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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3. 9.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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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 Basque

 

스페인
면적
7,235km²
인구
2,206,965명
최대 도시
빌바오

 

유럽의 민족 바스크인, 혹은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

이들 바스크 민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로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게르만·라틴족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해 왔다. 오늘날 스페인에는 약 240만 명의 바스크인이 살고 있고 프랑스에는 약 20만 명이 살고 있다. 바스크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이 정도라는 것이고, 조상 중에 바스크인이 있다거나 바스크계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더한다면 이보다 많아진다. 또한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중남미 멕시코, 콜롬비아, 칠레, 필리핀, 아르헨티나, 카나리아 제도 등 해외에도 바스크인들이 이주했으며, 가르시아 등 바스크계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추산하면 1억명을 넘긴다. 스페인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수의 바스크인들이 중남미 등지로 이민가기도 했다. 칠레는 바스크계 성씨를 가진 사람이 인구의 27%에 달하며, 페루는 18%,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10%, 콜롬비아는 5%, 멕시코는 2%가 바스크 혈통을 지녔다고 추산된다. 그리고 이 바스크인들의 특이사항이 있다면 적발, 녹안, 헤이즐색 눈, 벽안을 가지며 혈액형 중에서 O형이 많은 편이고, Rh- 형 혈액형이 유달리 많다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 Rh- 형 비율은 16% 정도라고 하는데 바스크인들은 무려 36%나 된다. 즉, Rh- O형이 흔한데, 적혈 모구증 때문에 유산·사산율이 높아 다수 민족이 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바스크 지역
넓은 의미의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령의 남부 바스크 지방과 프랑스령의 북부 바스크 지방에 걸쳐져 있는 일곱 지역을 통틀어 가리킨다. 표어는 '일곱이서 하나(Zazpiak Bat)'인데, 정작 이 중 셋이 프랑스 영토, 넷이 스페인 영토이다. 면적은 20,947㎢, 인구는 2017년에 3,155,597명이다. 사진의 지도의 색으로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노란색 부분은 프랑스령 북부 바스크이며, 레지옹인 누벨아키텐 전체는 아니고 최남단의 하위 데파르트망인 피레네자틀랑티크이다.
■ 초록색 부분은 스페인령의 남부 바스크지방인 나바라 광역자치주이다.
■ 분홍색 부분은 스페인령으로, 보통 바스크 자치주라고 부르는 바스크 광역자치주이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바스크 광역자치주'에서 서술.

 

 

바스크 광역자치주
지도의 분홍색 부분은 남부 바스크 지방 중에서도 기푸스코아(Gipuzkoa / Guipúzcoa), 아라바(Araba / Álava), 비스카이아(Bizkaia / Vizcaya) 3도로 구성된 바스크 광역자치주로, 좁은 의미의 바스크 지역은 이 곳만을 가리킨다. 분리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방이라 한다면 이 바스크 자치주에 해당한다.

기푸스코아의 대표적인 도시는 도노스티아(Donostia) /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 아라바의 대표적인 도시는 가스테이스(Gasteiz) / 비토리아(Vitoria), 비스카이아의 대표적인 도시는 빌보(Bilbo) / 빌바오(Bilbao)이다. 이 중 빌바오에 있는 아틀레틱 빌바오, 산 세바스티안에 있는 레알 소시에다드, 비토리아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는 지역의 대표적인 구단으로 바스크 더비를 이룬다. 이외에도 바라칼도, 게초, 이룬 같은 도시가 중소규모 도시로 연담되어 있고 소규모 도시로는 피카소의 걸작으로 유명한 게르니카와 라 리가 최소규모 연고지를 자랑하는 SD 에이바르의 에이바르 등이 있다.

 

 

역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최소 기원전 3천 년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는 단일 정체성과 문화가 분명한 단일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선주민들이다. 

이들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다양한 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에 피레네 산맥 부근에 수천 년간 정주민으로 살던 원시 바스크인(Proto-Basque people)과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주민(스페인인, 프랑스인)들 간의 혼혈화된 후손이라는 것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들 원시 바스크인 또한 일단은 여타 토착 서유럽인들과 거의 동일한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엄연한 코카소이드계 인종이라는 것이다. 그저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 수천 년간 유럽의 여타 민족들과 거의 섞이지 않아 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이 유달리 강하게 남았을 뿐이다. 혈액형 비율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것일 뿐 특이한 것은 아니다. 고대 크로마뇽인의 마지막 후손이라느니 심지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판타지스러운 가설도 있었지만, 유전적으로는 그저 평범한 서유럽 인종이다. 

