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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Kniefall von Warschau, 빌리 브란트,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Jobs9 2022. 9. 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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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추모비 앞에 다가섰다. 순간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브란트가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후, 비에 젖은 추모비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라며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독일어: Kniefall von Warschau)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이다.

빌리 브란트의 행동은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서독과 동구권 국가 간의 관계 개선에 나선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69년 드디어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이웃 나라인 폴란드를 방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주변 국가들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차 대전 중에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수백만 명이 죽었기에, 여전히 독일은 증오의 대상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폴란드는 나치에 의해 전체인구의 20%가 죽음을 당한 만큼 독일총리에 대한 증오도 상당했다.

1970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추모비 앞에 다가섰다. 그날은 아침부터 겨울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빌리 브란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그 앞에 섰다. 순간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브란트가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후, 비에 젖은 추모비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고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왔으며, 자신의 조국에 그 어떤 빚을 지지도 않았으며 사과할 필요도 없었던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서양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을 뜻한다. 우리로 치면 일본 총리가 동작동 국립묘지 무명용사 추모비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한 셈이다.

브란트의 행동은 나치의 과거를 뉘우치며 반성하고 진정한 용서를 청하는 사죄 그 자체였다. 추모비 앞에 헌화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그의 역사관에 따른 행동이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 작은 행동이 독일 현대사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세계는 독일을 용서했고 독일은 다시 인류공동체 안에 일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당시 ‘나는 독일보다 독일 총리를 더 신뢰 한다’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정치가요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행동에 감동한 폴란드 국민들은 독일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서서히 씻기기 시작했다. 전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라며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독일과 일본은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지만 전쟁이 끝난 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소인배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웃인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지금 현재까지도 독일에서는 독일인 나치전범들의 추적이 계속되고 있는 배경에는 ‘나치범죄의 시효를 폐지하고 영구히 추궁한다.’는 1979년 독일의회의 결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인도적 범죄는 시효가 없다는 말이다.

구서독에서는 연합군이 주축이 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뿐 아니라 독일의 자국 재판소를 통해 지금까지 9만 명이 넘는 나치 전범 관계자를 재판에 회부하고, 7천 건에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1985년 5월 8일,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은 연설에서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됩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라는, 타자(他者)에 의한 판결 말고 그들 스스로에 대한 재판판결을 내린 적이 여태껏 없었다. 일본은 아직도 ‘가해(加害)의 논리’를 망각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의식’에 빠져있다. ‘왜 할아버지 세대의 죄를 손자 세대가 떠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 의문을 갖는 일본인들의 사고가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라고 말한 신채호의 말을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독일은 잘못을 반성하고 이웃나라와 화해를 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진심어린 사과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빌리 브란트의 결단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다하우에서 밀려오는 빌리 브란트의 깊은 울림은 독일의 반성과 일본의 부정이라는 복잡한 이중의 논리에 갇혀 답답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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