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공간은 에스파냐의 모험가들에게 ‘타자’ 접촉을 가능케 한 통로였다. 에스파냐의 팔로스항을 출항한 콜럼버스 선단은 68일 만에 카리브해 한 섬에 도착했다. 68일간 힘든 항해 끝에 도착한 이 섬이 콜럼버스에게 구원의 빛과도 같았기에 콜럼버스는 이 섬에 ‘성스러운 구원자’라는 뜻의 산 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주민에게는 이미 구하나하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섬에 자신만의 생각이 반영된 이름을 일방적으로 붙였다는 점에서 ‘정복자’로서 오만이 느껴진다.
콜럼버스의 원주민에 대한 시선도 일방적이었다. 구하나하니 섬 원주민을 대면한 콜럼버스는 그들을 종교도 없는 존재이자 악, 살인, 범죄, 체포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존재로 규정했다. 콜럼버스는 인종적 타자를 보는 유럽의 시선으로 원주민을 문명사회 성원이 지녀야 하는 가치를 결여한 존재로 보았다.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로 진출한 에스파냐의 초기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열등한 존재로 간주한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를 강화해 이익을 증대시키려 했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토지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경작할 노동력이 없다면 토지는 무용지물이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 같은 초기 정복자들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부하들에게 토지는 물론 그 토지에 사는 원주민들을 할당했다. 원주민은 자신들을 ‘위탁’받은 사람들을 위해 노동으로 봉사할 의무를 지며, 원주민을 위탁 받은 자들은 원주민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친절하게 대할 할 의무가 있었다.
■ 엔코미엔다와 엔코멘데로
초기 정복자들에 의해 이렇게 시작된 아메리카 관리 체계를 에스파냐 국왕도 머지않아 승인한다. 엔코미엔다라 이름 붙인 이 관리 체계는 한마디로 정복자에게 토지와 원주민을 하사해 아메리카의 식민사업을 확대해 나간다는 의미였다. 엔코미엔다의 확대에 따라 혜택을 입은 에스파냐인도 늘어났다. 엔코멘데로라고 불린 이들은 ‘신세계판 봉건귀족’의 출현을 예고했다. 이들의 성장은 그렇지만 에스파냐 국왕에게는 적지 않은 근심거리로 다가왔다. 국왕은 엔코멘데로들에게 부여한 특권이 에스파냐 제국의 이익 증진을 위해 활용되길 희망했지만, 엔코멘데로들은 그런 특권을 사적 이익 증진 수단으로 봤다. 원주민에 대한 학대와 야만적 노동 착취의 일상화는 ‘인디언’ 인구의 급속한 감소를 초래했다.
이러한 엔코미엔다가 세습된다면 아메리카에는 국왕의 통제가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특권계층이 출현한다는 의미였다. 모든 엔코미엔다는 현재 그것을 보유한 자가 죽으면 곧 국왕에게 귀속된다고 규정한 1542년 신법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엔코멘데로들의 맹렬한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지만, 엔코미엔다가 세습되는 관행은 아메리카 스페인 정복지에서 뿌리내리지 못했다. 명목상 엔코미엔다의 주인은 에스파냐 국왕이었다. 그렇지만 엔코멘데로 일부는 특권적 지위와 사회적 영향력 등을 통해 토지를 구매하고 재산을 증식시켜 나갈 수 있었다. 엔코멘데로의 후손들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기반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엔코멘데로에게 부여된 특권은 에스파냐 왕실의 ‘문명화 사업’, 즉 원주민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는 사명과 결부된 특권이었다. 일부 엔코멘데로는 이 사명을 잊고 원주민에 대한 과도한 착취를 일삼아 원주민을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1550년 에스파냐의 도시 바야돌리드에 모인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에스파냐의 식민지 확대 과정에서 접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다양한 관점이 회의에서 제기됐지만, 그중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의 논쟁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와 정체성을 둘러싼 에스파냐 식민주의자들의 대립적 관점을 가장 잘 드러냈다.
■ 세풀베다 vs 라스카사스
세풀베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전쟁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미개하여 이성으로는 설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덕과 사리 분별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미개인’에게 우월한 문화를 강제로 부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세풀베다의 신념이었다. 세풀베다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인용하며 원주민을 ‘태생적 노예’로 규정했다. 원주민에게 육체적 봉사보다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태생적 노예와 다를 바 없으며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좋다는 주장이었다. 유럽 식민주의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원주민의 본성에 부합한다고 세풀베다는 생각했다.
라스카사스는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키케로의 관점을 따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본질 역시 에스파냐인과 같으므로 그들이 태생적 노예일 수 없다고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잉카 문명이나 마야 문명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나름의 문자, 법, 종교 등을 갖추고 통치 능력을 지녔다. 유럽인 시각에서 야만으로 비치는 인신공희 같은 행위는 그들 나름의 종교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 라스카사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세풀베다와 같이 전쟁도 불사하는 무력에 의한 원주민 개종보다 그들의 문화와 신앙을 존중하는 선교가 올바른 방식이었다. 라스카사스에게 복음 전파 의무가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었고 그런 방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만 유발하기에 배척돼야 했다.
■ 논쟁의 결론과 그 이면
바야돌리드 논쟁의 결과는 표면적으로 라스카사스의 승리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바야돌리드 회의 이전부터 옹호한 바 있던 살라맹카 대학 신학 교수들은 세풀베다의 주장이 세속적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논리라며 라스카사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에스파냐 왕실로서도 원주민의 노예화를 옹호하는 세풀베다의 견해는 엔코멘데로의 권리를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원주민이 왕실이 아닌 엔코멘데로에게 전적으로 귀속된다면 왕실의 통제는 어려워질 수 있었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라스카사스에게 “원주민의 보호자”라는 위상을 부여했던 사건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에스파냐 제국의 경제적 이해도 결부됐다. 라스카사스 자신이 원주민 권리를 제국의 경제적 이해보다 우선시하기는 힘들었다는 의미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원주민 개개인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태도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엔코미엔다의 착취체계에 내재한 정복의 만용을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 착취가 지속됐다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제국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