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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초기 고전, 뉴욕 상실, 뉴저지 및 로드 아일랜드 상실, 조지 워싱턴의 반격

Jobs9 2021. 4. 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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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초기 고전

 

비록 북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독립 전쟁을 본격화 했지만 여전히 내적인 문제가 산적하여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각 식민지들은 사실상 그때까지 단 한번도 통일된 형태로 어떠한 힘을 행사해본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통제 기구도 없었고 군대를 모집하고 병사들을 훈련,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어렵게 모집한 병사들도 대부분 자기가 살고있는 지역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만 동원되는 일종의 지역 방위군이었고 직업 군인이 아니라 복무기간이 1년 미만의 단기 복무가 보통인 단순 민병대에 불과했다.

 

반면에 영국은 당시 유럽의 최강대국 중 하나였고 특히 해군력에 있어서는 유럽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대륙군에게 보스턴을 내준 영국군도 전략상 후퇴를 결정하였을 뿐 병력 자체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대륙군에게 전황이 불리했다. 더욱이 식민지인들 중 여전히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들은 오히려 영국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식민지 내부의 갈등도 심각했다. 이렇게 미국은 아직까지 자력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었고 단지 식민지인들에게 유리한 건 영국 본토와 거리가 멀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퀘벡 공격 실패

 

대륙군은 보스턴 포위전과 병행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독립을 선언한 13개주 이외에 영국령으로 남아 있는 퀘벡 주(Province of Quebec)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격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대륙군의 북부 사단장인 필립 스카일러가 때마침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야전 지휘는 리처드 몽고메리가 맡기로 했다. 이에 따라 리처드 몽고메리가 이끄는 부대가 AD 1775년 8월 타이컨도로가 요새를 출발하였고 11월에 세인트존스 요새와 몬트리올을 점령한 후 퀘벡으로 향했다. 이와 별도로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별동대가 9월 19일 매사추세츠의 뉴베리 항구를 출발하였다. 다만 험난한 행군길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낙오했고 물자와 장비들이 유실된 채 11월 힘겹게 퀘벡 근처에 도착했다.

 

이후 대륙군의 두 부대는 AD 1775년 12월 31일 퀘벡을 협공했지만 영국군의 저력은 무서웠다. 대륙군은 퀘벡의 영국군을 지휘하던 가이 칼튼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리처드 몽고메리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비록 베네딕트 아놀드가 전투 중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채 퀘벡을 포위했지만 병력이 부족하고 리처드 몽고메리의 부관이었던 존 브라운과 불화까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베네딕트 아놀드가 AD 1776년 봄까지 퀘벡 포위전을 이어갔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몬트리올을 지키던 데이비드 우스터와 교대되었다.

 

그렇지만 AD 1776년 5월 영국군 측에서 존 버고인이 독일 용병을 이끌고 도착했기 때문에 대륙군은 퀘벡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가이 칼튼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대륙군을 다시 타이컨도로가 요새까지 밀어내고자 했다. 영국군이 해군까지 동원하여 육박해 오자 베네딕트 아놀드도 AD 1776년 6월 몬트리올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후퇴하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AD 1776년 10월 11일 갑자기 나무를 베어서 작은 배를 만든 후 섐플레인 호수에 띄웠다. 비록 베네딕트 아놀트가 만든 함대는 급조한 것에 불과하여 11월 11일에 벌어진 발쿠르 섬 전투(Battle of Valcour Island)에서 영국 함대에게 격파당하지만 이러한 기만책 덕분에 1달이라는 시간을 얻으면서 곧바로 겨울이 도래하여 영국군도 더이상의 진군을 꺼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발쿠르 섬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영국군의 승리이지만 전략적으로는 대륙군의 승리로 평가하게 된다.