게다가 바스크처럼 고립된 언어와 정체성을 가진 민족은 고대 로마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드물지 않았다. 아예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던 에트루리아어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고, 알프스 산맥 동부에서 쓰이던 라이티아어도 인도유럽어와 달랐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 가까웠던 덕에 기록에 남은 것만 이 정도며, 이런 기층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들이 확산되면서 다 사라져가고, 다소 고립된 지역에 살던 바스크족의 언어만 살아남은 것이다. 

선사시대 유적을 통해 보면 전통적인 바스크인의 거주 지역은 피레네 산맥을 중앙에 두고 프랑스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와 해안에 걸쳐 있었다. 이들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기원전 3,000년~5,000년부터 현재까지) 정착민으로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스크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 시대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에 점점 산지로 이동하며 요새화되는데, 다른 유럽계 민족들과의 마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달 이전부터 바스크족 어부들이 대서양에서 참치잡이로 부를 축적하는 와중에 신대륙까지 비공식적으로 갔다온 적이 여러 번 있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지만 참치잡이를 위해 먼 바다까지 갔다가 우연히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5세기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것 역시 당시 포르투갈의 국가 기간 산업이던 어업을 후원하던 엔히크 왕자가 참치 어장을 찾아서 어선을 이용해 대서양을 뒤지다가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관련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된 빈란드와는 달리 바스크인들의 아메리카 도달설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서 아직 가설에 머무르고 있다. 심지어, 이들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도 있는데, 바로 캐나다에 있는 바스크족의 포경기지 유적인 레드베이 기지가 그 증거다. 이 유적을 캐나다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분석해본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이르게 잡아도 1530년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1492년에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콜럼버스보다는 진출이 늦었던 셈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한 건 맞지만 말이다. 일단은 바스크족들이 스스로 주장한대로, 바스크족 포경업자들이 타국의 지원도 없이 독자적으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바스크족은 참치뿐만 아니라 대구잡이로도 유명했다. 당장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생선 요리가 바로 말린 대구인 바칼랴우(Bacalhau)였다. 

특수부대에서 쓰는 베레모의 유래가 이들의 전통모자인데, 유럽에서 강한 불굴의 전투 민족으로 유명하다. 많은 전쟁을 거치며 바스크족을 건드리는 군대는 이기든 지든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의 군단이 바스크족을 동맹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베리아 반도 곳곳의 다른 켈트족과 이베리아인 성읍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로마 군단병으로 입대해 오늘날의 영국의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도 활약했다. 샤를마뉴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 군대 또한 이들에게 호되게 당했고,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침공해 전선이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까지 밀렸을 때도 방어에 한 획을 담당했다.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 준동에 프랑스의 용병으로 참전에 활약한 바 있으며, 위그노 전쟁에 프랑스 왕실의 외가로 참전해 왕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 당시 프랑스군도 이들의 게릴라 전술로 힘겨워 했다. 게릴라 어원의 유래가 된 민족이기도 하다. 최근까지도 ETA 등 테러 단체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슬람을 상대로만 800여 년 동안 방어 전선을 형성하였고, 통합 스페인 왕국 창립이후 16~17 세기 유럽 최강 스페인 육해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면서도 여전히 많은 바스크인들은 산지에 있는 성읍의 자치권을 얻어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인으로써 완전히 동화되었다. 로마가 망하고 난 한참 이후까지도 가톨릭으로 개종이 상당히 느렸다가 중세 초기에 유럽의 대세를 따라 결국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 때는 소수 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동맹 등으로 외교적으로 자주성을 지켜내면서도 스페인 왕국 성립에 참여해 스페인 시민이 되어 동화되는 등 유연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통합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의 왕가들은 모두 바스크 민족의 왕이었던 산초 3세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스페인 제국 출발의 핵심에는 바스크 민족이 있고 스페인계와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이들의 혈통이 들어간다, 게다가 프랑스에 여왕을 시집 보냄으로써 결혼 동맹으로 동군연합이 되었고 위그노 전쟁에서 부르봉 왕가의 외가로써 참전해 부르봉왕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스크인들이 유럽 강대국들과 결혼 동맹과 군사적 지원에 성공한 결과 많은 유럽 강대국들의 왕가에 바스크인의 핏줄이 흘러서 현재까지도 바스크족을 소수 민족이라 낮춰 보는 국가는 없고 스페인 내에서도 꽤나 위상이 높다.

