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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인문학과 과학,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

Jobs9 2024. 8. 24.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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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공부의 즐거움

역사, 경제, 정치, 독서, 여행, 글쓰기 등 여러 분야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지만 인문학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문학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주로 과학 교양서 위주로 읽었으니 제대로의 과학 공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인문학의 질문을 다르게 이해하고, 오래 알았던 역사이론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을 쓴 철학자를 존경하게 되었다. 과학 공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과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과학교양서가 아니라 자극과 정서적 감동을 준 이론,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생각을 교정해 준 정보를 골라 나름의 해석을 얹은 것이다.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이라 할 수 있다.   

 
1. 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인문학과 과학) 

 

거만한 바보

과학 교양서 읽기는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서점과 출판사들이 과학교양서 알리기 일환으로 만든 서가에서 『코스모스』와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파인만!』을 의무감 반 허영심 반으로 고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파인만은 맨해튼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첫 핵폭발 실험을 현장에서 보았다. 파인만은 1970년대에 인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라든가 핵폭탄의 윤리적 쟁점 같은 문제를 연구하면서 강연회와 토론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공개했다. '평등의 윤리'를 주제로 뉴욕에서 열린 '학제적' 토론회의 마지막 평가모임에서 모두가 자기 관점에만 집착했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대화가 아니라 혼돈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다른 참가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반박에 접하게 된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라고 그는 회고록에 촌평을 남겼다. 그가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나머지 두 책을 읽고 알았다.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쉽지만 여전히 바보인 것만은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것이 과학 공부를 시작한 동기가 되었고, 그저 과학교양서를 읽으면서 생각하고 느낀 게 다지만 꾸준히 하니 바보는 면한 것 같다.

 

운명적 문과의 슬픔

나도 수학이 어려워 문과를 갈 수밖에 없었다. 문이과 선택은 수학을 잘해야 할 수 있다. 인문학도 수학과 통계학을 쓴 분야가 있다. 특히 경제학은 수학으로 무장한 학자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다. 마셜, 케인스, 내시, 크루그만 등 경제학자는 대부분 수학자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수학은 범용 학문이어서 수학을 잘하면 문과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운명적 문과'는 저마다 수학 공포증에 걸린 순간이 있다. 수학을 객관적 실재와 무관한 지적 · 논리적 예술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갈릴레이가 수학을 '우주의 언어'라고 한 말을 일단 받아들이자. 과학자가 되려면 물질 현상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우주의 언어인 수학을 익힐 재능도 있어야 한다.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맞지 않다. 인생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많다. 과학과 인문학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인간 지성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 영향을 주었는데, 과학이 인문학에 준영향이 압도적이다. 물론 좋은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게다가 과학자는 쉽게 인문학으로 건너가는 반면 인문학자가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지극히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언어로 과학을 가르쳐주는 '과학커뮤니케이터'를 은인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과학의 비대칭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인문학의 위기가 무엇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분명하지 않지만, 인문학 위기론이 나온 사정은 알기 쉽다. 부채비율이 높은 대기업들의 도산 중에 살아남은 기업은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우수 학생들을 이과로 몰리게 해 인문학 분야 학과가 줄어들었다. 그런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대학의 대규모 정원 미달 사태를 맞아 더욱 인문학과의 감소 현상은 심해졌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인문학 책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하며, 인문학 강연과 영상은 성황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온다.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실을 활용하지 않는 데서 인문학의 위기가 싹튼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인문학자들은 매우 어려운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해 왔다. 그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누는 과학자와 다른 점이다. 
인문학자의 잘못이 아니라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도 해왔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성벽을 쌓고 안주하는 학문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과학이 새로 찾아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과학과 소통하고 교류하기를 거부하면, 대학의 인문학은 존재 근거를 잃을 것이다. 대학 밖에서의 대중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인문학을 만나며 학습하고 있다. 전통적 인문학의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다.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본성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파인만은 인문학자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을 뿐이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 권력이나 종교 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들을 핍박한 사건으로 얼룩졌다.

과학자는 인간의 언어와 우주의 언어 둘 모두를 쓰기에 큰 어려움 없이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 든다. 세이건과 도킨스는 우주의 언어를 모르는 운명적 문과들에게 인간의 언어로 과학을 얘기해 준다. 더구나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라고 하며 용기를 북돋워 준다. 나이를 먹었어도 과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 진실

