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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의 종식, 미국의 독립 공인, 미국 연방 정부의 탄생

Jobs 9 2021. 4. 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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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의 종식

 

AD 1781년 5월 버지니아로 이동한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을 상대해야 하는 버지니아 방면의 대륙군 지휘관은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였다.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프랑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 전쟁 초기부터 대륙군에 합류하였고 조지 워싱턴을 도와 AD 1777년의 브랜디와인 전투(Battle of Brandywine)를 수행한 후 포지 계곡에서도 함께 했다. 그리고 AD 1778년 6월 몬머스 코트하우스 전투에도 참여했고 같은 해 8월 너새리얼 그린과 로드 아일랜드 공략에 나섰다가 실패하는 등 대륙군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AD 1779년에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6,000명의 군대를 파견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AD 1780년 4월부터는 버지니아 방면의 대륙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대륙군의 규모는 약 4,000명 정도였던 반면에 찰스 콘월리스의 병력은 증원을 받아 약 7,000명까지 늘어난 상태였다.

 

그러자 찰스 콘월리스는 병력의 우위를 살리기 위해 다수의 별동대로 나누어 버지니아 각지를 약탈하고 다녔다. 이때 뉴욕에 있던 영국군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으로부터 포츠머드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이를 위해 옛 제임스타운 인근의 제임스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대륙군이 나서면서 AD 1781년 7월 그린스프링 전투(Battle of Green Spring)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대륙군은 한때 찰스 콘월리스의 유인작전에 휘말리며 패전할 뻔 하였지만 무사히 퇴각하면서 사실상 무승부로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그린스프링 전투에서 고전한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찰스 콘월리스를 견제만 할 뿐이었고 찰스 콘월리스도 포츠머스로 이동하여 다음 명령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증원없이 대기하라는 답변만 받았다. 이후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대륙군은 증원군을 받아 8,000명으로 늘어난 반면에 찰스 콘월리스의 병력은 여전히 7,000명 정도였기 때문에 대륙군을 피해 리치먼드와 윌리엄즈버그로 차례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7월말 경부터는 요크타운에 머물며 해상으로 증원 병력을 도착할 수 있도록 항구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요크타운 전투

 

찰스 콘월리스가 요크타운으로 들어가자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육로 방향의 통로를 모두 봉쇄하였고 AD 1781년 9월 14일 조지 워싱턴의 본대가 로샹보 백작 장바티스트 도나티앵 드 비뫼르가 이끄는 프랑스 군과 함께 요크타운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 카리브 해에 주둔하던 그라스 백작 프랑수아 조제프 폴의 프랑스 함대 24척이 도착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체서피크 만 해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육상과 해상 모두 포위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영국 측 역시 토머스 그레이브스 제독을 파견하여 찰스 콘월리스를 도우려 하였으나 9월 5일 체사피크 만 해전(Battle of the Chesapeake)에서 패배하며 뉴욕 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찰스 콘월리스가 보유한 요크타운의 수비 병력은 영국군 6,000명과 독일 용병 1,000명을 합쳐서 여전히 7,000명에 불과했던 반면에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군의 숫자는 대륙군 8,800명과 프랑스 군 7,800명을 합쳐 무려 16,600명이나 되었다. 더욱이 대륙군은 각지의 민병대가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숫자가 점점 더 증가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0월 9일 대륙군과 프랑스 군의 합동 포격이 개시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요크타운 전투(Siege of Yorktown)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비록 찰스 콘월리스로서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프랑스 군보다 상대적으로 훈련도가 떨어지는 미국 대륙군이 지키는 고지를 공격하였으나 때마침 프랑스 군이 지원군으로 도착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상 역시 프랑스 함대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해상으로의 탈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비록 뉴욕의 헨리 클리턴이 찰스 콘월리스를 지원하기 위해서 7,000명의 병력을 태운 함대를 10월 17일 출항시킨 상태였으나 이를 알 수 없었던 찰스 콘월리스는 식량이 떨어지자 10월 19일 전 병력을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다.