중세 시대 바스크족은 다른 유럽인들과 다르게 바이킹들과 평화적으로 교류했는데 이들로부터 조선술, 항해술을 전수받았고 바이킹 몰락 이후에는 대서양의 주인으로 불렸던 만큼 조선술과 항해술에 매우 뛰어났다.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도 이미 신대륙을 다녀왔던 바스크족이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당시 어획, 고래잡이, 선박, 철광석 수출 등의 사업을 했고 영국, 북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며 무역 흑자로 막대한 수입을 올려서 당시부터 꽤나 부유한 지역이었다. 

바스크 지방은 원래 나바라 왕국의 영토였지만 1512년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다만 통일 스페인이라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연합체였기 때문에 지방 분권성이 강했고 다른 지방들이 그러하듯 바스크 지방 또한 폭넓은 자치를 누렸다. 특히 스페인의 군주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바스크 지방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바스크 지방에는 더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

19세기 말 산업 혁명 시기 영국 자본이 많이 유입되면서 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했고 금융 쪽에 강하다는 점은 지금도 남아 BBVA 은행(라리가 공식 스폰서인)과 이베드롤라(Ibedrola) 은행의 본사가 빌바오에 위치하고 있다. 바스크인들이 경영하는 몬드라곤 협동 조합은 독특한 운영방식으로 대부분의 근무처와 다른 장점을 내세워 웬만한 대기업 이상의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일자리 창출 또한 우수하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원래 바스크 지역은 자치권 확대 약속 때문에 공화 진영에 가담했지만 공화 진영 중 가장 보수적 색채가 짙은 지역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바스크 지역은 전쟁 전부터 중앙 정부와 멀찌감치 떨어져 나머지 유럽, 아메리카와 장사해 번 돈을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현지 산업 노동자들과 소위 '민족 자본가'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바스크 가톨릭 사제들 또한 스페인 전국 규모의 극우 정치판과 거리를 두어 바스크 지방 자체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다른 지방보다 좌우 계급/이념 갈등, 세속주의/가톨릭 교권 사이의 갈등이 확연하게 적었다. 이러니 대외적으로는 자치권 확대를 위해 군인들이 미는 스페인 중앙 집권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공화국 정부와 전략적 동맹을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머지 스페인 공화파 진영을 휩쓸었던 주로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사회 혁명과 무관하게 돌아갔다.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졌던 로마에 동화되면서도 특유의 전통적인 남녀 평등 상속 문화를 중세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고수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에서 전통적으로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 유래가 되었던 민족으로, 크루세이더 킹즈 2에도 여성 상속이 가능한 민족으로 나온다.

 

 

정치와 분리주의

 

1937년에 국민군이 바스크 지역을 원정할 때 바스크 지역 군인들에게 평화적인 대우를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그 약속은 무참히 짓밟혔다. 유명한 게르니카가 바스크 지방의 도시다. 프랑코 정권 수립 후에는 중앙 집권화 정책 때문에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바스크인의 무장 투쟁 단체인 ETA가 등장해 2017년에 해체될 때까지 분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쪽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독립을 요구했던 카탈루냐보다 더 적극적이었는데 중앙 정부 인사를 납치해서 죽이거나 정부 건물에 폭탄 테러를 하는 등 무력 투쟁이 주류였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분리주의 테러리스트 중 가장 악명 높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스크였다. 예를 들면 1992년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및 세비야 엑스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기 때문에 ETA의 테러를 예상했으나, 정작 ETA는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은 뒤 민주화가 진전되고, 주민들 중에 스페인과 화해하고 무장투쟁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일자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신입 전사가 거의 오지 않고, 혁명세도 걷히지 않아 쇠퇴해갔다. 이것 때문인지 폭력투쟁은 완전히 사라졌고 스페인 정부의 통치에 순응하고 있지만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더불어 스페인 정부에서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지역이다.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멤버이자 작사 담당인 파블로 베네하스의 아버지인 호세 마리아 베네하스(1948~2015)가 바스크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경제
스페인에서 경제 수준이 월등히 높은 지역이고 부자 동네임을 자처하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보다도 1인당 GDP가 훨씬 높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주(州)에 속했다.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 사정이 나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예로 2010년 기준 안달루시아의 1인당 GDP가 22,000$인 데 비해 바스크는 41,000$다. 바스크의 경제력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실업률의 경우 2012년 바스크의 실업률이 14%였다면 안달루시아의 실업률은 35%였다. 그렇지만 급여 수준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페인 국립 통계청(INE)에서 발간한 Encuesta anual de estructura salarial(연간 임금 구조 조사)을 보면 País Vasco의 평균 임금은 26,535유로, 스페인 전체 평균은 22,726유로다. 먼저 언급된 안달루시아는 20,891유로. 제일 못 버는 것은 19,278유로의 카나리아 제도다. 어쨌든 스페인에서 소득이 제일 높고 전체 평균보다 20% 가까이 높으니 경제력이 제일 우월한 것은 맞다. 

