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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조지아의 서배너 함락, 오거스타 쟁탈전, 베네딕트 아놀드 배신

Jobs 9 2021. 4. 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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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서배너 함락

 

미국 독립 전쟁의 북부 전역이 고착화 되자 영국군의 헨리 클린턴은 공격 대상을 남부 지역으로 바꿨다.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남부 지역은 열성적인 독립파들이 많았던 북부 지역에 비해 아직까지도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 영국군이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경우 적극적으로 영국군을 지원할 것이라는 주장이 영국 내부에서 이전부터 있었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미국 독립 전쟁 초기 윌리엄 하우도 남부 지역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시도했으나 대륙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막혀 매번 실패하곤 하였다. 그러나 헨리 클린턴이 영국군의 총사령관이 되자 영국의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국무장관인 조지 저메인은 필라델피아를 상실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남부 지역을 점령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헨리 클린턴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를 공격하는 것처럼 속이면서 조지아의 서배너 혹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으로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AD 1778년 11월 뉴욕과 로드 아일랜드를 위협하던 프랑스 함대가 사라지자 아치볼드 캠벨에게 3,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지아의 주도인 서배너로 향하도록 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미국 독립 전쟁과 무관하게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아있던 동(東) 플로리다의 세인트 오거스틴의 병력을 지휘하던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에게도 아치볼드 캠벨의 조지아 공격을 지원하도록 했다. 

 

당시 조지아의 방어는 두 부대가 맡고 있었는 데 하나는 남부 전체의 방어 책임을 지고 있는 로버트 하우의 대륙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조지아 주지사인 존 휴스턴이 지휘하는 민명대였다. 이 둘이 서로 지휘권을 두고 옥신각신하면서 동(東) 플로리다에 대한 원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AD 1778년 9월 제2차 대륙회의는 남부의 총사령관을 로버트 하우에서 벤자민 링컨으로 교체했다. 벤자민 링컨은 새러토가 포위전에서 민병대의 참여를 두고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어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헨리 클린턴이 조지아 공격을 준비할 때 벤자민 링컨이 미처 도착하지 않으면서 대륙군을 여전히 로버트 하우가 지휘해야만 했다.

 

AD 1778년 11월 6일 아치볼드 캠벨이 3,100명의 병력을 함선에 태워 뉴욕 항구를 출발했다. 그리고 헨리 클린턴은 대륙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지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로버트 하우는 여전히 존 휴스턴으로부터 민병대의 직접 지휘를 거절당했다. 11월 18일 로버트 하우가 대륙군 550명을 이끌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을 떠났고 11월말에 서배너에 도착했다. 이 때가 되서야 로버트 하우는 아치볼드 캠벨이 바다를 통해 조지아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11월 23일 아치볼드 캠벨은 동(東) 플로리다의 오거스틴 프레보스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은 채 즉각 상륙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대륙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타이비 아일랜드로 향했다. 그제서야 존 휴스턴도 민병대 100명을 로버트 하우에게 보내주었다.

 

조지아 측에서는 아치볼드 캠벨이 데려온 영국군의 숫자가 훨씬 많았지만 벤자민 링컨의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서배너를 지켜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AD 1778년 11월 28일 아침 아치볼드 캠벨은 서배너로부터 불과 3.2km 떨어진 농장에 상륙을 시작했다. 로버트 하우가 사나바의 남쪽으로 800m 떨어진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같은 날 오후에 펼쳐진 아치볼드 캠벨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서배너는 함락되었고 로버트 하우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퍼리스버그로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영국군의 성공이 이어지자 처음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왕당파들까지 영국군에 합류하면서 남부 지역에서의 전황이 영국군에게 유리해졌다. 서배너라는 거점을 확보하면서 영국군은 이제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남부를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오거스타 쟁탈전

 

AD 1779년 1월 중순 오거스틴 프레보스트가 서배너에 도착했고 얼마 뒤 아치볼드 캠벨은 오거스타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벤자민 링컨이 뒤늦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도착하면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AD 1779년 2월 14일 영국 측에 가담한 왕당파 민병대가 케틀 크리크 전투(Battle of Kettle Creek)에서 패배하자 아치볼드 캠벨도 오거스타는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서 영국군은 서배너 점령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내륙을 제압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우며 영국군의 지원이 없는 왕당파 민병대의 전투력도 많이 부족함을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군의 가세와 서배너 탈환 실패

 

AD 1779년 6월 미국 측에서는 서배너를 탈환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 벤자민 링컨은 대륙군 뿐만 아니라 찰스턴을 방어하던 민병대도 동원하였다. 그러나 해군의 도움없이는 서배너를 공격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에 카리브 해의 프랑스 함대를 지원을 받기로 하면서 해결되었다. 9월 초에 불어닥친 허리케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함대 몇 척이 찰스턴에 먼저 도착하였고 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본대가 조지아를 향해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프랑스 함대의 규모는 전열함 25척과 프랑스 군 4,000명 정도였다.이에 벤자민 링컨도 9월 11일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찰스턴을 떠나 사바라로 향했다.