어떤 과학 이론은 그저 신기했고, 어떤 것은 신기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바꾸고 시야를 넓혀 주었다. 
나의 마음을 끌었던 말들은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가진 원자의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정신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뇌세포에 깃든 인지 제어 시스템이다' 
'내 몸을 이루는 물질은 별과 행성을 이루는 물질과 같다',
'지구 생물의 유전자는 모두 동일한 생물학 언어로 씌어 있다',
'태양이 별의 생애를 마칠 때 지구 행성의 모든 생명은 사라진다', 
'모든 천체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우주 전체가 종말을 맞는다'
는 것들이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을 즉각 받아들여 활용하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에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이 아마 인문학에 가장 크고 깊고 넓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발견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이 발견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갈릴레이의 고전역학과 케플러의 행성 운행법칙 발견을 거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발견으로 이어졌다. 뉴턴은 우주의 근본원리를 수학으로 서술함으로써 고전역학의 시대를 열었다. 지동설은 주관적 견해를 담은 이론이 아니라 물리 세계의 사실을 서술한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고 과학을 잘못 흉내 내면 인문학은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을 벗고 지구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위력적인 공동 행동을 하지만 군집을 이루어 사는 '진사회성 동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모든 종처럼 수십억 년 전 출현한 최초의 생명체에서 진화했다. 과학혁명은 생산기술을 혁신함으로써 생산조직의 형태와 운영방식, 대중의 생활방식, 정치제도와 법률, 사회적 계급의 성격, 국가의 기능, 가족제도와 문화양식까지 세상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런 변화의 원인을 찾고 양상을 분석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다. 인문학이 과학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인간을 이해하려면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도 필요하다. 과학이 더 발전해도 인문학은 인문학의 길을 갈 것이지만, 지금의 형식과 내용 그대로는 아니다. 인문학은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만든 학문이다. 인간의 뇌는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라는데, 그 기계가 자신은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생각하고 고민한다. 인문학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비롯했다. 인간과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학의 이론을 활용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거부하면 인문학도 중세 기독교 신학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집합으로 전락할 수 있다.

 

 

 

2. 나는 무엇인가 (뇌과학)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장의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말이 널리 퍼져 오래 전해진 이유는, 첫째,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 하고, 둘째, 자신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도 자신을 모르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려워진다. 나는 겉모습은 물론 기억력, 체력, 정신력 등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도 언제나 나를 나로 여긴다. 남들도 변함없이 나를 나로 대한다. 법률적· 생물학적으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나를 나로 인식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자아'는 달라졌고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의 내가 나인가? 나를 온전히 알려면 인간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물질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나는 누구인가?'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지만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질문이 '나는 무엇인가?'다.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인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따라서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를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가 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물질, 은하를 포함하는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이룬 원자의 집합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우주에 딱 하나뿐인 존재다. 나를 나로 알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자아는 뇌라고 하는 세포 덩어리에 깃들어 있다.'와 같이 과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알아낸 여러 사실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면, 뇌를 떠나서는 철학적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모르고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이해할 수가 없고,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모르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나는 무엇인가'의 답은 '나는 뇌다'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

의과대학생들의 인기 높은 전공과는 성형외과와 피부과이고 요즈음은 영상의학과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경정신과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문과에서 심리학과가 뜬 것과 같은 이유다. 요즘 대중의 '최애과학'은 뇌과학이다. 태교부터 자녀 학습 지도와 외국어 능력 향상에 이르기까지 생존 경쟁에 필요한 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고,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이과와 문과로 나뉘지만 뇌과학을 토대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뇌과학은 생존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자기 이해에는 확실히 유용하다.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뇌과학은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지만, 우리는 뇌의 기본 구조와 작동 방식을 초보적으로 파악했을 뿐이다. 사람의 뇌를 스캔할 수 있는 MRI와 PET 기술을 확보하고 나서야 뇌 연구를 본격 시작해 아직 거대한 퍼즐의 조각 몇 개를 겨우 손에 넣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문학 천재'였다. 과학혁명 여명기의 과학자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싸워야 했다. 그중 하나가 쾌락과 고통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심장에서 비롯한다는 '심장설'이었다. 

 

신경세포와 경제법칙

인문학자들은 과학의 사실을 오해하거나 과학 이론을 오용해 잘못된 곳으로 인도했다. 그 대표 사례인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작동 방식과 특성을 드러내는 '현상'일 뿐이다. 같은 종류와 같은 강도의 자극을 계속 가하면 신경세포가 점점 둔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19세기 중반에 파악되었다. 이런 사실을 경제행위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 소위 '한계주위 혁명'을 일으킨 것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었다. 그 혁명은 경제가 아니라 경제학만 바꿨다. 경제학은 경제학자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이 되어 현실에서 멀어진 것이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은 '한계 효용 균등의 법칙'을 낳았다. 경제학자들은 초보적인 미분학으로 상품 수요곡선을 도출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했는데, 여기서 인간은 그저 수요자로 모든 시장 정보를 알고 있으며 빛과 같은 속도로 계산하여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 효용을 얻어낸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제학을 물리학처럼 보이도록 개조한 데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동일한 수학 모형을 경제 현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 소비자는 효용 극대화 자동기계이고 생산자는 이윤 극대화 자동기계로 만들었다. 분배법칙도 같은 방식으로 개조했다. 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 클라크는 '한계생산력분배이론'을 발표했다. 그 이론은 어떤 다른 변수도 없는 '완전경쟁시장'을 가정해 소득분배의 정의로움과 수학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었지만 틀린 이론이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한계생산력 체감의 법칙은 자본의 단위를 확정할 수 없으므로 한계생산력을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의 한계생산력이 이자율을 결정한다는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계생산력분배이론의 오류는 신경세포의 작동 원리를 물리 법칙 형식으로 만들어 신경세포와는 무관한 경제현상에 적용한 데서 생겼다. 수학을 썼다고 진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은 그 이론을 아직도 강단에서 가르치고 대중에게 전파한다. 

