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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프리맨스 팜 전투, 새러토가 전투, 프랑스의 참전

Jobs 9 2021. 4. 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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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전환점

 

존 버고인의 허드슨 강 장악 시도

 

윌리엄 하우가 필라델피아를 공격하는 동안 존 버고인도 자신의 작전을 위해 AD 1777년 퀘벡을 출발했다. 당초 존 버고인의 작전은 자신의 부대를 다시 둘로 나서서 자신이 지휘하는 본대는 몬트리올로부터 섐플레인 호수를 따라 남진하여 허드슨 강의 상류로 향하도록 했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종군한 경험이 있는 베리 세인트 리저에게 별동대를 맡겨서 온타리오 호수로부터 모호크 강 상류의 동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두 부대는 올버니에서 합류한 후 뉴욕에서 증원 온 윌리엄 하우의 부대와 연계하여 허드슨 강을 진군하는 것이었다.

 

만일 존 버고인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퀘벡으로부터 뉴욕으로 이어지는 섐플레인 호수, 조지 호수, 허드슨 강의 이동로가 모두 영국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이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물자와 자본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열성적인 독립파들이 있던 뉴잉글랜드 지역이 다른 식민지들로부터 고립되면서 식민지의 독립 의지를 꺾이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대륙군 측에게는 큰 위기였다. 그러나 이미 윌리엄 하우가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 병력을 끌고 갔기 때문에 존 버고인은 단독으로 허드슨 강의 장악에 나서야 했다.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베리 세인트 리저가 올버니로 향하기 위해서는 모호크 강 상류 서쪽에 위치한 스탠윅스 요새를 지나가야 했다. 본래 스탠윅스 요새는 영국군이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부족과 싸우기 위해서 구축하였으나 지금은 피터 갠즈보트가 이끄는 뉴욕과 매사추세츠 출신의 대륙군이 점령 중이었다. 이에 베리 세인트 리저는 영국군 300명과 왕당파 식민지군 65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스탠윅스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서 나섰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로쿼이 연맹의 지도자인 타이엔다네기(영어명 조지프 브랜트)의 지원을 받으면서 1,0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도 합류했다.

 

AD 1777년 8월 2일 베리 세인트 리저가 스탠윅스 요새에 대한 포위전을 시작하자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의 트라이언 민병대 800명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왔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Battle of Oriskany)에서 베리 세인트 리저의 영국군이 펼친 매복 공격에 걸려 패배하고 니콜라스 허키머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이 스탠윅스 요새의 수비병들은 영국군이 자리를 비우면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던 왕당파와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베네딕트 아놀드의 대규모 대륙군이 스탠윅스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요는 더욱 커졌다. 이 때 베네딕트 아놀드가 실제보다 과장된 숫자의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처럼 기만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포위전에 참가하기를 꺼려하기 시작했다. 결국 베리 세인트 리저도 스탠윅스의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뉴욕의 지원 부대가 오지 못하는 상태에서 베리 세인트 리저의 별동대마저 올버니에 합류하지 못한 채 후퇴했기 때문에 존 버고인은 아무런 증원 병력 없이 홀로 대륙군과 싸우게 되었다.

 

 

 

프리맨스 팜 전투

 

그 사이 존 버고인의 본대 8,000명도 AD 1777년 7월 6일 섐플레인 호수의 남쪽 끝에 위치한 타이콘더로가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000명의 병력을 타이콘더로가 요새의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7,000명의 부대만 이끌고 1개월 치의 식량만 지닌 채 계속해서 남하하여 에드워드 요새로 향했다. 하지만 보급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7월 29일 되어서야 에드워드 요새에 도착했고 7월 31일 점령에 성공했다. 하지만 8월 16일 벌어진 베닝턴 전투(Battle of Bennington)에서 1,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은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더욱이 8월 28일 베리 세인트 리저의 별동대가 스탠윅스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한 채 철수했다는 소식까지 들어야 했다.