 

이 당시 영국군은 조지아의 브런즈윅에 정규군 6,500명에 주둔 중이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뷰퍼트에 또 다른 정규군 900명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조지아의 선버리에 왕당파 민명대 100명도 있었다. 영국군의 총지휘는 서배너에 있던 오거스틴 프레보스트가 맡았고 프랑스 함대가 타이비 아일랜드에 도착하자 서배너의 방어를 위해서 브런즈윅과 선버리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AD 1779년 9월 12일 프랑스의 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가 서배너 근처에서 상륙을 시작했고 9월 16일부터 서배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또한 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는 벤자민 링컨의 대륙군에게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뷰퍼트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24시간의 생각할 시간을 부여해 주는 여유를 부렸다.

그렇지만 벤자민 링컨과의 연락 오류가 발생하면서 메릴랜드 증원군이 그대로 서배너에 도착하고 말았다. 뒤늦게 벤자민 링컨의 대륙군도 서배너에 대한 포위전에 동참하러 도착했으나 오거스틴 프레보스트도 24시간의 유예 기간이 끝나자 항복을 거절한 채 전투를 강행하였다. 그러자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도 프랑스 군함의 함포를 동원하며 서배너 포위전(Siege of Savannah)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도 구축된 참호에 의지한 채 필사적으로 버텨내면서 서배너 포위전은 10월 8일까지 지리하게 이어졌다. 이제 군함의 함포 사격 만으로는 서배너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는 10월 9일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서배너 탈환이 어렵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결국 에스텡 백작 샤를 앙리 엑토르와 벤자민 링컨은 10월 17일 서배너에 대한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함락

 

서배너가 위기에서 벗어난 뒤 뉴욕에 머물던 헨리 클린턴은 남부 지역에 남아 있는 대륙군의 다른 주요 거점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AD 1779년말 뉴욕을 떠난 헨리 클린턴은 부사령관인 찰스 콘월리스와 함께 8,500명의 육군과 5,000명의 선원, 90척의 수송선과 14척의 군함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고 폭풍우에 시달리는 힘겨운 항해 끝에 AD 1780년 2월 1일 서배너 강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12일 찰스턴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시브룩 아일랜드에 상륙했고 2월 24일 스토노 강을 건너 제임스 섬으로 들어간 후 마침내 3월 29일 애슐리 강까지 건너 찰스턴으로 향하여 포위전을 시작했다.

헨리 클린턴은 대륙군의 증원 병력을 차단시키며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찰스턴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주지사인 존 러틀리지는 AD 1780년 4월 13일 찰스 콘월리스가 쿠퍼 강을 건너기 전에 가까스로 찰스턴을 탈출했지만 벤자민 링컨은 수비병과 함께 그대로 포위당해야 했다. 점점 영국군의 포위망이 옥죄어 오자 4월 21일 벤자민 링컨이 헨리 클린턴과 협상에 나서서 군기와 무기를 그대로 지니고 떠나는 명예로운 퇴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5월 8일 헨리 클린턴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벤자민 링컨은 여전히 명예로운 퇴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대포 포격에 의해서 찰스턴이 불타기 시작하자 벤자민 링컨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5월 12일 3,371명의 병사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캠던 전투

남부 지역의 대규모 항구인 찰스턴이 영국군의 차지가 되면서 이제 영국군은 남부 지역에서 자유로운 병력 수송 및 물자 이동이 가능해졌다. 더욱이 남부 지역에 더 이상 영국군을 막아낼 만한 대륙군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군이 주변 지역으로 손쉽게 진출하여 조지타운, 체로, 캠던, 나인티식스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자 헨리 클린턴도 부사령관인 찰스 콘월리스에게 남부 지역의 영국군에 대한 지휘를 일임하고 AD 1780년 6월 5일 뉴욕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도 남부 지역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고 여전히 민병대를 중심으로 영국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메릴랜드와 델러웨어 출신의 대륙군을 다시 파견했고 7월 25일에는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의 영웅인 호레이쇼 게이트가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제 호레이쇼 게이트는 적극적인 공세를 위해서 캠던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비록 주변에서 너무 영국군 세력이 강한 곳으로 무리하게 진격하는 것과 이로 인해 보급선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우려했으나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에 도취된 호레이쇼 게이트는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진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도중에 노스 캐롤라이나 민병대와 버지니아 민병대를 흡수하여 병력 숫자를 3,052명으로 키우면서 더욱 자신만만해 했다. 이제 호레이쇼 게이트의 대륙군이 캠던의 북쪽으로 5.5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영국군 측에서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 때 캠던의 수비병은 1,000명 정도였으나 대륙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찰스 콘월리스도 찰스턴에서 왕당파 증원군을 이끌고 8월 13일 도착하면서 영국군의 규모가 2,239명이 되었다.