 

현상과 사물 자체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인문학자는 모른다는 말도 무언가 아는 것처럼 말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그런 면이 다르다. 그게 인문학의 매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칸트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이다.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알았다. 그런 점에서 남달랐다.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칸트 철학과 양자역학

칸트의 인식론은 칸트의 언어로 해설하기 어렵다. 천재의 이론을 해석하려면 그의 시대에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야 하고 그의 것과는 다른 언어를 가져와야 한다. 칸트의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은 패턴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작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뇌는 감각기관이 보내는 정보를 특정한 패턴으로 처리함으로써 외부 환경 변화를 빠르게 인지하고 몸을 신속하게 제어하기 때문에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거기까지 칸트는 옳았다. 우리는 빛이 우리 신경세포가 감지하는 영역의 전자기파임을 알면서도 전자기파나 가시광선보다는 빛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여러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인지한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전자기파의 성질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없다. 빛이 입자이고 파동이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이되 입자라는 사실에 집중하자. 모든 입자와 같이 빛도 일정한 양의 에너지가 있다. 태양이 내뿜은 빛 에너지는 지구에서 공기를 만나 열에너지로 바뀐다. 진공에서도 '빛의 속도'로 달리는 빛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자신의 에너지를 덜어주는데 이를 복사라고 한다. 그런데 빛은 또한 파동이고 파장에 따라 에너지가 다르다. 플랑크상수를 찾아낸 플랑크는 빛의 복사가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의 방출 · 전달 · 흡수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발견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양자'다. 이는 고전역학으로는 다룰 수 없는 현상이므로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무지개는 380~720 나노미터 영역의 전자기파가 물방울을 만나 굴절한 것을 뇌가 특정한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에 대한 정보를 각각 다른 패턴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일곱 색깔로 보인다. '사물 자체'는 굴절한 파장 380~720 나노미터 영역의 전자기파이고, 무지개는 우리의 감성형식으로 질서를 부여한 '현상'이다. 둘은 같지 않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뿐 그 영역의 전자기파는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빛만이 아니라 물질은 모두 원자의 집합이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는 각각 다른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물 자체'는 모두 동일하다. 뇌를 가진 모든 동물은 저마다의 감성형식이 있다. 어떤 박쥐 종은 초음파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만든다. 동물이 경험하는 세계의 형태는 뇌의 정보처리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과 박쥐는 주관적 감성형식이 달라서 동일한 '사물 자체'를 각각 다른 '현상'으로 인식한다. 칸트는 옳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옳았다. 칸트는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무지개라는 현상의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 안다. 그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도 안다. 시대를 초월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측은지심과 거울신경세포

'자아', '인격', '정체성'은 일단 물질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과 타인을 대하고, 인문학자는 그렇다는 전제를 두고 인간과 사회를 연구한다. 사람은 외모만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도 다르다. 한 사람의 자아는 사는 동안 계속 달라지고 물질은 아니지만 물질에 깃들어 있다. 내 몸이 없으면 자아도 없다.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이 인문학의 대세다. 우리는 사람마다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고 애쓴다. 한 사람의 자아 안에도 서로 다른 여러 면이 있다. 모든 자아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우며 주체적이고 괴팍하다. 군자의 미덕인 인의예지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는 본성에서 온다고 한 맹자의 말을 받아들여 군자가 되어 그것을 지킬 것을 다짐했는데,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본성이 있는지를 살피지는 않았다. 맹자는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인간 본성을 추론했다.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어디에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작은 공동체에 삶을 의탁(묵가)하거나 완전한 고립을 선택(양주학파)한 행위를 비판한 맹자가 지나쳤다고 할 수도 있지만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밝힌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만큼은 전적으로 옳았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이타 행동은 생물학적 유전자를 공유한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강력한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하는 논쟁을 종결하려면 사실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신경과학자들이 해냈다. '거울신경세포'를 발견한 것이다. 소위 '마음을 읽는 세포'라거나 '문명을 만든 뉴런'이라는 별명도 있다. 아직 아는 게 많지는 않아도 거울신경세포는 대뇌피질을 비롯한 뇌의 여러 부위에 분포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행위를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등 여러 일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거울신경세포 덕분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혼자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뇌는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이다.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협력하고 배려하게 해주는 것은 거울신경'세포'라기보다는 여러 종류의 뉴런이 협동해서 만든 거울신경'시스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한 본성'도' 지니고 있다. 맹자는 사람한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하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고 봤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했고 거기에서 '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오로지 관찰과 추론으로 구축한 이론이었다. 세포든 시스템이든 우리 뇌에 이기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타적 행위도 하게 만드는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공부를 하니 맹자가 더 대단해 보였다. 뛰어난 인문학자는 물질의 증거 없이도 옳은 인식에 다가선다. 때로는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에드워드 윌슨의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한다"는 말과 나탈리 앤지어의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의 맥락으로 보면 맹자는 과학적인 태도로 인간과 세상을 마주했다. 