 

다만 정작 발쿠르 섬 전투를 훌륭히 치뤄낸 베네딕트 아놀드는 철수 작전 중 그가 확보한 물자의 보관을 맡겼던 모세스 헤이즌과 다시 불화가 발생했다. 모세스 헤이즌이 보관을 거절했기 때문에 베네딕트 아놀드가 그를 직무 태만으로 고발했지만 모세스 헤이즌이 베네딕트 아놀드가 몬트리올 상인들의 물자를 무단으로 훔쳤다고 맞고발한 것이다. 비록 모세스 헤이즌은 무죄가 선고되고 베네딕트 아놀드만 유죄가 되었지만 전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후 타이콘데로가 요새의 주둔 중인 대륙군 대부분이 뉴저지에 있던 조지 워싱턴의 본군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게 되었으나 베네딕트 아놀드는 다시 존 브라운과 모세스 헤이즌에게 고발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롱아일랜드 전투 패배

퀘벡 전투(Battle of Quebec)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 정부는 보스턴을 빼앗긴 토마스 게이지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윌리엄 하우을 후임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리처드 하우 제독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뉴욕에서 윌리엄 하우와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 때 영국 정부는 식민지 측과 담판을 지어 만일 식민지인들이 항복할 경우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윌리엄 하우에게 부여하였으나 이번에는 이미 독립 선언을 한 식민지 측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무력 진압이 불가피해지자 윌리엄 하우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인 뉴욕을 점령하기 위해서 AD 1776년 7월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 조지 워싱턴도 뉴욕 항구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집중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윌리엄 하우는 맨하튼 남쪽의 스태튼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이 스태튼 아일랜드를 장악한 후 뉴저지 만 하류의 군함들이 서서히 합류하면서 병력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고 1달 반 뒤이면 병력 숫자가 32,000명에 달하게 된다. 만일 영국 군함이 스태튼 아일랜드와 맨해튼 사이의 좁은 수로로 들어오면 뉴욕을 방어하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을 것이 분명한 맨해튼 섬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AD 1776년 8월 22일 영국군이 롱아일랜드의 킹스 카운티 남서쪽의 그레이브 샌드 만 해변에 상륙을 시작했다. 그리고 5일 뒤 윌리엄 하우는 대륙군의 구안 언덕 방어선을 공격을 가면서 은밀하게 영국군 본대를 대륙군의 배후로 이동시켜 기습하였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대륙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총 병력의 20퍼센트를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지만 메릴랜드 군 400명이 결사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여 나머지 대륙군이 브루클린 언덕의 주 방어선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후 영국군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지만 조지 워싱턴은 8월 29일 야간을 이용하여 대륙군과 군수 물자를 모두 맨해튼으로 후퇴시켰다.

 

 

뉴욕 상실

 

이제 롱아일랜드 전투(Battle of Long Island)에서 승리한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이 뉴욕의 롱아일랜드를 차지하자 조지 워싱턴이 맨해튼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후 다시 한번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윌리엄 하우가 여세를 몰아서 대륙군의 저항을 뚫고 AD 1776년 9월 15일 맨해튼 동쪽의 킵스 만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조지 워싱턴이 맨해튼 북쪽의 할렘 언덕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편해야만 했다. 다만 할렘 언덕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9월 16일 영국군의 소규모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이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렇지만 26일 뒤인 10월 12일 윌리엄 하우의 본대가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10월 18일에는 대륙군 배후인 펠햄 근처의 펠스 포인트에 영국군 일부가 상륙하면서 대륙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허드슨 강을 통하여 영국 군함까지 지원을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대륙군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영국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대륙군이 먼저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펠스 포인트 전투(Battle of Pell's Point)까지 패배하면서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보급 기지가 있는 화이트 플레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재편성해야만 했다.

 

비록 조지 워싱턴이 펠스 포인트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대부분을 보전하며 후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워낙 긴박하게 후퇴했기 때문에 화이트 플레인에서는 언덕의 유리한 지형을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AD 1776년 10월 28일 화이트 플레인 전투(Battle of White Plains)가 벌어지자 영국군이 언덕 위의 대륙군을 근처의 마을로 밀어내 버렸다. 이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다시 한번 후퇴를 명령하고 대륙군을 더욱 북쪽으로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허드슨 강변의 주요 거점인 워싱턴 요새의 나머지 대륙군은 고립된 채 남겨져 버렸다.