 

 

미국 독립 공인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버지니아까지 상실한 영국군은 이제 뉴욕에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 뒤로도 플로리다, 오하이오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고 카리브 해 등에서 해전이 계속되었으나 사실상 영국군은 패전한 상태였다. 더욱이 요크타운 전투의 패배 책임을 두고 헨리 클린턴과 찰스 콘월리스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영국군 지휘 체계 역시 붕괴되고 말았다. 오히려 항복하기는 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분전한 찰스 콘월리스는 높은 평판을 유지한 반면에 헨리 클린턴은 전투를 회피한 겁쟁이로서 그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클린턴은 AD 1781년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귀국했고 영국군도 AD 1783년 철군하면서 뉴욕도 대륙군의 차지가 되었다.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으로 전쟁영웅으로써 AD 1781년부터 이듬해까지 필라델피아에 머물며 대륙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AD 1783년 11월에는 개선장군으로서 뉴욕에 입성한 후 12월 대륙회의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대륙회의는 AD 1783년 9월 3일 영국과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을 체결하고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패전국으로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 땅을 인도하였다. 동시에 프랑스 및 스페인과는 '베르사유 조약(Treaties of Versailles)'을 맺어 프랑스에게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 섬과 세네갈을, 스페인에게는 플로리다와 미노르카를 각각 양도하였다.

 

 

미국 연방 정부의 탄생 

 

비록 미국은 영국과 벌인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했지만 그동안 미국은 각 지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성격이었기 때문에 향후의 국가 체제를 두고 혼란이 계속되었다. 미국의 독립 선언이 AD 1776년 7월 4일에 이루어졌지만 AD 1781년 3월이 되어서야 '국가연합 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고 공식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이룬 바 있었다. 국가연합 헌장에 따라 각 식민지들은 미국의 개별적인 주(state)가 되어 주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대신에 연방 정부에게는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 만 부여하였다. 그러나 연방 정부는 과세권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강제로 집행할 수단이 없었고 일반적인 통상 규제권과 사법권도 보유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형태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AD 1787년 여름 조지 워싱턴을 의장으로 하는 제헌 의회가 열렸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가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대사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제헌 의회는 버지니아 주의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과 뉴욕 주의 대표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제헌 회의의 주요 관심사는 연방 정부의 형태에 있었는데 크게는 자유민 인구와 세금 부담액에 비례하여 각 주의 대표로 구성된 입법부를 통치 중심에 놓는다는 버지니아의 안과 모든 주가 인구수와 무관하게 동등한 권한을 가지도록 하는 윌리엄 패터슨의 안, 그리고 대통령을 종신직으로 하여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안이 서로 대립하였다. 

 

충돌하는 3개의 의견은 타협의 정신에 따라 조정되어 AD 1787년 7월에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AD 1788년에 13개 주에서 비준을 받으면서 이듬해인 AD 1789년에 공식 발효되었다. 입법부를 상원과 하원으로 구분하되 상원은 모든 주가 인구수에 관계없이 똑같은 2개의 의석을 배정받는 대신에 하원은 인구 비례로 배정되었다. 또한 각 주가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도록 대통령은 각 주가 파견한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하였다. 다만 세금을 내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이나 흑인 노예는 참정권이 없었고 비인간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 존속되었다. 그리하여 상하원으로 구성된 미국 의회가 출범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선출되었다. 당초 미국의 수도는 뉴욕시이었으나 AD 1790년에 필라델피아로 옯겼다가 AD 1800년에 다시 지금의 워싱턴 D.C로 옮겼다. 워싱턴 D.C의 이름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은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영국을 지지하던 많은 왕당파들이 추방되어 영국 본토나 캐나다, 서인도 제도로 도피한 상태였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북부의 여러 주들은 장자상속제와 같은 구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신앙의 자유도 인정해 주었다. 이와 달리 대규모 농장의 유지를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남부는 노예제를 유지하며 북부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미국이 연방제를 표방하며 탄생했으나 연방 정부의 권한과 각 주정부의 자치권 중 어느 것이 앞서는 것인지를 둘러싼 이념 대립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연방 정부의 권한을 우선시하는 '연방당(Federalist Party)'과 주정부의 자치권을 우선시하는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으로 나뉜 채 정파의 대립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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