 

자유의지

시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그 무엇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흘러 좋게 달라지면 '발전'이라 하고 더 못해지면 '퇴행'이라 한다. 그렇지만 발전인지 퇴행인지 판별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인생은 각자 책임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한다면,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평가할 뿐이다. 뇌를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람의 뇌를 기계라고 하면 인간을 비하하지 말라고 화를 낸다. 다른 동물의 뇌가 생존을 위해 조합한 기계임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뇌도 그렇다고 해야 앞뒤가 맞는다.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 외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신속하게 받아들여 적절한 대응책을 찾는다. 그것이 뇌의 존재 이유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본업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뇌에 깃든,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는 그 일을 하려고 애쓴다.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생존기계이기 때문이다. 뇌에 깃든 자아는 단단하지 않아,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강고할 수 없다.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뇌의 하드웨어에 물리적 손상을 입히는 요인은 다양해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성격, 신념, 사고방식은 크게 바뀔 수 있다. 그런 것을 두고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뇌의 소프트웨어는 뉴런이 서로 연결해 작동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전자 교환과 화학물질 분비에 변화가 생기면 뇌의 정보 처리 패턴이 달라진다. 우리의 자아는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땅 위에서 전자와 신경전달 물질의 홍수와 가뭄과 해일과 폭풍우를 견뎌야 한다. 자유의지에게 이 모든 악천후를 극복하고 철두철미한 일관성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없다. 전향은 뇌의 시냅스 연결망과 연결 패턴의 변화로 생긴 현상일 수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데이터도 자아에 영향을 준다.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는 데이터를 많이 학습할수록 성능이 나아진다. 데이터를 많이 확보한 뇌는 같은 질문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 뇌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한해서 우리는 누군가 자유의지로 전향했다고 조심스럽게나마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말을 믿기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하는 등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해야 한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자유의지는 그런 곳에 기거한다.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는 것이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3.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좌파, 우파, 다윈주의

밤하늘 · 별 · 바다 · 풀 · 나무 · 새 · 구름 · 바람 · 비가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보는 관점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책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도킨스는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다윈주의자다. 과학자 다윈의 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세졌다. 생물학의 경계를 넘어 심리학 · 인류학 · 경제학 · 사회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많은 분야에서도 파장을 일으켰다. 과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사실을 새로 찾아낼 때마자 다윈이 옳았다는 것이 더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을 따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인간도 거기 들어간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기에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견해는 12년 뒤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밝혔다. 이 책은 장차 생물학이 인문학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임을 예고했다. 다윈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이 되게 설명한 최초의 인간이다. 인문학 이론이 가끔 과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인구론이 대표 사례다. 진화론이 인문학에 가한 충격의 폭과 깊이와 강도는 맬서스가 다윈에게 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고 셌다. 다윈의 이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한 시련을 겪었다. 진화론을 오용하여 생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간주하여 격차와 불평등을 발전의 동력이라고 옹호하며 사회적 약자을 돌보는 정책에 반대하는 개인과 집단이 있었다. 그 시작은 스펜서가 창안한 '사회다윈주의'였다. 스펜서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의 원리를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요약했고, 골턴의 우생학도 탄생시켰다. 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원하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진화는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에 더 유리한 형질을 지닌 개체가 살아남아 번식한다는 사실을 서술하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도 무한경쟁을 조장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사회적 미덕이라고 찬양했다. 사회다윈주의는 우생학과 결합하여 민족 또는 국가의 번영을 최고 가치로 내세운 전체주의 사상과 손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는 집단을 생존경쟁의 단위로 설정하고 다른 민족 또는 국가의 구성원에 대한 적대의식과 혐오감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우파가 좋아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좌파로 하여금 다윈주의를 배척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부당한 차별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다위주의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그것대로 짚어보아야 한다. 