 

결국 워싱턴 요새도 윌리엄 하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채 11월 16일이 되면 대부분 포로 신세가 되고 만다. 이 때 붙잡힌 포로의 숫자는 3,0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제 맨해튼을 완전히 상실한 조지 워싱턴은 허드슨 강을 건너 뉴저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조지 워싱턴이 맨해튼에 남겨두었던 대포, 포탄, 소총, 탄환 등의 무기류와 천막 및 각종 야영 장비, 참호를 만드는 도구 다수 등의 막대한 물자가 그대로 영국군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가뜩이나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대륙군이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뉴저지 및 로드 아일랜드 상실

 

뉴저지에서도 조지 워싱턴의 고전은 계속되었다. AD 1776년 11월 20일 허드슨 강 건너편의 요새인 리 요새가 점령당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뉴저지에서도 후퇴를 거듭했다. 반면에 뉴욕을 완전히 장악하고 여유가 생긴 윌리엄 하우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찰스 콘월리스에게 뉴저지의 조지 워싱턴을 추격하도록 했고 헨리 클린턴과 휴 퍼시에게는 6,000명의 별동대를 이끌도록 하여 12월 8일 아무런 저항없이 로드 아일랜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도 찰스 콘월리스의 추격을 피하여 뉴저지까지 포기한 채 12월 25일 야간을 틈타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로 물러나야 했다.

 

 

조지 워싱턴의 반격

 

트렌턴 전투

 

뉴욕 상실은 보스턴 점령으로 드높았던 대륙군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조지 워싱턴의 지휘력에 대한 심각한 우려까지 낳게 되었다. 이제 영국군은 뉴욕항을 거점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면 보스턴을 다시 탈환할 수도, 대륙회의 본부가 있는 필라델피아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게 되었다. 더욱이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뉴욕에서의 잇달은 패배로 대륙군의 숫자가 2,40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보급품마저 여의치 않아 코트 밑에 셔츠 하나만 입고 담요를 덮은 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대륙군 대부분이 복무 기간이 1년 미만인 민병이었기 때문에 AD 1777년 1월에 기존 부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병사들을 모집해야 했지만 이미 불리해진 전황과 땅에 떨어진 조지 워싱턴의 명성으로는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지원할 지도 의문이었다.

 

조지 워싱턴으로서는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한 승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 때 뉴저지의 트렌턴에 영국군에 고용된 독일의 헤센 용병들 만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이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뉴저지에서 철군하면서 독일 헤센 출신의 용병 1,400명만 남겨둔 것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AD 1776년 12월 26일 대륙군을 너새리얼 그린과 존 설리반의 두 부대로 나눈 채 델라웨어 강을 건너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900명 이상을 포로로 잡고 트렌턴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트렌턴 전투(Battle of Trenton)는 작은 승리에 불구했지만 크리스마스에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대륙군에게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에 따라 조지 워싱턴은 기존 대륙군 병사들에게 상금과 함께 1개월 연장 근무의 동의를 받는 데 성공했다.

 

 

프린스턴 전투

 

트렌턴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찰스 콘월리스가 휘하 병력 중 1,400명은 프린스턴의 수비를 위해 남겨둔 채 나머지 병력 5,000명을 이끌고 AD 1777년 1월 2일 공격을 시작했다. 비록 애순핑크 크릭 전투(Battle of the Assunpink Creek)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하지만 조지 워싱턴은 여전히 영국군과 정면대결은 무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영국군의 후방을 교란하고자 샛길을 이용하여 프린스턴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찰스 콘월리스도 서둘러 프린스턴으로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AD 1777년 1월 3일 프린스턴 전투(Battle of Princeton)가 벌어졌다.

 

프린스턴 전투 초기에는 선봉대로 나선 휴 머서와 세인트 클레어의 대륙군이 찰스 콘월리스가 파견한 찰스 마후드의 영국군이 펼친 총검 돌격에 밀려서 정신없이 후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전투를 독려하면서 병력을 수습하였고 때마침 뉴잉글랜드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겨우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대륙군의 공세에 밀려난 영국군이 프린스턴에서 고립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고 프린스턴을 상실한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병참선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뉴브런즈윅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모리스타운까지 진격하여 뉴욕으로 향하는 길을 다시 열게 되었다.

 

 

뉴욕 및 뉴저지 전역의 고착화

 

트렌턴과 프린스턴의 전투 이후 추위 때문에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비록 조지 워싱턴이 뉴욕을 상실하고 계속해서 패전하기도 하였으나 트렌턴과 프린스턴 전투의 승리로 뉴저지의 북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을 지켜내었기 때문에 영국군이 왕당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남부 지방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으로서의 권위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복무 기간이 끝난 병사들이 제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병사들이 지원하였기 때문에 대륙군은 부대 자체가 해체되는 최악의 사태는 피하게 되었다. 이후 AD 1777년 봄이 되자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과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 간의 전투가 재개되었으나 서로 정면 대결은 피한 채 소규모 전투만 반복하였다.