 

이미 존 버고인의 부대가 겪고 있던 보급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고 그의 부대에 소속된 아메리카 원주민 병사가 제인 멕레이라는 젊은 여자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식민지인들의 적대감이 더욱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버고인은 대륙군의 포위망으로 피해서 새러토가로 향했고 AD 177년 9월 19일 대륙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 나섰으나 프리맨스 팜 전투(Battle of Freeman's Farm)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다만 대륙군도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였다. 베네딕트 아놀드가 방어선을 유지하라는 호레이쇼 게이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부대 단독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뒀으나 호레이쇼 게이츠는 자신의 명령을 불복종한 베네딕트 아놀드를 마땅치 않아 하기 시작했다.

 

 

베미스 언덕 전투와 존 버고인의 항복

 

이제 존 버고인이 올버니 방면으로 이동했지만 10월 7일에 1,500명의 정찰병을 이끌고 나섰다가 베미스 언덕 전투(Battle of Bemis Heights)에서 베네딕트 아놀드의 대륙군에게 다시 한번 패배하였다. 이 때 베네딕트 아놀드는 퀘벡 공략에 이어서 또 다시 발에 부상을 입었지만 용맹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호레이쇼 게이츠의 대륙군은 곳곳에서 증원군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숫자가 2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반면에 이번에도 패배한 존 버고인의 부대는 아무런 증원도 받지 못하면서 식량과 탄약이 다 떨어져가기 시작했고 병력도 약 5,000명으로 줄어든 상태가 되었다.

 

결국 존 버고인이 다시 새러토가로 후퇴했으나 대륙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지는 못한 채 10월 13일 다시 포위당했다. 이미 존 버고인은 병력도 부족하고 군수물자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겨울이 다가왔기 때문에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이에 존 버고인은 어쩔 수 없이 10월 17일 항복하고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다시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복무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존 버고인의 부대가 석방되어 영국으로 겨우 귀환하였다. 이로 인해 존 버고인은 영국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나중에 사교계의 명사가 되어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새러토가 전투(Battles of Saratoga)

 

새러토가 전투의 의미와 숨은 이야기

 

새러토가 전투(Battles of Saratoga)는 대륙군이 영국의 정규군을 맞이하여 기습 공격이 아닌 정면 대결에서 승리한 전투로서 그 가치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를 기회로 아직까지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던 프랑스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에 영국 내부 여론도 반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새러토가 전투를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승장이 된 호레이쇼 게이츠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이 당시 조지 워싱턴은 여전히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에게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비되면서 호레이쇼 게이츠의 명성이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지위까지 위협할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호레이쇼 게이츠는 베네딕트 아놀드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비판도 함께 받아야 했다. 중요한 두 전투인 프리맨스 팜 전투와 베미스 언덕 전투 모두 베네딕트 아놀드가 거둔 승리였고 심지어는 호레이쇼 게이츠가 베네딕트 아놀드의 작전을 반대했으나 정작 승리를 거두자 그 전공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호레이쇼 게이츠가 실질적인 새러토가 전투의 주역인 베네딕트 아놀드를 명령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홀대했기 때문에 훗날 베네딕트 아놀드가 미국을 배신하여 영국군 측으로 전향하는 데 간접적으로 일조하게 된다.

 

 

 

대륙군의 정예화와 프랑스의 참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의 대륙군 정예화

 

비록 AD 1777년 새러토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조지 워싱턴의 본대의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전역에서 패배한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이 다시 패배를 거듭하자 사기가 떨어졌고 무엇보다 포지 계곡에서 식량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만 했다. 다만 독일 출신으로 프로이센 군의 참모로 복무한 경험이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륙군에 합류하면서 겨울 동안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기동 훈련과 무기사용법, 진형 및 진지 구축 등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저술한 "미국군의 규율과 훈련에 관한 규정(Regulations for the Order and Discipline of the Troops of the United States)"은 AD 1812년까지 미국 군대의 공식 지침서가 되었다.