 

생명의 알파벳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내용은 '유전자 선택론'이다. 생존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난 집단이 아닌 유전자로 보는 이론이다. 이 책에 제시된 'ESS 모델'로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를 예전에 생각하지 못한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다양한 생존기계를 만들어낸 DNA는 한 쌍의 뉴클레오티드 사슬로,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라는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진다. 모든 동식물은 연결 순서만 다를 뿐, DNA라는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 DNA 분자는 복제를 잘한다. DNA 메시지는 아미노산의 알파벳으로 전환해 특정한 단백질 분자를 만든다. 단백질이 세포 내부의 화학적 과정을 제어하는 과정은 엄격한 일방통행이라서 획득 형질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유전이라는 방법으로는 자식에게 어느 하나 넘겨줄 수 없다. 새로운 개체는 매번 무에서 시작한다. 유전자는 우리의 몸을 이용해 불변 상태를 유지한다. 모든 생물의 DNA가 동일한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종이 공통된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하는 유전학의 증거다. 

 

유전자와 인생론

유전자는 '오래 존속하는 염색체의 작은 조각'이다. 염색체는 세포핵 안에 있는 유전자 운반 물질이다. 생물의 염색체는 n쌍이 보통이다. 인간은 23쌍인데, 한 쌍은 성염색체라 하고, 나머지 22쌍은 상염색체 또는 보통염색체라 한다.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정도로 오래 존재하는 생명의 단위는 유전자뿐이다. 유전자의 수명은 100만 년 단위로 측정한다. 개체는 수명이 너무 짧아서, 집단은 독립한 생물이 아니어서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수 없다. 유전자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불변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면서 되도록 많은 생존기계의 몸에 퍼져 나가는 것뿐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인간 유전자는 대부분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초등동물과 동일한 유전자가 많이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생물 개체나 동식물의 군집도 유전자처럼 오래 존속하지 않았다. 오직 유전자만이 40억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생존하고 번성했다. 유전자는 다양한 기계를 만들어 생존에 성공했다. 궁극적으로 보면 자연선택은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도킨스의 이론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지만, 물질의 증거가 가리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이가?' 하는 인문학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은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이다. 그러나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모든 종에게 유전자는 '성장하라. 짝을 찾아라. 자식을 낳아 길러라. 그리고 죽어라. 너의 사멸은 나의 영생이다. 너의 삶에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라고 똑같은 명령을 내렸지만, 그런데도 인간은 목적을 추구한다. 살아서는 유전자의 굴레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굴레에 묶여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진화가 만든 기적'으로 볼 수 있다. 

 

생물학 패권주의

미 생물학자 윌슨의 주장은 자연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생물학의 특수 분야이고, 역사학 · 전기 · 문학은 인간 행태의 보고이며, 인류학과 사회학은 영장류의 한 종에 대한 사회생물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사회성 행동의 생물학적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종교에 대한 사회생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과 달리, '어떤 적응의 이익이 있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군집에서 종교행위가 진화했는가?'와 같다. 사회생물학의 질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문학과 다른 관점으로 다른 각도에서 인간과 사회를 살핀다. 또, 윌슨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문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생물학 패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질 만했다. 윤리학자 싱어는 인문학자들, 특히 다위주의를 오해하고 배척하는 좌파에게 사회생물학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자연선택과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다. 인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하며 인간에게도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 좌파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사회를 조직했다가 대형 참극을 저질렀다. 윌슨의 표현은 도발적이었지만 내용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라는 충고였다. 

 

사회생물학과 사회주의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사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도덕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 도킨스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의 줄인 말인 ESS는 어떤 군집의 대다수 개체가 일단 선택하면 다른 모든 전략을 능가하는 전략이다. 자연선택은 ESS를 벗어나는 전략을 징벌한다. 때로는 둘 이상의 전략이 '집단적으로 안정한 전략(CSS)'이 되기도 한다. 생물학자들은 주저하는 경향이 있지만 ESS 모델은 인간 군집에도 적용할 수 있는 형태의 게임이론이다.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데 쓸 수 있다. 소련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과 '태만'하게 일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보상을 주었다. 소련 인민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 결과 생존에 유리한 전략은 '태만'이었다. 그런데 '태만'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는 혁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 결국 소련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싸우다 진 것이다. ESS 모델은 민주주의 사회의 제도를 설명하는 데도 쓸 수 있다. 다른 예로 모든 소비자가 꼭 필요한 만큼 진료 받는 '적정' 전략을 선택한다면 완전 무상의료제도를 도입해도 되지만 '과잉'의 열매가 너무 달아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과잉' 전략을 선택한다면 끝없이 보험료를 올려야 하게 된다. 공급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적정'이 우세한 가운데 일부 '과잉'이 공존하는 '쌍안정 시스템'을 이루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는다. 경제학은 이 문제를 정보 비대칭 현상 때문에 소비자 주권이 성립하기 어려운 시장의 문제를 다루는 '주인-대리인 모델'로 설명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대리인이 되어 의료서비스 가격을 책정하고 심사평가원은 공급자와 동등한 수준의 의학 정보를 가지고 과잉 진료와 부당 청구를 막는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윌슨은 '인문학과 생물학 사이에 차원을 나누는 경계는 없다. 인문학은 인간 의식과 행동에 대한 생물학의 연구 결과를 적극 받아들여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이타 행동의 비밀

