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주 01)의 경조부박(輕佻浮薄)주 02)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신구 대립인 신진사류와 훈구파의 갈등을 종래에는 양파의 사상적·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사회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면모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세종대 이후 사전(私田)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사유화 진행은 과전법의 모순을 노정시켰다.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은 일반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고, 나아가 신진사류의 경제 생활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세력인 훈구파는 인척과 정실 등에 의해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농단해 신진사류의 진출을 음양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사회의 모든 모순에 직면해 그 부조리를 시정,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류 인사를 등용해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호학숭문(好學崇文) 정신에서 결과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은 이 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표연말(表沿沫)·홍한(洪瀚)·정여창·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갔다.
이종준(李宗準)·최보(崔潽)·이원(李黿)·이주(李胄)·김굉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어 봉수(烽燧)와 노간(爐干)주 03)의 역을 지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이극돈·유순(柳珣)·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홍귀달(洪貴達)·조익정(趙益貞)·허침(許琛)·안침(安琛)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신진사류가 희생되고 주모자인 이극돈까지도 파면되었으나, 유자광만은 그 위세가 당당해 그 뜻을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신진사류는 많은 수가 직접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기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도 큰 사화를 여러 차례 더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선조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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