 

 

프랑스의 참전

 

샤를 앙리 헥토르 의 프랑스 함선, 새뮤얼 배링턴 의 영국 함선, 1778년 12월 15일  세인트루시아 해전

그동안 대륙회의는 영국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프랑스와의 외교 교섭을 위해서 AD 1776년 8월 벤자민 프랭클린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같은 해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에 프랑스에 도착하여 프랑스 외교장관인 베르겐 백작 샤를 그라비에와 협상을 시작했다. 베르겐 백작 샤를 그라비에는 7년 전쟁에서 영국에게 당한 굴욕을 복수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미국에게 재정 지원을 하자고 루이 16세를 설득했다. 다만 프랑스는 민병대에 불과한 미국의 대륙군이 정예군인 영국군에게 승리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때마침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반전될 수 있었다.

 

AD 1778년 2월 마침내 프랑스가 미국이 공식적인 동맹조약을 맺은 후 3월에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고 미국에게도 대규모 차관과 함께 많은 물자들을 공급해주기 시작했다. 대륙군으로서는 프랑스로부터 받은 돈과 물자를 이용하여 봉급과 군복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장 부족하였던 대포 등의 중화기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의 군사 훈련과 함께 대륙군을 단순한 민병과 의용병에 의존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점차 정규군의 모습을 갖추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가 대륙군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던 해군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바다에서도 어느 정도는 영국 함대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가 영국에게 선전포고하자 프랑스와 같은 부르봉 왕가인 스페인도 AD 1779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AD 1780년에는 영국이 미국에게 몰래 물자를 공급해주고 있던 네덜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미국 독립 전쟁은 이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영국으로서는 언제든지 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가 연합하여 자신의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지원군을 미국에 파견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 역시 미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얻은 또 하나의 이득이었다.

 

한편 영국이 미국에 대한 물자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중립국 선박까지 포획을 선언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AD 1779년 중립국인 스위스의 주창과 이듬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제창 아래 북유럽 발트해 연안의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가 제1차 무장중립동맹(First 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체결하며 영국에게 대항하였다. 제1차 무장중립동맹에는 AD 1882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참가한 데 이어서 AD 1883년에는 포르투갈까지 참가하면서 영국의 외교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게 된다.

 

 

북부 전선의 고착화

 

프랑스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급변했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하우가 AD 1778년 퇴역하였기 때문에 부사령관이었던 헨리 클린턴이 새로운 총사령관이 되었다. 헨리 클린턴은 프랑스의 참전으로 프랑스 함대가 식민지 동부해안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퇴로가 봉쇄당할 것을 우려하여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을 뉴욕으로 철수시켰다. 이에 한숨을 돌린 조지 워싱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의 훈련으로 정예 병력으로 성장한 대륙군을 이끌고 AD 1778년 6월 뉴저지 근처에서 몬머스 코트하우스 전투(Battle of Monmouth Courthouse)를 벌였다.

 

이 당시 대륙군에게 고무적이었던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의 훈련이 큰 성과를 보여줬다는 점이었는데 이전의 오합지졸의 모습에서 벗어나 대오를 유지하고 질서정연하게 사격을 하였고 명령도 없이 임의로 후퇴하던 모습도 사라졌으며 무엇보다 영국군의 총검 돌격을 맞아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대륙군이 몬서스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영국군을 주로 뉴욕과 그 주변으로 몰아 넣어 2년 전의 대치 상태로 전황을 되돌리는 성과는 거뒀다.

 

이후 AD 1778년 7월에 샤를 엑토르 에스탱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면서 헨리 클린턴의 영국군은 뉴욕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도 영국군의 근거지인 뉴욕을 직접 공격하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 근처인 뉴저지와 버지니아에서 영국군을 견제만 할 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는 못했다. 또한 영국군도 대륙군을 제압할 힘을 잃었기 때문에 뉴저지와 버지니아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만 했다. 이로 인하여 미국 독립 전쟁의 북부 지역의 전황은 더 이상 진전이 없이 고착화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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