유전자는 '몸 만들기 매뉴얼'을 지닌 물질일 뿐이다. 물질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도킨스가 유전자를 사람에 비유한 탓에 여러 오해가 생겼다. 유전자의 생존기계는 성장해서 짝을 찾아 자손을 낳고 죽으라는 명령을 수행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생존기계는 이기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개체나 다른 종의 개체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은 오로지 생존 투쟁만이 아니라 공감 · 협력 · 거래 · 공존의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말고는 어떤 종 어떤 개체도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특정한 행동방식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생존에 협력이 유리한 환경에서는 자연선택에 의해 협력 행동을 부추기는 유전자가 퍼졌고, 대결이 유리한 환경에서는 결과적으로 대결 행동을 부추기는 유전자가 살아남았을 뿐이다. 인간을 포함해 진화가 빚어낸 모든 종은 의도적 설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필연과 유전적 우연의 산물이다. 자연은 경쟁과 협력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생존기계는 단순히 협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물학 언어로는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낮추고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이고 인문학 언어로는 '자신이 가진 희소한 자원을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행위'인 이타 행동을 한다. 이타 행동을 유발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는 자손을 남길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아 자연선택은 그런 형질을 제거한다. 그런데도 동물의 이타 행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동물일수록 더 다양한 이타 행동을 한다. 인간의 이타 행동은 유전 연관도가 높은 순서로 퍼져 나간다. 이것이 가족주의 또는 혈연의식이라고 하는 의식과 감정의 생물학적 · 유전학적 기초다. 물론 인문학 이론으로도 친족이타주의가 생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생물학과 인문학의 이론을 결합하면 친족이타주의가 생긴 이유를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다. 혈연에 근거를 둔 비합리적 연고주의와 부정부패를 없애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해밀턴 모델로 인간의 이타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은 '비친족이타주의' 행동도 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성 선택과 일종의 부작용이다. 이타 행동이 고귀하다는 관념도 우리 뇌의 인지 제어 시스템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 관념이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사람을 이타 행동으로 이끈다. 유전 연관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타주의 적용 범위를 확장한다. 이는 진화의 부작용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단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이타 행동을 한다. 집단은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집단은 행위의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화학은 억울하다

우리는 화학을 '천연'의 반대말이자 '인공'의 나쁜 버전으로 취급한다. 화학은 물질의 조성과 구조 · 성질 · 관계 ·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으로 일상 언어로 말하자면 욕망 · 생명력 · 번식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품을 만드는 과학이다. 그런데도 대중은 화학을 악으로 여긴다. 그러나 화학은 생명을 해치는 사악한 마법이 아니다. 좋지 않은 물질을 만들어 잘못 사용한 책임은 화학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다.  

 

위대한 전자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원자의 정체를 모르고는 물질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양자역학이 나온 뒤에야 화학은 비로소 온전한 과학이 되었다. 화학은 크고 복잡한 것을 작고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환원의 필요성과 위력을 잘 보여준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더 작게 나누면 고유의 성질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물질의 기본 성분'인 원소는 원자와 같고 또 다르다. 화학에서 원자는 원소의 한 단위다. 물질의 성질과 변화를 연구하는 화학자에게는 원소가 중요하고, 미시세계의 역학을 탐구하는 물리학자에게는 원자가 중요하다. 물질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들이 결합해 물질의 분자를 만든다. 공유결합이 만든 '분자화합물'은 부드러워서 액체나 기체가 많은 반면, 이온결합이 만든 '이온화합물'은 고체인 경우가 많다. 원자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은 두 경우 모두 전자다. 원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물질을 이루는 것, 우리 몸이 생존에 필요한 화학 공정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전자 덕분이다. 전기산업과 전자산업의 모든 제품을 가동하는 것도 전자다. 

