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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1920-1930년대, 경제자립운동.

Jobs9 2021. 4. 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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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한민족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경제자립운동.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경제자립을 위한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며, 1920년대 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평양기독교계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 해 8월평양야소교서원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평양의 유지 70여 명과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혁신 청년들이 참석하였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장문의 취지서를 발표하고 당면 실천과제로서 경제계의 진흥, 사회의 발전, 실업자의 구제책, 국산품 애용, 근검 풍토, 실천성의 양성을 내세웠다. 평양에서 결성된 물산장려회는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조직체가 결성되자, 서울의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해 1922년말 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일간지를 통해 전국의 민중으로부터 조선물산장려 표어를 모집했으며,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는 지방순회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청년회의 활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의 기풍은 점차 민중 속에 확산되었다.

1923년 1월서울 낙원동협성학교(協成學校) 강당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이사 20명을 선출했는데,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기업인 등 각계각층의 민족지도자가 망라되었다. 이 회의에서 회의 조직과 활동 방향이 정해졌다.

활동 지침으로, 첫째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을 계발, 단련해 실업에 입각하게 하는 산업 장려, 둘째 조선인의 산품을 애용, 무육(撫育)해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애용 장려, 셋째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해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하기 위해 일반 사항을 조사, 강구(講究)해 그 실현을 지도, 관철하는 경제적 지도 등의 목표를 정하였다.

또 제1기 실행 조건을 공포하여 대중계몽운동에 나섰다. 제1기 실행조건으로 우선 의복은 남자는 두루마기[周衣],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 정월 1일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해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식염·설탕·과일·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 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으로 정하였다.

창립 후 첫 계몽활동으로서 그 해 2월 3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대(對)민중강연회를 개최되었다. 설태희(薛泰熙)의 개회사에 이어 이종린(李鍾麟)의 사회로 개최되었는데, 연사에는 최순탁(崔淳鐸)·이갑성(李甲成)·이돈화(李敦化)·오화영(吳華英)이었고, 청중 2,000여 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강연회에 이어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적 계몽활동을 계획하고, 또 구정을 기해 전국적으로 가두행렬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가두행렬에서는 조선 8도의 특산 포(布)로 기를 만들어 앞세우기로 하였다.

즉, 경기도는 강화 반포(班布)주 01), 충청도는 한산 세저(細苧)주 02), 강원도는 철원 명주(明紬), 전라도는 전주 우초(牛綃), 경상도는 안동 갈포(葛布)주 03), 황해도는 해주 백목(白木), 평안도는 안주 고라(古羅), 함경도는 육진 환포(環布)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구정을 기해 거행하기로 한 가두행렬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또 전국을 순회하는 계몽강연도 일제의 방해로 지방에 따라서 강연 도중 연사의 발언이 중지되거나 붙잡히기도 했으나 초기에는 대체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서울에 전국적 조직체가 결성된 뒤 강연회·전단살포 등에 의한 선전·계몽 활동이 전개되면서 각 지방에서도 지방분회를 결성하였다.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소읍에까지도 지방분회를 설립했는데, 그 호응도는 오히려 더 열렬하였다.

중앙본부에 해당하는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이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소비조합 및 생산기관의 설치, 조선물산진열관의 설치와 조선물산품평회 개최, 계몽을 위한 기관지 발행에 착수하였다.

이 중 그 해 3월 이사회에서 소비조합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설립위원으로는 이순탁(李順鐸)·김철수(金喆壽)·나경석(羅景錫)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6월 전경성공산업자대회를 개최해 조선물산진열관건립 실행위원을 선출, 총 건평 450평 규모의 진열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 시기부터 탄압을 가중, 자금원을 봉쇄해 이 사업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회지 발행도 자금난으로 미루어 오다가 회지만은 조속한 시일 내에 발행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같은 해 11월에 《산업계 産業界》를 창간하였다. 《산업계》는 제5호까지 발행되고 그 뒤부터는 《자치 自治》로 개칭되어 12호까지 발행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장산 奬産》·《실생활 實生活》 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간행되었다. 회지 간행을 1930년 초에 중단한 것은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한국의 민족운동탄압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 운동을 일종의 일화(日貨)배척운동이며, 항일민족독립운동으로 보고 탄압하였다. 그 뒤 조선물산장려회는 특별한 활동 없이 명맥만 이어졌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시에 민족기업의 활동을 대변해주고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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