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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유일당운동 -1920년대 독립운동 단체 통합 전개

Jobs9 2020. 9. 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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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우선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1922년 8월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7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1923년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하였다.

한편, 통의부 인사들은 공화주의를 지지하며 이주한인의 생존을 위한 통합 조직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추진한다.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조직하고 10월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단체는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대한광정단, 대한독립단, 통의부, 노동친목회, 의성단, 잡륜자치회, 고본계, 학우회 등이었다. 몇몇 단체가 이탈한 뒤 11월 전만통일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를 발족했다.

한편, 1925년 1월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고 동년 3월 영안현(寧安縣) 내에서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 및 16개 지역의 민선대표, 10개의 국내단체 대표들이 참여해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3부, 즉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성립되었다.

이들 단체들은 일제의 세력이 강한 북간도를 제외한 전체 만주의 교포 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그렇지만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간의 통합 운동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3부를 포함, 좌우익의 민족 독립운동을 합작하여 단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곧 민족유일당운동이다.

1926년 10월 가장 먼저 중국 북경(北京)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단체는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로 개칭하였다.

그 뒤 중국 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계속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 4월한국유일독립당 상해(上海)촉성회, 5월한국유일독립당 광둥(廣東)촉성회, 9월한국유일독립당 난징(南京)촉성회 등이 창립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가 앞장서 일어났다. 재만(在滿)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정의부가 1927년 4월 길림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회의에는 정의부, 정의부 군대측(軍隊側), 남만주청년총동맹,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등의 대표단 및 안창호(安昌浩)·이일세(李一世) 등 52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첫날부터 난항을 거듭하였다. 각 단체 대표가 모인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회의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부 참석자들은 이대로 끝낼 수 없다 하여 다시 모임을 갖고, 유일당조직 준비 기구로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일당운동 과정에서 조직 방법론은 세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 종래 분산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각 운동 단체의 존재를 본위로 한 연합체로서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이다.

둘째, 기성 운동 단체 모두를 본위로 하는 유일당의 결성은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그 가운데 ‘혁명적 권위’가 있고 ‘역사적 전적’을 가진 유력단체를 중심으로 기타 단체가 그것에 종속되는 형태의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이다.

셋째, 종래의 유력 단체는 대부분 지방적·파벌적 결합체이며 실력과 권위를 갖춘 중심단체가 없으므로 개인 본위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 등이 그것이다.

조직 방법을 둘러싼 이와 같은 의견 대립은 유일당조직의 큰 장애였다. 그러나 민족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은 전민족의 염원이었기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27년 8월 정의부는 제4회 중앙회의를 열고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도모하고, 유일당조직을 조속히 결성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뒤 유일당운동의 촉진에 대한 결의는 1927년 10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促成會聯合會) 등의 모임이 결성되어, 유일당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결의를 다져 나갔다.

한편, 시사연구회는 유일당조직 촉성회의(促成會議)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만주에 있는 32개 단체에 대표자 파견을 요청하는 통지문을 발송하였다.

1928년 5월 전민족 유일당 회의가 좌·우파 18개 단체 대표가 모인 가운데 길림성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유일당의 조직 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측으로 나뉘어져 서로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양자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되었지만, 협의회 측의 중심 단체인 정의부는 유일당 조직을 위해 새로운 노력을 벌였다. 1928년 7월 참의부와 신민부에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삼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한 것이다.

회의는 같은 해 9월 정의부 대표 김동삼(金東三) 등 5명,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 등 7명, 참의부 대표 심용준(沈龍俊) 등 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길림성 신안둔에서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호간 통합 방법에 따른 현격한 견해 차이가 드러났다. 정의부가 단체본위조직론을 제시한 반면, 신민부와 참의부는 3부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이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민부 내 양대 세력인 민정파(民政派)와 군정파(軍政派)간의 알력으로 인하여 회의에 참석한 신민부 대표의 대표권에 이의가 제기됨에 따라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대표권 문제로 인하여 신민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1928년 11월경 개최된 통합회의가 결렬된 뒤, 삼부 구성원은 기존 단체를 떠나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28년 12월 정의부 탈퇴파,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가 연합해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또 혁신의회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자매 단체로 조직하여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반면, 1929년 4월 협의회의 중심 세력인 정의부는 참의부의 일부 세력과 신민부의 민정파와 합쳐 국민부를 조직하고,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해체하였다. 결국, 1920년대 후반기의 민족유일당운동은 재만유일당책진회와 국민부, 두 단체로의 통합까지는 이루었으나, 끝내 이들 두 단체를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전체를 통괄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기된 것으로서, 당시 독립운동에 있어 최대 과제였다.

그러나 지방색과 파벌, 방법론적인 대립, 사상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여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좌·우단체가 통합을 모색하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의는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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