 

주기율표

화학자들은 물질의 성질과 변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소의 성격을 파악해 행동방식이 비슷한 원소를 그룹으로 묶었다. 그게 주기율표다. 주기율표는 양자역학의 도움을 받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표준 주기율표에 담긴 많은 정보 중에 원자의 결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전자의 수뿐이다. 원자번호는 그 원자의 핵에 있는 양성자 수를 나타낸다. 주기율표의 가로 줄을 주기라고하고 세로 열은 족이라고 한다. 같은 족에 속한 원소는 성질이 비슷하다. 지구에서는 전자가 모든 일을 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전역학으로는 전자의 운동을 서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양자역학의 세계에 속한다. 전자는 우선 입자이며 파동이다. 우리의 감각과 직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입자이고 파동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크기와 속도 모두 어중간하다. 그런 세계에서 얻은 정보와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 상대성원리를 적용해야 하는 광대한 우주 공간과 양자역학으로 서술하는 미시세계는 언어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수학으로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원자의 최외곽 전자껍질의 빈자리를 없애려는 욕망 때문에 다양한 분자와 이온화합물이 만들어진다. 그 분자와 화합물들이 결합해 자기를 복제하는 유기분자를 형성했다. 단순했던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선택이라는 필연과 유전이라는 우연을 통해 다양한 종으로 진화했다. 그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했다. 

 

탄소, 유능한 중도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은 온실가스다. 온실효과를 내는 여러 종류의 기체 중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비중이 가장 크다. 이 두 기체의 중심 원소가 바로 탄소다. 온실가스는 지구 표면 어디에서 누가 배출하든 똑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지구 차원의 규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면 산업 활동이 위축된다. 또한 '부족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 '그들'을 믿지 않는다. 온실가스 문제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 많은 탄소는 어디서 온 게 아니라 원래 지구에 있었지만 다른 곳에 다른 형태로 있었다. 그 탄소가 풀려나 산소 · 수소와 결합한 탓에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탄소는 잘못이 없다. 지구에서 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전 그대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모든 면에서 어중간하다. 바로 그런 성격 덕분에 생명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탄소는 신중해서 다른 원자에게 쉽게 전자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아무 원자하고나 결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색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자에 대한 탐욕이 아주 강한 수소가 오면 너그럽게 안아준다. 그렇게 해서 탄소와 수소 결합이 생명체의 분자를 이루게 되었다. 탄소와 같은 족에 규소가 있지만, 최외곽 껍질이 3층이라서 전자와 핵의 거리가 탄소보다 멀기 때문에 결합하는 강도가 탄소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복잡하고 긴 사슬을 만들기 어렵고 다른 원자와 안정된 결합을 만들기 어렵다. 게다가 덩치가 커서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기 힘들다. 그래서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환원주의 논쟁

환원은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나누어 단순한 것의 실체와 운동법칙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환원주의는 이런 연구 방법을 모든 대상에 적용하려는 경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문학자도 환원을 거부하지 않는다. 인문학자는 사회를 정치 · 경제 · 문화 등 여러 층위로 나누어 분석하고  그것을 종합해 설명한다. 인간의 내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분할하기도 하고 성별로 나누어 특징을 분석하기도 한다. 인문학자는 사회와 사람을 맡고 나머지는 전부 과학자의 몫이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환워주의를 배격하기도 한다. 환원주의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특히 날카로운 마찰을 일으켰다.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하거나 과학과 통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지금은' 옳지만 '영원히' 맞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물리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행동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지 판단할 수도 없다. 과학의 역사는 환원주의 연구방법론의 위력을 결과로 증명했다. 학문이 끝없이 작은 단위로 갈라진 것도 환원주의 연구 방법론과 관계가 있다. 환원주의가 추동한 학문의 세분화와 전문화 현상은 인문학과 과학을 가리지 않았다. 

 

통섭의 어려움

환원주의도 위험 요소가 있다. 가장 중대한 위험은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는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연구자가 자신이 몸담은 세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 성과를 습득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소통해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이 우주든 사회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윌슨은 그런 노력을 가리켜 통일의 열쇠로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하는 '통섭'이라고 정의하고, 통섭이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되어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도 이루어지기 힘든 게 사실이다. 



5.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리학)

불확정성 원리

어떤 사상 · 이론 · 이념도 진리라 확신할 수 없다는 갤브레이스의 견해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제목과 잘 어울린다.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의 유행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지동설과 진화론과 양자역학 같은 과학의 발견은 종종 인문학의 뿌리를 흔들었다. 불확정성 원리는 고전역학이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고전역학으로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 거시세계에 속하는 인문학자를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인문학자들은 불확정성 원리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지적 충격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는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다. 양자역학은 오히려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시세계의 운동법칙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진정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불확정성 원리는 인문학에 '불확실성' 개념이 퍼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 오해였지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인문학자들과는 다르게 불확정성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고전역학은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는 데서 출발한다. 고전역학의 세계는 결정론이 지배하는데 미시세계에서는 이 결정론이 통하지 않는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확률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확정성 원리'의 요체다. 양자역학은 우주를 고전역학의 결정론이 지배하는 거시세계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 존재하는 미시세계로 나누었다. 그런데 과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 같이 우주를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두 영역으로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 실험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주는 전체가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라야 한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하나의 운동법칙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우주의 책임이 아니라 과학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속도와 스케일이 달라 뉴턴의 세계에서는 무관한 것들이 하나로 얽힌다. 움직이는 물체가 빛의 속도에 접근하면 크기가 줄어들고 시간은 느려진다. 가속에 쓴 에너지가 질량을 바뀌어 물체의 질량이 증가한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을 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므로 빛이 직선으로 가다가 별 가까이에서는 휜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없는 상황에서 공간 · 시간 · 물질을 다루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먼저 세웠고 10여 년 후에 중력을 고려한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립했다. 천문학자들은 관측 자료와 이론의 예측치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상대성이론을 검증했다. 