 

 

필라델피아 전역

 

윌리엄 하우의 필라델피아 점령 작전 구상

 

윌리엄 하우는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과의 대결이 지지부진하자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의 본부가 있는 필라델피아를 단숨에 점령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때 캐나다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존 버고인도 전황을 단숨에 호전시키기 위하여 올버니에서 뉴욕까지 허드슨 강 유역 전역을 장악하는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국무장관인 조지 저메인이 존 버고인과 윌리엄 하우의 작전을 모두 승인했다는 점이었다. 윌리엄 하우는 이미 AD 1777년 4월 자신의 부대에게 뉴저지를 가로질러 펜실베이니아로 향하도록 한 상태였기 때문에 허드슨 강 유역을 장악하자는 존 버고인의 건의를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윌리엄 하우도 펜실베이니아로 향하기 위해서는 조지 워싱턴의 방어선을 뚫고 넓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윌리엄 하우는 뉴저지의 모리스타운에 있던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을 끌어내기 위하여 뉴브런스윅 남쪽의 서머싯 코트하우스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유인책에 속지 않았고 윌리엄 하우가 다시 부대를 후퇴시키는 척 했으나 조지 워싱턴은 뒤쫓지 않았다. 그러자 윌리엄 하우가 찰스 콘월리스에게 기습공격을 감행시켜 뉴저지의 스차치 플레인에서 벌어진 쇼트 힐 전투(Battle of Short Hills)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조지 워싱턴이 꿈쩍도 않했기 때문에 윌리엄 하우도 할 수 없이 진짜로 후퇴하였다.

 

이제 윌리엄 하우는 전략을 바꿔서 뉴욕의 영국 함대를 동원하여 필라델피아 후방의 상륙 작전을 펼쳐서 단숨에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자 했다. 조지 워싱턴도 윌리엄 하우가 군함에 병력을 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정작 윌리엄 하우의 공격 목표가 어디인 지를 몰랐다. 조지 워싱턴의 입장에서는 윌리엄 하우가 존 버고인을 지원하기 위해 허드슨 강으로 향할 수도 있었고 다시 델라웨어 강을 돌파하기 위해서 델라웨어 강 입구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후 영국 함대가 델라웨어 강으로 들어오지 않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여전히 윌리엄 하우의 목표가 필라델피아인지, 아예 더 남쪽에 위치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인 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AD 1777년 7월 23일 뉴저지의 샌드훅을 떠난 윌리엄 하우는 34일 간 항해 끝에 8월말 필라델피아의 남서쪽으로 불과 90km 정도 떨어진 체사피크 만의 엘크튼 근처에 병력 15,000명을 상륙시켰다. 이에 조지 워싱턴도 뒤늦게 윌리엄 하우의 목표가 필라델피아라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11,000명의 대륙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여 필라델피아를 지키기 위해서 엘크 강 하구와 필라델피아 사이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윌리엄 하우의 주병력이 떠난 틈을 타고 조지 워싱턴이 존 설리반에게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를 탈환하도록 했지만 8월 22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필라델피아 상실

 

조지 워싱턴이 크리스티나 강 어귀의 브랜디와인 수로에서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을 막아내고자 했지만 AD 1777년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Battle of Brandywine)에서 영국군의 측면 공격을 허용하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 대륙군은 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군의 피해는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더욱이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대륙군의 필라델피아 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에 제2차 대륙회의는 즉시 필라델피아를 포기한 채 서쪽으로 피신하여 처음에는 랭커스터로 이동하였고 나중에는 요크로 본부를 옮겨야 했다. 

 

그 사이에도 필라델피아 서쪽에서 영국군과 대륙군 사이의 교전은 수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윌리엄 하우가 조지 워싱턴의 저항을 뚫고 AD 1777년 9월 25일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필라델피아를 빼앗긴 조지 워싱턴은 10월 4일 필라델피아 북쪽으로 8km 떨어진 지역의 저먼타운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조지 워싱턴은 대륙군을 수습하여 포지 계곡으로 이동한 후 이제 도래할 겨울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윌리엄 하우의 필라델피아 공격은 대성공으로 끝났으나 아직 미국 독립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그가 지원하지 않은 존 버고인의 허드슨 강 장악 시도는 새러토가 전역(Saratoga campaign)에서 비참한 패배로 귀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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