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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참나, 불교, 힌두교, 선불교, 무아설(無我說), 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이 없다

Jobs 9 2022. 2. 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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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마음은 참나가 아니다

법문이나 책을 읽다보면 불교 견해가 여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모 스님의 경우도 그렇다. 그 스님이 말하는 불교지식과 수행이 실제로는 불교와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불교에서 비판했던 내용들도 눈에 띤다.

이 가운데 ‘바라보는 마음’과 ‘무아 속의 참나’도 그렇다. 대중들에게는 무비판적인 수용이 가능할지 몰라도 치열한 교리 탐구나 철저한 수행 고증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비판 받기에 충분하다. 먼저 그 스님이 말하는 ‘바라보는 마음’에 관한 내용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여러분 화가 날 때에 화를 내지도 말고 화를 참지도 마십시오. 단지 화를 바라만 보세요. 그러면 화는 스스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화를 내는 마음은 자기가 아닙니다. 이건 가짜 자기입니다. 바로 화가 날 때에 화를 지켜보는 그 마음이 진짜 자기 즉 참나입니다. 이 진짜 자기 참나는 본래부터 있었고 순수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부처자리인 불성이라고 합니다.”

스님 말에 따르면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나 번뇌가 일어날 때에 그 감정과 번뇌는 변하고 사라지는 가짜 성질을 띠지만 이를 지켜보고 관찰하는 마음은 진짜 성질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 성질은 참된 나이고 생각 이전, 더 올라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항상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관찰하는 마음이 불성이라거나 본래부터 있어왔다는 스님의 말은  불교경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일체의 몸과 마음과 대상이 모두 조건 지어진 허구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 스님은 간과하고 있다. 그게 화이건, 망심이건, 번뇌이건, 관찰하는 마음이건 모두 연기한 실체 없는 공성의 마음이다. 화가 일어날 때에 화를 화인 줄 아는 마음은 그 또한 화를 조건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이다. 화를 화인 줄 아는 마음은 화라는 대상이 없이는 결코 생겨나지 않으며, 화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스님 말처럼 화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있었던 마음이 아니라 화가 나면서 만들어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에는 반드시 인식 대상이 있고 인식 주체가 있다. 여기서 화가 인식 대상이라면 화를 화인 줄 아는 마음은 인식 주체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은 주체로 말미암아 대상이며 주체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대상’이라는 점이다. 대상과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이 때문에 대상과 주체는 연기성이고 연기성이기에 마침내 대상과 주체는 그 어떤 실체성이 없다. 둘 다 공이라는 점이다. 이런 마음을 두고 ‘진아’니 ‘불성’이니 하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스님이 불교와 힌두명상을 동일시 한데서 생긴 오해가 아닐까 한다. 스님은 설법 중에 한때 크리슈나무르티나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인도 명상가들에 심취했다는 말을 했었다. 인도의 힌두 명상가들은 모든 것은 환상이지만 환상을 환상이라 알거나 깨닫는 의식은 환상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이러한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를 천명했다. 그 스님은 아직도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무아 속의 참나가 왜 오류인지에 관해서는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아설(無我說)이 있다. 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무아설(無我說)이 있다. 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이 없다는 무아설은 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다. 무아설은 후에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으로 정리돼 불교의 근본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무아설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설도 없을 것이다.

무아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 인도 사상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며, 지식이 없는 경우 무아설의 이해는 물론 불교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무아설은 불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자 부처님의 깊은 철학적 사유와 비판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무아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 즉 아트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흥기하던 무렵 인도에는 우파니샤드로 대표되는 정통사상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을 찾는 철학전통이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인간 내면에서 궁극적 원인을 찾게 됐다. 궁극적 원인으로 인간 내면에서 발견되고 논의된 구체적인 것이 바로 아트만으로, 아트만은 윤회로부터 해탈을 가져오는 핵심 개념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아트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윤회의 근본 주체이고, 또한 인간 내면의 모든 감각기능의 중심이며, 인식작용으로는 알 수 없는 인식 그 자체이자 인식의 초월자이다. 아트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인간 인식의 근본 주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기능이 아트만을 인식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인간 내면의 통제자, 절대적인 근본원리 등으로 정의되고, 아트만을 아는 것이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인간 내면의 근본원리로 아트만이 발견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트만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바로 무아설이다. 부처님은 인간 내면에서 감각기능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등의 절대적인 아트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양한 교설로 표현했다. 대표적 가르침이 5온(蘊)과 6입(入)의 무아다.

‘5온’이란 신체를 포함한 물질일반과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곧 5온으로서 물질[色], 감각기능[受], 표상작용[想], 정신작용[行], 의식[識]의 각각에는 아트만이 없음을 논증한 것이 ‘5온 무아’다. 그리고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식[意]의 여섯 감각기능의 6입에도 아트만은 존재치 않는 것을 논증한 것이 ‘6입 무아’다. 이것은 감각기능 각각이 아트만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감각기능은 아트만에 의해 조절.통제되는 것이 아니며,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부처님의 무아설은 인간의식이 상정(想定)하는 내면의 절대적 실체로서 아트만을 부정한 것이지, 의식작용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작용이 끊임없이 실체적인 관념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의 본성을 꿰뚫어 비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들어 낸 실체적 관념과 그 실체적 관념을 만들어 내는 의식의 본성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러한 실체적 관념 대신 연기(緣起)의 이치(理致)에 의거하는 삶임을 확신한 뒤, 우리의 의식을 인(因)과 연(緣)의 관계로서 사유(思惟)하도록 강조했던 것이다.

인류의 정신사(精神史)에서 부처님처럼 인간 의식의 본성이 만들어낸 실체적 개념에 대해 분명히 비판한 사람은 드물다. 궁극적 실체에 대한 사유가 여전히 비일비재한 오늘날, 무아설은 인간의 의식본성에 대한 철저한 사유를 보여줌은 물론 불교가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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