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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대조영(大祚榮), 계루군왕(桂婁郡王), 인안(仁安), 흑수말갈

Jobs9 2021. 5. 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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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발해의 제2대(재위:719~737) 왕.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며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高王)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쑹화강[松花江] 하류에서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 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 관계를 취할 때 발해의 사전 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당은 돌궐(突厥)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거란(契丹)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717년 영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는데 이 당시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거란 역시 돌궐 진영으로 돌아섰다. 이에 거란 토벌을 포함한 동북 방면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발해에 대한 견제가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발해의 배후에 있던 흑수말갈에 기미주(羈糜州)를 설치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武王)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공모해 앞뒤에서 발해국을 공격하려는 심산으로 단정하고, 아우인 대문예(大門藝)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흑수말갈이 단독으로 당에 관리를 요청한 사실은 이들이 발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다른 말갈 제부(諸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해로서는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볼모로 당나라의 수도에 머물렀던 적이 있던 대문예는 발해국의 국력으로 당나라와 겨룸은 무모하다는 것을 고구려의 사례를 들어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국경선에 이르러 다시 간하였다. 그러자 무왕은 크게 노해 사촌 형 대일하(大壹夏)로 하여금 교체하게 하고 대문예를 소환해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고, 당나라는 그에게 좌요위장군(佐驍衛將軍)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대문예의 망명 후 무왕은 그를 죽이도록 당나라에 외교적 교섭을 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732년 현종(玄宗)이 무왕에게 보낸 칙서에서 무왕을 은근히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당은 728년 흑수말갈을 유주도독(幽州都督)의 관할 하에 두는 등 여전히 흑수말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발해는 당에 대해 대당강경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무왕은 732년 9월에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해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왕은 예상되는 당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 때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발해로부터 등주를 공격당한 바로 다음해인 733년 1월에 대문예에게 유주에 가서 군사를 모아 발해를 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신라는 733년에 발해의 남쪽 국경 지역을 공격했으나, 추위와 눈으로 반 이상의 병사를 잃고 돌아왔다.

당의 발해공격에 대해 무왕은 대문예를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문예 암살 미수 이후 발해는 다시 당의 마도산(馬都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발해의 대당강경책은 730년 이후 거란과 해(奚)가 돌궐과 함께 다시 당을 공격하기 시작한 국제적 상황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734년 돌궐의 비가가한(毗伽可汗)의 사망으로 돌궐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거란과 해가 당에 복속하고 신라 역시 발해 공격을 시도하는 등 국제 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발해는 대당강경책을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무왕은 당나라와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수말갈족에 대한 토벌을 결행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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