고래잡이 산업으로도 유명했다. 9세기부터 시작된 바스크 지방의 포경 산업은 주 본거지인 비스케이 만의 고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나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섬까지 진출했다. 나중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이들도 바스크 출신 포경 선원들을 상당히 많이 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진출한 선원들 사이에서 아이슬란드어와 바스크어의 피진어가 생겨나기도 했고 북아메리카에 남은 유일한 프랑스 영토인 생피에르 미클롱의 국기에 바스크 지방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출신 인물
오랫동안 한 국가를 이루어 교류하고 살았기 때문에 스페인의 다른 지방 사람들도 많든 적든 바스크 혈통이 섞인 경우가 많다.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가르시아(García)도 바스크계 성씨다. 스페인 정복자의 자손들이 주류인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도 바스크계 혈통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이베리아 연합 시절에 바스크인이 포르투갈이나 지금의 브라질 땅으로 이주하기도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 브라질에도 바스크계 혈통을 가진 사람이 있다. 

바스크 계열 사람들은 미남 미녀라는 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체 게바라가 바로 바스크 이민자의 자손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독립시킨 남미의 독립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도 바스크계 이민자의 자손이며, 유명인들 중에 남아메리카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다. 아르헨티나의 곤살로 이과인,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 호세 무히카 대통령 역시 바스크 이민자의 자손이다.
호주의 남배우 제이콥 엘로디의 부계 조상이 바스크 지방 출신이다.
영화 감독 빅토르 에리세, 훌리오 메뎀이 바스크인이다.
스페인의 국민 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 멤버 전원이 바스크 출신이다. 전직 멤버였던 아마이아 몬테이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 오레하 데 반고흐는 전원 바스크 인이다.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2대 보컬로 30살에 가수에 데뷔한 레이레 마르티네스의 경우, 가수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바스크 지방 중에서도 기푸스코아 주의 에렌테리아 시 토박이였다.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작곡 담당인 파블로 베네하스의 경우, 아버지인 호세 마리아 베네하스가 바스크 지역 국회의원이었다. 베네하스 가문이 원래 바스크 지역에서 살았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베네수엘라로 도망갔고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퇴진하자 다시 바스크로 되돌아왔다.
스페인 축구선수 및 감독 중에는 사비 알론소, 페르난도 요렌테, 하비 마르티네즈, 가이즈카 멘디에타, 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 미켈 아르테타, 우나이 에메리, 줄렌 로페테기, 케파 아리사발라가 등이 있다. 자세한 건 바스크의 축구선수 참고.
프랑스 쪽 축구선수 및 감독으로는 비셴테 리사라수, 에이므리크 라포르트, 디디에 데샹이 바스크인이다.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바스크 출신이다. 아울러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빌바오의 경제를 살렸다는 소리를 듣는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빌바오에 위치하고 있다. 
피프스 하모니의 멤버 로렌 하우레기(Lauren Jauregui)는 바스크계 쿠바인 부모를 두었다. 성씨가 바스크어로 궁전이라는 뜻이다. 바스크어 식으로 읽으면 라우렌 야우레기. 
볼레로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스페인 국경 근처 마을인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바스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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