호레이쇼 게이트는 보유한 병력 중 3분의 2가 새롭게 모집된 민병이었기 때문에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 밤 10시에 야간 행군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야간 행군 중이던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과 충돌하였지만 양 측 모두 야간 전투를 꺼려했기 때문에 당장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양 군은 밤새도록 전투 진형을 편성한 후 8월 16일 아침에 날이 밝자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캠던 전투(Battle of Camden)에서 호레이쇼 게이트는 진형 편성부터 전술적 실수를 범했는데 우익을 강화시키는 전통적인 영국식 전술을 그대로 답습하여 우익에 경험많은 메릴랜드 및 델러웨어 출신의 대륙군을 배치하고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민병대는 좌익에 집중 배치한 것이었다.

이러한 호레이쇼 게이트의 전술적 실수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자 우익의 민병대 2,500명은 불과 800명의 영국군이 펼친 총검 돌격에 놀라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말았다. 비록 대륙군으로 편성된 좌익은 분전했으나 민병대의 우익을 몰아낸 영국군 좌익이 도망친 민병대를 뒤쫓지 않고 그대로 반대편에 가세하면서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더욱이 호레이쇼 게이트가 너무 후방에 머물고 있어 급변하는 전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캠던 전투는 최종적으로 대륙군 측의 패배로 끝났다. 특히 캠던 전투는 대륙군이 병력 면에서 우세하였지만 패배했다는 점에서 더욱 뼈아팠다. 이제 남부 지역에서 대륙군은 훈련도 뿐만 아니라 규모 면에서도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이었던 새러토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한 때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위치까지 위협했던 호레이쇼 게이츠였지만 캠던 전투의 참패의 책임을 지고 직위 해제당하고 말았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배신

 

한편 새러토가 전투의 또 다른 주역이었지만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베네딕트 아놀드는 새러토가 전투에서 당한 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올버니의 병원에 잠시 입원한 뒤 AD 1778년 6월 대륙군이 탈환한 필라델피아의 지휘관으로 전속되었다. 그러나 베네딕트 아놀드는 자신이 제데로 된 보상을 못 받은 이유가 정치적 영향력 부족에 있다고 생각하여 상류층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흥청망청한 파티를 벌이면서 점점 빚 더미에 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필라델피아에서도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공격을 받아 직권남용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딕트 아놀드는 AD 1779년 4월 페기 시펜과 재혼했는데 그녀가 예전에 영국군 장교인 존 안드레와 사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맥을 이용하여 영국군과 내통하기 시작했다. 

AD 1780년 8월 3일 베네딕트 아놀드가 뉴욕의 웨스트포인트를 담당하게 되자 단순히 대륙군에 대한 정보를 유출하던 것을 넘어서 아예 웨스트포인트를 영국군에게 넘기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존 안드레를 통해서 헨리 클린턴에게 자신의 의향을 전달하며 2만 파운드를 요구했고 8월 25일 헨리 클린턴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9월 21일 존 안드레가 넘어와 베네딕트 아놀드를 만났다. 그러나 9월 23일 존 안드레가 귀환 중에 붙잡히면서 베네딕트 아놀드와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베네딕트 아놀드는 다음날 아침 도망쳤고 영국군의 수송선인 HMS 벌처 호를 이용하여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뒤늦게 베네딕트 아놀드의 배신 소식을 들은 조지 워싱턴이 존 안드레와 베네딕트 아놀드의 교환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기 때문에 존 안드레는 10월 2일 간첩죄로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딕트 아놀드는 영국군의 준장이 되어 버지니아와 코네티컷에서 대륙군과 전투까지 벌였기 때문에 미국인에게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리며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 전쟁이 종료된 뒤인 AD 1782년 겨울 부인인 페기 시펜과 함께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갔고 조지 3세와 토리당의 환대를 받았으나 휘그당과 대부분의 장교들로부터는 멸시를 당했다. AD 1787년에는 아들인 리처드 아놀드 및 헨리 아놀드와 함께 캐나다로 건너가 상업 활동을 했으나 그 곳에서도 극심한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AD 1791년 런던으로 다시 돌아갔고 AD 1801년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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