 더 앉아 있겠어요. 마치 예전에는 이 집의 벽이 어떠했고, 천장이 어떠했는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그걸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아주 열심히.

 

[가예프] 나도 생각난다. 내가 여섯 살 때, 교회 기념일 때, 이 창문에 걸터앉아, 아버지가 저 교회로 걸어가시는 걸 본 일이 있었어---

 

[라넵스까야] 짐은 다 날랐나요?

 

[로빠힌] 그런 것 같습니다. (외투를 입으면서 에삐호도프에게) 에삐호도프, 제대로 다 잘 할 수 있겠지.

 

[에삐호도프] (목쉰 소리로) 염려 마십시오! 주인님.

 

[로빠힌] 목소리가 왜 그래?

 

[에삐호도프] 지금 물을 마시다가 뭔가를 삼켰어요.

 

[야샤] (멸시하는 어조로) 무식한---

 

[라넵스까야] 이제 우리가 가고 나면 여기엔 아무도 없겠어.

 

[로빠힌] 봄까지는 그럴 겁니다.

 

[바랴] (보따리 속에서 우산을 잡아 뺀다. 그 모양이 마치 우산으로 누구를 때리려는 듯이 보인다. 로빠힌,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니, 왜 그러세요--- 전 그럴려고 한게 아니에요

 

[뻬쨔] 모두, 마차에 타시죠--- 시간이 다 됐어요! 곧 기차가 올 겁니다!

 

[바랴] 뻬쨔 선생님, 선생님 덧신이 여기 있네요, 트렁크 옆에. (눈물을 보이며) 어쩌면 이렇게 지저분하고 낡았지---

 

[뻬쨔] (덧신을 신으며) 가시죠, 여러분---

 

[가예프] (몹시 당황하며,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한 표정) 기차--- 정거장--- 가운데 쪽으로 쿠션을 주면서 흰 공을 구석으로---

 

[라넵스까야] 자! 갑니다!

 

[로빠힌] 빠진 사람 없죠? 저긴 아무도 없어요? (왼쪽 문을 잠근다) 여긴 물건이 있으니까, 잠가둬야겠어요. 자, 가시죠---

 

[아냐] 잘 있어. 나의 집! 안녕, 낡은 생활아!

 

[뻬쨔] 축복있으라, 새로운 삶, 만세!

 

바랴, 방을 한 번 둘러보고 천천히 퇴장. 야샤와 개를 데리고 있는 샤를로따. 퇴장.

 

[로빠힌] 내년 봄까지 입니다, 여러분. 자 나가주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퇴장)

 

라넵스까야와 가예프 두 사람만 남는다. 그들은 마치 이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라고 했듯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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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목을 부등켜안고, 남이 들을세라 숨을 죽여 가며 조용히 흐느낀다.

 

[가예프] (절망적인 목소리로) 내 동생, 내 동생이지---

 

[라넵스까야] 사랑하는 나의 집, 아름다운 내 벚꽃 동산!--- 내 인생, 내 청춘, 내 행복이---

 

[아냐의 목소리] (재촉하는 듯한 쾌활한 목소리로) 엄―마!

 

[뻬쨔의 목소리] (쾌활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아―우―우―!---

 

[라넵스까야]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벽과 창문을 보겠어요--- 돌아가신 엄마는 이 방에서 걸어다니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가예프] (시적인 대사로) 류바, 내 사랑하는 동생아, 이제 영원히 이 집을 버리고 떠나는 구나, 지금 나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이 감정은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구나. 우리가 태어나고, 우리가 자라고---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추억이 이곳 벚꽃동산과 함께 사라진다. 밝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기쁨의 눈물이겠지. 내 사랑하는 동생아, 우리 아픈 추억과 행복한 기억을 여기에 묻고 떠나는 구나.

 

[아냐의 목소리] 엄―마!---

 

[뻬쨔의 목소리] 아―우―우―!---

 

[라넵스까야] 지금 간다!

 

무대는 텅 빈다. 문마다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해진다. 정적 속에 나무를 찍는 둔탁한 도끼소리가 은은히 슬프게 울려 퍼진다. 사람의 발소리가 들린다. 오른쪽 문에서 피르스가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양복에 흰 조끼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는 앓고 있다.

 

[피르스] (문 곁으로 다가가서 손잡이를 만져본다) 문이 잠겼어. 다 떠나버렸어---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었군--- 괜찮아--- 여기 좀 앉아 있어야지--- 그런데 도련님은 틀림없이 털외투를 입지 않고 엷은 외투를 입고 떠나셨을 거야--- (근심스러운 듯 한숨을 내쉰다) 내가 챙겨 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저, 젊은 사람들이란 쯧쯧! (알아듣지 못할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인생이 훌쩍 지나갔어. 산 것 같지도 않게 말야--- (옆으로 눕는다) 조금 누워야겠어---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 것도--- 에헤,--- 바보 같으니라구! (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도 같은, 마치 줄이라도 끊어진 것 같은, 슬픈 음향이 멀리서 아련히 들려 오며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윽고 정적이 깃들고, 먼 동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만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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