 

별에서 온 그대

생물의 몸은 세포의 집합이다. 세포는 원자의 결합인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원자들은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원자핵을 만들 만한 높은 온도와 강한 힘이 지구에는 없으므로 원자는 지구 밖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태양은 젊은 별이다. 138억 년 전 일어난 빅뱅 이후 90억 년도 더 지나 태어났다. 태양의 온기 덕에 지구는 생명의 행성이 되었다. 빅뱅과 초신성 폭발, 중성자별 충돌 등으로 뿌려진 물질들이 우주 구름으로 회전하다가 중력으로 뭉쳐 수소 핵융합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태양은 다른 별과 다르지 않다. 지구는 철 · 니켈 · 알루미늄처럼 무거운 원소들로 된 바위형 행성이다. 지구는 중력 수축으로 중심부가 뜨거워졌지만 핵융합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형성 초기에 큰 행성과 부딪쳐 자전축이 기울어져 사계절이 생겼고 떨어져 나간 물질은 달이 되었다. 유성우가 비처럼 쏟아져 물이 끓었다 식기를 반복하다 유성우가 그쳐 바다가 안정 상태에 들어가자 최초의 생명이 출현했고, 이후 35억 년이 지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태양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양자역학, 불교, 유물변증법

불교는 인격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과 다르다. 석가모니는 '스스로 깨달은 사람'일 뿐이다. 그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를 탐색한 끝에 인간 이성과 자연법칙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한 철학자였다. 범신론과 이신론에 가까운 종교는 다른 종교나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불교철학이 양자역학과 통한다고 한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보편적 진리로 그 자체가 과학이다.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어느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하는 상호의존 관계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반야심경의 색과 공을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여러 해석 중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원자는 존재하지만 원자의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빈 공간이다. 그런데 핵력과 전자기력 때문에 원자를 꽉 찬 물질로 보이게 한다. 석가모니는 관찰과 사유를 통해 존재와 부재 사이에 경계가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석가모니가 얻은 결론이 물질세계의 근본원리와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게 전부다. 그렇다고 불교철학이 더 훌륭한 철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과학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엔트로피 묵시록

러셀이 말한 인류의 멸망의 '과학의 증거'는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점점 더 무질서해져 언젠가는 어떤 질서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은 대체로 저엔트로피 상태다. 높은 수준의 질서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엔트로피 법칙은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단 하나의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은 어떤 수단으로도 충족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종말이 어떤 형태로 찾아들지 알아냈다. 빛의 도플러 효과로 청색이동과 적색이동 현상이 나타나는데, 휴메이슨은 은하들은 모두 적색이동을 보이며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빅뱅과 우주의 가속팽창 가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삶에 주어진 의미란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6. 우주의 언어인가 천재들의 놀이인가 (수학)

수학의 아름다움

과학자는 수학을 우주의 언어로 여기며 물리 세계의 운동을 서술하는 데 필요한 수학을 선호한다. 그러나 수학자는 우주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하디는 쉰 살 넘은 수학자가 중요한 수학적 진보를 이룬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수학자가 수학 아닌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경우도 보기 어렵다고 했다. 수학을 연구하는 매력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 것이다. 만약 수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학은 현실과는 무관하게 수학자가 창조한 추상적 관념의 복합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수학은 우주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도구가 아니다. 

 

천재들의 지적 유희

과학은 이견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견 또는 통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은 과학처럼 분명한 합의가 없다. 힐베르트와 같은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학은 논리학이나 다름없다. 수학은 객관적 실재를 서술하는 우주의 언어이기도 하고, 기호와 논리를 가지고 노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이기도 하다. 수학은 수학자들이 창조한 추상의 세계다.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려고 수학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적 진리의 영원성에 끌려 추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난 부럽지가 않아

다른 분야는 몰라도 수학 천재는 천재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노력으로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바보를 겨우 면한 자의 무모한 도전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이 다르다.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과학 교양서는 이 순서를 지킨다. 양자역학에서 출발해 화학과 생물학을 거쳐 뇌과학으로 나아간다. 내친김에 생물학을 거쳐 인문학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문과한테는 이 방법이 좋지 않다. 그래서 뇌과학으로 시작했다.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 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양자역학을 알면 우주론이 덤으로 따라온다.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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