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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妙淸), 정지상, 백수한, 서경천도, 승려, 묘청의난, 풍수지리, 도참사상, 임원궁

Jobs 9 2021. 5. 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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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정지상, 백수한 등의 지지로 서경천도론을 제기한 승려.

 

서경(西京) 사람이나, 속성(俗姓)과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이라 고쳤다. 승려이면서도 도교(道敎)적인 요소를 함께 갖추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圖讖思想)을 익힌 후 이를 바탕으로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1128년(인종 6)에 같은 서경 사람인 정지상(鄭知常), 분사검교소감(分司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 근신(近臣) 김안(金安)·홍이서(洪彝敍)·이중부(李仲孚),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상경(上京)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그곳으로 천도하자고 했다.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이므로 이곳에 궁궐을 짓고 천도하면 가히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金)나라가 스스로 항복하고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이라 하였다.

묘청의 이러한 주장은 앞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왕궁이 불타고 새로 등장한 금나라의 위협으로 점차 민심이 동요하던 상황과 결부되어 인종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곧바로 천도를 위한 준비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인종은 묘청을 수가복전(隨駕福田)으로 삼고 친히 서경에 행차했으며, 곧 임원역에 궁궐을 짓기 시작해 다음 해 임원궁(林原宮)을 완성시켰다. 인종이 임원궁에 행차하자 이번에는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金國征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131년에는 임원궁에 호국백두악태백선인 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용원악육통존자 실덕석가불(龍園嶽六通尊者實德釋迦佛)·월성악천선 실덕대변천신(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구려평양선인 실덕연등불(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구려목멱선인 실덕비바시불(駒麗木覓船人實德毗婆尸佛)·송악진주거사 실덕금강색보살(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증성악신인 실덕늑차천왕(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두악천녀 실덕부동우바이(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등의 팔성당(八聖堂)을 지었다.

다음 해에는 서경의 상서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대동강에 담가두어 그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면서 오색 빛을 내게 했으나 곧바로 발각당했다. 그럼에도 서경천도는 차질 없이 진행되어 1132년에는 대화궐(大華闕, 大花闕)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대화궐에서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란 것을 펼쳐 보이며 이것이 도선(道詵)으로부터 강정화(康靖和)를 거쳐 자신에게 전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지상·김안 등 지지자들에 의해 성인으로 받들어지면서 계속 서경천도를 강행했고, 1134년 삼중대통지누각원사(三重大通知漏刻院事)에 제수되고 자의(紫衣)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1132년부터는 임원애(任元敳)·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임완(林完) 등 서경천도를 반대하는 문신들에 의한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1134년 대화궐의 건룡전(乾龍殿)에 벼락이 치는 등 재이(災異)가 속출함에 따라 풍수도참에 기반을 둔 천도론이 점차 명분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인종에게 서경 행차를 요청했다가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거부되고 더욱이 서경천도의 가능성 또한 희박해지자, 1135년 서경에서 분사시랑(分司侍郎) 조광(趙匡),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함께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광의 배신으로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묘청의 서경천도계획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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